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 6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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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0 - 독일의 사회과학자 베버(Weber, Max) 사망
베버 [Weber, Max, 1864.4.21~1920.6.14]
막시밀리안 베버 혹은 막스 베버 (Maximilian Weber, 1864년 4월 21일 ~ 1920년 6월 14일)는 독일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였다. 그는 사회학과 공공정책학 분야의 근대적 연구 토대를 마련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베버는 그의 연구 활동을 베를린 대학에서 시작했으며, 말년에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빈 대학교
그리고 뮌헨 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했다. 그는 당대 정치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의
독일 제국 측 협상자로 나서기도 했으며 바이마르 헌법의 초안을 닦는 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주요 업적으로는 종교사회학과과 정치체제에서의 합리화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경제 분야에도 큰 관심을 두기도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이 저서는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시작된다. 이 저서에서, 종교가 서양의 다문화 현상과 동양의 발전에 대한 비배타적인 이유가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본주의, 관료제, 서유럽의 합리적-합법적 국가의 발전과 형성을 이끈 동인이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하는 부분적 특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소명으로서의 정치학>이라는
그의 또 다른 주요 저서에서는 인력의 정당한 사용에 대한 전매권을 가진 자주 독립체로써의 국가를 규정 지었다.
이 규정은 근대 서구 정치학 연구의 중추가 된다. 이러한 그의 규정들은 흔히 ‘베버 명제’라고 불린다.
2) 1822 - 찰스 배비지가 왕립 천문학회에 차분기관에 관한 논문을 발포하다
찰스 배비지 (Charles Babbage, FRS) (1791년 12월 26일 ~ 1871년 10월 18일 ) 는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발명가, 기계공학자로서 프로그램이 가능한 컴퓨터라는 개념의 시초자이다. 그의 미완성된 메커니즘의 부품들은 현재
런던 과학 박물관에 전시 되 있다. 1991년 배비지의 계획에 따라 19세기의 기술에 의해 설계한 차분기관의 성공적인
작동은 배비지의 기구가 완성후 작동했을 것이라는 것을 표했다. 그후 9년후 런던 과학 박물관에서 19세기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배비지의 차분기관 프린터 디자인의 기구의 건조를 끝마쳤다.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리는 배비지는 또한 더욱더 섬세한 컴퓨터 디자인의 발명을 이끈 시초로도 입명됐다. -위키백과
차분기관(差分機關, 영어: difference engine)은 다항함수를 계산하기 위한 기계식 디지털 계산기이다.
다항함수로 로그함수와 삼각함수도 근사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계산기는 범용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최초의 차분기관은 1786년 J.H. 뮐러에 의해 제안되었지만 만들어지지는 못했다.
그 후 차분기관은 잊혀졌다가 1822년 찰스 배비지에 의해 재발명되었다. 그는 영국 왕립 천문학회에 "매우 큰 수학적 표를 계산하는 기계적인 방법"[1] 이라는 제목으로 이 내용을 발표했다. 이 기계는 십진법을 사용했고 핸들을 돌려 동력을 얻도록 설계되었다. 영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연구를 지원했지만 배비지가 이 기계를 만들지는 않고 계속 추가 지원금을 요구하자 지원을 철회하였다. 배비지는 더 일반적인 연산이 가능한 해석기관의 연구를 계속했지만 1847년부터 1849년 사이에는
차분기관의 설계를 발전시켜 "차분기관 2호"를 설계했다. Per Georg Scheutz는 배비지의 설계에 영향을 받아 1855년부터 몇 대의 차분기관을 만들어 1859년 이 중 한 대를 영국 정부에 판매했다.
Martin Wiberg는 Scheutz의 차분기관을 개선하였지만 로그표를 계산하고 인쇄하는 용도로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런던 과학 박물관에서는 배비지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배비지의 원래 설계를 그대로
따라 차분기관 2호를 만들었다. 2000년에는 배비지가 계산결과를 인쇄하기 위해 설계한 인쇄기도 제작했다.
배비지의 원래 설계를 공장에서 제작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배비지의 설계의 몇몇 오류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오류가 수정되고 나자 차분기관은 문제없이 작동하였으며, 지금도 작동 가능하다.
배비지가 차분기관을 설계만 하고 제작하지 못한 것은 빅토리아 시대의 공학 기술로는 이렇게 정교한
기계를 제작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많았다. 그러나 이 기계를 재현하면서
19세기의 기술로 이 기계를 제작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함이 알려졌고, 이제 그런 주장은 사라졌다.
