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우표와 사건 06.12 (1)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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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0 - 한국-그리스전 주심에 헤스터…‘또 만났네‘
한국의 첫 원정 16강 사활이 걸린 조별리그 첫 경기 그리스전 주심이 확정됐는데 구면이다. 2년 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온두라스전 주심이었던 미카엘 헤스터(38·뉴질랜드)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6일(한국시간) 발표한 조별리그 1차전 심판 명단 결과 12일 포트엘리자베스넬슨만델라베이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B조 1차전 한국-그리스전 심판에 헤스터 주심과 얀 헨드릭 힌츠(뉴질랜드)·데비타 마카시니(통가)
부심이 배정됐다.
헤스터 주심과의 만남은 베이징올림픽 D조 최종전 온두라스전에 이어 두 번째다.
하지만 그 때 기억이 달갑지만은 않다. 대체로 판정은 무난했지만 후반 페널키킥 상황에서 휘슬을 불지 않는 등 한국에
다소 불리하게 판정해 국내팬 사이에선 논란이 됐다.
당시 한국은 김동진의 결승골로 온두라스에 1-0으로 이겼으나, 조 1·2위 이탈리아-카메룬전이 무승부로 끝나 8강행이 좌절됐다. 하지만 골득실 차에 따라 8강 가능성이 있어 헤스터 주심의 판정은 야속했다.
베이징 올림픽 당시 주축이었던 박주영·이청용·기성용·김정우·강민수 등 절반 이상이 또 만난다. 특히 위험한 태클로 전·후반 각각 경고를 받았던 기성용·김정우는 심판의 성향은 잘 알고 있을 터. 이 경험이 약이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한편 한국인 심판으로 유일하게 참가하는 정해상(39) 심판은 12일 케이프타운 그린포인트 스타디움에서 치러지는
A조 우루과이-프랑스전 부심으로 나선다. 호흡을 맞출 주심과 또 다른 부심은 일본의 니시무라 유이치와 사가라 토루다.
<루스텐버그(남아공)|김기봉기자> -스포츠칸 & 경향닷컴 2010년 06월 06일 20:48:55
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art_id=201006062048553&sec_id=520501
2) 1994 - 오스트리아 EU가입 결정
1994년 5월 유럽의회는 오스트리아의 가입을 승낙했으며, 1994년 6월 12일 오스트리아의 국민투표에서도 가결된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는 1995년 1월 1일부터 EU의 13번째 정식회원국이 되었다. ... /종합경제사회연구원
http://www.hopia.net/ries/jes/jes_w_cp/jes_w_cp6.htm
3) 1984 - 코메콘(COMECON) 정상회담 모스크바서 개막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공산권의 경제협력기구 COMECON(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
경제상호원조회의)은 1947년 미국이 마셜 플랜(유럽부흥계획)을 제안하였을 때 동유럽 여러 나라가 동요하는 것을 막고
마셜 플랜에 대항하기 위해 소련 주도하에 1949년 1월 불가리아·헝가리·폴란드·루마니아·체코 등 6개국이 참가한 경제통합 조직을 창립하였다.
같은 해 알바니아, 1950년 동독, 1962년 몽골이 각각 회원국이 되었다.1961년 알바니아가 탈퇴하는 한편, 1972년 쿠바, 1978년 베트남이 가맹하여 10개국이 되었고, 유고슬라비아는 준회원국, 북한·아프가니스탄·앙골라·에티오피아·모잠비크·라오스·중국 등이 옵서버로서 참석하였다.
1960년대 이후 코메콘은 유럽경제공동체(EEC)의 눈부신 발전에 대항하기 위하여 경제협력으로부터 경제통합으로 활동형태를 바꾸었다. 그러나 1989년 동유럽의 민주화변혁은 코메콘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즉, 1990년 1월 불가리아의 소피아에서 개최된 코메콘 10개국 지도자회의는 종래의 엄격한 중앙경제계획에서 시장중심의 무역제도로 전환하기로 결정하였다. 1991년 6월 제46차 총회에서 모든 조약과 문서를 취소시키고 기구해체의정서에 서명하였다.
1) 2) 3)
1) 2005 - 김대중 전 대통령, 독일정부로부터 제1급 대십자공로훈장 수여
홀스트 퀠러 독일 대통령이 지난 6월 12일 김대중 전대통령에게 독일연방공화국 제 1급 대십자 공로 훈장을 수여했다.
김 전대통령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해 왔으며 이로 인해 지난 과거에
몇 차례씩 구속되고 생명을 위협당하기도 했다.
