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우표와 사건 06.04(1)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2 - 한국, 유럽 강호 폴란드에 2대0 승, 월드컵 출전 48년만의 첫 승
한국이 2002년 6월 4일 부산에서 벌어진 2002한일월드컵 축구대회 D조 첫 경기에서 유럽의 강호 폴란드를 시종 압도한
끝에 황선홍과 유상철의 골로 2대0 쾌승을 거뒀다. 지난 1954년 스위스 월드컵부터 여섯 차례 월드컵 본선 무대를 노크한 끝에 거둔 첫 승리였다. 한국은 역대 4무10패의 치욕적 월드컵 성적표에 드디어 1승을 보탰다.
부산 주경기장은 경기시작 6시간 전부터 관중들이 몰려들기 시작, 경기개시 휘슬이 울릴 때쯤엔 이미 열광의 도가니였다. 붉은 옷 차림으로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은 "대한민국"을 외치며 열렬한 성원을 보냈다. 전반 초반 폴란드의 거센 공세에
잠시 주춤했던 한국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한국은 최종 수비 홍명보가 상대 진영 깊숙이 침투하는 등 총력 공세를 폈다.
전반 26분 드디어 기다리던 골이 터졌다. 이을용이 왼쪽에서 강하게 밀어준 볼에 황선홍이 가볍게 왼발을 갖다댄 것.
월드컵 1승과 16강 진출의 염원을 담은 이 슈팅은 여지없이 폴란드 골대를 갈랐다. 한국은 후반 8분 유상철이 아크 정면에서 통렬한 오른발 중거리슛을 날려 다시 한번 골대를 흔들었다. 사실상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이후에도 한국은 계속 승승장구하여 월드컵 4강 진출의 기쁨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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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2 - 페루의 건축가, 대통령 벨라운데 테리(Belaúnde Terry, Fernando) 사망
벨라운데 테리 [Belaúnde Terry, Fernando, 1912.10.7~2002.6.4]
페루의 건축가이자 정치가.
1912년 10월 7일 리마에서 출생했다. 국립공과대학 건축학부 교수, 건축 잡지 《페루의 건축 Arquitecto Peruano》
편집장을 거친 후, 1956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M.프라도에게 패하였다.
1957년 인민행동당을 창립하고, 1962년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으나 선거가 무효되었다. 이어 보수적인 군부의 지지를
받아 1963년 6월 대통령선거에서 기독교민주당과 연합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8년 10월 군부쿠데타에 의하여
추방되었다. 1978년 귀국하고, 1980년 민정이양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85년 선거에 패하였다.
2) 1982 - 제8회 주요선진국 정상회담 개최 (베르사이유, G7 정상회의) (4~6일)
1982년 6월 베르사이유 정상회의에서의 합의에 의해 설치된 「기술, 성장 및 고용에 관한 실무회의」의 보고서가
1984년 6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제 10 회 G7 경제정상회의에 제출되었다. 이때 각국 수뇌는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는 것과 더불어 1983년 5월의 미국 윌리암스버그 정상회의에서 결정된 18개의 협력프로젝트의 진전을 환영하고 과학기술실무회의에게 다음 정상회의에서도 동협력프로젝트의 진전에 대해 보고하도록 요청했다.
바마스(VAMAS, 신소재 표준에 관한 베르사이유 프로젝트)는 1982년 G7 정상회의에서 합의된 국제 연구 협력체의 하나로, 신소재 표준에 관한 협력활동을 통해 국제 표준화를 촉진함으로써 신소재 관련 제품의 무역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각 기술 분야별 활동을 통해 얻어진 연구 성과는 국제표준화기구(ISO)나 국제전기 표준회의(IEC)에
제공해 국제 규격이 된다. - 미디어다아라 news.daara.co.kr/news - Google
3) 1946 -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
1946년 후안 페론 대령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선출돼 6월 4일 취임했다. 2차대전 초기에 이탈리아에 주재하고 있던 후안 대령이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공감하고 귀국한 것은 1940년이었다. 1943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문민정권을 폐하고 스스로 노동부장관에 취임했다. 카리스마에 부유한 페론은 사회개혁을 공약하고 노동자 대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그의 지나친 親노동자 정책과 국민을 통제하는 경제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1945년 10월 그는 정적에 의해 투옥된다.
곤경에 처한 그를 구해준 것은 장차 부인이 될 무명배우 에바 ‘에비타’ 두하르테였다. 24살의 그녀는 사생아로 태어나
밑바닥을 전전한 지난 경력이 무색할만큼 아름답고 총명하면서 야심까지 가득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페론지지를 호소하며 노동자대중을 결집시켰고 그 힘으로 페론을 석방시킨 후 그를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했다.
