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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의 사건 06.16

오늘의 사건 06.16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2009 - 서울 시내버스 운행 60주년을 맞아 '해피버스 드림프로젝트' 시행

1949년 8월 16일 서울시로부터 사업면허를 받은 17개사가 총 273대의 버스로 ‘시민의 발’ 역할을 시작한

서울 시내버스가 올해로 운행 60주년을 맞았다.
시에 따르면 현재 서울시내에서 운행 중인 버스는 68개 회사 7600여 대로 60년 동안 30배 가까이 늘어났다. 하루 이용승객도 약 500만 명에 달한다. 시내버스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동안 버스를 둘러싼 많은 것이 변했다. 서울시 양인승 버스정책담당관은 “운행 초기인 1940년대만 해도 휘발유가 부족했던 탓에 목탄 버스가 승객을 태우고 다녔다”며 “이후 한국 자동차 산업의 발전에 따라 서울 시내버스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고 설명했다.
1950년대에는 지금의 쌍용자동차 전신인 하동환 공업사가 일본에서 엔진과 차체를 수입해 제작한 버스가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1970년대에는 전철처럼 승객이 마주보고 앉도록 좌석을 배치한 버스가 등장했다. 이후 고급좌석버스,

친환경 압축천연가스(CNG) 버스가 속속 도입됐고 현재는 수용인원이 일반 버스의

2배 수준인 140여 명에 달하는 굴절버스도 운행되고 있다.
요금 체계도 변했다. 시에 따르면 1949년 도입 당시 버스요금은 소형 20원, 대형 50원으로 현금으로만 내야 했다.

이후 1966년 승차권, 1976년 토큰, 1984년 회수권이 잇따라 선보였지만 1996년 선불형 교통카드가 도입된 뒤로는 모두

자취를 감췄다. 또 시가 직접 운영하는 시영버스와 승객들을 안내하고 승차권을 받았던

버스안내양 역시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시는 버스 운행 60주년을 맞아 승객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는 ‘해피버스 드림프로젝트’를 시행한다.

1989년 이후 자취를 감춘 버스안내양을 16일 하루 동안 배치할 예정이다. 시민들은 16일 오전 6시 30분부터 오전 11시까지 101번, 150∼153번, 160번, 410번, 500번, 507번, 600번, 660번 등 시내 11개 노선에서

추억의 버스안내양을 만나볼 수 있다. 또 첫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을 위해 빵과 음료수 각 3만 개를 제공하는 행사도

같은 날 380개 노선 첫차에서 열린다. 서울시 김상범 도시교통본부장은 “60년 동안 시내버스를 사랑해 준

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동아닷컴 2009-06-16 02:56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6160107&top20=1 

 

2007 - 북송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사망 

이인모 [1917.8.24~2007.6.16]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가 6월 16일 사망했다.
이 씨는 북송된 후 ‘신념과 의지의 화신' '통일의 영웅’ 등으로 일컬어졌고 김일성 주석은 자신의 생일날 병원에 입원 중인

이 씨를 찾아 격려하고 노동당 당원증을 수여했으며 ‘김일성 훈장’ ‘영웅칭호’ ‘국기훈장 1급’도 수여했다.

양강도 김형직군에 있는 모교인 파발인민학교는 이인모 인민학교로 이름을 바꿔달았다.
1917년 함경남도 풍산군 안산면 내중리에서 태어나 6.25 발발하면서 인민군 문화부 소속 일선 종군기자로

낙동강 전선으로 남하했다.
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로가 막히자 지리산으로 입산 경남도당 선전부장 대리로 일하다가

 52년 지리산 대성골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징역 7년을 선고받은 그는 59년 1월 만기 출소했지만 61년 6월 부산에서 지하당 활동 혐의로 다시 구속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76년 만기가 지났지만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호감호 처분으로 88년 10월까지 복역했다. 34년간 옥살이를 했다.

http://www.voiceofpeople.org/plus/A00000077479.html

 

북송 비전향장기수 리인모(이인모)씨 사망

1993년 3월 판문점을 거쳐 북송된 비전향장기수리인모(89)씨가 16일 사망했다.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내각은 17일 공동으로 "전  조선인민군 종군기자이고

비전향장기수인 리인모 동지가 남조선의 감옥에서 당한 고문의 후과(후유증)로 16일 7시에 89살을 일기로 애석하게

서거했다"고 부고를 냈다고북한방송이 전했다.
부고는 "리인모 동지는 조국의 통일과 주체혁명 위업의 완성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견결히 싸운 신념과 의지의

화신이고 불굴의 통일애국투사"라고  덧붙였다.
리씨의 시신은 인민문화궁전에 안치됐으며 17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조문객을 받은 뒤

18일 오전 8시 발인할 예정이다.
북한은 리씨의 장례를 '인민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하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과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각각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하고,  김영일 내각총리,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 고위 당.정