독일정부를 대표해 직접 김전대통령에게 훈장을 수여한 미하엘 가이어 주한 독일대사는 “김전대통령이 일생에 걸쳐
민주주의와 한-독 관계에 지속적으로 공헌해 온 것을 기리기 위해서 훈장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수많은 국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훈장수여식에 이름가르트 슈베처 나우만 재단이사가 참석하여 독일 자유주의 재단으로부터의 축하메시지를 전달했다. 축사에서 슈베처 박사는 한국과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성공적인 한-독 협력관계에 대해 사의를 표하면서, “김전대통령은 오랜 세월 동안 억압의 희생자였지만, 결국은 민주주의를 위한 평생의 투쟁에서 승리한 투사”라고 치하했다.
이와함께 슈베처박사는 김전대통령이 남북분단이 종결되어 한반도 통일을 직접 목격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나우만 재단은 1년전부터 북한에서 시장경제에 관한 교육 세미나를 주관해오고 있습니다. 그 이래로 이미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습니다. 김전대통령의 햇볕 정책이 없었더라면 이 같은 일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김전대통령은 재임시 남북협력을 통해서 한반도 긴장을 완하시켰으며, 또한 독일의 동방정책과 통독에서 영감을 얻은 햇볕정책과 평생을 자유를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프리드리히나우만재단
http://www.fnfkorea.org/new_eng/new_kor/library2_view.asp?num=10
2) 1992 - 브라질에서 `지구환경정상회담` 개막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qid=2eFgg
3) 1991 - 러시아 최초 대통령 직접선거, 보리스 옐친 당선
1991년 오늘 소련 러시아공화국의 첫 직선 대통령선거가 실시됐다.
개표 결과 보리스 옐친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이 당선됐다.
1985년 중앙정치무대에 등장한 옐친은 급진개혁정책만이 정체된 소련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두 달 뒤 보수강경파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자 즉각 반(反)쿠데타 세력의 선봉에 서서 60시간 만에 쿠데타를 물리쳤다.
그 후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미온적인 개혁정책을 맹렬히 비판했다.
같은 해 12월 21일 발트 3국과 그루지야를 제외한 11개 공화국을 참여시켜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한다.
1) 2)
1) 1904 - 불가리아의 시인 달체프(Dalchev, Atanas) 출생
달체프 [Dalchev, Atanas, 1904.6.12~1978.1.17]
Atanas Hristov Dalchev (June 12, 1904 - January 17, 1978) a Bulgarian poet and translator.
He was born in Thessaloniki and graduated from high school in Sofia in 1922. His father Hristo Dalchev was a lawyer and represеnted Bulgarians from Macedonia in the Ottoman parliament.
In 1926, Dalchev published his first collection - Prozorec (Window)- and graduated in pedagogics and philosophy at Sofia University in 1927. From 1945 until 1956, he was under pressure from the communist authorities and was forced to publish only translations.
He died in Sofia in 1978.
http://en.wikipedia.org/wiki/Atanas_Dalchev
2) 1989 -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분리돼 연구기관으로 독립
한국과학기술연구원(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KIST)은 기초과학기술 개발을 담당하는 국책 종합연구기관. 1965년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대통령이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한국 공업발전을 위한 연구소 설립에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1966년 2월 10일 한국과학기술소로 설립하였으며, 한국과학기술원법에 따라 1981년 한국과학원과 함께 한국과학기술원으로 통합되었다가 1989년 6월 12일 기초 및 원천 기술 개발을 위한 대형 국책연구과제를 수행하는 종합연구기관으로서 한국과학기술원 연구부를 독립시켜 발족하였다.
1999년 1월 29일에는 '정부출연 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 등에 관한 법률'(법률 5733)에 따라 기초 분야 연구소 3개와 함께 국무총리 산하 기초기술연구회 소속으로 개편되었다. 조직은 이사회, 감사, 원장, 부원장, 재료연구부, 시스템연구부, 환경공정연구부, 생체과학연구부, 연구조정부, 기술사업단, 행정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 39-1번지에 있다. -naver
KIST 연혁
1965.05.18 - '한국의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 설립'에 관한 한-미 양국 대통령의 공동성명을 바탕으로
1966.02.10 -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되어 초대 소장에 최형섭 박사가 임명되었습니다.
1981.01.05 - 한국과학원(KAIS)과 통합하여, 한국과학기술원, KAIST로 설립되었습니다.