페론은 1946년부터 1955년까지 부인 에바와 함께 2차대전 중에 비축해 둔 풍부한 재정을 연간 20%가 넘는 임금인상과
사회보장제도, 노동자 주택정비에 투입하며 ‘페론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심정책은 결국 20세기 남미 최대
부호국이었던 아르헨티나를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
1952년 온 국민의 사랑을 받던 에바가 세상을 떠나자 페론은 급감한 인기도와 함께 계속된 경제 파탄으로 1955년 실각했다. 이후 1973년 전 부인 에바를 닮은 세 번째 부인 이사벨과 함께 부부가 대통령과 부통령에 나란히
당선되는 이변을 낳기도 했으나 이듬해 조국을 구제할 대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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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1 - 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문학사가 루카치(Lukacs Gyorgy) 사망
루카치 [Lukacs Gyorgy, 1885.4.13~1971.6.4]
마르크주의의 이론을 꽃피운 정통 마르크스주의자 게오르크 루카치가 1971년 6월 4일 사망했다. 루카치는 카를 마르크스 이래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가장 정교하고 성숙하게 발전시킨 이론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마르크스를
해석하고 주를 다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완벽한 체계로 탈바꿈시키고 변화한 현실에 맞게 이론을 가다듬었다.
루카치는 1885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부유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유태인 핏줄에 관해서 무관심했다.
부다페스트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베를린대에서 지멜에게, 하이델베르크대에서 베버에게 사사했다.
하지만 부르주아라는 계급적 조건에 반감을 느껴 1918년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첫 주저인 `역사와 계급의식`은 초기
마르크스의 주요개념이었던 소외와 물화를 재발견하여 블로흐와 벤야민, 마르쿠제 등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블룸 테제`를 발표한 이후 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적극적인 당활동을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히틀러가 등장한 후 모스크바로 망명해 과학학사원 철학연구소에서 미학·문학사에 몰두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에서도 스탈린의 주도 아래 수립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도 충돌했다.
1944년 귀국 후 `젊은 헤겔`(1948) `이성의 파괴`(1952)를 발간했다. 반소파(反蘇派)의 입장을
견지하며 한때는 나지 이무레 정권의 문화장관이 되었으나 곧 루마니아로 추방됐다. 1957년 사면되어
다시 부다페스트로 돌아온 후에는 주로 미학연구에만 전념했다. 유고로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과 `윤리학`이 있다.
생애 말년에는 "최악의 사회주의조차 최선의 자본주의보다 항상 더 낫다"라고 주장하며, 세계 유일한 돌파구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이며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혁 역시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에 입각해야 함을 강조했다.
2) 1942 - 독일 나치 국가보안본부 수장 하이드리히(Heydrich, Reinhard) 사망
하이드리히 [Heydrich, Reinhard (Tristan Eugen), 1904.3.7~1942.6.4]
독일의 나치 관리. 별칭은 Der Henker('교수형 집행인').
친위대(Schutzstaffel/SS)에서 하인리히 히믈러의 수석부관을 지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점령지에서의 대량학살을 주도했다. 14세 때 의용군에 들어가 시가전·테러리즘·약탈 등에 관한 훈련을 받았다. 1922년 해군에 들어가 대위까지 진급했으나 나치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1931년 전역했다.
그후 히틀러가 총리가 되자 하이드리히는 뮌헨 경찰의 정치부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악명 높은 다하우 집단수용소의 통제권을 맡게 되었다. 1934년 베를린 지역 SS 책임자가 되었으며, 그뒤 SS 총책임자 하인리히 히믈러 밑에서 부책임자로
일했다. '국가의 적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었던 그는 1941년 9월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남작 후임으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 총독이 되었다. 그는 프라하에 도착한 지 5주 만에 300명의 체크인을 처형했다. 그뒤 점차 고조되는 사보타주·테러 행위를 진압하기 위해 노르웨이·네덜란드·프랑스 점령지로 급파되었고 그가 가는 곳마다 더 많은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유럽 전역의 반나치 인사들은 그를 증오하고
두려워하여 '교수형 집행인'이라고 불렀다.
