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 06.13 (2)
1) 2) 3)
1) 1888 - 포르투갈의 시인 페소아(Pessoa, Fernando) 출생
페소아 [Pessoa, Fernando (António Nogueira), 1888.6.13~1935.11.30]
포르투갈의 시인.
그의 모더니즘 활동 덕분에 포르투갈 문학은 유럽 문학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페소아는 7세 때부터 남아프리카 주재 포르투갈 영사인 의붓아버지와 함께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살았다.
그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으므로 초기 시에서는 영어를 사용했다. 1905년에 포르투갈로 귀국하여 리스본에
머물면서 상업 서류 번역가로 일하는 한편, 전위적 평론지에 글을 기고했다. 특히 〈오르페우 Orpheu〉(1915)라는
평론지는 그가 주요논객으로 활약한 모더니즘 운동의 기관지였다. 1918년에 영어로 쓴 시집을 출판하기 시작했지만,
포르투갈어로 쓴 첫 시집 〈멘사젬 Mensagem〉은 1934년에 이르러서야 출판되었다. 이 시집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는 이듬해인 1935년에 죽었고, 그제서야 분신들(그는 자신의 시와 함께 이 분신들의 시도 썼음)로 가득 차 있는 놀랄 만큼 풍부한 그의 환상 세계가 널리 알려지면서 뒤늦게 명성을 얻었다. 그의 분신인 가공의 시인들이 쓴 작품은 페소아가
자신의 이름으로 쓴 작품과는 견해와 문체가 다르지만, 종합해보면 이 작품은 그가 자신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한 여러 가지 개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 Poesias de Fernando Pessoa〉(1942)·〈알바루 데 캄푸스의 시 Poesias de Álvaro de Campos〉(1944)·〈알베르투 카에이루의 시 Poemas de Alberto Caeiro〉(1946)·〈리카르두 레이스의 송가 Odes de Ricardo Reis〉(1946)이다. 아르망 기베르가 쓴 〈페르난두 페소아 Fernando Pessoa〉(1973)는 프랑스어(페소아의 작품은 프랑스어로 많이 번역되었음)로 된 훌륭한 연구서이다.
2) 1854 - 영국의 기계공학자 파슨스(Parsons, Charles) 출생
파슨스 [Parsons, Charles (Algernon), 1854.6.13~1931.2.11]
영국의 공학자. 다단식 증기 터빈을 발명해 선박의 추진방식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1877년 뉴캐슬에 있는
암스트롱 기계제작소에 입사하여 여러 공장을 거치면서 일을 했고, 1899년 뉴캐슬에 증기 터빈, 발전기,
그밖의 여러 전기기구를 제작하는 자신의 공장을 세웠다. 1884년에 그는 직렬로 연결된 다단식 터빈을 발명했는데,
각 증기 터빈의 팽창정도는 터빈 날개가 과속하지 않게 하면서도 최대의 운동 에너지를 끌어내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1891년 이 터빈에 응축기를 달아 발전기로 사용했고, 선박 추진기로도 사용되어 1897년 터비니아호(號)에 장착되어
그당시에는 매우 빠른 34.5kn(노트)의 속력을 내었으며, 곧이어 전함과 증기선에도 사용되었다.
그는 파슨스사의 사장직 외에도 여러 전기공급회사와 기계제작회사의 위원회에서도 지도자적인 위치를 유지했다.
한편 1898년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고, 1902년 왕립학회에서 수여하는 럼퍼드 메달을 받았으며,
1905~06년 조선공학학회의 회장, 1919~20년 영국학술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밖에 1911년 기사작위를 받았고,
1927년 메리트 훈위를 받았다. 터빈 제작 외에도 터빈과 스크루 사이에 장착되어 양쪽의 효율을 높여주는 감속 기어,
미끄러지지 않는 자동차 체인 등을 발명했다. 1934년 그의 논문과 연설문을 담은 책이 출간되었다.
