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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로 본 오늘 과 사건 06.15(2)


우표로 본 오늘 과 사건 06.15(2)



                  1)                                   2)                                      3)

 

1) 1942 - 알베르 카뮈(Camus, Albert), 소설 '이방인' 출판

20세기 프랑스 소설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힌 작품이라 면 단연 '이방인'이다. 프랑스 문학의 중심지인 파리도

아닌 식민지 알제리에서 문맹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청년 알베르 카뮈가 그 소설의 작가였다. '이방인'은 1942년 6월 15일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해 1월 어느날 밤 카뮈는 각혈을 했다. 이미 왼쪽 폐가 결핵으로 손상됐고, 더 이상 그가 좋아하던 수영도 즐기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 그가 파리로 보낸 소설 '이방인'을 비롯해 철학적 에세이집 '시지프스의 신화', 희곡 '칼리귤라' 원고에 대한 답신을 기다려야 했다. 그중 '이방인'은 앙드레 말로의 추천을 받아 세상에 나왔다. 그 소설은 출간 즉시 문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당시 전시하에서 용지가 부족한 프랑스 신문들은 그 소설에 대한 서평을 실을 지면이 없었다.

카뮈에겐 '이방인' 초판 한 권만 배달됐다. '이방인'은 부조리의 심연 앞에 선 인간을 그린 실존주의 소설의 대표작이다.

'이방인'이 젊은 세대에 준 충격은 컸다. 인간은 설명할 수 없는 삶 앞에 직면했지만, 그 삶과 쾌락을 사랑한다. 죽어야하는 운명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 카뮈의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합리성에 절망한 젊은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정신적 도덕을 제시했고, 실존주의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1950년대 전후 한국 지식인들은 카뮈를 읽으면서 황폐한 현실의 부조리를 견뎌낼 형이상학적 힘을 얻었다.

 

2) 1934 - 히틀러-무솔리니 첫 회담, 오스트리아 처리 논의

히틀러 연표 1934년
1월 26일 :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체결.
1월 30일 : 국가개조법 성립. 각 지방의회 폐지.
2월 14일 : 제국 참의원 폐지.
4월 24일 : 민족재판소 설치법 제정 (8월 1일 개설).
6월 14일∼16일 : 히틀러 최초의 국외 방문. 베니스에서 뭇솔리니와 회견.
6월 30일 : 룀사건 발생. SA보다 군부를 우선하고 룀, 슈라이하, 그레고르 슈트라사 등을 숙청함.
7월 20일 : SS를 SA로부터 독립시키고 나치당내 기관으로 변경시킴.
8월 2일 : 힌덴부르크 대총령 서거. 아돌프 히틀러, 대통령 겸 수상인 총통에 취임. 국방군은 히틀러에 대해 충성선서.
8월 19일 : 대통령과 수상의 일원화를 위한 총통제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 지지를 얻음.
9월 4일∼10일 : 제6회 나치당 전국 당대회 실시 (레니리펜슈타르의 영화 <의지의 승리>의 배경)

http://www.nobelmann.com/old/peoples/hitler/hitler3.htm

 

3) 1389 - 세르비아-오스만 제국 간의 코소보 전투

1389년 6월 15일 세르비아의 코소보폴례(지빠귀들의 들판)에서 세르비아 왕자 라자르의 군대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1세(1360-1389 재위)의 투르크 군대 사이에 이른바 '코소보 전투'가 벌어졌다. 무라드는 비잔티움과

슬라브 제국의 내부 불안을 틈타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점령지를 넓히려는 목적하에 세르비아를 침범했다.

코소보까지 진격했으나 그곳에서 라자르 군대와 맞붙었다.

전쟁 초기에 세르비아 귀족 밀로슈 오빌리크가 투르크군 진영에 잠입, 무라드를 살해함으로 전세는 세르비아 쪽으로 기우는 듯 했다. 밀로슈는 탈영병으로 위장, 투르크 진영에 잠입한 후 술탄의 막사로 들어가 독묻은 단검으로 무라드 술탄을 찔렀던 것이다. 그러나 무라드의 아들 바예지드는 무라드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세르비아군을 포위,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고, 라자르를 체포, 처형했다. 패전한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에 공물을 바치고 술탄 군대에서 군역을 질 것을 약속했다. 세르비아는 비록 패배했지만 코소보폴례의 장렬한 전투는 지금까지도 세르비아인들에게 영웅적인 민족 신화로 살아있다.