1942년 5월 27일 애국적인 체크인들이 프라하-베를린 고속도로에서 차를 타고 가던 하이드리히에게 폭탄을 투척하고 총을 쏘았다. 그는 6월 4일 프라하 병원에서 죽었다.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 관리들은 그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수백 명의
체크인을 처형하고 리디체 마을 전체를 파괴했다. /브리태니커
참조 : 하이드리히 암살사건 (1942.5.27)
3) 1943 - 아르헨티나 군사 쿠데타, 페론 실권 장악
1943 년 6 월 4 일 「통일 장교단」이라고 자칭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군부 내 소장파(少壯派) 장교들이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이 쿠데타 주모자 가운데 후안 도밍고 페론(Peron, Juan Domingo, 1895~1974) 대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페론은 일찍이 1930 년대 이탈리아 주재 무관(武官) 으로 근무하면서 파시즘의 대중 동원력에 매료되었던 인물이었다.
군사 정권 내부에서도 수차 대통령이 교체되는 가운데 페론은 국방부 장관·노동부 장관·부통령 겸 노동복지 장관 등을 거치면서 사실상 대통령을 능가하는 실권자로 성장했다. 노동부 장관·노동복지 장관을 역임하면서 노동자들의 정치적 잠재력을 인식한 페론은 이때부터 포퓰리즘 정책을 펴면서 그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전쟁 중 아르헨티나 군사정부의 친독(親獨)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미국은 제 2 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르헨티나 반(反)정부 진영을 고무하면서 민정(民政) 이양을 강요했다. 그 결과 파렐 발카르세 정권은 민정 이양을 약속하는 한편,
1945 년 10 월 초 페론을 구금했다. 페론의 부인 에바 페론을 비롯한 페론의 추종 세력들은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페론 석방 운동을 벌였다. 10 월 17 일 노동자들은 대통령궁(宮) 앞 에서 페론의 석방을 요구했고, 정부는 이에 굴복했다.
페론은 이듬해 2 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54 %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페론은 기존의 지배 세력이던 군부(軍部)·교회는 물론 노동 조합의 지지 까지 확보함 으로써 집권 초기 강력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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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8 - 제3회 월드컵축구대회 개막 (프랑스)
FIFA(국제축구연맹) 주관 아래 열린 월드컵축구대회로, 15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38년 6월 4일부터 19일까지
16일간 프랑스에서 개최되었다. 1936년 8월 15일 열린 베를린총회에서 남미의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유럽의 프랑스가
개최지로 선정되었고, 아르헨티나는 남미국가를 개최지로 할 차례를 어긴 데 반발하여 결국 지역예선에 불참하였다.
36개국이 지역예선에 참가하였고, 이 대회부터 개최국과 지난 대회 우승국은 지역예선을 거치지 않고 자동으로 본선에 진출한다는 규정에 따라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포함하여 16개국이 본선에 올랐다. 원래 오스트리아도 지역예선을 통과하였으나 나치 독일에 합병되어 단일팀으로 출장함으로써, 참가국수는 15개국이 되었다. 네덜란드령(領) 동인도가 아시아국가로는 처음으로 본선에 참가하였고, 개최지 선정에 반발한 아르헨티나 그리고 국내사정이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에스파냐·우루과이 등 일부 축구강국들은 지역예선에 불참하였다.
대회는 파리·마르세유 등 9개도시의 10개 경기장에서 열렸으며, 1회전부터 토너먼트로 진행하였다. 대회 결과 이탈리아가 제2회대회에 이어 우승하였고 헝가리가 준우승, 브라질이 3위를 차지하였다. 18개경기가 치러진 이 대회의 총관중은
48만 3000명, 평균관중은 2만 6833명, 총득점은 84점, 경기당 평균득점은 4.66점이다. 개최지 선정을 둘러싸고
유럽과 남미 국가들 간의 갈등이 두드러진 대회였다.
2) 1993 - 과학로켓 `과학1호`, 서해안에서 발사 (96초동안 오존층 측정)
한국항공우주연구소 등이 개발한 한국최초의 과학로켓 '과학1호'가 1993년 6월 4일 서해안에서 발사됐다. 길이 6.7m,
무게 1.4t, 직경 42cm의 고체연료추진형 로켓으로 발사후 최고 비행고도 38.6km, 비행거리 77km를 188초 동안 비행하면서 한반도 상공의 오존층 농도를 측정했다. 1997년에는 고도를 3배가량 높일 수 있는 2단계 추진방식을 사용하는
'과학2호'를 쏘아올렸다. '과학2호'는 1호와 달리 페어링 기술을 적용, 한반도 상공의 오존층 측정은 물론 우주에서
날아드는 우주X선을 국내 최초로 관측하기도 했다. -조선
1990 - 한국-소련 정상회담 (샌프란시스코)
노태우 대통령과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1990년 6월 5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날의 회담은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양국이 단교한 이래 86년만에 국교수립을 가능케 했으며 동시에 동북아 냉전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됐다.
