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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의 우표와 사건 06.14(1) 세계 헌혈자의 날



오늘의 우표와 사건  06.14(1) 세계 헌혈자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                                               3)

 

1) 1992 - UN 환경개발회의, 리우 선언 채택
1992년 6월 14일 세계 170여 개국의 정부대표와 환경전문가, 민간 환경단체대표 등이 참석한 국제연합(UN) 환경개발회의에서

리우 선언이 채택되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지구동반자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6월 3~14일 개최된 이 국가정상급 회의를

리우 회의라고도 한다. 1972년 스톡홀롬에서 개최된 '인간환경회의'에서 환경권을 채택한 이래 UN은 환경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왔다. 1989년 제44차 UN 총회에서 1992년 6월 'UN 환경개발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의한 이래,

3년간 4차례의 준비회의가 열렸다. UN 환경개발회의는 회의를 끝마치면서 리우 선언 외에 산림원칙 등을 채택했고, 기후변화협약과 생물다양성협약 등에 서명했다. 리우 선언의 주요 원칙은 지속 가능한 개발, 개발도상국의 주권적 개발권,

지구환경보전을 위한 모든 국가간의 차등적인 공동책임 등이다.

 

2) 1986 - 아르헨티나의 시인, 소설가 보르헤스(Borges, Jorge Luis) 사망

보르헤스(Borges, Jorge Luis, 1899.8.24~1986.6.14]

20세기 후반 문학계의 거두인 아르헨티나의 시인 겸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1986년 6월 14일 사망했다.

일본계 아르헨티나인으로 자신의 비서였던 마리아 고타마와 두번째 결혼했으나 결혼 2개월도 채우지 못한 채

스위스 제네바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모국어인 스페인어 외에도 영국계 할머니로부터 배운 영어를 6살 때부터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유럽에 가서는 라틴어와 프랑스어, 독일어로 된 책을 읽었다. 너무 많은 책을 읽은 나머지 30대 후반부터 서서히 시력을 상실해 생의 후반부는

암흑 속에서 지내야 했다. 시인으로 출발한 그는 1935년 단편집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내놓으면서 소설가로 활동했다.

그의 단편 '픽션들'과 '알레프'는 유럽과 미국의 문학과 비평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픽션들' 속에 삽입된 '바벨의 도서관'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소설의 죽음을 외치는 금세기 말의 문학세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 대표적 작품들로 손꼽힌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고, 이 우주를 거대한 도서관으로 보아 모든 것을 텍스트로 삼는 그의 소설이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기호학, 후기구조주의 등의 근원적 요소를 품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조선

 

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스페인어:J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 1899년8월 24일~1986년6월 14일)는 아르헨티나소설가이자 시인, 평론가이다. 현대 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헨리 제임스처럼 거의

정규적인 교육과는 거리가 먼 성장기를 보냈다. 대신 그는 역시 헨리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영국계인 외할머니와

가정교사인 팅크 양으로부터 영어를 배우는 등 개인 교수를 통한 교육을 중점적으로 받았다.

그는 이미 일곱 살에 영어로 《그리스 신화》 요약을 썼고, 여덟 살에는 《돈키호테》를 읽고 영감을 받아

〈치명적인 모자의 챙〉이라는 단편 소설을 썼으며 오스카 와일드의 영어 단편 〈행복한 왕자〉를 스페인어로 번역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라틴아메리카 작가인 보르헤스는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꽃피웠으며, '제 2세대' 라틴아메리카 예술가들이 세계적으로 도약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보르헤스는 라틴아메리카를 벗어나 프랑스의 신소설가들을 비롯 존 바스, 존 허크스, 도널드 바셀미 등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반사실주의 세대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경험과 상상의 세계는 문제를 야기하거나 깜짝 놀라게 하는 점에서 사뮈엘 베케트에 버금간다.

보르헤스는 1938년 어두운 계단에서 사고로 머리를 다쳐, 이로 인한 패혈증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다. 단편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단편은 자신의 맑은 정신과 판단력을 잃었다는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쓴 작품이다.

