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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06.11 (1)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06.11 (1)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                                    3)

 

1) 1937 - 소련의 육군 원수() 투하체프스키(Tukhachevskii, Mikhail) 처형

투하체프스키 [Tukhachevskii, Mikhail Nikolaevich, 1893.2.16~1937.6.11]


소련의 군부 지도자.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적군(赤軍)의 현대화 책임을 맡았다. 투하체프스키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914년 알렉산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 제정 러시아의 육군 소속으로 싸우다 1915년에 생포되었지만 탈출했다.

1918년부터 제정 러시아 육군장교로 모스크바 지구 방위를 지휘했고(1918), 동부전선에서 군대를 지휘했으며(1918),

제5군 사령관으로서 A. V. 콜차크 제독으로부터 시베리아를 탈환하고 카자크 군대를 이끌고 A. I. 데니킨 장군과 싸웠다(1920). 그는 러시아 전쟁과 폴란드 전쟁(1920~21) 및 크론슈타트 반란(1921)의 진압에도 참가했다.

내란이 끝난 후 투하체프스키는 군부개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31년부터 소련의 재무장을 지휘했다.

그는 적군의 대대적인 조직개편 및 기술혁신과 일련의 현대적인 군사학교 설립 책임을 맡았다. 또한 현대전에서의

전략적 고려사항들에 관한 많은 책과

논문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는 참모장(1925~28)과 국방위원회 부위원(1931~)을 역임하고 레닌 훈장을 받았으며,

1935년 소련의 육군원수가 되었다. 투하체프스키는 1937년 6월 스탈린이 숙청작업을 벌일 때, 다른 7명의 적군

고위사령관과 함께 독일과의 공모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1988년 혐의가 벗겨져 공무원령에 의해 복권되었다.

 

2) 2004 - 미국 LA 고속도로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 표지판 헌정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남부 지역을 가로지르는 110번 프리웨이와 샌타모니카 쪽 10번 프리웨이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인터체인지 이름이다.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타운을 선거구로 하는 캘리포니아주()의 민주당 상원의원인

케빈 머레이(Kevin Murray)가 도산기념사업회·밝은미래재단과 공동으로 발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들은 2003년 1월 북미 이민 100주년에 즈음해 한인 밀집지역을 통과하는 10번 프리웨이 일부 구간에 한국인을 대표할

만한 인물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자는 아이디어를 발의해 캘리포니아주 하원에 제출하였다.
이에 따라 2002년 8월 26일 캘리포니아주 하원은 찬성 39, 반대 0으로 결의안을 통과시킨 뒤 교통분과위원회 심의를 거쳐 같은 달 30일 본회의에서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로 하는 안을 확정하였다.

미국에서 한국인의 이름을 딴 거리명이 생긴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의 남쪽을 가로지르는

10번 프리웨이는 안창호의 주 활동무대였던 리버사이드까지 연결된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2004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안창호 우체국'이 생겼다.
 

3) 1902 - 미국 감리교 목사, 교육자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사망 
아펜젤러 [Appenzeller, Henry Gerhard, 1858.2.6~1902.6.11]

- 1960.8.3.발행 (1885년 배재학당 설립 75년)

펜실베이니아주() 손더튼 출생. 원래는 장로교 신자였는데, 1876년 감리교로 옮겼다. 1882년 펜실베이니아주

랭카스터의 프랭클린 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을 거쳐 뉴저지주 매디슨의 드류대학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1884년(고종 21) 미국감리교 선교회에서 한국 선교사 임명을 받고 갓 결혼한 아내 D.엘라와 함께

1885년 초 한국에

 와 한국선교회를 창설하고,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1887년 한국 성경번역부가 생기자 H.G.언더우드, J.S.게일 등과 함께 성경 국역사업에 참여,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I ·II)의 번역을 마쳤다. 한편 1895년 월간잡지 《한국휘보:The Korean Repository》를 복간, 그 편집을 맡았다. 그는 암기 위주인 한국의 교육방식을 이해중심적인 교육방식으로 고치는 데도