간부 57명이 참여하는 장의위원회를 구성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날 리씨의 빈소에 조화를 보내 애도의  뜻을  전했으며,북한 당.정.군 및 사회단체, 중앙기관,

평양 주재 각국 대사관 관계자와 6.15 7주년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했던 해외동포 대표단이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노동신문은 이날 1면에 리씨의 부고를 게재했으며 조선중앙통신과 조선중앙방송등 북한 매체들도 잇달아 리씨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고 리인모씨는 북한군 문화부 소속 종군기자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체포돼  34년간 복역한 후 1988년 출소했으며 5년 후 '장기방북' 형식으로 북한으로 송환됐다.
북한은 북송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리씨를 위해 고위간부들이 사용하는 전용병원인 봉화진료소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1996년 5월에는 미국으로 보내 진료받도록 하기도 했다. 
리씨의 유족은 부인 김순임씨와 외동딸 리현옥씨 부부, 외손자와 손녀 각 1명씩인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
2007.6.17

 

2005 -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폐막(평양)

2004 - 김천고보 세운 영친왕 보모 최송설당 별세

 

2002 - 전화기의 발명자로 안토니오 메우치를 복권시키는 결의안이 미국 하원 통과

전화기의 발명가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Bell, Alexander Graham, 1847~1922)이 아니라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이민자 안토니오 메우치(Meucci, Antonio, 1808~1889)라는 사실을 미국 하원이 표결을 통해 마침내 인정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7일 '전화기와 관련된 역사를 새로 쓰게 됐다'며 이같이 보도하고, 이번 표결 결과에 이탈리아인들이 매우 기뻐하고 있다고 전했다.
가디언지 보도에 따르면 미국 하원은 16일 메우치가 발명해 1860년 뉴욕에서 시연됐고 당시 현지 언론에도 보도된 '텔레트로포노(Teletrofono)'가 최초의 전화기이며, 벨은 메우치의 자료를 입수해 16년 뒤에 특허를 받아낸 데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메우치 사후 113년 만에 인정했다.

그동안 벨의 자서전과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메우치의 사연을 아는 여러 세대의 이탈리아인들과 마찰을 빚어왔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메우치는 전기충격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연구하던 중 소리가 구리선을 통해 흐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본격적인 기술개발을 위해 1850년 뉴욕으로 향한다.
그는 특히 몸이 마비된 아내를 위해 침실과 자신의 작업실을 연결하는 시스템을 개발, 1860년에 공개 시연회를 열었다.

이 기계를 보다 정교하게 고친 그는 영구 특허신청에 필요한 250달러가 없어 1871년 1년짜리 임시 특허를 신청했다.

그러나 그는 제품 상용화를 위한 재정적 후원자를 찾지 못했으며, 3년 뒤에는 임시 특허조차 갱신하지 못했다.
그러자 메우치와 연구실을 함께 사용하던 벨은 1876년 특허를 내고 웨스턴 유니언 전신회사와 계약을 맺어 큰 돈을 벌며

유명인사가 됐다. 메우치는 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 재판은 승리를 눈앞에 둔 메우치가 1889년 숨지면서 중단됐다. - 부산일보 2002.6.17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오른쪽)이 1998년 6월 16일 오전 임진각에

같이 북으로 갈 소떼와 함께 보도진들에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98 - 현대 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소떼와 함께 방북하다.1998년 오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이른바 '통일 소' 5백 마리와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
분단 이후 민간인이 정부관리의 동행 없이 판문점을 통과하기는 처음이었다.
정주영 씨는 북으로 출발하기 전 '평화의 집'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번 방북이 개인의 고향 방문이 아니라

남북한 사이에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주영 씨는 7박 8일 동안의 방북 기간에 고향인 강원도 통천군 노상리를 방문해 친척들을 만난 뒤

대북협력사업 지역인 금강산과 원산 등을 둘러봤다.

[녹취:북한 중앙방송]
정 씨는 또 금강산 관광사업과 남북한 합작 자동차공장 설립 등의 사안에 대해 북한 측과 합의를 하는 등

남한의 대북 창구 역할도 해냈다.

 

1998 -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소떼와 함께 방북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9년 6월 16일 북한에 제공할 소 1천마리중 1차분인 소 5백마리를 실은 트럭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다. 정주영 회장은 이날 오후 개성을 거쳐 평양에 도착,7박8일간의 방북일정에 들어갔다. 분단 이후 민간차원의 합의를 통해 군사구역인 판문점을 개방, 민간인의 북한방문이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새로 개통된 문산-판문점간 통일대교를 지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도착,평화의 집에서 방북기자회견을 가진 뒤

판문점중립국감독위 회의실을 지나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정주영 회장 초청 단체인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송호경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판문점 북측지역 판문각에 나와 정회장을 영접했다.