                           1)                                                   2)                                 

 

1) 1888 - 멕시코의 시인 로페스 벨라르데(López Velarde, Ramón) 출생  

로페스 벨라르데 [López Velarde, Ramón, 1888.6.15~1921.6.19]

멕시코의 포스트모더니즘 시인.

순수한 멕시코의 주제를 프랑스 상징주의 기법으로 다루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한 후, 저널리스트와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첫 시집 〈경건한 피 La sangre devota〉(1916)는

시골 생활의 단조로움 및 관능과 정신 사이의 긴장과, 그의 사촌 후엔산타 호세파 데 로스 리오스에 대한 사랑을 다루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종종 복잡하고 대담한 비유로 가득찬 언어가 사용되었다. 〈고뇌 Zozobra〉(1919)에서는

이전 작품의 주제를 더 강도 깊게 다루었다. 1917년 후엔산타의 죽음으로 상실감과 비애와 시에서 나타나는 심오한

관능성을 이끌어냈다. 시 모음집 〈마음의 소리 El son del corazón〉(1932)는 그가 죽은 뒤에 출판되었다.

그의 시는 비록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세기의 가장 위대한 멕시코 시인으로 간주 되었으며, 멕시코의 전위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시에서 이미 사용한 일부 주제를 고도의 시적 필치로 그린 수필집 〈미세한 손 El minutero〉(1933)·〈2월의 선물 El don de febrero〉(1952)·〈정치적 산문 Prosa política〉(1953) 등이 있다.


 

2) 1542 - 영국의 해군 사령관 그렌빌(Grenville, Richard) 출생

그렌빌 [Grenville, Richard, 1542.6.15~1591.9]

영국의 해군 사령관.

아조레스 제도의 플로레스 섬 연안에서 벌인 스페인 함대와의 유명한 싸움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을 맞아

영웅적인 활약을 보인 활기차고 대담한 인물이었다.

헝가리에서 투르크족을 맞아 신성로마 제국 군대와 함께 싸우기도 했다(1566~68).

그 뒤 1568~69년에는 아일랜드의 먼스터 소요사태 진압을 도왔으며, 1573~75년 영국에서 중국까지 북서항로를 트고자

남태평양으로 가는 해양탐험을 준비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탐험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은 그가 세운 1577~80년의 항해 일주여행 계획을 받아들였다.

1585년에는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로어노크 섬에 100명의 영국 식민지 이주자를 배로 옮겼으며 1589~91년에는 아일랜드의 먼스터 지방(지금의 클레어·코크·케리·리머릭·티퍼러리·워터퍼드 군)에 식민사업을 했다.

1591년 영국에 소환되어 아조레스 제도 가까이 있던 스페인 보물선을 가로채는 임무를 띤, 15척으로 이루어진

함대의 부지휘관(토머스 하워드 경이 지휘)이 되었다. 53척의 스페인 함대가 그들의 보물선을 보호하기 위해 접근해 올 때 영국함대는 퇴각했지만 그의 배는 머뭇거리다 퇴로가 막혔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배 '리벤지호(號)'를 이끌고 스페인 함대를 뚫으려 했다. 5,000명의 군대가 탄 15척의 스페인 함대와 15시간 동안 정면전을 벌인 끝에 결국 리벤지호에 탄 190명의 선원들은 모두 사로잡혔다(1591. 9.9/10).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그는 며칠 뒤에 스페인 함대의 사령선에서 죽었다. 그의 영웅적 행위는 테니슨의 시 〈리벤지호 The Revenge〉에서 찬사를 받았다. A. L. 로스는

〈리벤지호의 리처드 그렌빌 경 Sir Richard Grenville of the Revenge〉(1937)에서 그의 공훈을 자세히 그렸다.  

