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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우표로 본 오늘 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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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2 - 미국-일본 미드웨이해전(Battle of Midway)

1942년 6월, 4척의 항공모함과 300척의 군함, 1000여대의 항공기가 동원된 일본군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목표는 하와이 북서쪽 1600km 지점에 위치한 미드웨이섬.

6월5일 이른 아침, 항모(航母)에서 발진한 일본 전투기가 미군 비행장을 폭격했다. 그러나 비행장은 비어있었다.

이미 일본군의 암호망이 뚫렸기 때문이었다. 전투기들이 다음 공격을 위해 항모에서 발진을 준비하고 있던 10시20분경,

갑자기 미군 전투기 편대가 구름속에서 급강하하며 항모에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갑판에 줄지어있던 전투기들은

속수무책으로 파괴됐고 아직 치우지 못한 탄약과 연료는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연전연승을 자랑하던 항모였지만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3척이 대파되거나 두동강났다. 불과 6분 만이었다. 미 항모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며

버티던 마지막 1척도 곧 태평양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항모 4척, 순양함 1척, 항공기 332대가 파괴되고 3500명의 베테랑 군인들을 잃었지만 미군의

피해는 항모 1척, 구축함 1척, 항공기 147대와 307명의 군인 뿐이었다. 이로써 태평양 전쟁의 향방도 미국으로 돌아섰다. 
 

2) 1932 - 현충사를 보수하고 다시 영정을 봉안 - 1969, 현충사 중건 준공 기념

충남 아산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1545~1598)을 모시는 사당 현충사(祠)는 사적 제155호로, 1706년(숙종 32) 지방 유생들이 조정에 건의하여 세웠으며 이듬해 사액() ‘’를 받았다. 1865년(고종 2)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일시 철폐되었고, 국권피탈 이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20여년 간 향불이 끊겼다. 1932년 동아일보사가 주최가 되어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고 다시 영정을 모셨고, 62년에는 유물전시관이 건립되었다.

또한 66년에는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였는데, 67년에 준공하여 경내에 본전(殿) ·고택() ·정문() ·

유물전시관 ·활터 등이 마련되었다.

69년에는 현충사 관리사무소를 설치하고 관리와 제전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影幀)

최초의 영정은 1932년 일제치하에서 청전 이상범 화백이그려 현충사에 모셨으나 퇴색되어 위엄이 덜하였으므로

기념사업회에서는 한때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을 모시기도 하였다.

현재 현충사의 영정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 나타난 고증에 입각하여 1953년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으로 1973년 10월 30일 선현영정심의위원회에서 표준영정으로 지정한 것이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 묘사된

이순신 장군의 용모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순신의 사람됨엔 대담한 기운이 있어 일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갔으니 본래부터 수양해온 까닭이라 하겠다."

현충사 외에도 충무공의 영정과 동상은 국내 여러곳에 봉안되어 있다.

크기 : 세로 193Cm , 가로 113Cm  


 

3) 1887 -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베네딕트(Benedict, Ruth) 출생

베네딕트 [Benedict, Ruth, 1887.6.5~1948.9.17]

뉴욕 출생. 1909년 배서여자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어학교사·시인으로 지내다가, 1919년 컬럼비아대학교에 입학,

아메리카인디언의 민화와 종교를 연구하여 1923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30년 컬럼비아대학교 조교수,

1948년 인류학 교수가 되었다.
학문적 입장은 인간의 사상·행동의 의미를 심리학적으로 파악하려는 것으로서 O.슈펭글러나 W.딜타이의 문화유형학과

게슈탈트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문화양식론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입장은 문화와 퍼스낼리티 연구나 국민성 연구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주요저서로 《문화의 유형 Patterns of Culture》(1934) 《민족-과학과 정치성 Race:Science and Politics》(1940)

《국화와 칼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194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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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0 - 미국의 소설가 오 헨리(Henry, O.) 사망