이번 정주영 회장의 방북은 북한당국이 지난 1994년 남북 정상회담 실무회담을 제외하고

김영삼 정부기간 굳게 닫아온 판문점을 민간교류차원에서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조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소떼몰고 방북(1998.6.16~23)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98년 6월 16일 한우 500마리를 실은 트럭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방북하였다.

판문점을 통해 민간인의 북한 방문이 이루어진 것은 분단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회장은 아태평화위원장인 김용순 노동당 대남담당비서 등과 경협방안 및 금강산 관광문제를 협의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정회장은 10월 27일 두 번째로 한우 501마리를 북한에 지원하였다. KOREASCOPE


http://210.121.38.2/ks/kor/main/hanbandoFocus/07/sn7-4.jsp

 

1997 - 금융감독원 신설 발표  

`북청사자놀음` 예능보유자 변영호씨

 

1996 - `북청사자놀음` 예능보유자 변영호씨 별세

중요 무형문화재 제15호 북청사자놀음 보유자 변영호씨가 1996년 6월 16일 별세했다. 변영호씨는 김수석-동성영-이근화선씨와

함께 `북청사자놀음` 제1세대로서 이 놀이의 명맥을 이어온 예능인이었다.

1907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난 그의 원래 직업은 가구를 짜는 목수였다. 북청사자놀음은 어릴 적 동네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었다. 그의 인생이 바뀐 것은 1·4후퇴 때 월남하면서 월남한 북청 사람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북청구민회에서

그는 사자탈 제작과 퉁소연주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 자칫 끊어질뻔 했던 북청사자놀음을 전승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변씨는 지난 1970년 7월 북청사자놀음 기능 보유자로 인정받았으며, 병세가 악화되기 직전인 1995년 가을까지도

미수의 나이에도 불구, 함경남도 북청민속예술보존회에 날마다 출근하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 조선

 

1992 - 미국·러시아 핵무기 3분의2 폐기 합의(1992)
1992년 오늘!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을 공식 방문해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정상은 회담에서 2003년까지 두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 가운데 3분의 2를 폐기하기로 합의했다.
이 같은 핵감축은 미국과 구 소련이 15년여의 오랜 협상 끝에 1년 전인 1991년 타결한 스타트(START),

즉 전략무기감축협정 합의수준에서 또 다시 절반 이상을 줄이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와 함께 두 정상은 북한이 국제원자력 기구의 핵사찰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YTN


1992 - 미소정상회담,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I) 합의

부시 미국 대통령과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1992년 6월 16일 가진 1차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현재 보유중인 장거리 전략핵무기를 2003년까지 3분의 1만 남기고 모두 폐기한다는데 합의했다. 이같은 핵감축은 미국과 구 소련이 15년여의 오랜 협상끝에 1991년 타결한

전략무기 감축협정(START) 합의수준에서 또 다시 절반 이상을 줄이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START에서 정한 양국의 전략핵탄두 보유 상한선은 미국 9천8백86개 소련 1만2백37개였는데 양국 정상은 이번 회담에서 보유 상한선을 미국 3천5백개, 러시아 3천개로 다시 대폭 하향 조정했다. 양국 정상은 또 가장 가공할 무기인 중형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과 다탄두 ICBM을 폐기키로 합의했으며 이와함께 테러 위험 국가의 핵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인류의 안전을 확보하는

범지구방어망 구축작업을 함께 연구해 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때 합의된 전략핵무기 감축은 두 단계로 나눠 이뤄졌는데 1단계에서 양측은 보유 핵무기를 ICBM 1천2백50기 중형미사일 6백50기 잠수함 발사 미사일 2천2백50기 등 3천8백∼4천2백50개 수준으로 줄이도록 했다. 2단계에서 양측은 보유상한선이 1천7백50개로

제한되는 잠수함 발사 미사일(SIBM)을 포함, 각각 3천∼3천5백개의 핵탄두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폐기하도록 했다. -조선


 

1989 - 바둑 기사 조치훈, 혼인보 획득. 이후 혼인보 10연패의 대기록을 세운다.

조치훈(趙治勳, 1956년6월 20일 - )은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프로 바둑 기사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6살때 일본으로

건너간 후 지금까지 일본에서 활동중이다.

만 11년 8개월로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기록을 수립하였고, 현재 일본 최다 통산 타이틀 획득(71회) 기록을 가지고 있다.

기풍은 승부에 집착하여 항상 최선의 한 수를 놓기 위해 장고하는 스타일이나, 속기의 명수로도 알려져 있다.

약력

- 1962년 6세때 일본으로 건너감.

- 1968년 일본기원에 입단. (당시 최연소 기록)

- 1975년 제12기 프로십걸전 우승. 최초의 빅 타이틀.

- 1980년 명인전 우승. 이후 명인전을 5연패하여 최초의 명예명인(名譽名人) 자격 획득.

- 1983년 기성전, 명인전, 본인방전에 우승하여 대삼관(大三冠) 달성.

