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우표와 사건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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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6 - 이범석 장군 및 광복군 5백여명 귀국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 1900~1972)은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을 도와 중대장으로 참가하여 활약했다.
이후 소련으로 진출해 1922~25년 소련 합동민족군 연해주 지역 지휘관으로 소련의 혁명전쟁에 참가했으나 소련의 대일정책에 불만을 품고 다시 북만주로 돌아와 고려혁명군 결사대를 조직했다. 1933년 뤄양[洛陽] 군관학교 한국인 장교대장을,
1936년 중국 제3로군 사령관 등을 지냈다. 1941년 한국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을 겸임했으며, 중국 주재 미사령부와 합동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27일 광복군을 거느리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비행기로 여의도까지 왔으나 미군의 거부로
중국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1946년 6월 광복군 간부들과 함께 귀국했다. 미군정이 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자
12월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고 단장이 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1950년 주중대사,
1952년 자유당 부당수 및 내무부장관 등을 지냈다. 1952, 1956년 2번 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1960년 초대 참의원에 당선되었고, 1963년 '국민의 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을 지냈으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저서로 〈우등불〉·〈방랑의 정열〉·〈민족과 청년〉 등이 있다. - Daum 백과사전
2) 1937 - 영국의 윈저공, 사랑 위해 왕위 포기하고 심프슨 부인과 결혼
20세기 초, 사랑을 위해 왕위를 버린 에드워드 8세(Edward VIII, 1894~1972) 이야기는 처음 스캔들로 시작했지만 훗날에는 ‘세기의 로맨스’로 평가됐다.
1936년 12월10일 오후, 온 영국이 숨을 죽였다. 3시42분, 하원의장은 침통한 어조로 볼드윈 총리가 건넨 칙어를 읽어나갔다.
“오랜 시간 신중히 고려한 결과, 짐은 왕위를 버리기로 했다….”
독신이던 영국왕 에드워드 8세가 두 번의 이혼 경력을 가진 미국여성 워리스 심프슨(Simpson, Mrs. Wallis, 1896~1986)과의 사랑을 위해 국왕자리를 동생 요크공에게 넘기겠다고 공식 선언한 것. 에드워드 8세는 6년간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을 추진했으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귀족도 영국인도 아닌데다 유부녀였기 때문. 10월에 두번째 남편과의 이혼은 성사됐지만 왕비가 되기엔 두 번의 이혼경력은 너무도 큰 장애였다.
에드워드 8세는 이튿날 밤 10시 라디오를 통해 국민에게 작별을 고한다. “사랑하는 여성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국왕으로서 무거운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없어….”
젊은 국왕의 쾌활하고 평민적인 풍모에 애정을 가졌던 영국민은 눈물로 이 방송을 들으며 그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방송을 끝낸 뒤 윈저공(Duke of Windsor)으로 격하된 그는, 새로 왕이 된 조지 6세 등 가족과 이별연을 한 뒤 곧장 심프슨 부인이
기다리는 칸으로 떠났다.
1937년 6월 3일 드디어 프랑스에서 결혼한 두 사람은 이후 영국을 제외한 여러 나라를 다녔으며 에드워드 前 영국 국왕은 프랑스의 연락 사무소에서 근무를 하기도 했다. 영국 주변을 맴돌기만 하던 두 사람은 1967년에야 비로소 다른 왕실 가족들과 함께
공적인 왕실 모임에 초대되기도 했다.
3) 1904 - 미국의 흑인 의사 드루(Drew, Charles R.) 출생
드루 [Drew, Charles R(ichard), 1904.6.3~1950.4.1]
수혈용 혈액보존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이다. 1926년 애머스트 칼리지를 졸업하고 몬트리올에 있는 맥길대학(1933 졸업)과
컬럼비아대학(1940 졸업)을 다녔으며, 그뒤 워싱턴 D. C.에 있는 프리드먼 병원과 하워드대학(1942~50)의 외과의사와 교수로 있었다. 사람의 혈액 구조와 수혈을 위한 혈액보존에 관한 연구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 수혈협회 의학분과와
미국 적십자혈액은행의 책임자가 되었다.