 

1919 - 영국 존 알코크와 아더 브라운, 최초의 대서양 횡단 무착륙 비행 성공(6.14~15)

영국 조종사 존 알코크(J. Alcock)와 아더 브라운(A. W. Brown)이 이날 대서양 횡단 무착륙 비행에 성공했다.

그들은 개조된 비커스 비미 폭격기로 세인트 존스의 뉴펀들랜드를 출발한 뒤 평균시속 118m.p.h로 3,050킬로미터를

16시간 27분동안 비행해 안개가 낀 아일랜드 카운티 갈웨이의 클리프던에 착륙했다. 이 비행으로 많은 짐을 수송하는

비행기가 안개와 추위라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오랫동안 비행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됐다.

이 비행으로 두 조종사는 기사작위와 '데일리 메일'지로부터 상금 1만파운드를 수여받았다. 

 

1907 - 제2차 만국평화회의 개최(헤이그)
1907년 6월 15일 국제연맹의 창설에 큰 영향을 끼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었다.

제1차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외무장관인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무라비요프 백작이 제안해

1899년 1월에 소집되었다. 1907년의 제2차 회의는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처음 제안했지만 니콜라이 2세가

정식으로 소집했다. 44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만장일치로 강제중재의 원칙을 인정했으며, 다수의 결의를 채택해

8년 안에 다시 회의를 소집할 것을 통과시켰다. 이 회의를 통해 국제문제를 처리하는

최상의 방법은 일련의 연속적인 회의를 통한 것이라는 관념이 구체화되었다.

 

1889 - 루마니아의 시인 에미네스쿠(Eminescu, Mihail) 사망

에미네스쿠 [Eminescu, Mihail, 1850.1.15~1889.6.15]

본명은 Mihail Eminovici.

루마니아의 시인.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루마니아 작가들과 시인들에게 강한 영향을 끼친 시파를 창시해 루마니아 시의 형식과

내용을 바꾸어놓았다. 독일계 루마니아의 문화적 중심지인 체르너우치(지금의 우크라이나 체르노프치)와 빈대학교(1869~72)·베를린대학교(1872~74)에서 교육받았고,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독일 철학과 서유럽 문학에 접하게 되었다.

1874년 이아시대학교의 학감 겸 도서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보수적 신문 〈팀풀 Timpul〉의 주필을 맡았다. 1883년 정신착란을 일으켜 문학활동의 종말을 맞았고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1870년 이아시의 유니메아 협회 기관지인 〈콘보르비리 리테라레 Convorbiri literare〉에 2편의 시를 실으면서 처음으로

문학적 재능을 발휘했고, 그뒤로도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해 선구적인 근대 루마니아 시인으로 인정받았다. 신비주의적 경향에 우울한 기질을 지녔던 그는 과거 중세 루마니아의 영화를 꿈꾸며 민간전승에 탐닉했다. 루마니아 민간전승은 그의 대표적인 시 〈저녁별 Luceafǎrul〉(1883)의 바탕을 이룬다. 그의 시는 언어의 두드러진 간결함, 압운 및 운문 형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 심오한 사상, 자기 시대와 이후 시대의 거의 모든 루마니아 작가들을 매혹시킨 표현의 유연성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1930년 영역된 것을 비롯해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는데주로 독일어 번역이 많다. 산문 작품으로는 여러 논문과 평론집이 있으며, 소설 〈체자라 Cezara〉·〈서르마눌 디오니스 Sǎrmanul Dionis〉(1872)가 가장 유명하다.

 

1843 - 노르웨이의 작곡가 그리그(Grieg, Edvard) 출생

그리그 [Grieg, Edvard (Hagerup), 1843.6.15~1907.9.4]

노르웨이 민족음악파를 창시한 작곡가.

원래 스코틀랜드 출신인 그리그(예전에는 Greig) 가문은 그의 할아버지 때 쿨로뎅 전투 후에 노르웨이로 이민하였다.

