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우표와 사건 06.04(2)
1937 - 피카소 '게르니카(Guernica)' 완성
공화파 정부로부터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걸릴 대형 벽화를 의뢰받아 고민하고 있던
피카소가 ‘게르니카의 피’ 소식을 접한 것은 이틀이 지난 뒤였다. 조국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머무르고 있던 피카소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떨었고 곧 깊은 슬픔에 잠겼다. 6월 4일, ‘게르니카’가 완성되자 ‘전쟁과 폭력을 고발한 20세기 묵시록적 작품’ ‘학정에 대한 저항과 화해의 상징’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검은 색 바탕의 대형 캔버스(7.82m ×3.51m)에는 고통과 분노, 절규와 죽음이 가득했다. 화려한 색채를 즐겨 사용했던 평소와 달리 흑·백을 주조로 한 단순배색과 기하학적 구도로 전쟁의 비극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켰다. 2차대전 중 미국으로 건너간 ‘게르니카’는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찾아왔을
때 돌려주라는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1981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조선 (1937.4.26 - 독일군, 스페인 게르니카 공습)
(파시스트들의 잔학성이 극에 달하자 공화파는 피카소에게 이 사건을 그림으로 그려줄 것을 요청했고,
피카소는 프랑스 파리의 그랑 오귀스탱가에서 ‘게르니카’라는 대작을 완성했다.)
에스파냐 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피카소(Picasso, Pablo, 1881~1973)의 대표작.
크기는 349×775cm이며, 에스파냐의 소피아왕비 미술센터에 소장되어 있다.
게르니카는 에스파냐 북부 바스크지방의 작은 도시로, 1937년 4월 26일 에스파냐내란 중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무차별 폭격에 의하여 폐허가 되었다. 마침 그 해에 열리기로 예정된 파리만국박람회의 에스파냐관(館) 벽화제작을 의뢰받고 있던 피카소는 이 조국의 비보에 접하자, 한 달 반 만에 대벽화를 완성, ‘게르니카’라고 이름붙였다.
이 작품은 파리만국박람회를 비롯하여 구미 여러 나라에서 순회전을 가졌다. 그러나 에스파냐가 프랑코 체제가 되자,
공화파 지지자였던 피카소는 그림반입을 거부하고, 1939년 에스파냐의 민주주의와 자유의 회복 후 반드시 프라도에 전시할 것 등의 조건으로 이 작품을 뉴욕 근대미술관에 무기한 대여형식으로 빌려주었다. 프랑코의 독재가 계속되는 한 조국과 화해할 수 없다고 한 피카소의 신념으로 인해 1981년에야 에스파냐에 반환되어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되었다가,
일부 정치인과 예술가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보관상의 문제로 1992년 소피아왕비 미술센터로 옮겼다.
비극성과 상징성에 찬 복잡한 구성 가운데 전쟁의 무서움,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상처입은 말, 버티고 선 소는 피카소가 즐겨 다루는 투우의 테마를 연상케 하며, 흰색·검정색·황토색으로 압축한 단색화에 가까운 배색이 처절한 비극성을 높이고 있다. 극적인 구도와 흑백의 교묘하고 치밀한 대비효과에 의해 죽음의 테마를 응결시켜
20세기의 기념비적 회화로 평가된다.
1913 - 영국 여성참정운동론자 데이비슨, 경마장에 뛰어들어 자살
영국의 여성참정권운동은 1903년 팽크허스트(Pankhurst, Emmeline, 1858~1928)가 ‘여성사회정치연맹(WSPU)’을
결성하면서 점잖던 토론의 시대를 끝내고 과격한 투쟁방식으로 전개된다. 화랑에 침입해 그림을 훼손하고 전신용 전선을
절단했으며 철도역과 축구장에 불을 질렀다.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의 요구는 “남성이 누리는 것만큼의 권리를 여성에게도 달라”는 것이었지만 남성들이 조용히 있을 리 없었다. 남성들은 신문과 교회 설교 등을 이용해 “여성은 비논리적이고 변덕스러우며 투표에 따르는 무거운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정부도 곤혹스러웠다. 관대하면 약해보였고 탄압하면 영국의 양심이 아팠다.
운동은 1913년 6월 4일 7만5000여관중이 운집한 런던 남부 앱섬다운스 경마장에서 절정을 이뤘다. 말들이 마지막 코너를 돌아 결승점을 향해 질주하고 있을 때 갑자기 팽크허스트의 열렬한 추종자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이 질풍처럼 내달리는 국왕 소유의 말고삐를 잡으려다 발굽에 밟혀 4일 뒤 숨진 것이다. 소지품에서 왕복 기차표가 발견되고 오빠가 법정에서 “
사고였다”고
진술하는 등 자살여부에 대해 논란이 없진 않았지만 여성들은 데이비슨을 순교자로 추앙했다. 여성들의 성난 외침은
데이비슨의 죽음으로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그러나 참정권을 쟁취하는 데는 1차대전이라는 큰 변화가 필요했다.