 크게 공헌하였다. 1902년(광무 6)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차 배를 타고 가다가 목포 앞바다에서

충돌사고로 익사하였다. 마포구 양화진외인묘지에 묻혔다. - naver 

 

44세의 안타까운 최후
성서번역에 심혈을 기울이던 아펜젤러는 1902년 6월 11일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키 위해 인천에서

배로 출발했다. 오사가 선박회사가 운영하는 쿠마가와 마루호를 타고 그날 밤 10시쯤에 어청도 근처에 이르렀을 때

짙은 안개로 지척이 구분되지 않아 같은 회사의 키소가와 마루와 충돌하여 파선, 침몰했다.

당시 생존자 보울비의 설명에 따르면,

배가 충돌하자 그 충격으로 보울비 자신은 바닥에 쓰러졌고 배는 침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방 맞은편 선실에서 독서를 하던 아펜젤러는 무슨 일이냐고 소리를 치면서 계단을 향해 앞서 나가고 있었다.

2분도 채 되기 전에 갑판 앞부분의 반이 물에 잠겼고 선미는 물 밖으로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아펜젤러는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피신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배는 계속 가라앉고 아펜젤러의

허리까지 물이 차올라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그는 무엇인가를 잡아보려고 계속 헛손질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와 동행했던 그의 조수이며 비서인 조한규(조성규)씨와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목포 집으로 가는 한 어린

여학생을 구하려는 듯 했다. 배는 거의 45도로 기울며 가라앉았고 다음 순간 보일러가 폭발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나는 소용돌이에 휩싸였으나 뒤집어진 구명정을 붙들고 45분동안 물위를 표류하다가 구조되었다.”
결국 아펜젤러 목사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영원히 물속에서 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 사고로 아펜젤러를 비롯한 일본인 승객 4명, 한국인 승객 14명, 선원 8명이 사망하였다. 선교를 위해 삶을 바친 아펜젤러 목사는

주님의 말씀대로 목숨까지도 타인을 위해 바치는 큰 사랑을 이루고 떠난 것이다.- 선교타임즈 200007/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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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0 - 아르헨티나의 작가, 평론가 마레찰(Marechal, Leopoldo) 출생

마레찰 [Marechal, Leopoldo, 1900.6.10~1970.6.26]

아르헨티나의 작가·평론가. 철학소설로 유명하다.

1920년대초 아르헨티나 문학에 대변혁을 일으킨 급진적 잡지 〈마르틴 피에로 Martín Fierro〉와 〈프로아 Proa〉를

발간하던 문학단체에 속해 있었다. 첫 시집 〈새끼 독수리 Aguiluchos〉(1922)에서는 전원적인 주제를 모더니즘 기법으로 다루었으며, 〈화살같이 흐르는 세월 Días como flechas〉(1926)·〈남자와 여자에게 부치는 송시 Odas para el hombre y la mujer〉(1929)에서는 은유와 시상(詩想)을 좀더 과감히 사용 하여 급진주의적 미학을 표현했다.

시 가운데 〈5편의 남부지방 시 Cinco poemas australes〉(1937)·〈소피아에게 바치는 시 Sonetos a Sophia〉(1940)·〈켄타우로스 El centauro〉(1940) 등은 신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혼돈의 세계 속에서 균형과 질서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주제는 순진무구한 여인 엘비아모르에게 바치는 연가 〈엘비아모르에게 바치는 노래 Canciones Elbitences〉에서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 시들은 〈명시선 Antología poética〉(1969)에 실려 있다.

마레찰의 걸작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단 Adán Buenosayres〉(1948)은 기술적 복잡성, 문체의 혁신, 고도의 시적 언어를 구사한 작품으로 라틴아메리카 신소설의 선구가 되었다. 주인공 아단의 신화적 여행, 지옥 하강, 끊임없는 이상 추구 등은 자전적인 주제 소설(roman à clef)인 동시에 지질연대 이후의 아르헨티나에 역사성을 부여한 소설이기도 하다.