1950년 4월 1일 자동차 사고를 당한 드루는 수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태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으나
병원은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치료를 거부했다. 그는 흑인 전용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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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9 - 스위스의 세균학자 아르버(Arber, Werner) 출생
아르버 [Arber, Werner, 1929.6.3~ ]
제네바대학교를 졸업한 후 1971년부터 바젤대학교 분자세균학 교수로 있다. DNA를 분해시키는 효소(제한효소)를 대장균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다. H.O.스미스, D.네이선스와 함께 제한효소의 발전과
분자유전학에 이를 응용한 공로로 197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2) 1906 - 미국 태생의 프랑스 가수 겸 무용가 베이커(Baker, Joséphine) 출생
베이커 [Baker, Joséphine, 1906.6.3~1975.4.12]
미국 세인트루이스 출생. 에스파냐인과 흑인의 혼혈아로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한 그녀는 8세 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하였으며
1923년 뉴욕의 음악당에서 흑인 음악극의 주역 댄서로서 데뷔한 것이 호평을 받았다. 그후 1925년 파리에 초청되어 샹젤리제극장의 '흑인 레뷰(La Revue négre)'에서 춤을 춘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파리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카지노 드 파리 등의 무대를 통해
춤과 노래로 일약 유명해졌다. '호박색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파리의 레뷰계에서
대스타가 된 후, 영화에도 출연하여 《발가벗은 여왕》(1935) 등에서 활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레지스탕스운동에도 참가하였으며, 후에는 프랑스 자유군 중위로서 아프리카·중근동전선의 병사들을 위해
위문공연도 하였다. 전후 1950년부터 세계 각국의 전재고아(戰災孤兒) 구제를 위해 '레 밀랑드'라고 하는 이상향(理想鄕)을 설립하고 1956년에 무대에서 은퇴하였으나 1959년 레 밀랑드 유지를 위해 파리의 무대에 복귀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히트곡으로는 《두 사람의 연인》 《귀여운 통킹아가씨》 등이 있다.
3) 1873 - 독일 출생의 미국 약리학자 뢰비(Loewi, Otto) 출생
뢰비 [Loewi, Otto, 1873.6.3~1961.12.25]
1873년 6월 3일 독일 헤센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출생하였다. 스트라스부르대학교·뮌헨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뒤에 화학·생리학 등을 전공하고, 1897년 프랑크푸르트 시민병원 근무, 1900년 마르부르크대학교 강사가 되었다.
1909년 그라츠대학교 약리학 교수를 역임했다. H.H.데일과 함께 신경의 자극전도에 관한 연구를 하여, 신경의 자극이 근육에
전달되는 것은 화학물질을 생산하기 때문임을 확인했다. 1936년 이 연구에 대한 업적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1940년 뉴욕대학교 의학부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1946 - 러시아의 혁명가, 정치가 칼리닌(Kalinin, Mikhail) 사망
칼리닌 [Kalinin, Mikhail Ivanovich, 1875.11.19~1946.6.3]
미하일 이바노비치 칼리닌 (러시아어: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Кали́нин, 1875년11월 19일(율리우스력 11월 7일)~1946년6월 3일)은 러시아의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가이다.
1889년상트페테르부르크로 와 철강 노동자가 되었고, 1898년러시아 사회 민주노동당(РС-ДРП)에 가입했다.
1919년부터 1938년까지 명목상 국가원수(國家元首)인 전연방 집행위원회 공동의장을 거쳐, 1939년부터 1946년까지
역시 명목상의 국가원수인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을 지냈다.
그는 1919년부터 1925년까지 후보 정치국원이었으며, 1925년에 정치국원으로 승격하여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독일명 쾨니히스베르크)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43 - 알제리에서 드골지휘하에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 결성
드골은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5월 준장이 되고, 6월 5일 레이노내각의 육군정무차관이 되었으나,
6월 16일 내각 총사퇴에 이어 프랑스는 독일군에게 항복했다(5월 22일 휴전조약 조인). 6월 18일 드골은 망명지 런던에서 프랑스
국민에게 항전을 계속하도록 방송으로 호소해, 이후 드골의 이름은 독일에 맞서 싸우는 프랑스를 상징하게 되었다. 드골은 런던에서 자유프랑스군을 조직해 연합군에 가담하는 한편, 프랑스 내의 레지스탕스세력 결집에 힘썼다. 연합군이 북아프리카를 해방한 뒤인 1943년 6월, 알제리에서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를 조직하고, 이어서 1944년 6월 2일 이 위원회를 프랑스공화국 임시정부로
개조하여 그 총리가 되었다. 이로써 드골은 8월 25일 파리해방과 함께 국민해방의 영웅으로 파리에 돌아와,
전후 프랑스의 최고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1924 - 체코 출신의 독일인 작가 카프카(Kafka, Franz) 사망
카프카 [Kafka, Franz, 1883.7.3~1924.6.3]
20세기 문학사의 한 축을 이룬 체코 출신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1924년 6월 3일 빈 교외의 킬링 요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41세였다. 프라하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프라하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나 이즈음 시작된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본격적인 습작에 들어갔다.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08년부터는 노동자재해보험국에서 14년 동안 근무했다.