이듬해 전쟁이 발발하자 운동가들은 전진을 중단하고 전쟁 지원에 나섰다. 전쟁기금을 모금하고 여성의 전시산업체 동원을 독려하는 등 어려움에 처한 조국을 구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남성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1918년 1월 마침내 영국 정부가 30세, 중산층 이상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보장받기까지는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Google
1886 - 조선-프랑스 수호통상조약 체결
프랑스는 개항 이전에 천주교탄압을 구실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몇 차례 무력침략을 해왔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런 역사적 관계 때문에 조불수호조약의 체결은 다른 서구열강에 비해 다소 늦게 이루어졌다. 프랑스는 1882년 조선과
조약 체결을 꾀하였지만, 천주교선교 문제로 실패하였다. 이후 미국에 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이 먼저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자 프랑스는 F.G.코고르당을 전권위원으로 임명, 청나라를 통하여 조선과의 조약체결을 요청해왔다.
1886년 4월 서울에 온 코고르당은 조선측 전권 김만식(金晩植)과 외교고문 미국인 O.N.데니와 교섭을 벌였다.
이때 조선정부가 프랑스가 요구한 천주교의 선교 허락과 교인들의 신분보호를 수용함으로써 그해 6월 4일 수호조약이
조인되고 1887년 5월 30일 비준(批准) 교환되었다.
이 조약 역시 불평등조약이면서도, ‘언어 ·과학 ·예술 ·법률을 연구하고 교회(敎誨)하려고 조선에 가게 되는 프랑스인의
신분을 보호한다’는 조항을 두어, 프랑스는 다른 나라와의 조약과는 달리 조선에 선교를 목적으로 학교 등을 세울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이 조항은 최혜국조항(最惠國條項)에 의해 다른 나라도 프랑스와 같은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1886년 6월 4일 프랑스측 전권특사 코고르당, 조선측 한성판윤(漢城判尹) 김만식(金晩植), 고종의 외교고문관 데니 사이에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국교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조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양국은 천주교 문제로 만만찮은
갈등을 겪었으며, 특히 청일전쟁(1894~95) 후 프랑스는 러시아·독일과 더불어 3국간섭의 일원이 되어 경의선 부설권,
광산채굴권, 조선정부에 대한 차관공여 등 막대한 경제적 이권을 얻었다.
또한 조선의 농상공부 우체사무주임(우체국장, 1888. 12)에 클레망세가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철도·광산 등의 기술분야 및 법부고문에 프랑스인들이 등용되었다. 조선교구의 제8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뮈텔 주교는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종현성당(지금의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을 준공시켰고
드망주 신부는 1906년 10월 19일 주간지 [경향신문 京鄕新聞]을 창간했다. - naver 지식iN
1867 - 핀란드의 군인, 정치가 마너하임(Mannerheim, Gustaf) 출생
마너하임(만네르헤임) [Mannerheim, (Carl) Gustaf (Emil), 1867.6.4~1951.1.27]
제2차 세계대전 때 월등한 병력의 소련군에 맞서 조국 핀란드를 수호했으며 1944~46년 대통령을 지냈다.
스웨덴 혈통의 마너하임은 1889년 기병대 중위로 러시튿봇?입대했다. 핀란드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마너하임은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수훈을 세워 중장으로 진급하고 군단장이 되었으나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독립을 선언한 조국 핀란드로 돌아왔다. 보수적이며 군주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던 마너하임은 핀란드가 내전에 휩싸인 1918년 1월 독일의 지원하에 ' 백군'의 사령관이 되어 4개월 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렀고
핀란드 영토내의 볼셰비키 축출에 성공했다. 마너하임은 1918년 12월 섭정에 올라 1919년 공화국이 선포될 때까지
핀란드를 통치했으나 이후 1931년까지는 거의 은둔생활을 했다
1738 - 영국의 왕 조지 3세(George III) 출생
조지 3세 [George III, 1738.6.4~1820.1.29]
조지 2세의 손자로, 1760년에 즉위하여 앞의 2대의 왕과는 달리 왕권의 회복을 꾀하였다. 그래서 왕실비용을 줄인 돈으로 의원을 매수하여 어용당을 만들어, 이를 조종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국정의 지도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미국의 독립이라는 뼈아픈 실패를 초래하였다. 이따금 정신에 이상을 보였고, 특히 1811년 이후에는 폐인
같은 만년을 보냈다. 더욱이 그의 치세는 초기의 토리당(黨) 어용화 시대 등,
전후 수년간을 제하고는 소(小)피트가 주도하는 토리당의 지배 시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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