- 1987년 천원전에 우승하여 최초의 그랜드슬램 달성.

- 1989년 본인방 탈환. 이후 10연패하여 제25대 본인방 자격 획득.

- 1991년 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우승.

- 1997년 두번째 대삼관 달성.

- 2003년 삼성화재배 세계오픈 우승.

- 2005년-2007년 십단전 3연패 달성.

- 2007년 NHK배 우승. (통산 70회 우승)

 

1989 - 조치훈 명인, 본인방 획득

1984 - 캐나다 수상에 존, 터너 선출

 

1983 - 소련, 안드로포프 국가원수로 선출

1983 - 교황 요한바오로2세 모국 폴란드 방문

1980 - KBS TV과외 `가정고교방송` 방영개시  

 

1977 - 한국의 이론물리학자 이휘소(, 1935~1977) 사망

1977 - 핵물리학자 이휘소 박사 의문사
1977 - 물리학자 이휘소 의문사
1977년 6월 16일 세계적인 물리학자 이휘소가 미국 콜로라도 주 국립과학연구소에서 열린 초청강연에 참석차 가는 도중

의문의 자동차 사고를 당해 42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휘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 제조책임자였던 핵물리학자

오펜하이머아인슈타인·페르미보다 더 뛰어난 과학자로 극찬한 한국 출신의 물리학자였다. 주로 소립자물리학쿼크와 참 이론, 약작용과 전기장·자기장 작용을 통합하는 게이지통일장이론을 다루면서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활동했다. 사고 당시 이휘소는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과 더불어 시작된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

독자개발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소문도 나돌아 의문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 브리태니커

 

1977 - 로켓연구가 브라운 박사 사망(1977)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장거리 탄도미사일 'V-2'를 발명한 독일 출신 로켓 연구가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박사가 1977년 오늘 65살을 일기로 사망했다.
브라운 박사는 나치 독일의 몰락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1950년부터 미국 육군병기공장의 유도탄 연구의 기술부 부장으로서

장거리로켓을 연구했다.
1960년 이후에는 나사(NASA), 즉 미국항공우주국에 소속돼 아폴로 계획을 위시한 우주개발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으로 선출된 브레즈네프. 

 

1977 - 브레즈네프, 소련 국가원수로 선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가 1977년 6월 16일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에 선임됐다.

브레즈네프는 이로써 당과 국가의 양 쪽을 대표하는 자리에 올라 스탈린 이후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됐다.

소련은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를 해임한 이래 개인지배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당 서기장과 수상,

최고회의 의장을 각각 분리, 트로이카 방식에 의한 집단지도체체를 유지해 왔다.

브레즈네프는 1964년부터 사망한 1982년까지 스탈인 이후 최장기인 18년 동안을

소련의 지도자로 군림, 국제긴장 완화와 평화공존 이른바 `브레즈네프 노선`을 추진해 왔다.  

1976년 6월 16일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교외에 있는 흑인 거주구역 소웨토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1976 - 남아공 소웨토에서 대규모 흑인폭동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교외에 있는 흑인거주지역 소웨토에서 1976년 6월 16일 폭동이 일어났다.

이날 백인정권의 언어정책에 항의하는 흑인학생 약1만여명이 경찰 300명과 충돌, 최소한 6명이 사망했고 14명이 부상했다.
소웨토봉기는 백인정부가 아프리칸스(네덜란드계의 현지 공용어)를 정규 교과과목으로 채택하려는 데 대해 반대시위를 벌이던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 13세 흑인소년이 사망함으로써 발생했다. 학생들은 아프리칸스로 수업을 진행하는 정부의 방침에 반발,

수주간에 걸쳐 수업을 보이콧해 왔다.
폭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1년간 남아공 전역으로 확산됐으며 이 기간중 사망자수만 575명에 달했다. 아프리카 비동맹제국과 스웨덴, 파나마 8개국은 이 사건의 원인은 남아공 인종정책에 있는 것으로 판단해 유엔안보리에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폐지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유엔안보리는 5월 19일 만장일치로 이 안을 채택했다. - 조선

 

1973 - 소련 브레즈네프 제1서기 방미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1973년 6월 16일부터 10일간 워싱턴을 방문, 닉슨 대통령과 회담했다.

닉슨 미대통령과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서기장은 18일 오전과 오후 두차례 백악관에서 의제 확정없이 제1차회담을 시작으로

24일까지 계속될 미소정상회담을 시작했다.