1989.06.12 - 국가미래과학을 선도하는 창조적 원천기술의 연구개발을 위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로 재발족하였습니다.
1996.02.16 - 독일, EU, 동구와의 기술교류 및 공동연구 거점 확보를 위하여 KIST-EUROPE 연구소를 설치하였습니다.
2003.05.01 - 참여정부의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지방과학기술 혁신 정책'의 선도적 역할 수행을 위하여
KIST 강릉분원을 설치하였습니다.
KIST 한국과학기술연구원
2003 - 16만년전 최고(最古)인류 유골 발견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最古의 인류' 또는 '우리들의 최고의 조상들'-16 만년 전으로 연대를 추정-에 관한 보도로 언론매체가 왁자지껄 소란하다. 사실상 비전문가인 많은 일반인들은 이 기사 내용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워한다. 인류의 조상은 이 보다 훨씬 오래된 '연대'로 추정되어왔던 것이 아니었던가? '인류 조상들'의 연대는 수백만 년 전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이번에 추정된 연대와 이전에 추정되었던 연대와의 사이에 벌어진 차이점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에 발견된 두개골은 현생인류 (Homo sapiens)의 것이라고 하며, 본래 캘리포니아의 버클리 대학의 Dr. Tim White가 1997년에 에티오피아의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의 북동쪽 230km 지점에 있는 Herto 마을 근처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 발견이 저명한 Nature 지 (2003년 6월 12일)의 표지에 실렸다. 그리고 이 잡지는 이 발견에 대한 지도자급 고인류학자들의 기사를 싣고 있다. White와 동료들은 그 화석에 관한 보고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다른 신문들은 두개골에 대한 최근의 방사성동위원소 방법을 통해 얻어진 연대와, 그 두개골이 가지고 있는 전폭적인 인간 모습의 증거들에 관해서 보고하고 있다.
또 한 사람의 지도자급 진화론적 고인류학자인 런던의 자연사박물관의 Human Origin Group에 소속된 Dr. Chris Stringer는 그 기사내용에 대해서 깊이 있는 논평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두개골이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의 표본을 더욱 지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쟁적 진화론자의 다중-기원설의 표본에 반대하는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사단법인 한국창조과학회
http://www.kacr.or.kr/library/print.asp?no=742
1991 - 금성사, 국내 처음으로 초전도전착기술 개발 - 공중전화카드 -
1983 - 한국, 멕시코 청소년 축구 4강 진출
1983년 6월 12일. 한국 청소년 축구 대표팀은 멕시코 몬터레이에서 전대미문의 기록에 도전하고 있었다. 제4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준준결승. 상대는 우루과이였다. 아시아에서 태국이나 말레이시아를 이기면 열광하던 때였던 만큼 세계대회 4강은 꿈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선때 스코틀랜드 멕시코 호주와 한조에 편성된 한국은 스코틀랜드 전에서 0대2로 완패했다. 이때 국민들은 `한국 축구의 한계`라며 관심이 시들해졌으나 멕시코와 호주를 잇달아 2대1로 제압, 예선을 통과하자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신화의 계절이 시작된 것이다.
우루과이와 운명의 일전에 들어간 한국은 후반 9분 신연호가 선제골을 넣어 기선을 제압했다. 한국은 동점골을 내줘 연장에 돌입했지만 연장전반 14분 신연호가 다시 천금의 결승골을 터뜨려 당당 4강. 전국은 열광했고, 외신들은 빨간 유니폼을
입고 벌떼처럼 공을 향해 덤벼든 한국팀을 `붉은 악마`라 부르며 격찬했다.
이어 브라질과 준결승. 한국은 김종부의 선제골로 세계 최강을 벼랑 끝으로 몰았지만 아쉽게 1대2로 역전패해
결승진출에 실패했다. 결국 한국은 4위에 머무르고 말았지만, `멕시코 4강`으로 한국축구는 한단계 도약하게 됐다.
1982 - 500원권 새 주화 발행
1980년대이후는 현용화폐의 형태가 완성되고 고급화된 시기다. 한은은 1982년 6월 500원권 은행권을 주화로 대체하고, 1983년 1월엔 주화별로 불일치돼 있던 앞.뒷면 액면표시 및 숫자를 일정한 크기와 배열로 조정했다. 한은은 은행권에 대해선 1983년 6월 현용화폐인 나 1천원권과 함께 다 5천원권을 발행하고 같은해 10월엔 다 1만원권을 발행했다. 이때 발행된
5천원권과 다 1만원권은 규격.색상.재질.도안 면에서 현용은행권과차이가 거의 없다. 이후 부분노출은선, 광간섭 무늬,
미세문자, 요판잠상 등 위.변조 방지요소가 강화됐다.