독일어와 체코어가 함께 사용되던 프라하에서 그는 독일어로 작품을 썼다. 그의 문장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간결하지만 독일어 산문 문학 중 가장 명료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간의 부조리와 인간존재의 불안 등을 날카롭게 통찰해 현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한 그의 작품들은 사르트르와 카뮈에 의해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았다. 소련 공산당은 `절망과 불안을 조장하는 부르조아 퇴폐 반동 작가`라는 이유를 들어 그의 작품을 오랫동안 금기시했으나 1964년 해금됐다.
그의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성(城)`과 미완성 장편소설 `심판(審判)` 등이 있다. -조선
"모름지기 큰 죄는 오직 하나 바로 초조이다.
초조 때문에 우리는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초조 때문에 우리는 돌아가지 못한다."
- 프란츠 카프카
- 공중전화 카드
1922 - 한국 천주교 신부, 추기경 김수환(金壽煥) 출생
김수환 [金壽煥, 1922.6.3(음력 5.8)~2009.2.16]
한국의 가톨릭 성직자·추기경. 세례명 스테파노.
1922년 대구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막내로 출생하여 194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도쿄 조치[上智]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제2차세계대전으로 1944년에 귀국하였다. 1951년 가톨릭대학(전 서울 성신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4년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신학사회학을 연구하였으며, 1974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1년 사제 서품을 받고 대구 대교구 안동천주교회 주임신부가 되었으며, 1955년 대구 대교구 김천시황금동 천주교회
주임신부 겸 김천시 성의중고등학교장을 지냈다. 1964년 주간 가톨릭시보 사장, 1966년 마산 교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5월 29일 주교가 되었다.
1968년 제12대 서울 대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대주교가 되었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다. 1970년 이후 한국 주교회의 의장,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준비위원장, 교황청 세계주교회의(시노두스) 한국 대표를 지냈다.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성회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가운데 개최하였으며,
1998년 서울 대교구장을 은퇴하였다.
1968년 서울 대교구장 취임사에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 원칙에 따라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였다. 또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의 추구'를 사회 교리로 주장하였다. 취임사와 사회 교리로 인해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과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었고, 이후 시국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저서에《하느님은 사랑이시다》(분도출판사, 1981), 《평화를 위한 기도》(1981),
《이 땅에 평화를》(햇빛출판사, 1988) 등이 있다.
1911 - 사찰령 공포
삼십일본산(三十一本山)은 일제강점기에 전국 1,300여 사찰을 31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본산을 두었던 제도이다.
처음에는 삼십본산이었으나 1924년 전남의 화엄사(華嚴寺)가 본산으로 승격된 뒤 삼십일본산이 되었다.
일제는 1911년 6월 사찰령(寺刹令)을 공포하였고 같은 해 9월 사찰령시행규칙을 발표하였다. 이 법령은 일제의 식민지 종교정책의 하나로 시행된 것으로 본산을 정하여 국내의 사찰을 나누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본사와 말사에 주지를 두되, 본사의 주지는 총독의 인가를 받도록 하고 말사의 주지는 각 도지사의 인가를 받아 임무를 수행하도록 규정하였다. 본산제도는 사찰행정의 주체인 주지
임면이 관(官)의 권한에 달리게 되어 불교교단의 자율적 발전이 가로막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삼십일본산은 봉선사(奉先寺), 용주사(龍珠寺), 봉은사(奉恩寺), 법주사(法住寺), 전등사(傳燈寺), 위봉사(威鳳寺), 마곡사(麻谷寺), 송광사(松廣寺), 선암사(仙巖寺), 보석사(寶石寺), 백양사(白羊寺), 동화사(桐華寺), 고운사(孤雲寺), 해인사(海印寺), 대흥사(大興寺), 범어사(梵魚寺), 보현사(普賢寺), 월정사(月精寺), 건봉사(乾鳳寺), 기림사(祇林寺), 은해사(銀海寺), 통도사(通度寺),
성불사(成佛寺), 패엽사(貝葉寺), 귀주사(歸州寺), 석왕사(釋王寺), 영명사(永明寺), 김룡사(金龍寺), 화엄사 등이다.