3) 1398 - 고려시대의 학자, 문신 문익점(文益漸) 사망
문익점 [文益漸, 1329~1398]
강성현(江城縣: 경남 산청) 출생.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내고, 1363년 좌정언(左正言)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계품사(啓稟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元)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붓대[筆管] 속에 목화씨를 감추어 가져왔고, 이를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고향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다. 1375년(우왕 1) 다시 전의주부(典儀注簿)로 등용되고 1389년 좌사의대부(左司儀大夫)가 되었으며, 공양왕 때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준(趙浚)의 탄핵으로 밀려났다. 1440년(세종 22)
영의정이 추증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세조 때에 사당이 세워졌다.
1) 2)
1) 1831 -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맥스웰(Maxwell, James Clerk) 출생
맥스웰 [Maxwell, James Clerk, 1831.6.13~1879.11.5]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제임스 클럭 맥스웰은 19세기를 대표하는 물리학자로서 종종 뉴턴이나 아인슈타인과 비교된다.
1931년 맥스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판된 책에서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이 "뉴턴 이래 가장 심오하고 충실한 물리학
업적"을 이룩했다고 극찬했다. 맥스웰은 1831년 6월 13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부유한 중류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전가족이 미들비 지방의 글렌레어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8세 되던 해에 위암으로 사망했다. 1841년 숙모의 도움으로 에든버러 아카데미에 입학했는데,
그곳에서 평생친구가 될 루이스 캠블(후에 맥스웰 전기를 씀)과 피터 거스리 테이트를 만났다.
과학에 관한 그의 관심은 이미 이 시기부터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4세 되던 해에 출판된 첫번째 논문은 핀과 실을 이용해서 타원형 곡선의 일반적인 성질을 기술해낸 것이었는데,
기하학과 기계적 모형에 대한 그의 끝없는 관심이 잘 드러나 있다.
16세가 되자 에든버러대학교에 입학해서 모든 과목을 열심히 공부했고, 과학논문을 2개 더 발표했다.
1850년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입학했고 그의 탁월한 능력은 곧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수학 지도교사였던
윌리엄 홉킨스(당시 가장 유명했던 수학 교사로 테이트, 조지 게이브리얼 스토크, 윌리엄 톰슨(켈빈 경) 등
많은 과학자들이 그의 지도를 받았음)는 맥스웰이 그가 만난 학생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칭찬하면서
맥스웰은 물리적 감각이 매우 훌륭하지만 분석능력이 떨어진다고 평했다.
1854년 맥스웰은 캐임브리지대학교 수학 트라이포스(우등졸업시험)를 2등으로 졸업했고, 같은 해 독창적인 연구결과에 따라 수여하는 스미스상(The Smith's Prize)을 수상했다. 그후 트리니티 칼리지 펠로로 선출되었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856년 에버딘의 매리셜 칼리지 자연철학교수로 부임했다. 1858년 메리셜 칼리지 학장의 딸이었던 캐서린 메어리 듀어와 결혼했다. 비록 결혼생활 동안에 자식은 없었지만, 그의 전기에서 볼 수 있듯이 보기 드문 열애였다. 1860년 메리셜 칼리지가 킹스 칼리지와 합쳐서 에버딘대학교가 되자 맥스웰은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공석이 된 에든버러대학교 자연철학 교수직에 응모했지만 친구였던 테이트가 대신 임명되었다. 그후 런던의 킹스 칼리지 자연철학교수로 선출되었다. 킹스 칼리지의 교수로 있었던 5년은 맥스웰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활동적인 시기였다.
그는 이 기간 동안에 전자기학에 관한 고전적인 논문 2개를 발표했고, 컬러 사진법에 관한 시범을 수행했으며, 1861년에는 왕립학회 펠로로 선출되었다. 그의 연구과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욱 폭넓어졌는데
1866년 왕립학회 강연에서 발표하게 되었던 유명한 점성에 관한 연구도 계속했다. 또 영국과학진흥협회의 의뢰로
전기의 단위를 측정하는 실험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이 연구과제는 후에 국립물리연구소에서 계속했다.
