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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의 우표와사건 06.01

http://cafe.daum.net/sksnaustjtkfwk/RmAZ/754 

 

                  1)                                         2)                                            3)

 

1) 1972 - 이라크, 석유국유화 발표

이라크의 주요한 광물자원은 석유와 천연가스이다. 석유매장량이 1000억 배럴로 세계 제2위이며 유전은 주로 북서부

지역에 분포해 있다. 석유의 채굴은 1927년 북부의 키르쿠크 유전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외에 모술 부근의 아인자라 유전, 바스라 근방의 즈바이르 유전이 개발되었다. 석유는 파이프라인으로 지중해 연안의 트리폴리(레바논), 비니아스(시리아)로 송유되는 외에 바스라에서도 수출된다.

석유개발에서는 영국,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자본으로 이루어진 이라크석유회사(IPC)와 그 관련회사가 국토의

거의 전역의 이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1961년에 이권지역의 99% 이상을 정부가 몰수하고, 1964년에는 이라크국영석유회사(INOC)를 설립하는 등 자주적인 개발 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다시 1972년에는 이라크석유회사의 국유화를 선언하였다. 2000년 11월 현재 1일 생산량은 230만 배럴이다. -naver

 

2) 1971 -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 경매
1971년 오늘,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 진귀한 물건이 나왔다.
그 유명한 스트라디바리(Stradivari) 바이올린 진품이다.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 메뉴인(Menuhin)도 경매장에 나타나 진귀한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에 큰 관심을 보였다.
1737년 숨진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제작자 스트라디바리(Stradivari, Antonio, 1644?~1737)가 제작한 이 바이올린은

큰 음량과 빛나고 예리한 음색이 특징이다.

현재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은 수억 원대의 고가로 호가되고 있다.

현존하는 스트라디 바이올린은 전 세계에 600개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YTN

 

3) 1970 - 소련, 2인승 '소유즈 9호' 우주선 발사
소련 유인인공위성 소유즈 9호(Soyuz-9) 발사, A. 니콜라예프, V. 세바스티안노프가 탑승하여 424시간

59분간 287회 지구궤도 비행, 최장우주비행 기록 세우고 6월 18일 귀환 -Google 

                 1)                                         2)                                     3)

 

1) 1965 - 청소년 선도 위해 밤 10시에 '사랑의 종' 치기 시작 

이번에는 6월 1일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났나 오늘의 역사를 더듬어 봐야겠습니다. 1270년 오늘은 이별초,

저별초, 야별초 삼별초의 난이 발생한 날이며 목화씨를 거시기한 문익점의 후손이며, 재야 운동가 문익환 목사가

별세한 날입니다.(1944년) 근데 목사님이 무슨 운동을 하셨기에 이름을 날렸지? 종목이 뭐래?..
오늘부터 6년제 의무교육이 전면 실시된 날이며(1950년) 부정축제자 자수기간을 설정하여 남의 돈 꼬불친 놈 때려 잡은 날도 오늘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껄떡쇠가 있으니 이 게 문젭니다.(1960년) 그런가하면 청소년 선도를 위한 사랑의 종치기를 시작한 날이 오늘입니다.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어서 부모 형제가 기둘리는 가정으로 돌아갑시다" 뭐 이런 내용인데 청소년들이 땡땡이 치고 말 안 듣기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나봅니다.(1965년) 참 울 엉아가

백마부대로 월남에 파병하여 고엽제를 옴빡 뒤집어 쓴 날도 이 날 입니다.

 

2) 1966 - 월남파병 전투사단 백마부대 창설

보병 제9사단(백마)사단은 1950년 10월25일 국방부 일반명령 제29호에 의거, 서울에서 창설, 예하부대로서는 제 28연대가 대전, 제29연대가 공주, 제30연대가 청주에서 각각 창설 되었으며, 이듬 해 1월 포병사령부가 광주에서 편성되었다.
백마사단은 편성 1개월도 못된 1950년 11월23일부터 경북지구(영주, 김천, 문경) 공비 토벌작전에 참가하였고,

1951년 1월25일 연합군의 제2차 총 반격시는 제1군단 예하부대로서 북괴군 제10사단의 주력을 포착 섬멸하여 적 사살 5,549명, 화기 노획 1,622정의 대전과를 올렸으며, 그후 철원지구 반격작전, 금화지구 방어작전, 사두봉 전투를 거쳐 한국전사에 빛나는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정예부대인 제38군의 12차에 걸친 인해전술에도 불구하고

처절한 피아 공방전 끝에 적병 8,234명을 사살하고 백마고지를 회복하는데 성공하였다.