1950년대 중반 보르헤스는 그의 아버지처럼 시력 약화 증세로 거의 실명 상태가 되었다. 보르헤스는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어머니는 그에게 글도 읽어주고 창작 활동도 도와주었다. 보르헤스는 예순여섯 살에 어릴 적 친구였던 여성과 처음으로 결혼하지만 3년 만에 헤어졌다. 그리고 숨지기 몇 주 전에 자신의 제자이자 비서인 여성과 재혼했다. 보르헤스는 앞을 못 보면서도 강의를 하러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또 20세기의 매우 영향력 있는 국제적 명성도 날로 높아만 갔다.

보르헤스의 업적은 일관성과 가능성에 의해 어색해진 소설의 편협한 박진감을, 환상이 섞인 보다 광범위한 마음의 작용으로 대체시키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상상력은 납득할 수 없는 것에도 형태를 만들어준다. 이야기꾼의 책략을 흔쾌히

받아들인 보르헤스는 하나의 일관된 이중 초점을 유지해 가면서,

언어와 독서에서 세계를 반영할 때 나타나는 역설과 함께 경험도 반영한다.


 

3) 1949 - 월남, 바오 다이(保大) 정권수립 

바오 다이(保大帝 (보대제), Bao Daii, 1913년 10월 22일 베트남~1997년 7월 31일 프랑스 파리)는 베트남 응우옌 왕조

마지막 13대 황제로 1922년 태자가 되어 학업을 위해 프랑스로 갔으나

1926년 부왕 계정제의 사망으로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일본에 협력하여 일제괴뢰 국가 베트남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8월 30일 붕괴되어 1945년 9월 호치민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자 퇴위하여 동 정권의 고문이 되었으나, 1946년 중국 홍콩으로 망명했다.

1949년 프랑스와의 협정으로 베트남 원수로 취임했으나 1954년 국민투표에서 총리 응오딘지엠에게 패배하여

프랑스로 망명했다.


                  1)                                  2)                                               3)

 

1) 1966 - 제1차 ASPAC회의 개최(서울), 아시아태평양각료이사회 창설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ian and Pacific Council, ASPAC)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유대관계와 국제협력을 목적으로

설립했던 협의기구로  약칭 ASPAC이라고도 한다. 1964년 가을 한국의 아시아 외무장관 회의 제창이 발단이 되었다.

1965년 3월 11일 타이 외무장관 주관으로 한국·타이·타이완·필리핀·일본·말레이시아·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

8개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예비회담이 개최되었다. 1966년 4월 18일 방콕에서 제2차 예비회담이 열렸고

라오스가 옵서버로 참석하였다. 1966년 6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제1차 회의 이후 매년 1회씩 개최하였다.

조직은 외무장관 연례회의인 각료회의, 차기 개최국 외무장관과 주재 회원국 대사들로 이루어진 상임위윈회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차기 개최국 외무부에 설치하는 사무국과 사회문화센터, 과학기술서비스등록처, 식량비료기술센터,

경제협력센터, 해양협력계획 등이 있다.

중국이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 가입하자 1973년 개최 예정이었던 제8회 회의가 무기한 연기됨으로써 사실상 해체되었다. ASPAC은 냉전시대에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세계 조류 변화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2) 2002 - 한국, 포르투갈 1대 0 승, 사상 처음 월드컵 16강 진출

"만세! 한국축구 만세!"
한국축구의 신기원이 마침내 열렸다. 48년간이나 목놓아 외쳤던 월드컵 16강의 염원이 마침내 이뤄졌다.
한국이 우승 후보 포르투갈을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16강에 진출했다. 또 공동개최국 일본도

16강에 올라 역대 개최국이 단 한번도 예선탈락한 적이 없는 월드컵의 전통을 이어갔다.
한국은 14일 밤 인천문학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2002월드컵 D조 예선 최종전에서 후반 24분 박지성의 천금 같은 왼발

결승골에 힘입어 2명의 퇴장으로 9명이 싸운 포르투갈을 1-0으로 물리쳤다.
이로써 한국은 2승1무 승점 7점으로 당당히 조 1위로 2라운드에 올랐고 18일 대전에서 이탈리아와 8강행을 다툰다.