1865년 맥스웰은 교수직을 사임하고 글렌레어의 영지로 은퇴했다. 비록 매년 봄마다 런던을 방문했고 케임브리지대학교
수학시험 시험관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그는 거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유명한 〈전자기론 Treatise on Electricity and Magnetism〉을 집필하는 데 바쳤다. 맥스웰은 책 서문에서 자신의 작업이 패러데이의 물리적 생각을 수학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법칙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기계적인 모형을 설정했는데, 그로부터
유전체에 '변위전류'가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파동의 속력을 계산하던 중 빛의 속력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빛은 전자기현상이 일어나는 매체와 같은 매체 안에서 일어나는 횡파(橫波)'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전자기파가 실험실 안에서도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실제로 1887년 하인리히 헤르츠에 의해 증명되었다.
따라서 이후에 전개된 무선통신사업은 그의 이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맥스웰은 전자기학 이외에도 많은 다른 분야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가 20대에 제시한 토성의 테에 관한 이론은 100년 뒤에 보이저 위성 탐사선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또한 최초로 통계적인 방법을 열역학에 도입했고, 실험에도 조예가 깊어
컬러 사진법, 효과적인 조속기(調速機) 등을 고안했다.
1871년 맥스웰은 새로 설립된 케번디시 실험물리학 교수로 선출되었다. 그는 케번디시 연구소를 설계하고 건축하는 데
깊이 관여했고, 존 앰브로즈 플레밍, 리처드 테틀리, 글레이즈부루크, 존 헨리 포인팅, 아서 슈스터와 같이 의욕있고 재능있는 소수의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정열을 바쳤다. 1879년 봄학기중 병세가 악화되자 6월에 고향의 영지로 돌아갔다.
하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11월 5일 사망했다. 병명은 그의 어머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위암이었다. 그는 생전에도 그랬듯이 사후에도 아무런 공적인 예우를 받지 못했으며 조용히 스코틀랜드의 한 마을 묘지에 묻혔다.
2) 1901 - 스웨덴의 총리 에를란데르(Erlander, Tage) 출생
에를란데르 [Erlander, Tage, 1901.6.13~1985.6.21]
스웨덴의 총리(1946~68).
스웨덴에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1928년 룬드대학교를 졸업한 후 1928~38년 〈스벤스크 웁살라보크 Svensk Uppslabok〉 백과사전 편집자로 일했다. 1933년에 사회민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1938~44년 사회복지장관, 1944~45년 무임소장관을 역임했으며, 페르 알빈 한손의 사회민주당 내각(1945~46)에서는 교육장관과 종교장관을 지냈다. 1946년 한손이 사망한 이후 사회민주당 당수 겸 총리가 되었고 1968년 퇴임할 때까지 양 직위를 겸임했다.
1970년 양원제에서 단원제로 변경된 새로운 의회에서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에를란데르는 오랫동안 총리로 재직하면서 노인 수당, 어린이 수당, 임대보조금 지급안을 통과시켜 복지입법을 확대했다. 또한 교육개혁을 단행하여 의무교육
연한을 9년으로 연장하고, 고등교육 기회를 증대시켰다. 냉전시대에 그의 외교정책은 스웨덴의 중립을 견지하는 것이었다. 은퇴 후 1972~76년 4권으로 된 〈에를란데르의 인생 Tage Erlander〉을 썼다.
1908 - 포르투갈 태생의 프랑스 추상화가 비에이라 다 실바(Vieira da Silva) 출생
비에이라 다 실바 [Vieira da Silva, (Maria Elena), 1908.6.13~1992.3.6]
포르투갈 태생 프랑스의 화가.