3) 1811 - 미국의 소설가 스토(Stowe, Harriet Beecher) 출생
스토 [Stowe, Harriet (Elizabeth) Beecher, 1811.6.14~1896.7.1]
미국 소설가. 노예제도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분노를 작품《엉클 톰스 캐빈》을 통해 표현했다.
미국 코네티컷주리치필드 출생. 신학자인 L.비처의 딸로서 이웃 켄터키주의 노예들의 비참한 상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1836년 신학교 교수인 C.스토와 결혼하고 1850년에 동부의 메인주로 이사하였다. 이 해에 발표된 도망 노예 단속법안으로 그녀의 노예제도에 대한 분노는 더욱 커졌다. 노예제도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그녀의 분노는
드디어 《엉클 톰스 캐빈 Uncle Tom’s Cabin》(1852)을 발표하게끔 하였다.
이 작품은 노예제도에 대한 격렬한 탄핵의 기백으로 가득 차 있는 위대한 멜로드라마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으며,
동시에 동부에 사는 미국인들을 감동시켜 드디어 남북전쟁을 일으킬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이야기 줄거리와 인물의 파악이 쉬운 점과 인도주의 정신이 충만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즐겨 읽는 작품이다. 이 외에도 뉴잉글랜드에서 소재를 구한 일련의 소설을 썼으며, 《목사의 구혼 The Minister’s Wooing》(1859) 《올드 타운의 사람들 Oldtown Folks》(1869)을 발표하였다. 이것들은 《엉클 톰스 캐빈》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지방문학의 원조로서
그녀의 사실주의는 근년에 이르러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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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7 - 프랑스의 시인 샤르(Char, René) 출생
샤르 [Char, René, 1907.6.14~1988.2.19]
프랑스의 시인.
초현실주의자로 출발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레지스탕스 지도자로 활약한 뒤에는 교훈적 내용의 압축된 시를 썼다.
프로방스에서 교육을 마친 뒤, 1920년대말에 파리로 이주하여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사귀면서 고향 프로방스에 대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초기 시집인 〈주인 없는 망치 Le Marteau sans maître〉(1934)는 초현실주의 양식을
갖고 있으며, 언어의 화려함과 자유로운 이미지 구사가 특징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샤르는 프랑스령 알프스에서 레지스탕스 부대를 지휘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2권의 시집 〈유일한 생존자 Seuls demeurent〉(1945)·〈입노스의 유고집 Feuil- lets d'Hypnos〉(1946)에 가장 훌륭하고 정치적으로 가장 참여적인 몇 편의 시를 발표했다. 〈입노스의 유고집〉은 그가 전쟁 때 쓴 시적인 일기로서 그의 인도주의를 반영하고 있으며, 인간의 고귀한 소명에 대한 신념과 전쟁의 잔혹상에
대한 분노를 보여준다. 샤르의 후기 시집들로는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 Les Matin-aux〉(1950)·〈밑바닥과 꼭대기를 찾아서 Recherche de la base et du sommet〉(1955)·〈공존 Commune présence〉(1964) 등이 있다.
그의 〈전집 Oeuvres complètes〉은 1983년에 출판되었다.
시적 간결함의 대가인 샤르는 생략과 경구 및 간결한 심상과 '헤라클리틱'한 구절, 즉 모순되는 개념들을 혼합한 구절을
이용하여 이런 간결함을 획득했다. 그래서 그의 시(산문시를 포함)는 꾸밈 없고 치밀하며 약간 난해하다.
프랑스의 작곡가 피에르 불레즈는 샤르의 〈주인 없는 망치〉에 곡을 붙였다(1954).
2) 1821 - 루마니아의 시인, 극작가 알렉산드리(Alecsandri, Vasile) 출생
알렉산드리 [Alecsandri, Vasile, 1821.6.14~1890.8.22]
루마니아의 서정시인·극작가.