이번 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은 미소 핵제한 기본협정, 두 개의 통상관계의정서, 원자력평화이용을 위한 과학협정, 문화교류,

해양탐사, 농업협력, 민간항공 확장, 소득세 등 모두 9개의 협약에 조인했다. 그리고 25일 핵무기제한, 크메르평화,

양국교역증대, 유럽안보 등에 공동 노력을 기울일 것을 다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워싱턴 정상회담을 폐막했다. - 조선

 

1972 -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실무회의,본회의 의제확정, 합의문서교환

1972 - 제1회 소년체전 개막(1972)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나라도 튼튼'이라는 표어 아래, 자라나는 소년들의 지(智)·덕(德)·체(體)를 연마하기 위한

전국소년체천 제1회 대회가 1972년 오늘 개막했다.
스포츠 소년단의 창단을 겸한 1회 대회에 전국의 초등학교 5·6학년과 중학교 1·2·3학년 학생 선수 6천6백여 명이 참가해

스포츠 기량을 겨루었다.
19일까지 나흘 동안 열띤 경쟁을 편 끝에 충청남도 팀이 종합우승을 차지하고 2위는 전라북도,

3위는 경기도가 거머쥐고 모범선수단 상은 부산팀에게 돌아갔다.
대한체육회가 주관하는 소년체전은 이후 해마다 봄에 거행됐다.

 

1971 - 의료파동 발생  

시인 김수영

 

1968 - 시인 김수영 교통사고로 사망(1968)
1968년 오늘, 시인 김수영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이때 그의 나이 48살이었다.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함께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내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김수영!
당시 모더니스트들의 일반적 경향과 같이 작품에서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과 암담하고 불안한 시대사조 등을 반영했다.
그러나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을 계기로 현실참여 의식을 담은 작품을 냈다.
시집으로는 '달나라의 장난'과 '거대한 뿌리', 그리고 산문집으로 '시여 침을 뱉어라' 등을 남겼다. - YTN

 

1968 - 시인 김수영 교통사고로 사망 

시인 김수영에게 4·19는 분기점이었다. 모더니즘으로 출발해 설움·비애 등의 소시민적 정서를 표현하던 시(詩)세계가

이 때를 전후해 현실참여 쪽으로 완연히 기울었다. 물론 그 전에도 술만 마시면 자유당과 이승만을 욕했지만 아직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좌절과 미완이었지만 김수영에게 4·19는 언제나 꺼지지 않는 횃불이었다.
분단상황도 지울 수 없는 아픔이었다. 김수영 자신이 6·25 때 의용군으로 끌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났었다.

황혼무렵이면 발걸음이 명동의 전주집이나 은성 부근을 서성거렸지만 그는 언제나 원고료를 꼬박꼬박 집에 가져간

철저한 생활인이기도 했다. 한때는 양계로 가족을 부양하기도 했다.
1968년 6월 15일 늦은 밤, 김수영은 문단의 지인들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뒤 귀가하던 중 갑자기 덮친 버스에 치였다.

이튿날 오전 9시경 병원에서 숨졌다. 47세였다. - 조선

 

1967 - 브라질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실험에 성공

1966 - 장창선선수, 세계아마 레슬링대회서 금메달  

`보스토크 6호` 기내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테레슈코바 소위.

 

1963 - 테레슈코바가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우주선 보스토크 6호를 타고 보스토크 5호의

V.F.비스코프스키와 그룹 비행을 하여 지구를 48바퀴 도는, 70.8시간의 비행에 성공 

“여기는 갈매기. 기분 최고. ” 1963년 6월 16일,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가 된 발렌티나 테레슈코바(Tereshkova, Valentina V., 1937~ )(당시 26세)가 우주에서의 감동을 이렇게 전했다. 갈매기는 그녀의 호출 부호.

테레슈코바가 1인승 우주선 ‘보스토크 6호’에 몸을 싣고 하늘로 날아오른 것은 낮 12시30분이었다. 장시간의 우주여행이

남녀의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소련은 이를 위해 발레리 비코프스키 중령을 태운 ‘보스토크 5호’를 이틀 전에 발사, 그녀와 함께 비행하도록 했다. 모스크바 방송은 무중력 상태를 실연(實演)하는 그녀의 모습을 오후 3시30분부터 생중계하기도 했다. 보스토크 6호는 70시간50분 동안 지구를

48바퀴 선회한 뒤 19일 오전 11시20분쯤 지구에 착륙했고, 보스토크 5호는 81바퀴를 돌며 119시간6분 동안 우주에

머무는 신기록을 달성한 뒤 같은 날 오후 2시쯤 지구로 돌아왔다.

흐루시초프는 “여성은 약하지 않다”며 소련에서 6번째, 세계에서 10번째의 우주비행사가 된 테레슈코바의 장도를 축하해주었다.

 

1963 - 최초의 여자 우주비행사 탄생
1963년 6월 16일 소련 바이코니르에서 세계 최초의 여자 우주비행사인 발렌티나 테레슈코바가 탑승한 보스토크 6호가 발사되었다. 보스트크 6호는 71시간 동안 지구를 48회 선회한 뒤 6월 19일 지상에 착륙했다. 테레슈코바는 야로슬라블에 있는 타이어 공장과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다. 그녀는 조종사 훈련을 받지는 않았지만, 취미로 낙하산을 탔었기 때문에 1961년 우주비행사 계획에 선발되었다. 같은 해 11월 3일 테레슈코바는 우주비행사인 A. G. 니콜라예프와 결혼했다. 1962년 소련 최고회의의 현역 의원, 1968년 소련 여성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그녀는 레닌 훈장을 2회 받기도 했다.