젊은시절 사회주의자였던 마레찰은 뒤에 열렬한 페론주의자가 되어 후안 페론의 통치기간 동안 문화부의 요직을 맡았다.

 페론의 실각과 함께 사실상 은둔생활로 들어갔지만, 소설 〈세베로 아르칸헬로의 향연 El banquete de Severo Arcángelo〉(1965)·〈메가 폰 : 전쟁 Megafón o la guerra〉(1970)으로 다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소설 속에서도 신화와 이상주의를 계속 탐구하고 있다. 



2) 1894 - 갑오농민전쟁 중 전주화약(全州和約) 체결

1894년 6월 11일 갑오농민전쟁 중 농민군과 정부간에 휴전화약이 성립되었다. 그해 4월 전라도 무장면에서

시작된 농민봉기는 5월 31일 전주성 점령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양호초토사 홍계훈 지휘하의 정부군과 농민군 간의

공방전 속에 희생자가 늘어나자 정부는 청에 원병을 부탁했고, 이를 구실 삼아 일본군까지 상륙했다. 청·일의 개입으로

국제분쟁의 국면에 처하자 당황한 정부는 농민군을 회유했다. 농민군의 지휘자인 전봉준은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이면 해산하겠다고 했다. 결국 농민군의 제의가 받아들여져 전주화약이 성립됨으로써 제1차 농민전쟁은 종결되었다. 이후 농민군은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해 폐정개혁을 시행했다.


 

3) 1811 - 러시아의 문예평론가 벨린스키(Belinsky, Vissarion) 출생

벨린스키 [Belinsky, Vissarion Grigoryevich, 1811.6.11~1848.6.7]

러시아의 문예평론가. 펜자주() 벨린스키 출생.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대학의 문학부에 다녔으나, 1832년에 반농노제적() 희곡 《드미트리 칼리닌 Dmitrii Kalinin》을 써서 퇴학당하였다.

1833년부터 잡지 《텔레스코프》에 기고하기 시작하여, 1834년에 그의 초기의 대표논문 《문학적 공상 Literaturnye mechtaniya》을 발표하였다. 그 후에도 잡지 《조국잡기()》, 그 밖의 잡지에서 집필을 계속하였으며, 1847년에 시인 네크라소프가 주재()하는 잡지 《동시대인》에 참가하여,

사상적 지도자로서 러시아 비평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다.

초기 작품에는 독일 고전철학, 특히 헤겔의 영향이 두드러져, “모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테제(정립)를

일면적()으로 포착하여, 이른바 ‘현실과의 화해’에 빠졌다. 그러나 생시몽, 푸리에 등을 알게 되고, 또 헤겔의 변증법()의 영향을 받아, 차차 러시아의 현실에 입각한 독자적인 사회주의, 혁명적 민주주의의 사상을 구축해나갔다.

그의 문학론은 예민한 감성()에 입각하면서 예술을 진정으로 민중의 것으로 만들려는 열의와 설득력이 넘치고 있으며, 후일의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을 육성하려는 뜻으로 일관되었다. 그는 고골리의 재능을 최초로 인정하였으며,

《러시아의 소설과 고골리의 소설》(1835) 《치코프의 편력과 죽은 영혼》 등을 통하여

그의 민중성()과 사실주의를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네르몬토프의 시》(1841)에서는 그의 현대성과 전인간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후기의 대표작인

《푸슈킨론 Sochineniya Aleksandra Pushkina》(1843∼1846)에서는 처음으로 푸슈킨의 저작에 전면적인 분석을

가하여, 그 국민성과 사실주의를 명확히 하였다.