반(半)추상적인 형태의 복잡한 건축적 구성으로 된 작품들로 유명하다. 1928년 파리에서 앙투안 부르델에게 처음으로 조각을 배웠으며, 뒤에는 샤를 데스피오에게 지도를 받았다. 페르낭 레제와 스탠리 윌리엄 헤이터의 지도를 받으면서 회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초기 그림에 보이는 추상적인 무늬는 장식적인 경향을 띠었지만,
공간 처리에 있어서 매우 능숙함을 보여주었다. 또한 두드러지게 밝은 부분과 교차선을 사용하여 뚜렷한 건축적인 구도를 암시했으며 〈황금의 도시 Golden City〉(1956)와 같이 원숙한 작품들에 나타난 환상적인 도시 풍경들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브라질에서 살다가 1947년에 파리로 돌아왔으며 1956년에 프랑스 시민이 되었다.
1899 - 멕시코의 작곡가 차베스(Chávez, Carlos) 출생
차베스 [Chávez (y Ramírez), Carlos (Antonio de Padua), 1899.6.13~1978.8.2]
멕시코의 지휘자·작곡가.
그의 음악은 민요의 요소들과 현대 기법을 기술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19세 때 첫번째 교향곡을 완성했으며, 1921년에는
멕시코 양식에 의한 그의 첫번째 주요작품인 무용곡 〈새로운 불 El fuego nuevo〉을 작곡했다. 유럽과 미국을 여행한 후 1928년 멕시코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설립하여 지휘자가 되었으며 1928~34년 멕시코 국립음악원 원장으로 재직했다. 멕시코 음악에 관한 여러 논문들을 비롯하여 〈신음악을 향하여 Toward a New Music〉(1937)를 썼으며 하버드대학교에서
행한 찰스 엘리엇 노턴의 강의들을 묶어 〈음악적 사고 Musical Thought〉(1960)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선율적 유형이나 리듬적 굴곡에 있어 멕시코적인 색채가 분명하게 드러나며, 특히 인디언 음악으로부터 타악기의 개념과 원시적 리듬, 화성과 선율의 옛 형식들을 취했다. 특히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6개의 완성된 교향곡들 가운데 처음 두 곡인 〈신포니아 데 안티고나 Sinfona de Antígona〉(1933)와 〈신포니아 인디아 Sinfonía India〉(1935)는 멕시코 인디언의 주제들을 사용한 단악장 작품이다.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1번 Concerto No. 1 for Piano and Orchestra〉(1940)은 매우 타악기적인 특성을 갖는다. 〈타악기를 위한 토카타 Toccata for Percussion Instruments〉(1942)는 6명의 연주자가 연주하는 11개의 타악기를 위한 작품으로 악기 가운데는 멕시코의 민속악기도 포함되어 있다. 그밖의 작품으로는 무용곡 〈4개의 태양 Los cuartro soles〉(1926), 관현악과 인디언 악기들을 위한 〈Xochipilli Macuilxochitl〉(1940),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Concerto for Violin〉(1950)과 관현악을 위한 〈발견 Discovery〉(1969) 등이 있다.
1897 - 핀란드의 장거리 육상선수 누르미(Nurmi, Paavo) 출생
누르미 [Nurmi, Paavo, 1897.6.13~1973.10.2]
핀란드의 육상선수. 1920년대 장거리 육상 종목을 석권했다.
3차례의 올림픽 대회(1920, 1924, 1928)에서 6개의 금메달을 땄으며 그가 기록한 1마일(1.6㎞) 경기의 세계기록
4분 10초 40은 8년 동안(1923~31) 깨지지 않았다.
1920년 이래로 올림픽의 영광을 차지했던 다른 수많은 핀란드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누르미도 1912년 올림픽에서
장거리 경기 3종목을 석권한 핀란드의 한네스 콜레마이넨에게 감명을 받았다.
누르미는 훈련 때나 경기 때나 자신의 보폭을 정확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스톱워치를 가지고 다녔다.