오 헨리 [Henry, O., 1862.9.11~1910.6.5]

뉴욕을 "지하철 위의 바그다드" 라고 묘사하며 뉴욕 소시민들의 생활을 낭만적으로 묘사, 창작 활동을 폈던

오헨리(본명ㆍ윌리암 시드니 포터)가 1910년 6월 5일 간경화증으로 뉴욕 종합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스버러 출생으로 내과 의사인 아버지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복도 잠시, 어려서 양친을 잃어 거의 학교교육도 받지 못한 채 숙부의 댁으로 보내졌다. 숙부의 약방을 거들고 있다가, 1882년 텍사스주로 가서 카우보이ㆍ점원ㆍ직공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1887년 25세 때 17세 소녀 애설 에스티스와 결혼했고 1891년 오스틴 은행에 근무하는 하면서 주간지 `롤링 스톤 (The Rolling Stone)`지를 창간하는 등 저널리스트로서도 활동했으나 적자만 내다가 폐간됐다.
이후 1896년 2년 전 그만둔 은행에서의 공금횡령 혐의로 고소당하자 남미로 도망갔으나 사랑하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아내의 사후 체포됐다. 다행히 숙부의 약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도움이 되어 활동이 다소

자유로운 교도소 내 약제계로 보내졌고 이로인해 그는 필명 `오 헨리` 를 써가며 딸의 부양비를 조달하기 위해 밤 늦게까지 단편 창작에 몰두했다. 결국 이 3년간의 교도소 생활의 체험이 오 헨리를 한 저널리스트에서 미국의 대표적 단편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석방 후 그는 뉴욕으로 와 본격적인 작가생활에 들어갔고 `서부의 마음`(1907) `4백만`(1906) 등의 단편집을 발표하며

인기작가로서 지위를 굳혀, 불과 10년 남짓한 작가활동 기간 동안 300편 가까운 단편소설을 썼다.

그는 순수한 단편작가로 따뜻한 유머와 깊은 페이소스를 사용하여 미국 남부나 뉴욕 뒷골목에 사는 가난한 서민과 빈민들의 애환을 다채로운 표현과 교묘한 화술로 그려 놓았다. 특히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결말의 의외성`은 기교적으로 뛰어나

단편작가 오 헨리의 대명사가 되었으나 이로 인해 문학 평론가들에게는 냉대를 받아야 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따뜻한 휴머니즘을 탁월하게 묘사한 `경찰관과 찬송` `마지막 잎새` `현자의 선물` 등이 있다.

 

2) 1878 - 멕시코의 혁명가 비야(Villa, Pancho) 출생

비야 [Villa, Pancho, 1878.6.5~1923.6.20]

1878년 6월 5일 산후안델리오 아시엔다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도로테오 아랑고(Doroteo Arango)이고

프란시스코 비야(Francisco Villa)라고도 한다. 농장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어려서부터 농장노동자로 일했으나, 1894년 누이를 강간한 농장주인을 살해하고 멕시코 북부 산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1910년까지 광산에서 일하거나 산적떼에 들어가 도적질을 하였으나,

훔친 돈과 물건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신망을 얻어 조직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었다.
1909년 F.마데로(Francisco Madero)가 P.디아스(Porfirio Diaz) 정권의 독재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키자, 1910년 자신을 따르던 게릴라 세력을 이끌고 이에 가담하였다. 이후 강한 카리스마와 연이은 승리로 멕시코 북부지역을 평정하면서

민중의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혁명이 성공하자, 민간인으로 돌아가 토지 재분배와 경제 살리기에 주력하였다. 그뒤 오로스코(Orozco)가 마데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싸움터로 나갔다. 1913∼1914년에는 마데로를 암살하고 정권을 잡은 V.우에르타(Victoriano Huerta)를 축출하기 위하여 V.카란사(Venustiano Carranza)와 연합하여 저항군을 지휘하였다. 1914년 카란사와 결별한 후 카란사 당파와 내전을 계속하였다. 1916년 미국이 카란사를 지지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뉴멕시코주에 있는 콜럼버스를 습격하였다. 그를 잡기 위해 J.퍼싱(John Joseph Pershing)이 이끄는 수천의 병력이 파견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0년 카란사가 암살되고 A.우에르타가 멕시코 임시 대통령이 된 뒤, 혁명군으로서의 삶에서 은퇴하였으나,