아버지 알렉산더는 베르겐 주재 영국영사였고, 어머니 게신 하게루프는 노르웨이의 안정된 가문에서 태어나 함부르크에서 음악을 배웠다. 6세 때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1858년 바이올린의 거장 올레 불의 추천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들어가 멘델스존과 슈만 풍의 음악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늑막염을 심하게 앓았으며 끝내 완전히

치유하지 못했다. 1863년 코펜하겐으로 가서 1864년 노르웨이의 젊은 민족주의 음악 작곡가 리카르트 노르로크와 사귀면서 음악적으로 발전했다. "그를 통해 북부의 민속 가락과 내 자신의 특성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그리그는 말한 바 있다.

 

1864~65년 겨울, 스칸디나비아의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설립한

코펜하겐 음악협회 '외테르프'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1867년 사촌 누이동생 니나 하게루프와 결혼했고, 그녀는 그리그의 가곡에 대한 권위있는 해석가가 되었다.

1865~66년, 1869~70년 겨울을 로마에서 보내던 중, 그의 피아노 협주곡에 열광적 찬사를 보낸 리스트와 입센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1866년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에 정착하여 노르웨이 정부의 종신연금(1,600크로나)을

받기 시작한 1874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885년 베르겐 근방에 '트롤드하우겐'이라는 집을 지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스칸디나비아·유럽·영국에서 연주 여행을 가졌으며, 1888년 런던에서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을 스스로 연주했다.

 

노르웨이의 민속 전통에 뿌리를 둔 그리그의 음악은 섬세한 서정 감각으로 유명하다. 1867~1901년 사이에 10집으로 된

피아노곡 〈서정 소곡집 Lyriske Stykker〉을 작곡했다. 활기찬 리듬은 민요와 연관이 깊으며, 화성법은 후기 낭만주의 양식에서 발전한 새로운 것이었다. 〈피아노 협주곡〉 작품 16과 〈현악 4중주 G단조〉 작품 27, 바이올린 소나타 및

피아노 소나타 각각 3곡 등 일부 작품에서 자유 소나타 형식을 썼다. 피아노를 위한 〈발라드〉 작품 24는 노르웨이의 민속 선율에 바탕을 둔 변주곡이다. 가장 사랑받는 곡은 〈페르 귄트 모음곡 Peer Gynt〉 작품 23과 〈홀베르그 모음곡 Holberg〉

작품 40이다. 노르웨이의 춤과 노래를 편곡한 작품 17, 작품 66과 특히 〈노르웨이 농민 춤곡 슬로터〉 작품 72는 리듬과

화성에 대한 그의 예리한 감각을 보여준다. 성악곡은 A. O. 비녜의 가사에 곡을 붙인 작품 33과 시가 〈산의 요정 Haugtussa〉 작품 67이 있는데, 이 작품들에서 그리그는 시의 정서를 그대로 음악으로 표현했다.

 

1792 - 오스트레일리아의 탐험가, 측량감독관 미첼(Mitchell, Thomas L.) 출생

미첼 [Mitchell, Thomas Livingstone, 1792.6.15~1885.10.5]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의 측량감독관.

세계 각지를 탐험하고 조사했다. 스페인에서 일어난 반도전쟁(1811~14) 때 육군 중위로 지형(地形)을 조사하는 정보기관에서 일했다. 1826년 소령이 되었으나 봉급은 절반밖에 받지 못했다. 이듬해 시드니에 있는 측량 감독관 존 옥슬리의 조수로 뉴사우스웨일스에 갔다. 1828년에 옥슬리가 죽자 그의 뒤를 이었고, 1829년에는 도로·다리 건설의 책임을 맡았으며, 1830년에 와서는 혼자서 전체 업무를 관장했다. 1830년에는 시드니에서 패러매타까지, 시드니에서 리버풀까지, 그리고 시드니에서 블루마운틴을 지나는 도로를 닦았다.

1831~32년 캐슬레이 강과 과이더 강 사이의 유역을 탐험했다. 1835년에는 이미 7년 전(1828) 찰스 스터트가 달링 강과 머리 강의 합류점을 찾아나섰던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달링 강을 거슬러 탐험을 떠났다. 1836년 머리 강 주위의 지역을 탐사하고 나서 이 지역을 오스트레일리아필릭스('행복한 오스트레일리아'라는 뜻으로 지금의 빅토리아 주)라고 이름 붙였다. 그때부터 이 지역에 이주자들이 급속히 몰려들었다.