처음으로 루마니아 민요를 수집했으며 루마니아의 여러 공국을 통합하려는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이아시와 파리에서
교육받은(1834~39) 그는 1844년 첫번째 루마니아 민요집을 출간했으며 루마니아 혁명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53년 서정시 〈비가와 은방울꽃 Doine şi lǎcrimioare〉을 파리에서 발표하고 1852~53년에 이아시에서 발라드와 민요 모음집 2권을 출판했다. 1868~75년에는 풍경을 묘사한 시들을 〈파스텔화 Pasteluri〉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한편 극작가로서 루마니아 사회 희극을 창작했으나 연극계에 이바지한 가장 중요한 업적은 〈데스포트 왕 Despot Vodǎ〉(1879)·
〈블란두지아의 분수 Fântâna Blanduziei〉(1883)·〈오비디우스 Ovidiu〉(1885) 같은 시극을 들 수 있다. 말년에는
루마니아에서 공직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외무장관(1859~60)을 지내던 중 대공 알렉산드루 쿠자의 대사 자격으로
연합 루마니아 공국에 대한 영국의 승인을 얻어내는 임무를 띠고 런던으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1885년에는 파리 주재 루마니아 공사로 임명되었다.
3) 1736 - 프랑스의 물리학자 쿨롱(Coulomb, Charles-Augustin) 출생
쿨롱 [Coulomb, Charles-Augustin, 1736.6.14~1806.8.23]
프랑스의 물리학자.
두 전하간에 작용하는 힘은 전하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의 법칙을 공식화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쿨롱힘은 원자 반응에 관련되는 주요 힘 중 하나이다.
9년 동안 군사공학자로서 서인도제도에서 보내다가 건강이 나빠져 프랑스로 돌아왔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블루아에 있는 작은 사유지에 칩거하며 과학연구에 몰두했다. 1802년 공공교육 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잉글랜드의 J. 프리스틀리가 공표한 전기적 반발의 법칙을 연구하다가 쿨롱의 법칙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그는 프리스틀리의 법칙에 관련된 전기력을 측정할 민감한 기구를 발명했고 자신이 발견한 것을 1785~89년에 발표했다.
그는 자기극 사이의 인력과 척력의 역제곱 법칙을 확립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시메옹 드니 푸아송이 발전시킨 자기력에 대한 수학적 이론이 기반이 되었다. 기계의 마찰, 풍차, 금속과 견섬유의 탄성 등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전하의 단위인 C(쿨롬)은 그를 기념하여 붙여진 것이다. -브리태니커
1936 - 러시아의 소설가 고리키(Gorki, Maksim) 사망
고리키 [Gorky, Maxim][Peshkov, Aleksey Maksimovich, 1868.3.28~1936.6.14]
1936년 6월 14일, 누군가에 의해 독살됐다는 의문을 남긴 채 고리키가 생을 마감했다.
1891년 11월 1일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슈코프는 러시아 남부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의 어느 다리 옆
벤치에 앉아 있었다. 지난 넉달 동안 오데사에서 트빌리시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줄곧 걸어온 청년은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이 아름다운 도시의 경관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청년의 머릿속은 장기간의 대기근에 허덕이는 광활한
러시아땅을 방랑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대자연의 영상들로 터질 지경이었다.
그것들은 머지않아 문자로 옮겨져 청년을 위대한 작가로 탄생시킬 터였다.
페슈코프 청년이 러시아어로 '가장 큰 고통'을 뜻하는 '막심 고리키'라는 필명으로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를 발표한 것은 1892년 9월 12일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세계 문학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른 성장을 보인 고리키는 변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해 1905년 혁명과 관련해 이듬해 당국에 체포됐다가 추방되어 7년간 계속된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을 거쳐 이탈리아의 카프리섬에 정착한 고리키는 그곳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어머니'를 완성해 러시아 사회 혁명에 영향을 미친다.
그 이후로 '유년시대' '세상 속으로' '대학시절'등의 작품을 남겼다. “고리키의 작품은 위대한 10월혁명으로 나아가는 과정, 즉 러시아에서 혁명적 위기가 성숙해 가는 전과정을 포괄한다.” 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고리키의 소설들은
혁명을 앞둔 제정 러시아의 혼란과 지배계급의 부패상, 그 안에서 움트는 새로운 사회의 싹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1928 - 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 Ernesto) 출생
체 게바라 ['Che' Guevara, Ernesto, 1928.6.14~1967.10.9]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게릴라 지도자이자 혁명 이론가이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19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혁명이라 확신하고, 멕시코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에 동참하게 되었다. 1950년대말 카스트로의 게릴라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59년 카스트로가 집권하자 쿠바의 산업장관으로 일했다. 제3세계에 미치는 미국의 영향에 강력하게 반발해,
카스트로 체제가 좌익 친공산주의 노선을 걷도록 이끌었다. 1965년 쿠바에서 종적을 감추었고, 이듬해 볼리비아 봉기의
지도자로 다시 나타났으나,
볼리비아군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반대했던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으로 불리며 1960년대 신좌익 급진주의자들의 우상이 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쿠바에서의 사회주의와 인간 Socialism and Man in Cuba>(1965)·<게릴라전 La Guerra de guerillas>(1960) 등이 있다. - 브리태니커
"어리석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진정한 혁명가를 인도하는 것은 위대한 사랑의 감정이다.