1923년 7월 파랄에서 암살당하였다. -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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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0 - 헝가리 태생 영국의 물리학자 가보르(Gabor, Dennis) 출생

가보르 [Gabor, Dennis, 1900.6.5∼1979.2.8]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 부다페스트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27년 독일의 베를린공과대학에서 고압송전선로(高壓送電線路)의 감시를 위한 고속오실로그래프의 개발로 전기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3년 나치스에 의해 추방되어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시민으로 이적(移籍)하고, 그 뒤 평생을 영국에서 살았다. 영국에서 처음에는 사기업의 연구기사(硏究技師)로 있다가 1949년 임피리얼칼리지에 봉직, 1967년 응용전자물리학 교수로 있었으며

그 뒤로 상급연구원, 런던대학의 명예교수로 있었다. 1947년 물체에서 반사된 코히어런트광(光)이 그 물체의 형상정보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이 광선을 사진건판(乾板)이나 필름에 노광(露光)시키는 홀로그래피를 발명하여

1971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밖에 안개상자·방전 등의 실험물리학, 플라스마·핵융합(核融合) 등의 이론 및 통신방식·시계열(時系列)·

아날로그계산기 등 정보과학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저서로는 《전자공학의 기술적 혁신과 문화에의 영향》 《성숙사회(成熟社會)》 《미래를 발명한다》 등이 있다.

 

2) 1885 - 프랑스의 정치가 망델(Mandel, Georges) 출생  

망델 [Mandel, Georges, 1885.6.5~1944.7.7]

본명은 Louis­ Georges Rothschild. 나치 독일에 강렬하게 저항한 프랑스의 정치가.

유명한 금융자본가문인 로트실트가(家)와 관계는 없지만, 부유한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의 개인참모로 일했다(1906~09, 1917~20). 또 1919~24년, 1928~40년 국회의원을 지냈다. 보수당원으로 좌익의 정책에 강력히 반대했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많은 보수당원들이 보인 친독일정책에도 반대했다.

내각이 4차례 바뀌는 동안 체신부장관을 지냈으며(1934~36), 1938년 4월부터 식민지 장관을 지내다가,

1940년 5월 폴 레노 총리의 발탁으로 내무장관이 되었다.

1940년 5월과 6월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해 투쟁을 계속하자고 주장한 레노를 지지했다.

정전을 단연코 거부한 정치지도자로서, 1940년 6월 21일 마실리아호를 타고 보르도에서 아프리카로 갔으나

모로코에서 체포되어 프랑스로 압송된 후 투옥되었다. 그뒤 1942년 11월 독일군에게 넘겨졌다가 오라니엔부르크와

부셴발트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44년 7월 4일 다시 파리로 보내졌다가

3일 뒤 비시 정권의 경찰총감 다르낭의 명령으로 총살되었다. -브리태니커

 

3) 1883 -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Keynes, John Maynard) 출생



케인스 [Keynes, John Maynard, 1883.6.5~1946.4.21]

케임브리지셔 출생. 경제학자이자 논리학자인 아버지 J.N.케인스는 케임브리지대학교 강사,

어머니는 케임브리지 시장()을 지냈다. 이튼고등학교를 거쳐 케임브리지대학의 킹스칼리지에 입학, ‘소사이어티’그룹에 가입하여 젊은 윤리학자 G.E.무어의 영향을 받았다. 1905년 대학 졸업 후 공무원이 되어 1908년까지 인도부() 및

재무부()에 근무하였다. 1909년 케임브리지대학교 강사 겸 회계관이 되었다. 1911~1945년 영국의 대표적 경제잡지 《이코노믹 저널 Economic Journal》의 편집자로 있으면서,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에 재무성 수석대표가

되기도 하였으나, 연합국의 다른 대표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퇴하였다.