한소정상회담은 소련의 한반도정책과 노태우정권의 북방정책이 맞아떨어져 성사된 것으로, 고르바초프는 한반도 평화정착과 한소경제협력 확대를 바탕으로 소련의 경제발전을 도모함으로써 자신의 개혁,개방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으며 한국측 역시 사회주의권 특수를 통해 경제침체를 극복하면서 한소수교를 통한 한반도 평화구조의 정착이 필요했던 때문이다. 이 회담 결과 남북교차승인 문제가 활발히 거론되고,국가보안법 철폐, 방북인사 석방 요구가 제기됐으며 9월 30일 한소수교가 이루어졌다.
- China, 1 Yuan(圓) (1953, Banknote)
1989 - 톈안먼사건[天安門事件] 발생
1989년 6월 4일 중국 정부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무력진압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중국의 민주화 시위는 1989년 4월 15일 급진개혁주의자로 학생들의 추앙을 받던 후야호방[胡耀邦] 전 당총서기가 심장마비로 죽으면서 시작되었다. 베이징대학교[北京大學校] 학생 수천 명은 톈안먼 광장에 집결해 후야오방의 재평가를 요구하며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4월 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에 수십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석하면서 민주화 시위가 본격화되었다. 5월 13일부터 2,000여 명의 학생이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5월 18일 시민·학생 100만여 명이 단식농성 지지시위를 벌였다. 이에 당국은 5월 19일 밤에 베이징에 군을 투입하기 시작했고, 5월 20일 베이징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또한 세계여론의 빗발치는 비난과 경제제재 조치에도 불구하고 반대자들에 대한 체포와 숙청을 단행했다. 톈안먼 사건 이후 중국공산당은 6월 23일부터 2일간 제13기 4중전회를 열고 자오쯔양[趙紫陽] 지지세력을 제거하는 권력개편을 단행했다. 장쩌민[江澤民]이 신임 당총서기에 선출됨으로써 리펑[李鵬]·장쩌민 체제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1981 - 사다트와 베긴, 팔레스타인과 시나이문제로 회담
시나이(Sinai)의 어원은 BC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디아어(語)로 달을 의미하는 신(sin)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고대로부터 전략적인 중요성 때문에 복잡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근세에는 시나이반도(Sinai Pen.)의 영유를 둘러싸고 터키와 이집트가 싸웠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이집트령으로 인정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시나이반도는 이따금 이스라엘에 점령되었고, 1967년 중동전쟁(中東戰爭) 이래 이스라엘의 군사점령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제4차 중동전쟁 후, 1974∼1975년 병력의 분리협정에 따라 연간 약 500만 t의 산유량을 내는 유전지대를 포함한 반도의 일부가 이집트령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 1977년 11월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과 1978년 9월 미국 대통령 카터가 주선한 캠프데이비드 회담을 통해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1979년 평화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이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은 점령지인 시나이반도에서 군대를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1982년 4월에는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완전히 넘겨주었다
1980 - 우리나라 첫 태양광 발전소가 아차도에 준공
1970 - 통가, 영국으로부터 독립
통가 제도는 1616년 네덜란드인에 의하여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나 통가 왕국의 역사는 10세기경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태평양에 있는 제도로서는 일찍부터 왕조를 세워 작은 나라이면서도 인접한 여러 섬에 그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통가왕조는 투이통가 1세가 된 아호에이투에 의하여 950년경 수립되었다. 1773년 제임스 쿠크 선장이 방문한 이후 프렌들리 제도로 불리기도 하였다. 1845~1893년 동안 조지 투푸 1세가 내란을 진압하고 지금의 군주제를 수립하였다.
19세기 말 베를린조약에 따라 1900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으나, 1958년 영국-통가 우호조약이 체결되어 영국은 외교와 군사권만을 유보한 채 자치권의 확대를 인정하였다. 1970년 왕국으로서 독립하게 되었다.