이것이 없이는 진정한 혁명가를 생각할 수 없다."
- 체 게바라
1928 - 영국의 여성참정권운동가 팽크허스트(Pankhurst, Emmeline) 사망
팽크허스트 [Pankhurst, Emmeline (Goulden), 1858.7.14~1928.6.14]
그녀가 죽던 해에 영국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선거권을 부여받음으로써 그녀가 40년 동안 해온 운동은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딸인 크리스타벨 해리어트(1880~1958, 후에 작위를 받음) 또한 여성참정권 운동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다. 1879년 에멀린 굴든은 법률가이자 존 스튜어트 밀의 친구이며, 영국 최초의 여성참정권 법안(1860년대말) 및 1870, 1882년 2차례에 걸쳐 기혼여성 재산법안을 기안했던 리처드 마스덴 팽크허스트와 결혼했다.
10년 후 그녀는 여성참정권연맹을 창설하고, 1894년 지방 공직자 선거에서 기혼여성의 참정권을 확보했으며, 1895년부터 맨체스터 시의 공직을 맡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1903년 그녀가 맨체스터에 설립한 여성사회정치연맹(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WSPU)에 점점 더 힘을 기울였다. 이 연맹이 처음으로 세인의 관심을 끈 것은 1905년 10월 13일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와 애니 케니가 여성참정권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 위해 자유당 회합을 무산시켰을 때였다. 당시 그들은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에게 체포되어 벌금형을 거부하고 대신 옥살이를 했다.
1906년부터 그녀는 런던에서 WSPU의 활동을 지휘했다. 자유당 정부를 여성참정권 운동의 주요장애물로 간주한 그녀는 선거 때 자유당 후보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으며, 그녀의 동료들은 내각 각료들의 회합을 방해했다. 1908~09년 그녀는 3차례에 걸쳐 투옥되었는데, 그중 1번은 사람들에게 하원 점거를 호소하는 인쇄물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1910년에 그녀가 선언한 '휴전'은 정부가 여성참정권 조정안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자 곧 파기되었다. 1912년 7월 WSPU는 극단적인 호전적 노선으로 운동을 전환했는데, 주로 방화(防火)를 저항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는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검거를 피해서 파리에 가 있던 크리스타벨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으며, 팽크허스트 자신은 투옥된 상태였다.
그녀는 단식투쟁을 하는 죄수들을 일시 석방하여 일정 수준까지 건강을 회복하도록 할 수 있다는 1913년의 죄수법(단식죄수가출옥법)에 따라 석방 및 체포를 1년에 12차례나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녀가 복역한 기간은 총 30여 일 정도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녀와 크리스타벨은 참정권 운동을 중지했고,
정부는 참정권 운동 관련 죄수를 전원 석방했다.
이전에 여성참정권 강의를 위해 3차례 미국을 여행했던 그녀는 전쟁기간중 여성의 전시산업체 동원을 촉진시키기 위해
미국·캐나다·러시아를 방문했으며, 전후에는 몇 년 동안 미국·캐나다·버뮤다 등지에서 살았다. 1926년 영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런던 동부 선거구의 보수당 후보로 공천을 받았으나 건강이 쇠약해져 의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투표권을 인정한 1928년의 인민대표법이 그녀가 죽기 수주일 전에 통과되었다. 1914년에 팽크허스트의 자서전 〈나의 이야기 My Own Story〉가 출간되었으며, 그녀의 둘째 딸인 E. 실비아 팽크허스트가 지은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생애 The Life of Emmeline Pankhurst〉가 1935년에 출판되었다. - 브리태니커
1919 - 존 알콕과 아서 브라운, 최초로 북대서양 무착륙횡단 비행
1919년 6월 14일 - 존 알콕(John W. Alcock)과 아서 브라운(Arthur W. Brown), 비커스 비미(Vickers Vimy)로
미국 뉴파운드랜드(Newfoundland)-아일랜드의 크리프덴(Clifden)간 3,040km를 16시간 27분에 비행.