1920년 벨기에 앤트워프 올림픽 대회에서 1만m 달리기와 1만m
크로스컨트리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192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올림픽 대회에서 1만m 달리기에서 또 하나의 금메달을
추가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대회에서 그의 기록은 대단했다. 굉장히 더웠던 7월 10일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1,500m와 5,000m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다. 이틀 후 역시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 1920년에 우승한 1만m 크로스컨트리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는 1924년 이후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되었다. 그 다음날 비공식 3,000m 릴레이에서
첫번째로 들어와 핀란드 팀이 승리했으나 메달은 없었다.
1923년 8월 23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1마일 신기록을 세울 때에 자신의 스톱워치를 들여다보며 뛰어 처음 3쿼터는 각각 정확히 63초에 달렸고, 마지막 쿼터는 61.4초에 달렸다. 그가 각 쿼터를 거의 같은 시간대로 달려 기록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수들은 그 방법을 따르지는 않았다. 1928년 1시간 경기에서 1만 9,210m를 달려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규정 이외의 금품을 받았다 하여 1932년 올림픽 직전에 국제 아마추어 선수자격을 박탈당했다.
1870 - 벨기에의 세균학자 보르데(Bordet, Jules) 출생
보르데 [Bordet, Jules(-Jean-Baptiste-Vincent), 1870.6.13~1961.4.6]
벨기에의 세균학자·면역학자.
혈청에서 면역인자를 발견하여 1919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이 발견은 많은 위험한 전염병의 진단과 치료에
매우 중대한 발전을 가져왔다. 1894~1901년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수행된 적혈구와 세균의 파괴에 대한 그의 연구는 체액에서의 면역반응을 연구하는 혈청학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1895년 세균의 세포벽 파괴, 즉 용균작용(溶菌作用)에 관여하는 혈청 속의 2가지 요소를 발견했다. 하나는 열에 안정한 항체로서 이미 그 세균에 대해 면역이 된 동물에서만 발견되며, 다른 하나는 모든 동물에서 발견되는 열에 민감한 물질인데 지금은 보체(補體)로 알려져 있다. 3년 후 외부의 적혈구가 혈청 속에서 파열되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 과정을 용혈(溶血 hemolysis)이라 하는데 이는 용균작용과 비슷하며 보체를 필요로 한다.
보르데는 브뤼셀에서 브라반트 파스퇴르 연구소를 설립·관리했으며(1901~40), 옥타브 장구와 함께 면역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그들의 연구는 장티푸스·결핵·매독(바서만 검사)을 포함한 많은 병원체에 대한 혈청학적 검사의 기초를 마련했다. 1906년 장구와 함께 지금은 백일해균(Bordetella pertussis)이라고 불리는 백일해의 원인균을 발견한 후 브뤼셀대학교의
세균학교수가 되었으며(1907~35), 그곳에서 혈액응고와 박테리오파지(세균을 공격하는 바이러스)에 대해 연구했다.
1865 - 아일랜드의 시인, 극작가 예이츠(Yeats, William Butler) 출생
예이츠 [Yeats, William Butler, 1865.6.13~1939.1.28]
예이츠는 아일랜드 문예부흥을 이끌었던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영국계 아일랜드인으로 더블린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80년부터 수년간 더블린에 머무는 동안, 미술을 공부하는 한편 시를 쓰기 시작했고
아일랜드의 민간전승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7년 런던으로 돌아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와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위시한 광범한 신비주의 전통에 접하는 동시에 아일랜드 문예부흥을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1889년에 발표된 첫 시집 <오이신의 방랑 The Wanderings of Oisin>은 아일랜드적 주제들을 신비주의적 영감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1891년 아일랜드 지도자 찰스 스튜어트 파넬이 죽자, 정치적 환멸이 남긴 공백을 아일랜드 문학 전통의
부흥으로 메꿈으로써 민족 정신을 고취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을 이끌었다.