휴전이 되기까지 8개월동안 중부 및 중,동부 전선에서 삼각고지, 금화 저격능선등지에서 전투를 계속하였으며, 휴전 이후 금화, 포천, 인제, 화천, 양평, 양주등지에서 부대정비와 전선 방어 임무를 수행하면서 전투력을 배양하여

오던중 1966년 6월 1일 국방부 지령 제3호에 의거, 제2차 파월 전투사단으로 지명됨으로써 자유십자군의 일원으로

해외에 파병하게 되었다.

1966년 8월27일 중앙청 광장에서 환송식을 갖고 출범한 보병 제9사단 백마부대는 사단장 이소동 소장의 지휘하에

1966년 9월16일 부산 3부두를 통해 출진,1966년 9월22일 월남 나트랑에 상륙하여 인근 지역에 주둔했다. 백마사단은

월남 중동부 해안지력의 1번 도로와 해안을 따라 길이270Km, 폭 50Km에 달하는 책임전술(TAOR)지역을 확보하고,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 주요도시와 항만에 있는 군사시설을 보호 해 왔으며 또한 전술지역

내외의 침투하고 있는 적을 격멸하여 왔다. - 대한민국 해병대

 

3) 1958 - 드골 장군, 프랑스 수상에 취임

1958년 6월 1일 프랑스의 샤를 드골 내각이 성립되었다. 1943년 드골(De Gaulle, Charles, 1890~1970)은 자유 프랑스

위원회를 알제리로 옮겨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로 개편하고 앙리 지로(Giraud, Henri, 1879~1949) 장군과 함께 공동위원장에 취임했다. 이후 드골이 창설한 프랑스 국민연합은 대중운동조직으로서 급성장을 거듭해 1951년에는 유력한 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드골은 전후체제를 둘러싼 이견으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1958년 5월 알제리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프랑스가 내란 직전의 상태에 놓이게 되자 드골은 이를 정치 재개의 기회로 이용했다. 결국 르네 코티 대통령은 사퇴 입장을 밝혔고 드골은 총리 지명자로서 의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 브리태니커

 

1) 928 - 소련의 우주비행사 도브로볼스키(Dobrovolsky, Georgy) 출생

도브로볼스키 [Dobrovolsky, Georgy (Timofeyevich), 1928.6.1~1971.6.29]

1946년 오데사의 공군학교, 1950년 추구예프 군사항공학교, 1961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71년 6월 6일 소유즈 11호 우주비행 대장이 되어 V.N.볼코프와 V.I.파자예프와 함께 우주에서 24일간 머물렀다.

그들은 2개월 전에 지구궤도에서 발사된 살류트 무인정거장과 도킹하여 최초로 유인정거장을 만들었다. 6월 30일 카자흐스탄에 완전하게 도착했으나 모두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그 이유는 출입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캡슐 안의 공기가

새어나가 감압()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 1903 - 우리나라 최초의 팔미도 등대 점화

일제는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통상장정(通商章程)을 체결하게 하고, 1903년 6월에 높이 7.9미터, 지름 2미터의 팔미도등대를 건설한다. 제국주의 침략을 위하여 부단히 일본배들이 인천항을 드나들었지만 암초 등으로 인하여 해난사고를 경험하게 되자 조선정부를 압박하였다. 자금력 없던 조선정부로서는 세관에서 일정한 금액을 떼내어 등대를 만들게 되었다. 팔미도등대는 바닷물에 부식되지 않는 대리석과 콘크리트를 이용하였다.
콘크리트를 이용하여 이렇듯 높은 건물을 쌓아올리는 것은 당시로서는 건축사적 쾌거였다.
1903년의 콘크리트건축물은 초유의 일이었으니, 이후 일반 건축물에서의 콘크리트 사용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울러 비록 일본의 압력과 강요에 의하여 외국인기술자의 손으로 세워지기는 하였으나 한국인 인부들이 동원되었고
대한제국의 이름으로 세워진 첫 번째 우리나라 등대이다.
<주강현· 해양문화재단 이사> www.visitkorea.or.kr -Google
 