이날 같은 시간에 벌어진 미국-폴란드전은 미국이 1-3으로 패했지만 1승1무 승점 4로 2위를 마크했다.
이번 대회 들어 처음으로 포백으로 나선 한국은 전반 3분 이영표가 미드필드 왼쪽에서 중거리슛을 날리며 포문을 열었다. 전반 12분에는 설기현이 수비 한 명을 제치고 왼쪽 측면을 돌파했고,19분 유상철의 아크 왼쪽에서

날린 슛이 골대를 살짝 빗나갔다.
한국에 행운이 여신이 미소지은 시간은 전반 27분. 하프라인 부근에서 박지성이 볼을 잡는 순간 포르투갈의 주앙 핀투가

레슬링하듯 뒤에서 다리를 꼬며 넘어뜨려 레드카드를 받았다.
이후는 완전히 한국의 페이스. 전반 30분 송종국의 오른쪽 코너킥을 최진철의 헤딩패스에 이어 설기현이 가볍게

밀어넣었으나 골키퍼 차징으로 아쉬움을 달래야했다.
결정적으로 포르투갈이 무너진 시간은 후반 20분. 왼쪽 측면을 치고들던 이영표를 베투가 태클을 걸며 퇴장당했고 이후

포르투갈은 전열을 가다듬지 못할 정도로 허둥댔다.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 한국은 결정타를 날렸다. 후반 25분 왼쪽에서 이영표가 길게 넘겨준 볼을 페널티지역

오른쪽에 있던 박지성이 가슴 트래핑으로 잡은 데 이어 수비 한 명을 가볍게 제치고 그대로 왼발슛,

볼은 대각선 방향의 골네트를 출렁이게 만들었다. http://worldcup.kbs.co.kr/live/relay/47.htm 

 

3) 1951 - 세계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인 유니박(UNIVAC) 탄생

194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J.P. 에케르트와 J.W. 모클리는 최초의 전자식 계산기 에니악(ENIAC)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진공관을 사용한 최초의 자동 계산기로 1만 8000여 개의 진공관과 1500개의 계전기를 사용하였고 무게가

30t이나 되는 거대한 기계였다. 150㎾의 전력을 소비하였고 연산속도는 매초에 5000번 처리할 수 있으며,

십진수 10자리의 곱셈을 0.0028초, 나눗셈을 0.006초 이내에 처리할 수 있는 획기적인 컴퓨터였다.

마크-원에서는 계산을 제어하는 데 종이테이프가 쓰인데 비해 에니악에서는 배선판이 쓰였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계산순서를 지령하는 일련의 명령은 그 대상인 데이터와는 별도로 주어졌다.

프로그램을 배선판에 일일이 배선하는 외부 프로그램 방식이었으므로, 에니악에서는 작업에 따라 배선판을 교체해야만

하였다. 그 뒤 에니악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J. 노이만이 기억장치에 컴퓨터의 명령이나 데이터를 모두 기억시키는 프로그램 내장방식을 제안하였다. 1949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이 프로그램 내장방식을 채택하여 세계 최초로 내부기억장치가 있는 에드삭(EDSAC)을 개발하였고, 미국에서는 1952년 전자식 프로그램 내장방식인 에드박(EDVAC)을 만들었다.

또한 1951년 유니박-원(UNIVAC-Ⅰ)을 만들어 상품화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이다.

이용태lyt7509  2007-11-19 19:01  

http://kr.ks.yahoo.com/service/ques_reply/ques_view.html?dnum=KAC&qnum=5646346 




 

2004 - 제1회 세계 헌혈자의 날
6월 14일은 세계헌혈자의 날

각종 기념일이 셀 수 없이 많다. 6월만 해도 6일 현충일, 14일 세계헌혈자의 날, 기념일은 아니지만 절기상으로 5일이 망종, 21일이 하지, 25일이 6·25사변일이다.
오늘 여기서 언급하고자하는 기념일은 다름아닌 6월14일의 제6회째인 세계 헌혈자의 날이다.