1994년 1월 라 1만원권, 2000년 6월 마 1만원권, 2002년 6월 라 5천원권이 각각 발행됐다. 내년 상반기에 규격과 재질,
색상을 완전히 달리한 새로운 5천원권을 시작으로단계적으로 새 은행권이 발행되면 이는 83년
이후 23년만에 전면적인 은행권 교체가단행되는 셈이다.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경제 2005.04.18(월) 14:40
http://www.hani.co.kr/section-004000000/2005/04/004000000200504181440689.html
1962 - 한국-칠레, 국교 수립
칠레는 1949년 5월 27일 라틴아메리카 국가 가운데 최초로 한국 정부를 승인하고 1962년 6월 12일 양국이 국교를
수립하였다. 1966년 11월 7일 주(駐)칠레 대한민국대사관을 설치하였으며,
1969년 11월 25일 주한 칠레대사관을 설치하였다가
1971년 3월 25일 철수한 뒤 1975년 5월 14일 업무를 재개하였다.
양국은 수교 이후 전통적으로 두터운 우호친선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으며 칠레는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등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해왔다. 특히 1994년 대통령 프레이(Frei)의 한국 방문과 1996년 대통령 김영삼의 칠레
방문 이후 양국의 실질적인 협력관계가 더욱 긴밀해졌다. 양국간의 교역은 1997년에 12억 7000만 달러에 이르러
한국은 칠레의 제4대 수출대상국으로 부상하였다. (칠레 대한민국대사관)
http://100.naver.com/100.nhn?docid=741662
1944 - 독일 장거리 로케트 V-1, 런던 공격 시작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은지 6일이 지난 1944년 6월 12일 독일의 신병기 V-1 로케트(V는 독일어로
보복을 의미하는 단어의 첫 글자)가 프랑스로부터 런던으로 발사됐다. 820Kg의 폭탄을 탑재한 V-1 로케트는 제트추진의
비행폭탄으로 1000미터의 고도를 시속 500~600Km로 날았다. 발사된 10발중 영국까지 도달한 것은 4발이었고
그중 1발이 런던의 한 철교에 명중해 6명이 사망했다.
그후 7월 6일까지 런던을 향해 2754발을 발사해 2752명의 사망자와 8천명의 부상자를 냈다. 무차별로 날아오는 V-1 로케트에 2차대전 초기 독일군의 공습에 질려있던 런던시민은 공황상태에 빠졌고 급기야 영국정부는 7월20일 여성과
어린이 17만명을 런던으로부터 소개(疏開)시켰다. V-1 로케트의 총 발사수는 8564발이었고 이중 런던 주변에까지 도달한 것은 2400여발이었다. 영국은 민간인 사망자 6184명, 중상자 1만7984명의 인명손실을 보았다. -조선
1942 - 안네 프랑크가 생일 선물로 일기장을 받고, <안네의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
당신과 내가 처음 만난 날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요?” 1942년 6월12일자 ‘안네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했다. 이 날은 안네의 열 세번째 생일. 그러나 안네는 12일자 내용을 이틀 뒤에 썼으므로 정확히 말하면 14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 셈이다.
극심한 불안과 갈등, 또래 소년에 대한 사랑과 꿈을 담아내던 어린 소녀의 일기는 2년이 조금 지난 1944년 8월1일자에서 갑자기 끝을 맺는다. 사흘 뒤 독일 비밀경찰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은신처에 들이닥쳐 안네와 가족을 아우슈비츠로 끌고갔기 때문이다. 아버지 오토는 다행히 병이 깊어 그곳에서 해방군을 만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안네와 언니는 독일의
베르겐 벨젠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1945년 3월 발진티푸스로 죽음을 맞아야 했다.