2003.6.1 - 우리나라 최초의 팔미도 등대 점등 100주년

2003년 6월 1일은 우리나라에서 근대식 등대가 점등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등대는 항로표지인 광파표지의 하나이므로 등대 100주년은 곧 항로표지 100주년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1903년 6월 1일 점등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는

팔미도(八尾島) 등대이다. 1902년 3월 인천에 해관등대국이 설치되어, 5월에 팔미도를 비롯하여 소월미도, 북장자서,

백암에서 등대 건설에 착수하였으며, 이듬해인 1903년 6월 1일 그 중 팔미도 등대를 점등하였다.

100년 전 근대식 등대가 설치되는 과정에도 우리 근대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일본 등 열강의 강압으로 개항한 데 이어 일본이 그들의 필요 때문에 등대 설치를 강권하자,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서, 백암에 등대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일본은 일제강점기 동안에 대륙 진출에 필요한 해상거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등대를 설치하였다.

현재 우리나라에 설치되어 있는 유인등대 49기 중 36기가 광복 이전에 설치된 것이다.

이렇듯 우리나라 근대식 등대의 역사는 일본의 침략 야욕이 뻗어오는 뱃길을 안내하는 불행함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우리 등대의 역사에는 누란지세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발판이 된 사실도 있다. 6.25의 전세를 대 반전 시킨 인천상륙작전은 유엔군이 팔미도등대를 발견하고, 그곳에 해상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기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박물관종합정보안내 www.korea-museum.go.kr /Google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인 팔미도 등대는 조선정부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침략전쟁 도구로 일제의 강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일본은 인천개항때인 1883년 조선과 체결한 `통상장정'에 통상 이후 각 항을 수리하고 등대를 설치한다는 조항을 내세워 등대건설을 강권함으로써 조선은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이듬해인 1903년 6월 등대를 완공하게 된다.
팔미도 꼭대기인 해발 71m에 높이 7.9m, 지름 2m 규모로 세워진 국내최초의 등대는 처음에는 90촉광짜리 석유 등을 사용했으며 광복 이후 교통부에서 인수하면서 등대지기가 파견됐고 54년부터는

자가 발전시설을 갖추고 백열등으로 불을 밝혔다.
이후 62년에는 무선표지국을 설치했으며 67년에는 수은등으로, 81년에는 할로겐 등으로 각각 바뀌었고 92년에는

태양광발전장치를 설치했다.
팔미도 등대는 100년이 된 지난 2003년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해양수산부가 해양문화유산으로, 인천시가 지방문화재로

각각 지정해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새롭게 대치된 등대는 지하 1층·지상 4층, 높이 31m의 등탑과 위성항법 위치정보 송출장치 등 각종 첨단장비를 갖추고

옛 팔미도 등대 바로 옆에 세워졌다.
팔미도 등대는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해 더욱 관심을 끌었다.
당시 영흥도 일대에서 활동했던 대북 첩보부대인 켈로부대 대원들이 1950년 9월10일 밤 발동선을 타고 팔미도 등대에 들어가 9월14일 자정에 불을 밝힘으로써 극심한 간만의 차로 성공확률이 거의 없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단초를 제공했다.
당시 작전은 미 국방성내에서도 성공확률이 거의 없을 것으로 내다봤으나 켈로부대원들이 불을 밝히는 것을 신호로

7만5천명의 병사를 태운 연합군 함대 261척이 팔미도 등대를 길라잡이 삼아 월미도 해안에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됐다. 