최초 북대서양 무착륙횡단 비행(영국) - (세계항공발달사) -항공정보포탈시스템
http://www.airportal.co.kr/life/history/han/LfHanBa003.html
1919년 6월 14일
존 알콕과 아서 브라운
비커스 비미(Vickers Vimy)로 미국 뉴파운드랜드(Newfoundland)-아일랜드의 크리프덴(Clifden) 간 3,040km를
16시간 27분에 비행, 최초 북대서양 무착륙횡단비행(영국)
1919 - 최초의 금속제 여객기 융커스 F-13(4~5인승), 첫 비행에 성공
자신들이 벌인 전쟁통에 입은 막심한 피해와 가혹한 베르사이유 조약 등 경제적 불안속에서도 독일은 세계항공계에
또 하나의 커다란 기여를 했다. 종래의 목제 비행기와는 달리 강도가 뛰어난 전(全)금속제 민간항공 수송기를
처음으로 개발한 것이다.
융커스교수(Hugo Junkers)가 개발한 이 F13 안제리제기는 1919년 6월에 첫 시험 비행을 했는데, 8명 좌석을 장착하고
6천7백50미터의 고공비행을 하여 상업적 민간 항공기의 시초가 되었다. 이 비행기는 금속제라는 점 외에도,
융커스 교수의 이론을 바탕으로 오토로이터가 만든 실용적 엔진을 부착했으며, 바퀴도 육상과 해상의 지형적 변화나
나쁜 기상조건에도 적응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유럽은 물론 미국에서까지 주목을 끌었다.
또한 처음으로 여객을 싣고 안데스산맥을 넘었는가 하면, 뉴기니아에서 금화를 수송하기도 했고 스웨덴에서는
응급환자를 수송하는 등 위력을 발휘했다.
이같은 현실적 경험을 바탕으로 계속 개조되어 F13기는 4인승 객실에 냉온장치를 마련하는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안락한 여행이 가능한 비행기로 호평을 받아 민간항공사업의 전망을 밝게 했다.
미국에서는 전문가를 독일의 제조공장에 파견하여 23대나 수입을 해 가기도 했다. 데사우에 있는 융커스공장에서 촉망받는 민항기 F13기 생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무렵, 독일은 1921년 5월 소위 '런던최후통첩'이라고 불리우는 항공기제작금지령을 받아 주로 군용기였지만 독일내의 모든 항공기 제조공장을 파괴할 수 밖에 없게 됐다.
이에따라 7백여명이나 되던 융커스 공장의 기술인력도 1921년말에는 2백여명만 남고 뿔뿔이 흩어지기에 이르렀다.
전승국인 영,프,미 등 연합국측에서는 F13기 제작기술에 관해서도 추궁했다. 독일 기술자들은 모호한 대답만을
되풀이 하다가 소련 기술자 투볼레프에게 제작기술을 전해주고 F13기를 만들게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여러 나라의 민간회사들에게 제작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남미의 여러 민간회사와 제휴하여 F13기는 남미대륙 상공에도 등장했다. 남미에서 F13기는 기차로 몇주일이나 걸리는 고지대에 있는 라파즈비행장에도 착륙하고 코차밤바에도 내려앉아 그 성능을 인정받아 상업항공에 관심이 있는
인사들의 깊은 관심을 끌었다.
1925년에는 시속 1백40킬로미터의 개량 신예기가 베를린-하노바-암스테르담 간의 정기항공노선에 취항했는가 하면
시각비행에서 계기비행을 하는데까지 발전, 세계 민간항공기의 주도 역할을 하게 됐다.
[상업항공의 발자취][printed '월간 항공' 1991. 1. ~ 12. 연재분 요약]
인터넷신문 온타임즈 1991년12월31일 21시10분
http://www.ontimes.kr/detail.php?number=896&thread=14r04
1919년 6월 14일
융커스(Junkers) F-13(4~5인승)
최초의 금속제 여객기 융커스(Junkers) F-13(4~5인승), 첫 비행에 성공(독일)
http://www.kidlab.co.kr/AirZone/azmeseum_list.php?category=1
1914 - 올림픽 오륜기 제정
처음으로 올림픽 오륜기가 피에르 쿠베르탱(Pierre Coubertin)에 의해서 언급된 것은 1913년 8월,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잡지인 《올림픽 리뷰 Olympic Revue》의 기사에서였다.