그 밖에 게르첸,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콜리초프, 곤차로프, 네크라소프 등의 작품에 있어서의 사실주의를 분석 평가함으로써 그들의 문학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847년에 결핵치료를 위하여 국외로 나가, 유명한 《고골리에의 편지》를 썼으며, 가을에 귀국해서는 《1847년의 러시아 문학관()》을 비롯한 논문들을 썼으나,

병이 악화되어 이듬해에 페테르부르크에서 36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2009 - 한진重, 첫 국적 쇄빙선 ‘아라온’ 진수식

‘21세기 보물창고라 불리는 극지 탐사를 수행하게 될 대한민국 첫 쇄빙연구선(碎氷硏究船) ‘아라온’호의

진수식이 11일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국적 쇄빙연구선 아라온호의 건조사업을 주관하고 있는 국토해양부 및 극지연구소, 선장,

승조원과 한진중공업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아라온’호의 성공적인 진수를 축하했다.
전 세계 모든 바다를 누비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아라온’호는 총 톤수 6,950톤급으로 길이 110m, 19m,

최고 속도 16노트(시속 30km 정도)의 연구선으로서 60여종의 첨단 연구장비와 헬기 및 승조원 25명과

연구원 60명을 태우고 1m의 얼음을 시속 3노트로 연속쇄빙이 가능하며 한번의 보급으로 70일간

2만 해리를 항해할 수 있도록 건조된 최첨단 선박이다.
극지는 미래 국가이익이 직결되는 곳임에도 그동안 우리나라는 쇄빙선이 없어 타국의 쇄빙선을 임대하여

막대한 사용료를 지불하는 등 탐사 및 연구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아왔다.
아라온호를 통해 극지를 비롯한 전 대양에서 국내 조선기술로 만든 첨단 쇄빙연구선을 이용한 종합해양과학조사

연구활동과 기지 건설이 가시화 되었으며 무엇보다 극지인프라 구축으로 미래의 해양영토

선점과 극지해양자원의 심층 연구가 가능해져 극지 연구국으로서의 위상도 크게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20071월 첫 국적 쇄빙연구선 건조 조선사로 선정된 한진중공업은 고기술고부가가치 선박으로 꼽히는

쇄빙연구선을 완벽히 건조, 진수함으로써 조선기술 종가의 명성을 이어가고 되었다.
한진중공업 관계자는 국내 조선기술력은 세계최고 수준이나 그 동안 쇄빙선박 설계 및 건조경험이 없었다면서

첫 국적 쇄빙연구선의 성공적인 건조로 국가 위상 제고뿐만 아니라 첨단선박 건조기술 확보로 향후 고부가가치선

시장 확대 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혔다.
1,030억이 투입된 아라온호는 오는 9월말 인도 후 쇄빙능력 시험항해를 거쳐, 2010년부터 본격적인

남·북극 탐사 및 연구, 보급활동에 나서게 되어 향후 극지연구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한진중공업 2009.06.11 - http://www.hanjinsc.com/pr/media/media_view.aspx?noticeID=122



 

1985 - 소련의 금성탐사위성 베가1호의 착륙선이 금성에 도달

<베가 1호> 소련의 금성과 핼리 혜성 탐사선, 4,000 kg
발사 ; 1984년 12월 15일
베가 1호는 1985년 6월 11일에 핼리 혜성을 향해 가는 도중에 금성을 지나갔다. 베가 1호는 금성의 대기의 가운데 층의

구름 상태를 알아보기 위한 탐사봉을 낙한산으로 금성 대기 중에 투하하였다. 이 탐사봉의 토양 실험은 실패했지만

탐사봉이 낙하하는 동안에 고도 54 km 지점에서 약 48시간 동안 떠 있었다. 베가 1호가 핼리 혜성을 만난 것은

1986년 3월 6일 이었다. - 민경기  2008-05-28 18:57:13  항공우주박물관

 

1979 - 한국-쿠웨이트, 국교수립

쿠웨이트는 한국과 1979년 6월 국교()를 수립하였다. 1990년 8월 이라크군의 침공으로 이의 철군을 요구하는

다국적군에 의한 걸프전쟁에 한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5억 달러의 지원금을 부담하고 군의료진 200명과 수송장비 및

장병 150명을 파견하였다. 1991년 주한 쿠웨이트 대사관이 개설되었고, 1982년 항공협정, 1983년 문화협정,

1984년 경제기술협력 및 무역증진협정, 1994년 이중과세방지협정이 체결되었고 2000년에는 과세방지협약 비준서를

교환하였다. 2000년 현재 대한수입은 2억 4800만 달러, 수출 27억 16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중화학공업제품,

경공업제품, 식료 및 직접소비재 등이고, 수출품은 석유, 석유화학품, 가스, 광물, 화공품 등이다.