(한동식 기자 기호일보) www.kihoilbo.co.kr Google

팔미도등대: 1902년 공사를 시작해 1903년 6월에 건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등대이다. 공사는 탁지부(度支部) 산하 해관등대국(海關燈臺局)이 맡았다. 높이는 7.9m이며, 지름은 약 2m이다. 해발고도 71m의 팔미도 꼭대기에 세워졌고,
처음에는 90촉광짜리 석유등을 사용하였다.
6·25전쟁 때는 켈로부대(대북첩보부대) 대원들이 이 등대를 탈환해 1950년 9월 15일 불을 밝힘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8·15 광복 후 교통부에서 인수하면서 정식으로 등대원을 파견하였고, 1954년 9월부터 자가 발전시설을 갖추고 백열등으로 불을 밝혔다. 1962년 무선표지국을 설치한 뒤, 1967년 수은등으로, 1981년 할로겐등으로 각각 바꾸었고, 1992년에는 태양광발전 장치를 설치하였다.
2003년부터는 위성항법 위치정보 송출장치를 비롯해 각종 첨단장비와 등탑·전망대를 갖춘 지하 1층, 지상 4층, 높이 31m의 새로운 등대를 건설하고 있는데, 이듬해 2월 이 등대가 완공되면 기존의 등대는 더 이상 등대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2003년 한국 등대 설치 100주년을 기념해 주변에 기념 조형물인 `천년의 빛`이 건설되고, 해양수산부에서 해양문화유산으로 지정함으로써 100년 동안 불을 밝혀 온 팔미도 등대는 폐기되지 않고 영구 보관하게 된다.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동 산 372번지 팔미도에 있다.
 
팔미도등대 유물상세정보
인천 광역시 중구 용유동의 팔미도에 있는 등대.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로 1903년 6월 처음으로 불을 밝힌 인천항 입구의 등대로 등탑에 설치된
석유등 불빛은 10KM 밖에서도 식별할 수 있었으며, 현재는 전등으로 교체하여 사용하고 있다.
등탑구조와 특징
구     조 : 콘크리트로 건축된 백색 원형으로 높이 7.9M
특     징 : 철근을 사용하지 않는 콘크리트 공법으로 건축되었으며 출입문 부근에는 석축으로 축조됨.
설계자 : 일본국 석조 원형 백색
등기명형: 제6등급 수은조식 회전등명기 석유증기 백열등
등       질 : 연섬석 24초를 격하여 16초에 3섬광
광달거리: 20리
공사기간: 1902년 5월 기공 1930년 4월 준공
(4월부터 5월까지 등명기 및 회전장치설치)
점등일 : 1903년 6월 1일
초대 등대원: 일본인 모리카메기, 세치가와 츄우치
박물관종합정보안내
 www.emuseum.go.kr  
 

3) 1873 - 캐나다의 정치가, 신문발행인 하우(Howe, Joseph) 사망

하우 [Howe, Joseph, 1804.12.13~1873.6.1]

노바스코샤 총리(1860~63)를 지내면서 노바스코샤에 책임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으며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연방 성립에 반대했다. 1827년에 하우는 비정치적인 주간잡지 〈어캐이디언 Acadian〉을 창간했다.

이듬해 그는 〈노바 스코션 Nova Scotian〉을 인수했는데, 이 신문은 뒤에 〈모닝 크로니클 Morning Chronicle〉에

통합되어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유력지 가운데 하나로 부상했다. 1836년 하우는 노바스코샤 의회에 핼리팩스 대표로 선출되었고. 1840년부터 집행위원회에 참여했는데, 1943년에 사임했다. 그는 자신의 신문을 통해 노바스코샤에 내각책임제를

수립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며, 총독대리인 포클런드 경을 비판했다. 1848년 포클런드를 사임시키는 데 큰 몫을 했으며,

그해에 마침내 내각책임제를 승인받았다.

 

1968 - 미국의 맹농아() 저술가, 사회사업가 헬렌 켈러(Keller, Helen) 사망

켈러 [Keller, Helen (Adams), 1880.6.27~1968.6.1]

신체장애를 이겨내고 정상인보다 왕성한 지적활동을 보여준 헬렌 켈러! 1968년 오늘 여든일곱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 앨라배마주의 터스컴비아에서 태어난 켈러는 생후 19개월에 열병을 앓고 시각과 청각을 잃었다. 7살 때부터 가정교사 설리번에게 교육을 받고 1900년 하버드대에 입학해 1904년 세계 최초로 대학교육을 받은 맹농아자로서 졸업했다. 헬렌 켈러는 '삼중고(三重苦)의 성녀'라고 불렸다. 그녀의 노력과 정신력은 전 세계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다양한 활동으로 '빛의 천사'로 불렸다.
또 켈러는 미국은 물론 해외로 돌아다니며 맹농아자의 교육과 사회복지시설의 개선을 위한 기금을 모아 맹농아자복지사업에 크게 공헌했다. 1937년에는 우리 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1952 - 미국의 철학자, 교육학자 듀이(Dewey, John) 사망 