헌혈자들의 사기앙양은 물론 생명이나 다름없는 혈액의 중요성과 헌혈에 대한 이해와 동기부여를 통해 원할한

혈액수급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제정된 날이다.
이 날을 세계 헌혈자의 날로 제정한 이유는 이렇다. 헌혈운동 관계기관(국제적십자사연맹, 세계보건기구,

국제헌혈자조직연맹, 국제수혈학회)이 2004년 제정한 세계 헌혈자의 날 축제로 ABO혈액형을 발견하여

노벨상을 수상한 칼 랜드스타이너 박사의 탄생일인 6월14일을 기념하여 제정했다.
세계 헌혈자의 날은 전 세계적으로 매혈을 지양하고 자신의 혈액을 무상으로 기증하여 생명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모든 혈자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날이다.
이 제6회 세계 헌혈자의 날엔 3가지 이벤트 행사가 진행된다. 첫 째는 1~14일까지 자신의 홈페이지나 까페,

블로그에 홍보하는 헌혈홍보 달인과 두 번째 헌혈상식왕, 세번째 헌혈서포터 등이다.
참여를 희망하는 사람은 혈액관리본부(www.bloodinfo.net)에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세계 헌혈자의 날 기념행사를

클릭하면 된다. 헌혈에 대한 관심과 실제 헌혈에 동참하고 계시는 시민들께서 많이 참여하셔서 이날의 의미를

깊이 되세기고 주위에 헌혈문화를 널리 파급시키는 역할에 동참하면 어떨까. 시민여러분의 적극적인 동참을 기대한다.

손홍식 시민기자 guinness1808@naver.com  광주드림 2009-06-09 07:00:00

http://gjdream.com/v2/simin/view.html?news_type=101&uid=403282 

 

2003 - 파리 에어쇼 개막, 콩코드기 고별비행

프랑스 파리 에어쇼가 이라크전을 둘러싼 갈등으로 미국의 참가가 저조한 가운데 개막됐다.
14일(현지시간) 막을 연 45회 파리 에어쇼에는 40여 개국이 참가해 항공기 200여 대 를 전시했지만

미국의 참여율이 저조해 행사 규모는 전보다 축소됐다.
이라크전 반대에 앞장섰던 프랑스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에 참여하지 말도록 미국 국방부가 암암리에 기업들에

압력을 넣었다는 것이 워싱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 영향으로 지난 2001년 350개에 달했던 미국 참여업체가

이번 전시회에는 183개로 대폭 감소했다.
세계 최대 군수업체인 록히드마틴은 회장과 CEO가 참석할 수 없다고 밝혔고 보잉사도 경비절감 차원에서 대표단을

예전 절반 규모로 축소 했다. 이번 에어쇼에서는 콩코드기의 고별비행도 있었다.
지난달 콩코드기 5대의 운항을 완전 중단한 에어프랑스는 이번 에어쇼에서 초음속 항공기 콩코드를 마지막 전시비행했다. 이번 비행을 마지막으로 에어프랑스 소속 이 콩코드기는 우주항공박물관에 기증된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개막식에 참석해 30년에 걸친 초음속 여객기 시대의 문을 닫는 콩코드 항공기의

고별 비행에 경의를 표했다.

매일경제신문,2003.6.16 -스마트무인기 기술개발사업단
http://www.smart-uav.re.kr/information/news_view.htm?uid=311&page=39&selected_key=&key_field=

 

콩코드기 연혁

1969.03.02 - 콩코드기 첫 시험비행 성공 (프랑스)

1969.10.01 - 초음속 비행에 성공

1970.11.04 - 102번째 시험비행에서 마하 2(시속 2천 1백55 km)의 굉속을 기록

1976.01.21 - 상업운항을 개시

1979          - 콩코드기 생산 중단

2000.07.25 - 파리 북부지역에 추락 사고 (113명 사망)

2003.06.14 - 파리 에어쇼 개막-콩코드기 고별비행

2003.10.23 - 마지막 상업비행 (런던-뉴욕)

2003.10.24 - 마지막 상업비행(귀항)(뉴욕-런던)

2003.11.26 - 콩코드기 마지막 퇴역비행 (히드로공항-필턴비행장)

 

2000 -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8.15 고향방문 등 5개항 합의 서명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 14일 오후 김대통령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에서

2차 단독 정상회담을 갖고 5개항의 남북공동선언을 채택, 서명했다. 김위원장은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답방하기로 했다.