1899 - 헝가리의 생리학자 베케시(Békésy, Georg von) 출생
베케시 [Békésy, Georg von, 1899.6.3~1972.6.13]
부다페스트 출생. 베를린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하였고, 1923년 부다페스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후, 20여 년 간 부다페스트의
헝가리 우체국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전기통신기술을 연구하기 위하여 1년 동안 베를린의 지멘스 중앙연구소에 들어갔다.
원거리 통화의 문제에 관한 연구를 하다가 가장 근본적인 귀의 음향전달에 관하여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946년 헝가리를 떠나 스웨덴의 카롤린스카연구소 객원이 되었으며, 1947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교 정신청각연구소에서 연구를 계속하였다. 1961년 달팽이관내 자극의 물리적 기구에 관한 발견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1899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지휘자 슈트라우스(Strauss, Johann) 사망
슈트라우스 [Strauss, Johann, 1825.10.25~1899.6.3]
'왈츠의 왕'으로 불리며 '왈츠의 아버지' J.B.슈트라우스의 장남이다.
아버지는 처음 그를 상공학교(商工學校)에 입학시켜 은행업을 배우게 하였으나, 음악에 대한 집념이 강한 그는
아버지 몰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1843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별거생활을 하자 이를 기회로 생애를 음악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피아노 교수로 생계를 꾸리면서 바이올린 외에 작곡이론을 배웠다.
처음에는 교회음악 작곡에 뜻을 두었으나, 19세 때 시 당국의 허가를 얻어 15인조악단을 조직, 무도회에 데뷔하여 그 자신의 작품 1∼4번의 무도곡을 연주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아버지와의 갈등은 1846년에 일단 수습되었으나 그는 아버지의 악단에는 가담하지 않고 자기 악단을 인솔하여 독립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849년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의 악단도 지휘하게 되어,
동생이 악단에 가담하기까지 수년간 그는 분주한 세월을 보냈다.
1851년에는 함부르크·프라하·드레스덴·라이프치히·바르샤바 등지에서 연주를 하고, 분주한 가운데 작곡에도 열중하여 1853년에는
1년 동안에 27곡 이상을 작곡하였다.
그러한 정열적인 활동으로 마침내 병석에 눕게 되자 악단을 동생에게 맡긴 후 요양지로 옮겨다니다가 건강을 회복한
그는 1855년에 다시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까지 연주여행을 하였다.
1862년 통칭 예티(Jetty)라고 불린 가수 헨리에테 트레프츠와의 결혼으로 커다란 전기를 맞았다. 그의 연주는 공원에서의 연주회와 자기 작품의 첫공연에 한정되고, 온갖 정력이 작곡에 투입되어 새로운 독자적인 왈츠양식 '연주회왈츠'를 낳았다.
《아침 신문》(1864)을 비롯하여 1867년부터는 왈츠에 처음으로 합창이 곁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예술가의 생애》
《빈 숲속의 이야기》 《술·여자·노래》 《빈 기질》 등의 대규모 왈츠의 걸작을 계속 작곡하고, 1870년 어머니와 동생 요제프가
모두 세상을 떠나 큰 타격을 받았으나 오펜바흐와 수페 등에게서 자극을 받아 그때부터 오페레타의 작곡도 시작,
《박쥐》 《집시남작》을 비롯한 작품으로 당시 빈 오페레타계에 군림하게 되었다.
1878년 아내가 죽자 30세 연하인 릴리 디트리히와 재혼했으나 어울리지 않는 이 결혼은 얼마 후 파탄되고
1887년 아델레 도이치와 재혼, 빈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축복받는 만년을 보냈다.