듀이 [Dewey, John, 1859.10.20~1952.6.1]

버몬트주() 벌링턴 출생. 버몬트대학교를 졸업하고,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미네소타·미시간·시카고·컬럼비아 각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1930년 이후에는 컬럼비아대학교 명예교수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나, 차차 W.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에 끌려, 이것을 발전시킴으로써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 또는 인스트루멘털리즘(도구주의)의 입장을 확립하였다. 그의 《논리학적 이론의 연구》(1903) 《실험적 논리학 논문집》(1916) 《사고의 방법》(1933) 등에 의하면, 모든 사고()는 혼탁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명확한 상황으로 개조()하는 노력, 다시 말하면 ‘탐구()’인 것이다. 관념이란 이를 위한 실험적인 가설()이며 도구이다. 예를 들면, 처음에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도, 이것은 오렌지의 일종이 아닐까 하고 잘라 보고 맛봄으로써 오렌지라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실험적인 가설로서의 관념은 상황을 개조하기 위한 도구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칼의 좋고 나쁨이 잘 드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되듯이, 관념의 좋고 나쁨(진위)은 상황을 개조할 수 있는지의 유효성()에 의하여 판정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입장에서, 논리학은 모든 분야에서의 탐구 규범과 생차를 분명히 함으로서 앞으로의 탐구를 보다 더 유효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논리학―탐구의 이론》(1938)을 저술하였다. 또한 《경험으로서의 예술》(1934)에 의하면, 경험은 인식()의 한 형식일 뿐만 아니라, 반성이 가미되기 전에 느껴지며 살아 있는 것으로서 널리 해석된다. 인간생활은 혼탁하고 불확정()한 경험에서 통일적인 경험으로 이행하는 리드미컬한 움직임에 의해서 성립되었다. 전자에서 후자에 이를 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의미와 충족감이 주어진다. 이러한 이행()의 달성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적인 작용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교육에 대해서는 《학교와 사회》(1899) 《민주주의와 교육》(1916)에 의해서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교육이란 경험의 끊임없는 개조()이며, 미숙한 경험을 지적인 기술과 습관을 갖춘 경험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시키거나, 반대로 학생들의 자발성()에만 의존하면 불충분하므로 여러 가지 경험에 참여시킴으로써 창조력을 발휘시킬 수 있는 계획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 일을 위하여 학교는 현실사회의 모델일 뿐만 아니라, 사회개조의 모체가 될 수 있는 이상사회로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92세라는 그의 생애동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었고, 미국이 최대강국으로 부상한 시대였다. 그러나 독점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이 무너져가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 제퍼슨과 링컨의 고전적인 이상을 새로이 개조하고, 서민의 경험을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에 의해 소화하여 보편적 교육학설을 창출하여 세계 사상계에 기여하였다. 1932년 ‘전국교육협회’ 명예회장, 1939년 중국에서 제이드 훈장, 1949년 칠레에서 메리트 훈장을 받았고, 터키·러시아 등을 방문하여 교육혁명을 지도하였다. 1946년 87세에 42세인 로버타와 재혼, 1952년에는 뉴욕주() 자유당 명예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적 지도자들은 그의 이상을 배반하고 힘과 금력으로 전세계를 지배하려 하였다.

여기에 그의 사상의 비극적인 성향이 있다.

 1942 - 독일, V2 로켓 시험 발사 

 

1926 - 미국의 배우 마릴린 먼로(Monroe, Marilyn) 출생

먼로 [Monroe, Marilyn, 1926.6.1~1962.8.5]

1926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노마 제인 모텐슨(Norma Jeane Mortenson)이다. 어린시절을 불우한 환경에서 보냈다. 사진모델 시절 찍은 누드사진을 계기로 1948년 영화 《Scudda-Hoo! Scudda-Hay!》에 첫 출연하였으며, 《아스팔트 정글 The Asphalt Jungle》(1950)에서 인정을 받았고, 《나이아가라 Niagara》(1953)에서 주연을 맡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아름다운 금발과 푸른 눈, 전신에서 발산하는 독특한 성적 매력은 그녀를 순식간에 세계적인

섹시 심벌로 올려 놓았다.
그러나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극작가 A.밀러를 포함한 세 번의 결혼실패 등 사생활은 불행하였다. 할리우드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끌려 약물중독이 되었고, 마침내 자살로 보여지는 의문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 주요 주연작품으로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1953) 《돌아오지 않는 강》(1954) 《7년 만의 외출》(1955)

《왕자와 무희》(1957) 《버스 정류장》(1956) 《뜨거운 것이 좋아》(1959) 《황마()와 여인》(1960) 등이 있다.