올림픽마크와 마찬가지로 근대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이 1914년 6월 파리의 소르본(파리)대학에서
열린 IOC 20주년 기념행사에서 첫선을 보였고, 이 자리에서 IOC의 공식기로 채택되었다.
그 이후에도 올림픽경기는 아니지만, 올림픽조직위원회를 대표하는 성격으로 1915년 3월 18일에 샌프란시스코의
만국박람회장에서 공식적으로 올림픽기가 게양되었다.
그러나 1916년 올림픽 때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무산되어 이 기를 게양할 수가 없었다.
1868 - 오스트리아의 병리학자 란트슈타이너(Landsteiner, Karl) 출생
란트슈타이너 [Landsteiner, Karl, 1868.6.14~1943.6.26]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의 면역학자·병리학자.
주요혈액군을 발견했고, 수혈의 보편화를 가져온 ABO식 혈액형계를 개발해서 1930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빈 병리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었을 때(1898~1908) 인간 혈액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발견하고,
아무 혈액이나 구분 않고 수혈하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혈액형 판정).
인간의 혈액에는, 적혈구의 원형질막에 붙어 있으며 항원으로 알려진 당분 함유물의 종류에 따라, 적어도 3가지의 주요혈액형이 있다는 것을 입증했고(1901), 이를 A형, B형, O형이라고 불렀다. A항원과 B항원을 모두 갖고 있으며, AB 항체는 갖고 있지 않은 4번째 혈액형(AB형)은 다음해에 발견되었다. 그뒤 M과 N식(1927) 혈액형, 그리고 리서스(Rh) 인자도 발견했는데(1940), Rh 인자란 그것이 발견된 원숭이종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Rh 인자는 산모와 태아의 혈액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산·유산 또는 신생아에게 위험한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이 된다(→ Rh식 혈액형계).
그의 연구는 친자확인소송이나 살인사건의 재판에서 중요한 증거를 제공하며 법의학 발달에도 큰 몫을 했다.
혈액형이 특정한 유전자를 통해 유전된다는 사실은 인류유전학과 인류학 연구에 유용한 수단을 제공했다. 빈대학교(1909~19)와 뉴욕에 있는 록펠러 의학연구소의 병리학 교수로 재직했으며(1922~43), 면역학을 확립시키는 데
기여한 〈혈청반응의 특성 The Specificity of Serological Reactions〉(1936)을 저술했다.
1807 - 나폴레옹과 러시아의 프리들란트 전투
1806년 프로이센 군대가 프랑스 군대에 완전히 패하고 베를린이 점령되었지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바르텐슈타인 회의에서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나폴레옹과의 전투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807년 6월 14일 프리들란트 전투에서 러시아가 나폴레옹 군대에 패하자 러시아는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체결해 버렸다. 프로이센은 크게 실망하였으나 결국 프로이센도 1807년 7월 9일 틸지트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틸지트 조약으로 프로이센은 거의 사라지게 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러시아 황제의 강력한 설득으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지위는 겨우 보존되었다. 프로이센은 이제 브란덴부르크, 동프로이센, 슐레지엔으로 구성 된 동유럽 주변 국가로 전락하고, 인구도 1,000만여 명에서 450만으로 줄어들었다. 15만여 명의 프랑스군이 프로이센에 주둔했다. 프로이센은 프랑스군의 주둔 비용과 더불어 무려 1억 5450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배상금은 1억 2,000만 프랑으로 줄어들었으나 그 액수는 여전히 과도했다. 프로이센은 한 들에 400만 마르크씩 지불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프로이센 군대는 4만 2,000명으로 축소되었으며 오스트리아와 전쟁이 일어날 경우 1만 6,000명의 병사들이 프랑스군사령관
지휘 아래로 재배치될 예정이었다.
나폴레옹에게 완전히 굴복한 프로이센은 그 후 유례없는 개혁을 시도한다.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된 이 개혁은 그 후 19세기에 정착된 프로이센이라는 국가의 틀을 잡게 된다. 이들이 주도한 프로이센의 개혁정책은 군사개혁, 정치개혁, 농업개혁,
재정개혁, 대학개혁의 다섯 개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1777 - 미국 국기 성조기 제정
1777년 6월 14일 성조기(星條旗, Stars and Stripes)가 미국의 국기로 채택되었다. 당시 채택된 최초의 성조기에는 13개의 별이 그려져 있었는데, 당시에는 13개의 주만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 7월 4일 이후 이 흰 별의 수는 50개가 되었다.