1837년 휴가를 얻어 조국에 돌아온 미첼은 〈3번에 걸친 오스트레일리아 동부탐험 Three Expeditions into Eastern Australia〉(1838)을 쓰고 기사작위를 받기 위한 운동을 벌여 1839년에 작위를 받았다. 또한 1840년에 이베리아 반도전쟁에서 사용했던 작전을 엮어 책으로 냈다. 1841년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 1844년 상원의원이 되었다. 포트에싱턴으로 가는 육로를 발견하려는 4번째 탐험(1845~46)은 실패로 끝났지만 광대한 지역을 탐사할 수 있었다. 1847~48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열대 오스트레일리아 내륙지방으로의 탐험일지 Journal of an Expedition into the Interior of Tropical Australia〉(1848)·〈오스트레일리아 지리 The Australian Geography〉(1850)를 썼다. 〈오스트레일리아 지리〉는 뒤에 오스트레일리아 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1955년 J. H. L. 컴스턴이 쓴 그의 전기가 출판되었다. - 브리태니커

 

1752 - 프랭클린, 번개가 전기현상임을 실험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년 1월 17일 ~ 1790년 4월 17일)은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중 한 명이자 미국의 초대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는 특별한 공식적 지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군(軍)과의 동맹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 미국 독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계몽사상가 중 한 명으로서, 유럽의 과학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피뢰침, 다초점 렌즈 등을 발명하였다.

달러화 인물 중 대통령이 아닌 인물은 알렉산더 해밀턴(10달러)과, 벤저민 프랭클린(100달러) 두 명뿐이다.



 

번개를 끌어들인 프랭클린
프랭클린은 가늘고 긴 나무막대 두 개를 십자형으로 만들고 여기에 큰 수건의 네 귀퉁이를 묶었다. 세로로 된 나무에

긴 철사를 잡아매고 연 꼭대기에서 약 30cm위로 나오게 했다. 연을 띄우는데 긴 삼끈을 사용하고 삼끈 끝에는 명주리본을 매달고 줄과 명주리본의 매듭에는 쇠로된 열쇠를 매달았다. 부도체인 명주리본은 손으로 잡아 번개로부터 쇼크를 받지

않도록 한 것이다.
1752년 6월 어느 날 프랭클린과 그의 아들은 명주리본과 열쇠가 젖지 않게 오두막 문가에서 비를 피하면서 연을 날렸다.

한참을 기다리던 중에 축축한 삼끈에 전류가 흐르는 징조가 나타나 손가락 마디를 열쇠에 댔는데 분명히 전기 불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후에 그는 라이덴병에 쇠구슬을 대어 충전시켰다. 이렇게 충전된 병은 보통의 방법으로 충전시켰을 때와

다르지 않아 번개가 전기적 현상임을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라이덴병은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의 물리학자 뮈센부르크가 보이지 않는 전기를 담아낸 병을 일컫는 말. 절연시킨 유리병에 물을 넣고 병마개의 중심을 통해 내부로 넣은 금속 막대 끝에 사을 달아 물과 접촉시켰다. 그리고 대전된 유리 막대를 병마개 위로 나와 있는 금속막대와 접촉시켜 전하를 저장했다. 이렇게 한 후 금속막대에 손을 대어 봤더니 저장됐던 전하가 단숨에 방전되 큰 쇼크를 받았다고 한다.
프랭클린은 번개를 구름에서 지상으로 끌어 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쇠막대인 피뢰침을 만들어냈다.

이 때 프랭클린은 벼락이 쇠막대를 타고 내려올 때 이를 만지거나 가까이 가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염려는 1753년 비극적인 사건으로 많은 과학자들의 뇌리에 심어지게 됐다.

러시아의 물리학자 리히만이 구름에서 얻은 전기실험을 연구하던 중 장치를 점검하다가 실험 장치로

떨어진 푸른 전하덩어리인 벼락을 맞아 사망한 것이다.

http://moolynaru.knu.ac.kr/middle/force/jungijagi/reference.htm

 

1215 - 영국 존 왕, 귀족들의 압력을 받고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에 서명

1215년 6월 15일 잉글랜드의 존 왕(John Lackland, 1167~1216)이 마그나 카르타에 날인했다.