 

1979 - 미국의 영화배우 존 웨인(Wayne, John) 사망

웨인 [Wayne, John, 1907.5.26~1979.6.11]

지난 반세기동안 2백여편의 영화를 통해 미국인을 대표해 온 영화배우 존 웨인이 1979년 6월 11일 사망했다.

15년에 걸친 암과의 끈질긴 투병끝에 이날 오후 5시35분 캘리포니아주립대 메디컬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1938년 ‘역마차’로 각광을 받은 이래 서부극의 카우보이 기병을 비롯, 각종 영화에 해병대, 파일럿, 선장 등으로

등장해 무뚝뚝하면서도 자상한 ‘정의의 투사’로 전세계 영화팬의 심금을 울렸으며

‘미국인’의 이미지를 세계에 홍보한 대변인으로 군림했다.
1907년 5월 26일 아이오와주에서 태어난 그는 192cm의 거구를 이용 남가주대 시절 미식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깨 부상 후 영화계에 입문, 포드 감독에게 인정받아 배우가 됐다. 그후 10년 이상을 한결같이 값싼 B급 서부극에 출연하던 중 1939년 서부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역마차’의 주연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붉은 강’ ‘기병대’

 ‘그린 베레’ 등에 출연, 강인한 미국인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심어주었다. 또한 1970년 ‘진정한 용기’(1969)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생전에 그가 보지 못하고 받은 명예훈장에는 다음의 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 ‘존 웨인, 그는 미국인이다’ 라고... -조선



 

1910 - 프랑스의 해양탐험가 쿠스토(Cousteau, Jacques-Yves) 출생

쿠스토 [Cousteau, Jacques-Yves, 1910.6.11~1997.6.25]

생탕드레드큅자크 출생. 1930년 보레스트의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잠수기술을 연구

개발하고, 1943년 E.가냥과 함께 상품명이 애쿼렁(Aqualung)인 수중폐(:scuba)를 발명하였는데, 이 압축공기를

이용한 간편한 수중작업용구인 수중폐는 해양개발과 레저에 새 국면을 열었다. 1948년에는 스위스의 실험물리학자 A.피카르와 함께 심해잠수정 바치스카프호()의 잠수실험, 해중원반()의 제작과 해중조사, 1951∼1952년 칼리프소호로 실시한 홍해의 해양조사, 1967∼1970년에는 역시 같은 칼리프소호로 세계 여러 곳의 해양을 탐험하였다.

또 해중 ·해저의 예술성 높은 기록영화 《침묵의 세계 le Monde du silence》(1953)를 만들어, 1956년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 미국의 아카데미 최우수 장편기록영화상을 수상하였고, 1956년에 만든 《태양이 미치지 않는 세계 Espace sans lumiere》도 아카데미상 등을 받았으며 텔레비전의 연속 과학프로에도 진출하였다. 또한 대륙붕 개발 ·해중생활 ·해양오염방지 등 활동분야를 넓혔다. 1957년 해군소령으로 예편한 뒤에도 모나코 해양박물관장 ·프랑스 해양개발센터 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침묵의 세계》(1953), 필립 디올레와의 공저()인 《위대한 바다의 패자()》(1971) 등이 있다.


 

9 -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출생

가와바타 야스나리 [, 1899.6.11~1972.4.16]

1899년 6월 11일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사별한 것과 병약한 체질은 그의 문학에 강한 그늘을 던졌다. 제1고등학교와 도쿄대학을 졸업하였다. 1924년 요코미쓰 리이치[] 등과 《문예시대》를 창간하여

신감각파의 유력한 일원이 되었으며, 《이즈[]의 무희()》(1926) 등으로 작가적 지위를 확립했다. 《이즈의 무희》는 사춘기의 청순한 연정을 서정적으로 그린 초기의 대표작이다. 그후, 《수정환상()》(1931), 《서정가()》(1932), 인생을 비정()의 눈으로 응시한 《금수()》(1933) 등 문제작을 발표했으며, 《설국()》(1935∼1947)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계속했다.