그후 재무상 고문, 국민상호보험회사 사장, 투자회사의 경영자, 《뉴 스테이츠먼 앤드 네이션》지()의 사장, 맥밀란 위원회 위원(1913), 왕립 인도 통화위원회 위원, 브레턴우즈 협정 영국대표(1944),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총재, 20세기 문예운동의 하나인 블룸즈버리그룹 회원, 국립미술관 이사(), 음악미술장려회 회장 등을 지내며 문예진흥을 위하여 많은 힘을 쏟았다. 후에 귀족에 서임되어 상원의원이 되었다.

케인스는 경제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정치적 영역에서도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한

활동을 하였다. 철학·고전·사상() 및 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경제학에 관한 초기의 관심은 주로 화폐와 외환문제에

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부터는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의 고용 및 생산수준을 결정하는

요인에 관하여 종래의 경제이론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그 결과 대표적 저서인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1936)에서 완전고용을 실현·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소비와 투자, 즉 유효수요를 확보하기 위한 정부의

보완책(공공지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이론 및 이에 입각한 정책,

그 기반을 형성하는 사상의 개혁을 케인스 혁명이라고 한다.

 

1956 -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운드 독(Hound Dog)> TV 방영

1956년 초여름 어느 날, 소년 검프는 읍내에 나갔다가 가게 진열창에 놓인 티비를 통해 낯익은 사람의 모습을 본다.

“아이들이 볼 게 아니”라며 어머니가 그의 눈을 가렸지만, 티비 속의 젊은이가 자신을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을

소년은 이미 알고 있다. 티비 속 청년의 이름은 엘비스 프레슬리로 밝혀진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1994)의 도입부 한 장면이다. 미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질료 삼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 검프는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과 조우하는데, 그 첫 번째 대상이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포레스트 검프는 물론 가상의 캐릭터다. 하지만 영화 속에

묘사된 그 저녁의 일화는 전미국을 경악하게 만든 실제 사건이었다. 정확히는 1956년 6월5일의 일이었고,

당대의 인기 프로그램 <밀튼 벌 쇼>의 방송 내용이었다. 4천만 명이 시청한 이 방송은 경련하듯 하반신을 흔들어대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모습을 송출한 대가로 곧장 스캔들에 휘말렸다. <뉴욕 데일리 뉴스>의 저명한 매체비평가 벤 그로스는 엘비스가 “선정적이고 상스러우며, 동물적 쾌락으로 채색된 구경거리를 전시했다”고까지 썼다. 이후 프레슬리에게는 ‘엘비스 더 펠비스’(골반을 흔드는 엘비스)라는 낙인이 찍혔고, 더불어 그날 방송된 <하운드 독>은 역사상 가장 떠들썩하게 등장한 노래로 기록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하운드 독>을 둘러싼 섹슈얼리티 논란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4주 후 방영된 <스티브 앨런 쇼>는

엘비스에게 점잖은 턱시도를 입혔고, 당대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 <에드 설리번 쇼>는 엘비스의 상반신만을 찍어 방송했다.

인기는 사되 논란은 피하자는 방송사의 고육책이었지만 기성세대의 반발과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로큰롤에 대한 반감의 표출이었고, 사회적으로는 성 모럴의 급변에 대한 불안감의 표현이었다.