마그나 카르타는 이후의 여러 권리선언들에 영향을 준 인권헌장으로 대헌장이라고도 한다.

1204년 잉글랜드가 노르망디를 잃고 난 후 귀족들에 대한 존 왕의 재정적 강요는 더욱 심해졌다.

결국 1213년 이후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븐 랭턴이 귀족들의 불만을 모아 국왕에게 자신들의 권한을 엄숙히

선포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마침내 '귀족들의 헌장'이 작성되었고 이를 원본으로 한 최종적인 대헌장이 기초되었다. 1215년에 반포된 대헌장은 4가지의 '원본'이 현존하는데, 2가지는 각기 링컨 대성당과 솔즈베리 대성당에 있고

나머지 2가지는 대영박물관에 있다. 대헌장은 반포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압제에 항거하는 상징으로

인식되었으며, 후세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보호장치로 해석되었다. - 브리태니커

 

"왕의 밑에 속한 귀족의 합법적 판단 또는 국법에 의한 일 이외에는
어떤 자유인에 대해서도 체포, 감금, 횡령, 법률의 보호 박탈, 추방 등이 있어서는 안된다."

     

- 마그나 카르타  


 

 

그해,오늘 무슨일이 총 46

 

 

2015년 병무청 첫 여성 국장 탄생

2015년 유엔(UN) 본부 공연 갖는 평균 65세 아마추어 청춘합창단

2015라스베이거스 대통령커크 커코리언 별세

2009년 예멘서 납치된 봉사활동 엄영선씨 피살

2004년 남북, 군사분계선(DMZ) 지역의 모든 선전 도구 철거

1999년 남북한 해군함정, 서해상에서 교전

1996년 버스카드제 실시

1984년 한국-포르투갈 정상회담

1983년 한국형다목적 경비함진수

1983년 국립중앙박물관이전 개축공사. 구 중앙청서 기공

1977년 주한미군 이네스트존 미사일 대대 해체

1962년 한국-파라과이, 국교수립

1960년 제3차 개헌(내각책임제) 통과, 2공화국 출범

1960년 허정 제6대 국무총리 취임

1960년 일본 전학련 국회 난입

1959년 미국 정찰기 동해서 소련기에 피격

1954년 제네바회담에서 한국참전 16국 공동성명

1954년 아시아 민족반공연맹 창설

1952년 시아누크공, 캄보디아 정권 장악

1950년 여간첩 김수임 사형 선고

1949년 군인용담배 `화랑`제조

1948년 중국공산당기관지, 인민일보 창간

1942년 아바나 승전연합대회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1942년 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출판

1940년 탤런트 최불암(본명 최영한) 출생

1939년 경부선 대전-서울간 복선화

1934년 히틀러-무솔리니 첫 회담, 오스트리아 처리 논의

1922년 온들(Oundle) 학교를 재조직한 영국의 교육학자 샌더슨 사망

1920년 제네바서 제2회 국제노동회의

1919년 영국 존 알코크와 아더 브라운, 최초의 대서양무착륙비행성공

1917년 미국 방첩법 제정

1914년 유리 안드로포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출생

1911IBM의 전신 CTR사 설립

1911년 성균관 폐지하고 경학원 설치

1909년 부통감 화이황조 통감에 임명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 헤이그에서 개막(~10.18)

1902년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 출생

1896년 일본 메이지산리쿠(明治三陸) 지진·쓰나미로 21915명 사망

1861년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 순직

1849년 미국의 제11대 대통령 포크 사망

1843년 노르웨이 민족음악파를 창시한 작곡가 그리그 출생

1819년 해왕성을 발견한 영국의 천문학자 애덤스 출생

1389년 세르비아-오스만 제국간의 코소보 전투

1381년 영국 농민반란군 지도자 와트 타일러 사망

1215년 영국 존 왕, 귀족들의 압력을 받고 대헌장(마그나 카르타) 승인

918년 고려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