1896년에는 아일랜드로 돌아갔고 오거스타 그레고리를 만나 아일랜드 극장(1904년 애비 극장이 됨)을 설립하는 등
아일랜드 시극운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전설을 바탕으로 영웅적 가치관에 호소한 그의 희곡들은 점차 중산층의
관심사에서 멀어져갔고, 그는 한층 더 시적이고 정적이고 비의적인 세계를 추구하게 되었다.
오늘날 그는 주로 <쿨 호수의 야생 백조들 The Wild Swans at Coole>(1919)·<탑 The Tower>(1928)·<나선 계단 The Winding Stair>(1933) 등에 수록된 시들로 기억되고 있다.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 윌리엄 B. 예이츠, <쿨 호수의 야생 백조들
1809 - 독일의 의사, 동화작가 호프만(Heinrich Hoffman) 출생
호프만 [Heinrich Hoffman, 1809.6.13~1894.9.20]
(본명은 Heinrich Hoffmann-Donner. 필명은 Reimerich Kinderlieb, Heinrich Kinderlieb, Peter Struwwel,
Heulalius von Heulenburg, Polykarpus Gastfenger, Zwiebel.)
독일의 의사·작가.
지저분한 외모에 개구쟁이짓을 골라하는 악동, '더벅머리 페터'를 만들어낸 작가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더벅머리 페터는 〈재미난 이야기와 익살스런 그림, 3~6세 어린이들을 위한 예쁘게 칠해진 그림 15장 Lustige Geschichten und drollige Bilder mit fünfzehn schön Kolorten Tafeln für Kinder von 3~6 Jahren〉(1845)에 등장했다. 교훈적인 이야기의 이 책은 작가가 네살박이 아들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쓴 것이다.
그는 다른 아동용 도서와 시·유머·풍자문 이외에 의학과 정신병 치료법에 관한 책도 썼다. 하이델베르크와 할레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있는 국립정신병원에서 진료와 강의를 맡았으며,
1851~88년 그곳 원장으로 일했다. -브리태니커
더벅머리 페터 [Struwwel Peter]
1847년에 간행하였다. 이발(理髮)이나 손톱 ·발톱 깍기를 싫어하는 소년 페터를 주인공으로 그가 난처한 처지에
빠지는 장면을 통해서 생활범절이나 몸가짐 등을 가르치는 교육적인 내용
이다. 그러나 교육에 공포심을 이용한 방식이 아동심리 발달에 역기능으로 작용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790 - 베네수엘라의 군인, 초대 대통령 파에스(Páez, José Antonio) 출생
파에스 [Páez, José Antonio, 1790.6.13~1873.5.7]
베네수엘라의 군인·정치가.
베네수엘라의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독립 초기의 어려웠던 시절에 온건한 독재자로서
조국을 위해 일했다.
파에스는 인디언의 피가 섞인 랴네로(남아메리카 대초원 거주자) 출신이었다. 목장 일꾼으로 일을 시작해
얼마 안 가 토지와 가축을 소유하게 되었다. 1810년에는 랴네로 집단의 지도자로서 스페인에 대한 혁명운동에 가담했다.
남아메리카 북부지역을 해방한 시몬 볼리바르 밑에서 베네수엘라의 최고사령관이 되어 카라보보 전투(1821)와 푸에르토카베요 전투(1823)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스페인군은 푸에르토카베오 전투에서의 패배를 끝으로 남아메리카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이후 베네수엘라는 남아메리카 북부에 형성된 대(大)콜롬비아 연방의 한 주로 편입되었지만 1826년 연방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파에스는 베네수엘라의 군민(軍民) 양면 사령관이 되었고
1829년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1831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1846년까지 명목상의 대통령들의 뒷전에서 실권을 행사했다.
그는 대체로 헌법을 존중했으며, 제한적이나마 언론의 자유를 허용했고, 농업과 산업의 발전을 촉진했다.