 

1963 - 소련발렌티나 테레슈코바보스토크 6호를 타고 여성 최초로 우주비행을 하다.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러시아어: Валенти́на Влади́мировна Терешко́ва 1937년 3월 6일~ )은

러시아의 '세계최초 여성우주인'이며, 아울러 '세계 최연소 여성우주인'의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1963년 6월 16일~6월 19일까지 V.F. 비코프스키와 함께 보스토크 6호를 타고 70시간 50분 동안 지구를 45바퀴 돌았다.

즉 88분에 지구를 한 바퀴씩 돌았으며, 그 궤도의 원지점은 약 209km였고, 근지점은 약 179km였다.

1963년 11월 3일 우주비행사 A.G. 니콜라예프와 결혼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1960 - 일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방문 취소

1960년 6월 16일 일본정부가 강력한 좌익계 시위자들에게 굴복하고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신변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을 연기할 것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좌파 사회당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일 연기발표에 즉각적인 승리의 반응을 보여줬다.

전날 15일에 미-일 신안전보장조약과 관련해 발생한 유혈충돌에서 여학생의 희생에 의한 결과였다.

이 때문에 당초 일본을 방문한 후 22일경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3일 앞당겨 19일 한국에 방문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극동 친선방문의 마지막 목적지인 하와이 호놀룰루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도착, 9일간의 일정을 마쳤다.

이번 순방 기간 중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대만에서 우호적이고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며칠간 아시아지역에서 공산주의의 존재가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중국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문 수시간전에 대만 앞바다의 섬들에 공격을 가했다.

 

1956 - 적십자사, 납북자 신고 접수

1956 - 국내 최초 TV방영 시작

1954 - 제5회 월드컵 스위스서 개막 

 

1954 - 1954년 축구 월드컵이 개막하다

1954년 FIFA 월드컵(1954 FIFA World Cup, Championnat du Monde de Football 1954)은 제5회 FIFA 월드컵으로 에서 1954년 6월 16일부터 7월 4일까지 스위스에서 열렸다. 제5회 대회가 열린 이 해는 국제 축구 연맹 창설 5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대회를 관장하는 국제 축구 연맹 본부가 있는 국가에서 열려야 한다는 공감대 아래 1946년

 스위스가 개최국으로 선정되었다. 1950년 FIFA 월드컵이 세계인의 축제라는 가능성을 보여준 반면 이 대회부터는 TV 중계, 기념 주화 발매, 그룹 배정 제도 등 실질적으로 제도화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대회이다.

 

1954 - 고 딘 디엠, 베트남 수상에 취임

 

1954 - 아일랜드더블린에서 블룸즈데이(Bloomsday) 행사 시작

블룸즈데이(Bloomsday), 아일랜드더블린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를 기리는 날

블룸즈데이(Bloomsday)는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의 배경이 되는 날인

1904년 6월 16일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소설 《율리시스》는 1904년 6월 16일 하루동안에 주인공 리오폴드 블룸과 그의 아내 마리언 블룸, 예술가를 꿈꾸는 청년 지식인 스티븐 데덜러스 라는 세명의 인물이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겪는 하루동안의 18가지 에피소드를 다루었는데

제임스 조이스의 팬들과 문학가들은 매년 6월 16일을 주인공 블룸의 이름을 따서 블룸즈데이로 명명하고

제임스 조이스와 율리시스를 기념하는 행사를 갖는다.

1954년에 첫 행사를 가진 블룸즈데이는 매년 더블린과 그 일대에서 행사를 가지는데 2004년에는 소설의 배경

100주년을 기념하여 수개월동안 성대한 행사를 벌였다. 매년 블룸즈데이를 전후로 해서 아일랜드 문학과

제임스 조이스를 조명하는 학술대회, 공연, 전시회등 다양한 행사가 개최된다.

이 행사는 더블린 시민과 아일랜드 국민은 물론 세계의 많은 영문학도와 문학 애호가들의 문학 축제이다.