두 정상은 오는 8월 15일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친척의 방문단을 상호 교환하고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로 합의했으며, 이를 공동선언에 담았다.

두 정상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해 빠른 시일안에 남북 당국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두 정상은 이날 오후 3시부터 한 차례 휴식을 취해가며 오후 6시50분까지 마라톤 회담을 한 끝에 이같이 합의했으며

김대통령 주최의 만찬을 끝내고 밤 11시20분에 역사적인 공동선언 합의문에 서명했다.

단독회담에는 남측에서 임동원 대통령 특별보좌관, 황원탁 외교안보수석, 이기호 경제수석이,

북측에선 김용순 아태평화위원장이 각각 배석했다.

공동선언문은 1.남북통일 자주적으로 2.통일방안 공통성 인정 3.이산가족-장기수 해결 4.각분야 교류 활성화

5.당국간 대화 조속개최 등 5개항이었다. 

 

1994 - 경부고속철도 차량도입계약체결

1994년 6월 14일, 경부고속철도 차량도입계약을 정식으로 체결 하였습니다.
박유광 한국고속철도공단 이사장은 피에르 빌저 프랑스 GEC알스톰그룹 회장과, 21억160만달러의 경부고속철도

차량도입계약을 정식 체결함으로써, 우리나라도 고속철도 시대로 접어들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koreandb@emp.. 
04.10.22 18:21

http://ask.nate.com/knowhow/view.html?num=56909

- '자유센터'                                            - '올림픽 주경기장'


1986 - 건축가 김수근(金壽根) 사망

김수근 [, 1931.2.20~1986.6.14]

건축가. 세례명은 김바오로. 서울 출생. 1950년 경기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진학하였으나

6·25를 맞아 2년 만에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예술대학 미술학부 건축과에 입학, 신건축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재학중에는 ‘마쓰다·히라다(松田平田)건축설계사무소’에 나가 건축실무를 배우기도 하였다. 1958년 대학을 졸업한 뒤에

동경대학대학원 도시공학과의 다카야마연구실(高山英華硏究室)에서 공부하여 1960년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이어 박사과정도 수료하였다.

1959년 동경예술대학 건축과를 졸업한 직후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모집에 응모하여 17점 가운데 일등으로 당선,

한국건축계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朴春嗚·康炳基·鄭炯·鄭鍾泰 합작). 1961년 김수근건축연구소를 개소하는 한편,

홍익대학 건축미술과에 전임강사로 취임하였다.

5·16 후에 〈워커힐 힐탑바〉에서 대담하고 상징적인 구조를 표현하여 개성 있는 작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국내건축계는 아직 여명기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이어 1960년대를 장식하는 〈자유센터〉·〈오양빌딩〉(1964), 〈정동문화방송사옥〉(1965), 〈타워호텔〉(1967),

〈한국일보사옥〉·〈홍릉과학기술연구소〉(1969)를 잇달아 설계, 그의 성가를 높였다. 또한, 〈국립부여박물관〉(1967)에서는 전통문제를 불러일으켜 건축이 사회문제의 한 장르가 되는 부수적 효과를 얻어내기도 하였다.

그의 건축활동은 1966년 월간잡지 ≪공간≫을 창간하면서 예술 전반으로 확대되었고, 불모지였던 건축언론 창달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시기에 대표적 작품의 하나인 〈공간사옥〉(1977)과 〈마산성당〉(1979) 등을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을 설계하여 세계적인 건축가로서 부각되었고, 해외 언론매체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뒤 그의 영역은 해외로 확대되어 일본·미국·이란·수단·인도·카타르·말레이시아에까지 작품을 세울 수 있었다.