또 교회가 세속적인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억제했으나 종교적 권위는 지지했다. 1846년 자신이 직접 선택한 대통령 후계자가 등을 돌리는 바람에 투옥되었다가 강제추방되었다. 1861년 베네수엘라로 돌아와 권력을 잡았으나 가혹하고 억압적인
독재통치를 펴 1863년 다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말년의 대부분을 뉴욕 시에서 보냈으며 1867~69년에 자서전을 출간했다.
그해,오늘무슨일이 총 46건
2015년 공수부대 중사 출신 최원창씨, 인터플로라 월드컵 1위 수상 2015년 영국서 사상 최고령 신혼부부 탄생 2006년 한국 축구대표팀, 토고 꺾고 월드컵 사상 첫 원정 승리 2006년 ‘DJ 가택연금’ 19년만에 유죄, 당시 마포서장에 집유 2년 2004년 영화계 대표적 감초배우 김일우씨 별세 2002년 6·13 지방선거 한나라당 압승, 민주·자민련 참패 2002년 미군장갑차에 치여 여중생 2명 사망 2002년 중국, 한국 영사관 진입한 탈북자 강제연행 2000년 김대중 대통령 평양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 첫 회담 1997년 미연방배심원, 티모시 맥베이 사형평결 1993년 캐나다 총리에 캠블 선출 1991년 옐친, 러시아공화국 초대 대통령(직선) 당선 1986년 `스윙재즈의 킹` 베니 굿맨 사망 1984년 런던서 시크교도 망명정부 칼리스탄국 창설 1982년 제12회 월드컵 스페인서 개막 1982년 할리드 사우디국왕 사망 1974년 제10회 월드컵 서독서 개막 1974년 중국, 비림(批林).비공(批孔)운동 전개 1971년 뉴욕타임스(NYT)지 베트남전 기밀문서 게재 정치문제화 1968년 정부, 가이아나와 국교 수립 1966년 `미란다 원칙` 고지 의무화 판결 1961년 언커크, 한국의회제도 부활을 촉구 1959년 민판수호총연맹, 언론수호대회 서울서 개최 1958년 일본, 한국에 반환할 문화재목록을 제공 1958년 스위스 의회, 부인참정권 가결 1956년 영국군 74년 만에 수에즈운하서 철수 1955년 일본-북한 어업협정조인 1953년 콜롬비아 육군 유혈쿠데타 1948년 미국 뉴욕 양키즈팀, 베이브 루스의 등번호 3번을 영구 결번으로 발표 1938년 학교 근로 보국대 실시요항 발표 1938년 휘발유 및 중유판매취체령 공포 1938년 경성제대 강당에서 육군지원병훈련소 입소식 거행 1918년 광화문선 전차 운행 개시 1917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개교 1915년 1938년 최초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미국의 테니스 선수 버지 출생 1903년 소련 압록강목재회사 설립 1903년 소련,청나라 전선연접 조약 성립 1890년 양화진에 외국인 묘지 허가(1890.06.13 음력) 1879년 핀란드의 육상선수 누르미 출생 - 1920, 1924, 1928년 올림픽서 6개의 금메달 획득 1871년 런던 상해간 전신 개통 1865년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 출생 1831년 영국 물리학자 맥스웰 출생 1790년 베네수엘라의 초대 대통령 파에스 출생 1402년 명나라 율문제, 정강의 변으로 폐위 1398년 목화 전래자 문익점 사망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망 |
'오늘의 뉴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우표와 사건 06.14(1) 세계 헌혈자의 날 (0) | 2019.06.14 |
---|---|
우표로 본 오늘 60.14(2) (0) | 2019.06.14 |
오늘의 우표와 사건 06.13 (1) (0) | 2019.06.13 |
우표로 본 오늘과 사건 0 6.12(2) (0) | 2019.06.12 |
오늘의 우표와 사건 06.12 (1) (0) | 2019.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