그 기저에는 두 편의 킨제이 보고서-남성편(1948)과 여성편(1953)이 발간되고, <플레이보이>(1953) 등 성인잡지들이 창간되면서

성에 관한 프로테스탄트적 믿음을 뒤흔든 50년대의 사회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성의 권위는 로큰롤 특히,

스타로 부상한 엘비스 프레슬리를 통해 불온한 성의식이 확산될 것이라는 판단에 패닉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는 <하운드 독>을 음악으로 평가했다. <하운드 독>은 대중음악계 최고의 송라이팅 콤비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제리 리버와 마이크 스톨러가 만든 노래다. 흑인 여성 블루스 가수 빅 마마 손튼이 발표하여 이미

1952년 리듬 앤 블루스 차트 상위권에 올랐던 이 곡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통해 불멸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1956년 7월13일 발표된 엘비스 버전의 <하운드 독>은 무려 11주 동안이나 팝 차트 정상을 지켰는데,

1992년 보이즈 투 멘의 <엔드 오브 더 로드>가 13주 연속 1위의 신기록을 수립하기 전까지, 무려 36년 동안이나

빌보드의 최장기록으로 남았던 것이다.

<하운드 독>에 얽힌 스캔들은 이제 구시대의 해프닝으로 퇴색했다. 하지만 몰입상승이 초래하는 판단착오에 대한 우화로서의

가치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고의 표현처럼,

“비범하게 평범한 청년” 엘비스 프레슬리가 남긴 유산 가운데 하나다.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세상을 바꾼 노래]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운드 독>(1956) - 한겨레 2008-04-03

 

1947 - 마샬플랜(유럽부흥계획) 발표

마샬(Marshall, George C., 1880~1959) 미 국무장관이 1947년 6월 5일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유럽부흥계획(마샬 플랜)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2차대전으로 잿더미가 된 유럽경제를 재건,

민주주의 국가들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을 이루자는 것이 그 취지였다. 당시 소련의 도전에 직면한 미국은

전후의 빈곤과 실업, 사회적 혼란으로 유럽에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마샬 플랜은 `유럽 모든 국가들에 열려있다`는 연설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반소-반공주의를 전제로 서유럽 민주국가들의

경제부흥과 통합을 목적으로 추진됐다.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들이 불참한 가운데 7월에 결성된 `유럽경제협력위원회(CEEC)`에 참가한 16개국이 유럽 경제재건안을 제출했고 미국 의회는 이에 기초해 1948년 4월 유럽부흥계획을 승인했다. 이를 위해 미국정부 내에 특별 설립된 `결제협력국(ECA)`은 폴 호프만의 지휘아래 1952년 중반까지 4년간 약 1백30억달러에 달하는 경제원조를 제공했다.
이 계획의 성공적인 실행으로 유럽의 산업과 농업생산이 회복됐고 재정이 안정됐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등은 이 기간동안에 국민총생산이 15~25%까지 증가했고 화학-기계-철강 등의 산업분야가 빠르게 회복됐다. 먀샬 플랜은 1949년 4월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가 발족하는데 경제적 기반이 됐다.
CEEC는 이후 상설기구인 유럽경제협력기구(OEEC)로 대체됐고 이는 1961년 9월 다시 미국과 캐나다를 가입시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로 발전해왔다.

 

1898 - 에스파냐의 시인, 극작가 가르시아 로르카(Garcia Lorca, Federico) 출생

가르시아 로르카 [Garcia Lorca, Federico, 1898.6.5~1936.8.19-20]

그라나다의 푸엔테바케로스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나 그라나다대학에서 법학 ·철학을, 마드리드대학에서

문학을 배웠다.
처녀작 《나비의 장난》의 상연(1920)은 실패하였으나, 이듬해의 첫시집 《시의 책》을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 후에 《노래의 책》(1927)과 전통시의 형식을 살리면서 공고라풍()의 다채로운

이미지를 담은 《집시 가집(): Romancero gitano》(1928)을 내어 시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1931년 제2공화국 정부가 성립되자, 대학생 극단 ‘바라카’를 조직, 농촌을 순회 공연하여 연극의 보급과 고전극의 부활에

힘썼다. 또한, 이 무렵부터 극작에 전념하여 불행한 사랑을 그린 《피의 혼례 Bodas de Sangre》(1933),

석녀()의 비극을 다룬 《예르마 Yerma》(1934), 폭군적인 어머니 아래에서 부자연스러운 생활을 강요당하는

딸들의 비극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La casa de Bernarda Alba》(1936)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모두가 숙명적인 본능의 힘으로 움직이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다.
1936년, 스페인 전쟁이 일어난 며칠 뒤에 고향인 그라나다에서 프랑코측에 의하여 사살되었다.