또한, 이즈음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서울올림픽대회 시설의 중요시설들도 설계하였다. 1980년대 그의 파트너십이

활성화되면서 그는 또다른 대규모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82 - 아르헨티나, 포클랜드전쟁에서 영국에 항복

1982년 6월 14일, 포클랜드를 점령하고 있던 아르헨티나군이 영국군의 우세한 군사력에 밀려 항복했다.

이로써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점령한 지 꼭 74일 만에 포클랜드 전쟁이 종결됐다.
전쟁결과 아르헨티나는 712명의 사망자와 1만1천명의 포로를 냈고 영국은 256명의 전사자를 냈다.

전쟁 전문가들은 영국군의 승인을 현대적인 무기보다 우수한 인적자원에서 찾았다.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를 전격 침공하자 영국의 대처수상은 즉각 100여척의 함선을 12,800km 떨어진

포클랜드 섬으로 파견했다. 4월 5일 영국을 출발한 영국군은 4월 26일, 포클랜드섬의 동남쪽 1,500km에 있는

남조지아섬을 탈환했고, 5월 15일에는 포클랜드의 작은 섬 페블섬을 점령했다. 영국군은 포클랜드의 요충지 포크스탠리를 점령하기 전 반대 방향의 산카를로스항을 첫 상륙지로 결정했다. 산카를로스항으로 영국군이 상륙할 것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불과 120여명만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5월 21일 새벽 4시, 영국군은 함포사격을 개시하며 산카를로스항의 아르헨티나 군관측소와 대공 및 해안포대를

단숨에 무력화시켰다. 영국을 떠난 지 46일 만에 육지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5월 27일까지 교두보 확대를 완료한

영국군은 최종목표인 포트스탠리를 향해 돌진했다. 5월 28일 다윈 및 구스그린지역에서,

6월 12일과 13일 이틀동안 포트스탠리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은 마침내 이날 아르헨티나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영국을 지원, 남미에서의 신뢰도에 금이 갔으며, 아르헨티나의 갈티에리군사정부도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1967 - 미국, 금성 탐색선 마리너 5호 발사

미국의 금성 탐사선, 244 kg
활동 ; 1967년 6월 14일 - 1967년 11월
마리너 5호는 베네라 4호보다 하루 늦은 1967년 10월 19일에 금성에 도착하였다.

마리너 5호는 금성 상공 3,900 km 까지 도달하여 금성의 자기장을 탐사하였다.

또한 금성의 대기의 85 내지 99 %가 이산화탄소라는 것도 밝혀냈다.

민경기  2008-05-28 18:57:13 -항공우주박물관 

http://aerospacemuseum.co.kr/bbs

 

1963 - 소련, 보스토크-5호 발사

보스토크(Vostok)는 구소련이 발사한 세계 최초의 1인승 인공위성인데, 러시아어로 '동방()'이란 뜻이다.

제1호는 본체의 무게가 4.725t으로 1961년 4월 12일 Y.A.가가린 소령이 탑승하여 사상 최초의 인간 우주비행을 실현하였다. 그후 6호까지 발사되었다. 제3호와 제4호는 하루 사이를 두고 발사되어, 가장 접근하였을 때 두 위성의 간격은 5km로서

최초의 그룹 비행을 하였다.

제5호는 우주비행 최장기록을 세웠고, 제6호는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인 V.V.테레슈코바가 탑승하였다. 1, 2호에 의하여 최초의 인간 우주비행을 시작하였고, 3, 4호와 5, 6호에 의하여 랑데부계획의 예비실험으로서

그룹 비행과 장시간 비행을 하였다. - naver

 

미국이 최초로 지구궤도를 돌 수 있었던 것은 아틀라스 로켓이 완성된 뒤였다. 존 글렌은 1962년 2월 20일 프렌드십(우정)을 타고 4시간 55분 동안 지구를 3바퀴 돌면서 러시아의 뒤를 좇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보스토크는 미국의 추격을 뿌리치고 이미 멀찌감치 도망갔다. 1961년 8월 6일 우주비행사 게르만