 1922 -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개최

1922년 6월 1일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가 개최되었다. 3·1운동 이후 문화정치를 표방한 일제는 한국 근대미술의 일본화를 꾀하며 조선미술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려 했다. 1921년 조선인 미술가 단체인 서화협회가 전시회를 개최하자, 일제는 일본의 관전인 문부성전람회와 제국미술전람회를 본떠 조선미술전람회를 설치했다. 1922년 제1회 전람회에서 출품작 403점 가운데 215점이 입선되었고, 이후 23회에 걸쳐 개최되면서 대규모의 미술전람회로 성장했다. 그러나 조선미술전람회의 전통이 8·15해방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로 연결되면서 일제식민지 잔재를 온존시키고 바람직한 미술발달을 저해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편 해방 이후 서화협회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고희동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미술협회가 결성되었다.

 

1910 - 영국 탐험가 스코트, 남극탐험을 위해 영국 출발

스코트(Scott, Robert Falcon, 1868~1912)는 1901∼1904년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남극탐험을 지휘하였다.

이때 킹 에드워드 7세 랜드를 발견하여 남한() 도달기록인 남위 82도 17분을 기록하였다. 1910년 테라 노바호()에 의한 제2차 남극탐험에 나서서 1912년 1월 18일 남극점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남극점은 1911년 12월 14일 노르웨이의 아문센이 도달하였기 때문에 첫 정복의 웅도()는 깨어졌다.

그와 4명의 동행자는 귀로에 악천후로 조난, 식량부족과 동상으로 전원 비명의 최후를 마쳤다.

그의 유해와 일기(마지막 일자는 3월 29일) 등은 1912년 11월 12일 발견되었다. 마지막까지 용기를 잃지 않고

영국신사다운 최후를 마친 것이 알려져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1907 - 영국의 비행사, 항공기술자 휘틀(Whittle, Frank) 출생

휘틀 [Whittle, Frank, 1907.6.1~1996.8.8]

코벤트리 태생. 레밍턴대학을 졸업하고 항공사관학교에서 조종훈련을 받은 다음 1928년 조종장교로 제111비행중대에 배속되었다. 1931∼1932년 해상항공시험소에서 실험비행에 종사하였다. 그 동안 제트 추진에 가스터빈을 이용하는 연구를 개발하여 30년에 최초의 특허를 얻고, 37년 그 기관의 운전에 성공하였다.
1941년 휘틀엔진을 장착한 글로스터 E 28/39가 영국 최초의 제트기로서 비행에 성공하였으며,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영국 공군의 제트기 중대가 탄생하였다. 그 후에도 제트 추진의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1946년 공군 준장으로 승진, 1948년 퇴역, 같은해 나이트 작위가 수여되었다. 1948∼1952년 영국 해외항공회사(BOAc)의

기술고문을 지냈고, 1950년부터 파워 제트사 상담역으로 있었다. -naver

                 1)                                         2)                                        

 

1) 1815 - 근대 그리스의 첫번째 왕 오토(Otto) 출생

오토 [Otto, 1815.6.1~1867.7.26]

전제주의 통치를 했으나 1843년 강요에 의해 입헌군주가 되었고 투르크를 희생시켜 그리스의 영토 확장을 꾀하다 실패해 퇴위했다.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1세의 차남으로 1832년 5월 런던 회의에서 열강들에 의해 그리스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리스 국민의회는 1832년 8월에 그의 왕위를 인준했고 그는 1833년 2월 6일 바이에른의 몇몇 조언자들과 함께 그리스에 도착했다.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고 상비군을 조직했으나 바이에른식의 절대주의적 통치와 중과세로 국민들의 원성을 샀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1837년 총리 요제프 루트비히 폰 아르만스페르크를 해임했다. 1841년 영국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크레타 병합 시도가 실패한 뒤 1843년 그리스에 반란이 일어났다.