그는 오페레타 16, 왈츠 168곡을 비롯하여 많은 무도곡을 작곡하였는데, 이 모든 작품에는 인생을 찬미하는 빈의 독특한 분위기가
담겨 있다.
1885 - 러시아의 혁명가 스베르들로프(Sverdlov, Yakov) 출생
스베르들로프 [Sverdlov, Yakov (Mikhaylovich), 1885.6.3∼1919.3.16]
니주니노브고로트 출생. 유대인 동판(銅版)직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1년 러시아사회민주당에 들어갔으며,
같은 해 고향에서 일어난 작가 M. 고리키의 추방에 항의하는 데모에 참가하여 체포되었다. 이후 직업혁명가로서 각지에서 활동했고, 1905년 제1혁명기에는 우랄의 스베르들로프스크 등에서 당조직을 지도, 1917년 2월혁명까지 여러 번 체포되어 긴 옥중생활,
유형생활을 하였다. 1917년, 당의 4월협의회에서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어 중앙과 지방조직의 연락조정, 요원배치, 수도의 10월 봉기를 위한 준비와 추진에 조직자로서 수완을 발휘했다. 10월혁명 후 중앙위원회 서기로 있으면서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의장(국가원수에 상당)을 겸임, 헌법의 제정과 중견당원 양성에도 전력했다. 각지를 유세하던 중 병에 걸려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1877 - 프랑스의 화가 뒤피(Dufy, Raoul) 출생
뒤피 [Dufy, Raoul, 1877.6.3~1953.3.23]
1877년 6월 3일 프랑스 르아브르에서 출생하였다. 14세 때 커피 수입점 종업원으로 가계를 도우며 밤에는 미술학교에 다녔다.
1900년 시에서 장학금을 받아 파리의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L.보나르 문하에서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하였다. 처음에는 인상파풍의
그림을 그리다가 1905년 H.마티스의 작품에서 계시를 받고 야수파(포비슴)운동에 가담, 강한 선과 선명한 색채로 대담하게 단순화된 표현을 전개하였다. 1908년경부터는 사진과 입체파(큐비즘)의 경향에 이끌려 감화를 받고, 1913년경부터 입체파에 근거를 두면서도 점차 독자적인 작풍을 이룩하였다. 1911년경부터 장식미술에도 진출, 폴푸아레 의상실에서 직물염색 디자이너로 일하였다.
이 일은 그의 특색인 밝은 색채와 경쾌한 구도에의 기호를 한층 살렸다고 할 수 있다.
1922년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을 여행한 후, 자유분방한 선과 명쾌한 색채성을 합성한 장식적 양식을 확립하여, 유화 외에 수채화에도 뛰어나 부동의 명성을 획득하였다. 작품에는 해안의 산책길·경마장·악회·요트경기 등을 다룬 것이 많다. 이들은 단순화된
소묘와 대담한 색채의 조화 속에서 현실과 환상, 프랑스적 매혹과 우아성을 강하게 표현하여 보는 이에게 유쾌한 생의 기쁨을 준다.
1875 - 프랑스의 작곡가 비제(Bizet, Georges) 사망
비제 [Bizet, Georges, 1838.10.25~1875.6.3]
파리 출생. 아버지는 성악교사,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1848년 10세 때 파리음악원에 들어가 A.마르몽텔에게 피아노를, F.브누아에게 오르간과 푸가를 P.지메르만에게 작곡을 배우고, 때로는 구노의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1853년 지메르만이 죽은 후에는
알레비에게 사사하였는데, 그는 구노와 알레비에게서 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56년 칸타타 《다윗 David》을 로마대상 작곡 콩쿠르에 제출하여 입상하고 다음해인 1857년에는 칸타타 《클로비스와 클로틸드 Clovis et Clotilde》로 로마대상을 받아, 관비로 3년 가까이 유학했다가 파리로 돌아와서는 그때부터 오페라 창작에만 주력하였다.
1863년 이국적인 선율의 3막 오페라 《진주잡이 Les Pêcheurs de Perles》를 작곡하였는데, 이 작품은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비제의 최초의 중요한 작품이다. 그리고 1869년 2월 로마 체재 중의 회상을 담은 모음곡 《로마의 추억 Souvenirs de Rome》(나중에 교향곡 《로마》로 개작되었음)이 파들루의 연주회에서 연주되고, 또 6월에는 은사인 알레비의 딸 주네비에브와 결혼하였다.