한때는 13개의 가로줄이 15개로 늘어나기도 했으나, 1818년 의회는 처음에 13개 주만 있었기 때문에 국기에는 13개의 가로줄만 그려져야 하며 새로운 주가 승인되면 성조기에 새로 승인된 주의 수만큼 별을 더 그려넣도록 하자는 안건을 내놓았다. 최초로 성조기를 도안하거나 제작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필라델피아의 여자 재봉사인 벳시 로스 또는 독립선언서
서명자 중 한 사람인 프랜시스 홉킨슨이다. - 브리태니커
(1777년 6월 14일 의회에서 채택한 최초의 성조기는 13개의 별이 가로로 3-2-3-2-3 개씩 엇갈리게 배열된 것이었는데, 별이 둥글게 배치된 성조기는 벳시 로스가 고안한 형태라고 합니다. ^.@)
그해,오늘무슨일이 총 49건
2009년 한국, 제1회 동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 우승
2005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5년 8개월의 해외도피생활 마치고 귀국
2005년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개막(평양)
2004년 남북함정, 국제상선 공용통신망 첫 무선교신
2002년 한국-포르투갈 1대0 승, 사상 처음 월드컵 16강 진출
2000년 남북한, 8.15 고향방문 등 5개항 합의-서명
1994년 `문 리버`의 작곡자 헨리 맨시니 사망
1994년 박유광 한국고속철도공단 이사장과 피에르 빌저 프랑스 GEC알스톰그룹 회장, 21억160만달러의 경부고속철도 차량도입계약을 정식 체결
1989년 부시 미국 대통령, 전략방위구상 (SDI) 프로그램 지속 천명
1986년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 사망
1984년 캐나다 트뤼도 수상 고별 연설
1982년 아르헨티나, 포클랜드전쟁에서 영국에 항복
1982년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첫 공판
1980년 국내 첫 태양광발전소 가동
1977년 일본, 2백해리 수역발표
1977년 아르헨티나 북한과 단교
1968년 195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탈리아의 시인 콰시모도 사망
1967년 미국 화성탐사선 마리너5호 발사
1967년 부정선거규탄 학생데모, 서울시내 11개대학 임시휴교
1966년 서울서 제1회 아스팍회의 개최-아시아,태평양각료이사회 창설
1963년 소련, 보스토크 5호 발사
1961년 부정축재처리법 공포
1954년 중국인민정부, 헌법초안을 채택 발표
1949년 월남, 바오다이 정권수립
1946년 세계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에 성공한 베어드 사망
1946년 김규식.원세훈.여운형.허헌, 좌우합작회담 개시
1940년 독일군 파리 입성
1938년 별의 시선속도를 분광학적으로 측정한 미국의 천문학자 윌리암 캠벨 사망
1937년 스페인정부, 막스주의 통일사회당에 해산명령, 스페인 인민전선이 붕괴됨
1936년 러시아 소설가 막심 고리키 사망
1929년 바티칸.프로이센, 정교조약 조인
1928년 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 출생
1928년 여성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 사망
1920년 막스 베버 사망
1919년 최초의 금속제 여객기 융커스 F-13(4-5인승), 첫 비행에 성공
1914년 오륜기 제정
1909년 청나라-스웨덴, 북경통상조약조인
1907년 내각관제 공포(의정부 폐지)
1907년 노르웨이, 여성 참정권 부결
1900년 파리-리용간 최초로 국제자동차레이스(경주) 개막
1889년 미국-영국-독일, 사모아섬에 관한 조약을 베를린서 체결
1868년 란트슈타이너 출생 - ABO식 혈액형분류법 개발로 1930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1825년 미국 수도인 워싱텅 D.C.의 기초도면을 설계한 건축가 랑팡 사망
1811년 미국 소설가 스토우부인 출생
1811년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저술한 미국의 작가·스토 출생
1777년 미국 국기 처음 제정
1775년 미국 육군 창설
1736년 프랑스 물리학자 샤를 오귀스탱 드 쿨롱 출생
756년 양귀비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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