아일랜드에서는 이 날을 공휴일로 정해 기념한다. - 위키백과

 

1947 - 제1회 유엔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 상해서 개막

1944 - 프랑스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 사망

1940 - 프랑스 페탱 내각, 독일에 항복

 

1932 - 로잔배상회의 (독일의 배상액 절하)

1924 - 중국, 황포군관학교 개교. 교장 장개석

1920 - 멕시코의 대통령(1972-82) 로페스 포르티요 출생

 

1917 - 제1회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1910 - 페루의 대통령(1968-75) 벨라스코 알바라도 출생

 

1904 - 블룸즈데이(Bloomsday), 아일랜드더블린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를 기리는 날

블룸즈데이(Bloomsday)는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의 배경이 되는 날인

1904년 6월 16일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소설 《율리시스》는 1904년 6월 16일 하루동안에 주인공 리오폴드 블룸과 그의 아내 마리언 블룸, 예술가를 꿈꾸는 청년 지식인 스티븐 데덜러스 라는 세명의 인물이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겪는 하루동안의 18가지 에피소드를 다루었는데

제임스 조이스의 팬들과 문학가들은 매년 6월 16일을 주인공 블룸의 이름을 따서 블룸즈데이로 명명하고

제임스 조이스와 율리시스를 기념하는 행사를 갖는다.

1954년에 첫 행사를 가진 블룸즈데이는 매년 더블린과 그 일대에서 행사를 가지는데 2004년에는

소설의 배경 100주년을 기념하여 수개월동안 성대한 행사를 벌였다. 매년 블룸즈데이를 전후로 해서 아일랜드

 문학과 제임스 조이스를 조명하는 학술대회, 공연, 전시회등 다양한 행사가 개최된다.

이 행사는 더블린 시민과 아일랜드 국민은 물론 세계의 많은 영문학도와 문학 애호가들의 문학 축제이다.

아일랜드에서는 이 날을 공휴일로 정해 기념한다.

 

1903 - 미국 포드자동차사 설립

1902 - 이상재 등 개혁당사건에 관련되어 구속  

 

1902 - 1983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유전학매클린턱(McClintock, Barbara) 출생
매클린턱 [McClintock, Barbara, 1902.6.16~1992.9.2]

매클린턱은 1983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유전학자이다. 코넬대학교에서 1927년 식물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주리대학교의 교수직을 거쳐, 1942년 이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뉴욕에 있는 콜드하버스프링 연구소에서 일했다. 1940~50년대에 옥수수 종자의 색변이 관찰을 통해 유전정보가 염색체상의 특정 위치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이러한 전위가 유기체의 생장에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뒤이어 그녀는 전위인자들에

관한 중요한 연구들을 진척시켰으나, 그 결과들은 당시의 통념과 반대되는 것이었으므로 인정받지 못했다.

크게 낙심한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하지 않았고 강의도 그만둔 채 연구에만 전념했다.

분자생물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1970년대에 들어서서야 그녀의 연구가 유전자의 기능 및 구성을 밝히는 데 중요하다고

인정받기 시작했다. 1983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상을 단독 수상하는 기록을 남겼다.

 

"매클린턱이 발견한 전위인자는 과학계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일례이다.

(중략) 사람들은 처음에는 매클린턱이 미쳤다고 했고, 좀 지나서는 그것이 옥수수에만 국한된 특이한 현상이라고 했다.

좀더 지나서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끝내 그 중요성을 인정했다."

 

- 칼 샤피로

 

1901 - 손문, 일본에 망명

1897 - 미국 매킨리 대통령과 하와이 공화국이 합병조약 체결

하와이 합병은 1900년 4월 30일에 미국이 하와이를 합병한 사건이다. 하와이는 본래 독립국가로서 1782년에 카메하메하 1세 이후

왕조 체계가 유지되던 독립국가였다. 이 합병은 텍사스 합병과 거의 유사한 절차로 이루어졌다.

먼저 다른 국가로 이민을 간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미국과 합병운동이 일어난다. 그 다음 단계로 미국인들이 중심이 된 공화국을

세우고, 이 공화국이 미국에 자신들을 합병해달라고 요청하면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주는 식이다.

이 방식은 나중에 1938년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과 주데텐 할양,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점령과도 유사한 수법이다.

하와이는 19세기 중반부터 미국과 극동을 잇는 중간 기지 역할을 해왔고, 1887년에 미국과 호혜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진주만(Pearl Harbor)을 미국 해군기지로 제공하기도 했다. 하와이로 이민온 사람들은 주로 미국인들이 많았는데, 19세기 후반에 사탕수수 및

파인애플 재배에 성공하여 제당업이 번창하자 아시아인을 포함한 다른 외국 이민이 증가하였다.

이때 조선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그런데 1890년의 미국 관세법 개정으로 제당업이 타격을 받자 하와이에 와있던 미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과 합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91년에 즉위한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국수적인 헌법개정을 시도하자 1893년에 하와이 혁명이 일어나서 1894년에 공화국이 되었다.

미국인을 중심으로 한 미국과 합병운동은 "Newlands Resolution"라 하여 미국에 하와이를 합병해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결국 1897년 6월 16일 매킨리 미국 대통령과 하와이 공화국이 합병조약을 체결하도록 하였고 이 조약을 미국 의회가 1898년 7월 7일에 비준하였다. 조약이 효력을 발생한 날짜가 1900년 4월 30일이다.