《설국》은 비현실의 세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순일()한 미()의 구축에 성공했으며, 가와바타 문학의 최고봉으로

지목되는 작품이다. 《설국》은 《센바즈루[]》(1951) 《고도()》(1962) 등 전후의 작품과 함께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가와바타는 격변하는 쇼와[] 시대에서 갖가지 전위문학적 실험을 거듭한 끝에, 전통적인 일본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기의 감성()을 닦아 독자적인 문학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근대 일본문학사상 부동의

지위를 구축하였다. 제자인 미시마 유키오[]가 자결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자살하였다.

그는 1934년 최승희의 일본 데뷔 무용발표회를 보고 당대의 일본 신진 여류무용가로서 그녀를 제1인자로 꼽았으며,

전후 발표한 장편 《무희()》에서 그녀의 예술을 다루었다.

 

1864 - 독일의 작곡가, 지휘자 슈트라우스(Strauss, Richard) 출생

슈트라우스 [Strauss, Richard (Georg), 1864.6.11~1949.9.8]

슈트라우스는 20세기초 독일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음악수업을 받았고,

뮌헨대학교에서 철학미학을 공부했다. 21세 때부터 마이닝겐·뮌헨·바이마르·베를린 등지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능력을 인정받는 한편, 25세 때에는 교향시 <돈 주앙 Don Juan>으로 작곡가로서도 호평을 얻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로베르트

슈만, 뒤이어 리하르트 바그너와 요하네스 브람스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썼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1896, 니체의 작품에서 따옴)를 비롯한 교향시들은 현대 오케스트라의 표현적 가능성을 크게 확장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과 함께 작업한 <살로메 Salome>(1905)·<엘렉트라 Elektra>(1909) 등의 오페라들은 발표 당시 유럽의 가장 전위적인 작품들로 인식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나치와의 애매한 관계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심한 고초를 겪으며

망명 생활을 하다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일류 작곡가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일급의 이류 작곡가이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1947

 

1838 - 스페인의 화가 포르투니(Fortuny, Mariano) 출생

포르투니 [Fortuny (y Marsal), Mariano (José María Bernardo), 1838.6.11~1874.11.21]

스페인의 화가. 19세기 중반에 힘찬 기법과 일화적인 주제로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바르셀로나 아카데미에서

4년을 공부한 뒤 1858년 로마 상을 받아 로마에 가서 공부했다. 1860년 정부 당국에서 그를 모로코로 보내 스페인과

모로코 사이의 전쟁 장면들을 그리도록 했다. 그는 곧 스페인으로 돌아갔지만 파리에서 1년(1869~70)을 지낸 것을

제외하고 로마에서 남은 생애를 보냈다. 파리에서 유명한 미술 상인인 구필과 사업 관계를 맺기 시작했는데, 구필을 통해

그림들을 팔아 엄청난 돈을 벌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포르투니는 때때로 대형 작품을 그렸는데,

예를 들면 모로코 전쟁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초로 한 대작 〈테투앙 전투 Battle of Tetuan〉는 현장감 있는 회화적 보고

형식의 훌륭한 본보기로서 활기가 넘쳤다. 이런 작품보다 더욱 독특한 것은 섬세한 세부 묘사로 가득 찬 작은 풍속화들인데, 그는 이 작품들에서 18세기의 환상적인 장면이 주는 우아함과 매력을 되찾으려 했다. - 브리태니커

(포르투니의 아들 마리아노 포르투니도 화가인데, 이름이 같아 혼돈하기 쉽습니다. ^.@) 

 

1808 - 스위스의 법률가 케른(Kern, Johann Konrad) 출생

1776 - 영국의 풍경화가 컨스터블(Constable, John) 출생

 

1671 -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고산 윤선도() 사망 
1644 - 토리첼리의 기압계 발견이 알려짐

1455 - 수양대군,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로 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