티토프를 태운 보스토크 2호는 25시간 18분 동안 지구를 16번이나 돌았다. 그는 우주에서 하루를 보낸 첫 우주인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의 우주생활은 그리 아름답지는 못했다. 우주멀미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었고, 히터가 고장나

실내온도가 6℃로 내려가는 바람에 벌벌 떨면서 지내야 했다. 하여간 티토프의 우주여행으로 힘을 과시한

러시아는 몇일 뒤인 8월 13일 동독에게 압력을 넣어 베를린 장벽을 쌓도록 했다.
1962년 8월 니콜라예프가 탄 보스토크 3호와 포포비치가 탄 보스토크 4호는 첫 우주랑데부를 시도했다. 둘 사이의 거리는 5km도 채 되지 않았다. 보스토크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보스토크 5호와 6호의 랑데부. 보스토크 5호에

탑승한 발레리 비코프스키는 무려 1백19시간 동안 우주에 머물렀다. 보스토크 6호에 탑승한 사람은

최초의 여자 우주비행사가 된 발렌티나 테레슈코바(26세)였다.

홍대길 기자 heart@donga.com 1999년 07월 01일


http://www.dongascience.com/info/contents.asp?mode=view&article_no=20071107084440 


 

1950 - 한국, 유네스코에 가입

한국은 1950년 6월 14일 제5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정식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우리 나라는 1950년 6월 14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제 5차 총회에서 유네스코에 가입했고, 유네스코 헌장이 권고하는 대로 1954년 1월 30일 유네스코한국위원회를 설립했다.
1950년 6월 14일로서 한국전이 발발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유네스코 활동은 전쟁 후로 미루어졌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서도 유네스코 본부는 1950년 8월 29일에 한국에 대한 긴급원조를 결의하여, 전란 속에서도 대한문교서적인쇄공장 설립, 한국 외국어학원 설립, 한국교육재건을 위한 교육조사단 파견 등 전쟁복구를 도와줌으로써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대통령령에 의하여 1954년 1월 30일 한국 위원회가 창설되었다
유네스코는 인류의 지적·도덕적 연대에 의해서 지속적인 세계평화를 구축한다는 이념 아래 만들어진 국제기구이기 때문에 각 회원국 내 각계의 지식인과 지도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력이 필요했고, 따라서 유엔 기구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창설 당시부터 국가 위원회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우리 위원회는 이러한 배경에 따라 우리 나라의 유네스코 활동에 관한 정책건의, 사업기획과 집행,

국제협력, 기타 정보교류 활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1954에 창설되었다.

http://k.daum.net/qna/view.html?qid=2ejlL


 

한국, 유네스코 가입과 활동의 시작

유네스코가 창설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국내의 교육, 과학, 문화계 인사들은 유네스코 헌장에 명시되어 있는

유네스코의 숭고한 이념과 원리에 고무되었고, 유네스코를 통한 국제평화의 증진을 위한 노력에 우리나라도 참여하자는

운동을 전개했다.
정부는 1949년 7월 당시 대통령 특사 겸 유엔 대표 단장이었던 조병옥 박사로 하여금 주미 유엔연락관에게

유네스코 가입신청서를 전달하게 했고, 이는 다시 오스트레일리아를 통해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 제출,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서 1950년 2월 8일 신청안이 통과되었다. 당시 한국이 유엔 회원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한국의

유네스코 가입안은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심의와 유네스코 집행위원회 토의를 거쳐, 1950년 5월 22일부터 6월 17일까지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개최된 제5차 유네스코 총회 안건에 인도네시아 및 요르단의 가입안과 함께 상정되었다.1)
한국의 가입과 관련해 제5차 유네스코 총회에서는 논란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이라크, 필리핀 등은 3개국 가입에 대해 지지선언을 했다. 특히 이라크 대표는 이들 3개국이 유엔에 가입하지 못한 것은 특정 국가의 거부권 행사에 그 책임이 있으므로, 유네스코는 이에 구속받지 않고