 

1637 -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 탐험가 마르케트(Marquette, Jacques) 출생  

마르케트 [Marquette, Jacques, 1637.6.1~1675.5.18]

별칭은 마르케트 신부(Père Marquette). 루이 졸리에와 함께 미시시피 강을 따라 여행하고 그 수로에 대해 처음으로 정확한 정보를 알렸다. 1666년 그는 퀘벡에 도착했다. 인디언 말을 배운 후 1668년 수세인트마리 운하(지금의 미시간 주에 속함)와 1671년 세인트이그나스(지금의 미시간 주에 속함)에 선교본부를 설립하는 일을 도왔다. 1673년 5월 중순 뉴프랑스 지방 총독 프롱테나크 백작의 의뢰를 받은 졸리에와 함께 미시시피 강의 수로와 하구를 찾기 위해 세인트이그나스를 떠났다.

그들은 서쪽으로 그린 만(지금의 위스콘신 주에 속함)까지 가서 폭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위스콘신 강을 가로지르는 연수(連水) 육로까지 갔으며, 6월 17일 프레리뒤시앵 부근에서 미시시피 강으로 들어갔다

 

1804 - 러시아의 작곡가 글린카(Glinka, Mikhail) 출생  

글린카 [Glinka, Mikhail (Ivanovich), 1804.6.1~1857.2.15]

1804년 스몰렌스크주에서 출생하였다. 대지주의 아들로 페테르부르크에서 F.필드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나, 음악가가 될 마음이 없어 처음에는 교통성의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26세 때 건강문제로 이탈리아와 독일로 여행을 떠나, 이 여행 중 베를린에 머문 것이 그의 생애를 결정지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화성과 작곡을 S.W.덴에게 배우고,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개시하였다. 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서는 푸슈킨, 주코프스키 등 문학서클의 사람들과 사귀었으며, 그들의 자극으로 오페라 《이반 수사닌》(1836)을 썼는데, 이것이 러시아음악의 시작이 되었다. 그 후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1842)를 비롯한 여러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1844년에 다시 외국여행을 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유럽 각지를 순방하였다. 그러는 동안 베를리오즈와 친교를 맺고, 에스파냐에서는 작곡을 위한 소재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첫 작곡가,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이는 19세기 러시아 음악의 양식을 결정하는 데 어떠한 작곡가보다도 그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며, 차이코프스키나 러시아 국민악파의 음악도 이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외의 작품으로 《호타 아라고네사에 의한 화려한 카프리치오소》(1845)

《카마린 스카야》(1848) 등의 관현악곡이 유명하다.

 

1780 - 프로이센의 군인 클라우제비츠(Clausewitz, Carl von) 출생

클라우제비츠 [Clausewitz, Carl (Philipp Gottlieb) von, 1780.6.1~1831.11.16]

부르크 출생. 중부 독일의 관리 집안에서 태어나 12세 때 군대에 들어갔고, 1801∼1803년 사관학교에서 샤른호르스트에게서 병학()을 배웠다. 프랑스 혁명에의 간섭전쟁() 때는 프로이센군의 사관으로서 활약하였다. 예나의 패전 후에 슈타인의 프로이센 개혁이 시작되자 샤른호르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군제개혁자 서클에 가입하였다. 1812년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프로이센에서 도망쳐서 동지와 함께 러시아군에 투항하여 나폴레옹으로부터의 해방전쟁()에 진력하였다. 1815년 프로이센왕으로부터 귀국을 허락받고 사관학교 교관과 군사행정관으로 활동하였다. 1818∼1830년 육군대학교장, 1830년 포병감()을 지낸 후 그나이제나우 장군 휘하의 참모장을 역임하고, 콜레라에 걸려 급사()하였다.

그의 사후에 간행된 저서 《전쟁론 Vom Kriege》은 이 시대의 전쟁경험에 기초를 둔 고전적인 전쟁철학으로 불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전쟁은 정치적 수단과는 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정치에 불과하다’고 한 유명한 말은 군사지도부에 대한 정치지도부의 우월성을 설파한 것이며, N.레닌 등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1815 - 근대 그리스의 첫번째 왕 오토(Otto) 출생

1804 - 러시아의 작곡가 글린카(Glinka, Mikhail) 출생  

 

1780 - 프로이센의 군인 클라우제비츠(Clausewitz, Carl von) 출생

1637 -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 탐험가 마르케트(Marquette, Jacques)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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