 

1868 - 아일랜드의 노동조합 지도자 코널리(Connolly, James) 출생

코널리 [Connolly, James, 1868.6.5~1916.5.12]

아일랜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노동조합 지도자. 1916년 4월 24~29일 더블린에서 영국 지배에 항거하는

부활절봉기를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코널리는 1896년 더블린에 도착하여 곧 아일랜드 사회공화당 창당에 이바지했다. 1903~10년 미국 뉴욕 시에서 살았고,

미국에 있는 동안 세계산업노동자조합(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IWW)을 조직했다.

1912년 그는 아일랜드 티퍼러리 주의 클론멜에서 제임스 라킨과 함께 아일랜드 노동당을 창당했다.

그는 라킨을 도와 전(全)아일랜드 운수노동자 및 일반노동자 조합을 조직했는데, 이 조합은 다른 노동쟁의를 지지하는

동맹파업을 주도했다. 1913년 아일랜드 산업가들은 노동조합원을 대량으로 해고하기 시작했고,

그결과 일어난 노동자 시위는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1916년 4월 24일 부활절 월요일 아일랜드 의용군과 시민군 약 2000명이 더블린시에서 봉기하였다.

약 1만 명이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일이 어긋나서 군중이 모이지 않았다.

게다가 계획하였던 다른 지방의 봉기도 따르지 않고 더블린시만 봉기하였다. 이 날은 휴일이었기 때문에 경계가 허술하여 봉기군은 시내 요소를 점령하고 중심부대는 오코늘 거리에 있는 중앙우체국을 점령하고 공화국 선언을 선포하였다.

선언문에는 19세기 중엽 이래의 급진파조직 피니어회의 지도자 T.J. 클라크를 필두로 사회주의자 J. 코널리, 게일동맹(Gaelic League)의 P.H. 피어스 등 7명이 서명하였다.

봉기군은 점령한 지 1주일이 채 못되는 토요일에 항복함으로써 패배로 끝났다. 이 봉기는 19세기 이래의 자치운동에

매듭을 지어 아일랜드 독립에의 새로운 길을 연 것으로 아일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브리태니커


 

1862 - 스웨덴의 안과의사 굴스트란드(Gullstrand, Alvar) 출생

굴스트란드 [Gullstrand, Alvar, 1862.6.5~1930.7.28]

1862년 6월 5일 란스크로나에서 출생하였다. 웁살라·빈에서 공부하고 1894년 웁살라대학교 안과학 교수,

1913년 생물학 및 물리광학 교수 등을 지냈다. 눈의 조절기능의 연구 및 눈의 통광학()의 권위자로,

눈의 수정체와 같은 불균질()한 매체 중의 영상에 관한 광학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굴스트란드 슬리트램프’를 발명하였고, 1911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Die optische Abbildung in heterogenen Medien und Dioptik der Kristallines des Menschen》

(1908)《Einfuhrung in die Methoden der Dioptik des Auges des Menschen》(1911) 《Das allgemeine optische Abbildungssystem》(1915) 등이 있다.