미국 합병 직후에는 준주(準州)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후 주(州) 승격운동이 활발해져

1959년 8월 21일 알래스카에 이어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wikipedia

 

1894 - 근대올림픽 부활을 결정한 국제스포츠회의 개최(6.16~6.23 소르본느대학에서)

쿠베르탱은 스포츠야말로 프랑스뿐만 아니라 온세계 청년들의 희망이라고 믿고 1889년 ‘프랑스 스포츠연맹’을 조직하였다.

그는 이와 더불어 올림픽이라는 스포츠 제전을 통해 세계의 청년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여 우정을 나누게 한다면 이는

곧 세계평화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후 여러 차례 올림픽 부활을 제창해 오다가 드디어 1894년 6월 16∼23일까지 열린 국제스포츠회의에서 쿠베르탱의 올림픽 제의는 유럽 각국 대표들로부터 만장일치로 찬성을 얻었고, IOC(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국제올림픽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쿠베르탱의 건의에 따라 그리스의 디미트리오스 비켈라스(Dimitrios Bikelas)가 초대 IOC 위원장이 되었고 쿠베르탱은 사무총장에 머물렀다. 이들은 제1회 대회를 1896년 유서깊은 아테네(Athenae)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Google

1890 - 미국의 희극배우 로럴(Hardy, Oliver) 출생 

로럴 [Laurel, Stan, 1890.6.16~1965.2.23] 하디 [Hardy, Oliver, 1892.1.18~1957.8.7]

로럴과 하디(Laurel and Hardy)는 미국 희극영화의 명콤비로서 로럴(Laurel, Stan, 1890~1965)은 영국 출생으로,

서커스와 만담흥행을 거쳐 1917년 영화계에 들어갔다. 하디(Hardy, Oliver)는 미국 조지아주() 출생으로, 지방 무대생활을 거쳐 1913년 영화계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1927년 할로치 밑에서 콤비를 이루었다. 깡마르고 왜소하며 수줍어하는

로럴과 비대하고 까다로운 하디의 대조를 강조한 우스꽝스런 행동으로 관중을 웃겨 1931년 《극락의 한 쌍》 등

약 15편의 장편을 포함하여 1945년까지 200여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보트와 코스텔로 희극콤비가 등장하면서 인기가 떨어졌다. - naver

 

로럴과 하디(Stan Laurel and Oliver Hardy) 

본명은 Arthur Stanley Jefferson 및 Oliver Norvell Hardy Jr. 할리우드 영화 최초의 뛰어난 미국의 희극배우 팀.

홀쭉이 역할을 맡은 스탠 로렐은 무성영화에 출연하기 전에 서커스·뮤지컬·연극·보드빌 등에 출연했으며,

1926년 뚱뚱이 역의 올리버 하디를 만나 짝을 이루었다. 하디는 미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노래와 보드빌 공연을 하다가 1913년부터 희극 무성영화에 출연했다.

유성영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시각적 유머가 언어적 유머로 바뀌자 무대에서 훈련된 이 2인조의 인기는 급속히 올라가 1920~40년대에 걸쳐 200편 이상의 익살스런 희극영화를 찍었다. 로렐은 덤벙대고 쉽게

풀이 죽는 성격의 순진한 역할을 맡아...  



 

1883 - 인천해관 설치 

중국이 홍콩반환을 앞두고 제작한 영화 `아편전쟁`에서 몰수한 아편을 폐기하는 장면(원내 사진은 임칙서).

 

1840 - 아편전쟁 발발(양력 7월 18일) 1840년 6월 16일 영국이 철갑선 `네메시스`(신의 보복)를 비롯,

48척의 함대를 동원해 이른바 아편전쟁을 시작했다. 영국의회는 4월 10일 271대 262라는 근소한 표차로 전쟁을 결의한 바 있다.

100여년 동안 중국에 아편을 팔아 막대한 부를 벌어들였던 영국은 중국정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보복차원에서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광주에 부임한 임칙서가 `아편금연대업(阿片禁煙大業)`에 나서면서 촉발됐다. 임칙서는 중국인 밀매자들을

적발해 처벌하고 밀수선들을 억류하거나 이를 보호하고 있는 영국 상관을 포위하는 등 강력한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압수한 아편 전량을 폐기하기도 했다. 아편전쟁은 인류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의 하나로 평가받았다.

 

1762 - 실학자 정약용 출생

1592 - 임진왜란 옥포 해전, 합포 해전

 

1592 - 임진왜란 옥포 해전, 합포 해전

1583 - 스웨덴 역사상 가장 유능한 총리로 불리는 악셀 옥센셰르나 출생

 

1583 - 스웨덴의 총리 옥센셰르나 출생

1232 - 고려,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로 천도

1232 - 고려, 몽고 침입 피해 강화도 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