1956 - '체신의 날' 제정
체신의 날-정보통신의 날 유래 및 연혁
1956.06.04 - 우정총국 개설 축하연을 베푼 날(1884. 12. 4)을 '체신의 날'로 지정(체신부훈령)
1964.05.31 - 충남 금산군내 기자단이 집배원의 노고를 위로 격려하고, 1966.05.30부터는 모범 집배원을 포상하고 노고를 치하하는 행사 를 가짐
1967.11.27 - 5월 31일을 '집배원의 날'로 지정(체신부훈령)
1972.07.07 - 고종황제께서 우정총국 개설을 명령한 날 (1884. 4. 22)을 '체신의 날'로 개정(체신부훈령)
1973.01.24 - 집배원의 날을 '체신의 날'에 통합(체신부훈령)
1973.03.30 - 「각종기념일에관한규정」에 규정
1996.05.30 - 명칭 변경(체신의 날 → 정보통신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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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 항일유격대 보천보 급습(보천보 전투)
1937년 6월 4일,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국 공산당 소속의 항일유격대 동북항일연군 제1군 6사 병력 100여명이 압록강을 건너 함남 갑산군 내 보천보를 급습했다. 보천보는 일본인 50여명과 조선인 13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작은 시골도시. 일본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을 파괴하고 관청을 불태운 뒤 밤늦게 떠난 유격대의 뒤를 인근에 있는 일본 경찰이 추격에 나섰지만 7명의 전사자와 14명의 부상자만 내고 말았다.
이상이 북한이 그들의 영도자 김일성이 주도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보천보 전투`다. 이 전투는 당시 국내신문이 호외를 발행할 정도로 크게 보도됐지만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를 실제로 지휘했는지,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에서 활약한 김일성과 동일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조선
보천보 전투는 1937년 6월 4일 만주에서 활약하던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부대가 국내진공하여 량강도 보천군 보천읍{(보천보)(해방전 명칭:혜산군 보천면 보전리)}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퇴각한 사건이다.
배경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독립군과 중국공산당을 비롯한 항일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던 독립군의 자취는 거의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의 일선에 섰던 인사들이 체포되거나 일본의 탄압과 회유에 속속 전향하여 일본에 협력함으로서 점차 광복에 대한 허무주의와 패배주의가 확산되고 있었다. 당시 동북항일연군 제6사의 지휘관이었던 김일성은 비록 작더라도 선전효과를 극대화하여 이런 패배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했다.
전투경과
보천보 내의 지하조직으로부터 소수의 경찰병력이 느슨한 경계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은 100여명의 병력으로 급습했다. 보천보에 진입한 유격대는 일본의 각종 행정기관과 경찰 주재소에 방화하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식당과 부자집을 돌며 군자금을 강탈했다. 일본경찰은 모두 도주해서 쌍방의 피해는 없었고, 민간인 사상자로 일본인 요리사 한명과 유탄에 맞아 숨진 갓난아기 한명이 있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항일유격대는 토벌대가 출동하기 전에 보천보를 빠져나와 만주 방면으로 도주했다.
결과와 영향
보천보 전투는 군사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단순 소동에 지나지 않았으나, 김일성이 의도한 바와 같이 일제의 지배력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 확산되어가고 있던 패배주의를 저지하는데는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이러한 김일성의 의도는 이 사건에 대해 두번이나 호외를 발행하여 전국에 보도한《동아일보》에 의해 증폭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26살에 불과하던 김일성은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김일성 전설"이 생겨날 정도로 신화화 되었다. 중도파 여운형뿐만 아니라 김일성과는 노선이 달랐던 임시정부의 김구도 보천보 전투의 결과에 고무되었다고 한다. [2]
일제 또한 김일성을 주시하게 되어 만주지역에 산재하던 항일유격대의 뿌리를 뽑기위해 대규모 토벌전을 전개하고 국내에 잠입해 있던 김일성 세포조직을 일제검거했다. 1938-1939년에 일제의 토벌전은 절정에 달해서 김일성을 비롯한 많은 항일유격대들은 결국 만주지역을 포기하고 소련령 연해주로 도피하게 되었다.
북조선에서 보천보전투는 김일성의 항일투쟁 신화의 절정으로 학습되고 있으며 정권의 정통성의 토대가 되고 있다. 남한에서는 한동안 보천보전투를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했고, 김일성이 아닌 다른 인물이 주도한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현재는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위키백과
1937 - 피카소 '게르니카[Guernica]' 완성
1913 - 영국 여성참정운동론자 데이비슨, 경마장에 뛰어들어 자살
1886 - 조선-프랑스 수호통상조약 체결
1875 - 독일의 시인, 소설가 뫼리케(Morike, Eduard) 사망
1867 - 핀란드의 군인, 정치가 마너하임(Mannerheim, Gustaf) 출생
1738 - 영국의 왕 조지 3세(George III)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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