이들 국가의 가입을 꼭 승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편 버마(현 미얀마)는 한국의 가입 문제에 대해 중립을 지키겠다고 하면서 3개국의 가입안을 개별 표결에 붙일 것을 제안했으며, 유고슬라비아 대표는 한국의 가입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자유중국, 파키스탄 대표의 지지 연설이 잇따랐고, 결국 거수표결에서 32개 참석 회원국 가운데 압도적인 다수결(찬성 27, 반대 1, 기권 4)로 한국의 유네스코 가입이 확정되었다. 이 총회 결의에 따라 우리나라는 1950년 6월 14일자로 유네스코의 55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가입 승인과 함께 이 총회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했던 공진항 당시 주불공사관 공사는 정식 대표로서 총회에서 가입인사 연설을 했다.2)




유네스코에 가입한지 불과 2주일도 못되어 6·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교육 과학 문화 내 모든 활동이 위축되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한국 정부는 유네스코 활동을 조속히 전개하고자 한국위원회 설치에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 돌발로 연기되었던 유네스코 헌장에 대한 국회의 인준은 부산 피난정부 중 백두진 국무총리가 국회에 동의를 요청,

1952년 11월 10일 제2대 국회 제17차 본회의에서 유네스코헌장 준수서약을 만장일치로 가결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국회 인준 이후 교육·과학·문화계 인사들은 유네스코 헌장 제7조에 따라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설치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우방 유네스코 회원국으로부터 국가위원회의 조직, 기능 및 활동에 관한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검토했다.

또한 유진오 박사를 중심으로 몇몇 법률학자와 관계 인사들로 하여금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성격, 조직, 기능 및 활동을 규정짓는 설치법의 초안을 작성케 했다. 그 결과 1953년 7월 6일 대통령령 제 801호로 한국유네스코위원회 설치령을 공표해 유네스코에 가입한 지 3년 만에 국가위원회를 설치할 수 있는 법적근거를 마련했으며,

1954년 1월 30일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창립총회를 가짐으로써 공식적인 유네스코 활동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국내 교육·과학·문화 단체의 대표자들과 학자, 전문가들로 구성된 60명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초대 위원들은 문교부장관의 임명을 받았다. 초대 위원장에는 당시의 문교부장관이었던 김법린 박사가 취임했고, 초대 사무총장에는

정대위 박사가 임명되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창립 시기부터 전쟁의 고통과 아픔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국내 유네스코 활동의 개시 및 정착에 커다란 장애요인이 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평화와 발전을 지향하는 유네스코의 이상과 이념을 절실히 이해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유네스코 활동이 굳건히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 되기도 했다.
창립 이후 다양하고 활발한 유네스코 활동을 전개했던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1963년 4월 20일 ‘유네스코 활동에 관한

 법률’이 법률 제1335호로 지정되면서, 제정 조직 및 기능에 있어 보다

강력한 법적 뒷받침을 받고 향후 발전을 기약하게 되었다.

 

1) 당시 유네스코 헌장 가입 규정에 따르면 가입 희망 국가가 유엔 회원국일 경우 가입 신청을 유네스코 본부에 제출하게끔 되어 있었으나, 유엔 회원국가가 아닌 경우는 유엔의 경제사회이사회의 심의와 유네스코 집행위원회의 토의, 집행이사회를 통한 유네스코 총회의 안건 상정, 총회 출석회원국 2/3 이상의 표결에 따른 가입 승인을 거치도록 되어 있었다.
2) 표결 직후 있었던 가입연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장님, 각 국 대표여러분. 우리나라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유네스코 가입을 찬성 투표하여 주신 대표들에게 충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유네스코의 숭고한 이념을 실현시켜 나감에 있어 모든 유네스코 회원국과 상호 협조하여 헌신할 것을 다짐합니다. 감사합니다.(Mr. President, ladies and gentle men, I wish to express my sincere gratitude to every delegate who has voted for our country. Our country will collaborate with all your Member States in furtherance of the great ideal of UNESCO. Thank you.)



노지원(유네스코한국위원회 기획실) 2009.02.10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http://www.unesco.or.kr/front/news_center/news_center_01_view.asp?articleid=1139&cate=news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