그 후 1872년 보드빌오페라극장의 지배인 L.카르발로의 권고로 A.도데의 소설을 극화한 《아를의 여인 L’Arlésienne》의 부수음악 27곡을 써서 성공하고 그중 4곡을 스스로 선택한 모음곡은 파들루의 연주회에서 연주되어 청중을 매료하였다.
또 그의 유명한 오페라 《카르멘 Carmen》은 1875년 3월 오페라코미크에서 초연되었는데 3개월 후인 6월 3일
비제가 37세로 요절할 때까지 무려 33회나 공연되었다 한다.
이 오페라는 그의 어떤 작품보다도 많이 연주된 것으로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비제는 오페라음악에 뛰어난 작품을
남겼는데, 어느 것이나 등장인물의 정확한 표현, 빈틈없는 무대구성, 세련된 작곡기법과 새로운 맛으로 당시의
오페라계에 큰 자극을 주었다.
특히 《카르멘》은 노래도 음악도 낭비가 없으며, 극과 음악이 잘 융합되어 있다. 이는 프랑스의 노래답게 샹송이나 쿠플레를 도입하였으며, 악기의 개성을 잘 살린 데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국정취가 많이 풍기는 이 곡은 그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뛰어났으며, 이 작품은 같은 시대에 있어서나 그 다음 시대에 있어서나 특히 베리스모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극음악적 재능은 특히 제4막의 대단원의 장면에서 노래가 서로 얽히면서 합창과 관현악이 숨막힐 듯이 밀집 ·응결하는 극적 효과에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이 작품은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와 함께 R.롤랑이 말했듯이
프랑스오페라의 쌍벽을 이루는 명작으로서, 지금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1865 - 영국의 왕 조지 5세(George V) 출생
조지 5세 [George V, 1865.6.3~1936.1.20]
에드워드 7세의 차남이다. 1892년 형 앨버트의 사망으로 왕위 계승권자가 되어, 1901년 프린스 오브 웨일스로 서임되었다.
1910년에 아버지 에드워드 7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1917년, 모든 독일계 작위 칭호를 버리고,
가명(家名)을 윈저왕가로 변경하였다. 1921년에는 아일랜드 자유국의 승인에 기여하는 등,
근대사에서 성공한 입헌군주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1770 - 아르헨티나 독립운동 지도자 벨그라노(Belgrano, Manuel) 출생
벨그라노[Belgrano, Manuel, 1770.6.3~1820.6.20]
아르헨티나 독립전쟁 때의 군사지도자.
스페인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관인 상인조합 서기에 임명되었다(1794). 그 자리에 있으면서
특히 교육과 경제 분야의 자유주의 개혁을 옹호했다. 1806~07년 실패로 끝난 영국의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 침공 때
처음 전투체험을 했다. 1810년 리오데라플라타가 스페인과 관계를 끊었을 때 벨그라노는 혁명평의회의 일원이 되어 자체의 결속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외곽 지역들이 함락되자 그는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혁명평의회의 이름으로
지금의 파라과이 땅을 탈환하기 위해 출동했으나 실패했다. 뒤에 아르헨티나 북서부의 투쿠만과 살타에서 친(親)스페인
군대를 물리쳤으나 1813년 상(上)페루(지금의 볼리비아)에서 결국 패배했다.
1814년 군사령관직을 호세 데 산 마르틴에게 넘겨주었다. 벨그라노는 다른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지도자들처럼 군주정을
선호했다. 그래서 적당한 통치자를 찾기 위해 뒤에 아르헨티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와 함께
유럽을 방문했으나 방문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1819 - 네덜란드의 화가 용킨트(Jongkind, Johan Barthold) 출생
1808 - 미국의 정치가 데이비스(Davis, Jefferson) 출생
1786 - 조선 후기의 서화가, 문신, 금석학자 김정희(金正喜) 출생
1770 - 아르헨티나 독립운동 지도자 벨그라노(Belgrano, Manuel) 출생
1657 - 영국의 의학자, 생리학자 하비(Harvey, William)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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