 

1826 - 독일의 작곡가 베버(Weber, Carl Maria von) 사망

베버 [Weber, Carl Maria von, 1786.11.18~1826.6.5]

홀슈타인주()의 오이틴 출생. 어려서 부친에게 초보적인 음악교육을 받은 다음, 미하엘 하이든(요제프의 동생)에게

사사하였다. 18세 때 브레슬라우오페라극장의 악장이 되었으나 2년 후 사직하고 유럽 각지를 돌아다녔으며

방랑생활 중에도 그는 오페라를 비롯하여 각종 작품을 썼다. 1813년 프라하의 오페라극장 지휘자가 되어 겨우 방랑생활은 끝났지만 1817년 또다시 드레스덴으로 옮겼다. 이 무렵부터 낭만파음악가로서 그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으며,

유명한 《마탄의 사수 Der Freischütz》의 작곡에 착수하여 1820년에 완성, 이듬해 6월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

그는 이 오페라의 대성공에 힘입어 다시 《오이리안테 Euryanthe》(1832)를 작곡하였으나, 이 무렵부터 결핵이 심해지고 생계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런던의 유명한 코벤트 가든극장으로부터 신작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아 《오베론 Oberon》을 작곡하였으며, 런던으로 가서 이 오페라를 초연(1826)한 후,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베버에게는 기악곡도 많지만 그의 천분은 역시 오페라였으며,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일오페라의 새로운 낭만파적인 단계를 개척하였다. 작품으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트슈튀크 Konzertstück》 이외에도 대중적인 것으로 《무도에의 권유 Aufforderung zum Tanz》가 특히 유명하다.

 

1783 - 몽골피에 형제, 최초의 열공기기구 실험비행 성공

1783년 11월 27일, 인류는 공상 비행의 오랜 방황에서부터 현실로 돌아와 그토록 염원했던

인류 최초의 유인비행(the first human flight)을 이루었다.

프랑스 리용 근처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 아노네(Annonay)에서 제지업을 하고 있던 몽골피에(Montgolfier)

형제는 공중비행의 실현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형은 Joseph Michel de Montgolfier, 1740∼1810 ; 아우는 Jacques Étienne de Montgolfier, 1745∼1799.)

그리하여 구름을 주머니 속에 넣으려는 생각으로 수증기나 수소가스를 만들어 주머니에 넣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뜨거운 연기가 든 종이 주머니가 하늘로 높이 올라가는 것에서 힌트를 얻어

1783년 4월에 열공기 기구를 발명하였다. 그리고 6월 5일에 최초의 공개 실험에 성공했다. 그 결과 , 직경 11m,

부피 680입방m의 거대한 기구는 2천m 높이까지 올라가서 30분 뒤에 2km 떨어진 곳에 무사히 내려왔다.

최초의 기구에 사용한 연기는 몽골피에 가스라고 명명되었다.

기구가 상승한 것은 지표면의 공기보가 비중이 작은 뜨거운 공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때부터 2년 후로서 .

프랑스 과학원이 몽골피에 가스를 분석한 결과 그 비중이 차거운 공기의 2분의 1이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 뒤, 파리로 옮겨 간 이들 형제는 같은 해(1783년) 9월 19일에 베르사이유에서 기구에 동물을 싣고 8분 간을 비행한 뒤 2.4km떨어진 곳에 무사히 착륙하는데 성공했다. 동물실험비행에서 자신을 얻은 몽골피에 형제는

그 해(1783년) 11월 21일에 인류 최초의 유인 비행을 실시하여 성공했다.

 

당초 루이 16세는 이 비행에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를 태우려고 했으나 역사적으로 기념해야 할 비행에 죄수 대신에

지망한 피라돌드 로제에(Francois Pliarre de Rozier, 1757~1785)와 다르란드 후작(the Marquis d’Arlandes)을 태우고 이 유인기구는 브로뉴 숲에서 이륙하여 약 9천m 고도에서 약 25분간 파리 상공을 비행한 후 파리

동부의 13구에 있는 뷰튜 오 카이유에 무사히 도착했다.

인류가 처음으로 신의 영역으로 여겨 왔던 하늘에 첫발을 들여놓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아노네의 주민들은 인류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발명가가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최초의 유인비행 100주년이 되는 1883년에 몽골피에 동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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