전쟁이 끝나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한때 그의 무역회사에서 일했던 한 부인이 노트 한 권을 전해준다. 안네 가족이 체포된 다음날 그 방에서 발견한 일기장이었다. 아버지는 1947년에 일기를 출간하며 딸의 죽음을 아파했지만,
그가 전쟁 바로 전까지 독일군에 물품을 납품했던 사업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29 - 안네 프랑크(Frank, Anne) 출생
프랑크 [Frank, Anne, 1929.6.12~1945.3. ]
프랑크는 홀로코스트를 피해 은신처에 숨어살면서 쓴 일기로 널리 알려진 나치 치하를 산 유대인 소녀이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났지만, 1933년 히틀러가 이끄는 반유대적 나치당이 집권하자,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당시 4세였던 안네는 11세가 되기까지 비교적 안전한 네덜란드에서 별 어려움 없이 자랐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1941년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다시금 반유대적 법령들에 구속당하게 되었다. 1942년 강제수용소로의 이송이 시작되자, 안네의 가족은 아버지의 회사가 있던 건물의 밀실에서 은신생활을 하다가 1944년 8월 게슈타포에 의해 발각되었다. 안네의 가족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게 되었고,
안네와 그녀의 언니는 다시 베르겐 벨젠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죽었다. 약 2년간의 은신 생활 동안 안네가 쓴 일기는 1947년 <뒤쪽 집 Het Achterhuis>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전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사춘기 소녀의 꿈과 함께 조숙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이 일기는 30여 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나는 세상이 점점 황무지로 변해가는 것을 본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 언젠가는 우리마저 파괴해 버릴 천둥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우러러 볼 때면,
이 잔인함도 끝이 나고 평화와 고요가 다시금 찾아오리라고 느낀다."
- 안네 프랑크, 1944년 7월 15일 일기
1924 - 미국의 제41대 대통령 부시(Bush, George) 출생
부시 [Bush, George (Herbert Walker), 1924.6.12~ ]
매사추세츠주(州) 밀턴에서 출생했다. 예일대학교 재학 중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1942∼1945년 항공모함 탑재 뇌격기
조종사로 종군하였고, 1948년 예일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53년 자파타석유회사를, 1954년 자파타원양회사를 공동창설, 이사장으로 있었고, 1959년 공화당에 입당하여 1964년 상원의원선거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한 후 1966년 텍사스주(州) 제7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0∼1973년 국제연합 주재 대사, 1974∼1975년 국무성 베이징[北京]연락사무소 소장으로서 대(對)중국과의 국교정상화에 힘썼으며 1976∼1977년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지냈다. 1980년, 1984년 대통령선거에서 R.W.레이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여 두 차례 부통령을 지냈으며, 1989년 제4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후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B.클린턴에게 패하여 재선에 실패하였다. 1982년, 1989년, 1992년, 2001년 한국을 방문하였다.
- 제1회 노벨 평화상 공동수상자 프레데릭 파시와 앙리 뒤낭
1912 - 프랑스의 경제학자 파시(Passy, Frederic) 사망
파시 [Passy, Frederic, 1822.5.20~1912.6.12]
프랑스의 경제학자, 국제 중재의 주창자. 1901년 적십자를 창설한 장 앙리 뒤낭과 함께 최초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프랑스 최고 행정재판소의 회계감사관(1846~49)으로 일한 뒤 파시는 여러 경제개혁과 자선활동에 관련된 저술과 강연,
조직활동에 몰두했다. 열렬한 자유무역주의자인 그는 영국의 경제학자인 리처드 코브던이나
그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존 브라이트와 함께 19세기 자유주의 전통에 속한다. 평화를 위한 파시의 활동은 크림 전쟁(1853~56) 때부터이다. 정기간행물 〈탕 Le Temps〉(1867)에 평화를 호소하는 글을 실어 룩셈부르크를 차지하기 위한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의 전쟁을 막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같은 해 그는 국제평화연맹(Ligue Internationale de la Paix)을
창설했는데, 이 조직은 후에 국제분쟁의 중재를 위한 프랑스 협회로 알려졌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 뒤 그는 알자스로렌의 독립과 영구중립을 제안했다. 1881년부터 프랑스 하원의원으로서 프랑스령 기아나와 수리남 간의 경계에 관하여 프랑스와 네덜란드 사이에 벌어진 분쟁을 중재하여 성공했다.
그는 국제의회연맹(IPU:1889) 설립에 일조했고 여생을 평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00 - 큐바의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롤단(Roldán, Amadeo) 출생
1898 - 필리핀의 독립운동 지도자 아기날도,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
1890 - 오스트리아의 화가 실레(Schiele, Egon) 출생
1842 - 노르웨이의 작곡가 노르로크(Nordraak, Rikard) 출생
1829 - 스위스의 아동문학가 슈피리(Spyri, Johanna) 출생
1780 - 스위스의 초상화가 리오타르(Liotard, Jean-Etienne) 사망
1519 -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Cosimo I de' Medici)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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