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감정 근원에서 본 종교관
인간이 가진 의식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건 고통 고독 등이지만, 의식을 지탱하는 우리의 무의식은 허무 공백 등을 말하게 하며 가장 두렵습니다.
희노애락이라는 것은 의식의 작용뿐만이 아니라, 무의식의 공포를 조장한 비합리적 억압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유형의 억압을 우리는 존재감에의 열망이라고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분은 상대적인 가치로 좋음이 있으면 필히 싫음도 뒤 따라 옵니다. 이 상대적인 기분의 시초는 육체적인 고통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플라톤은 우리의 감성은 우리의 육체적 감각에 시작을 두며, 이성은 우리의 본래 근원지인 저세상에 시작을 둔다고 합니다.
좋다고 하는 기분의 연속은 곧 좋다고 하는 기분의 소멸을 의미하며, 이 좋다고 하는 기분의 양질을 높이기 위해선 좋지 않음이라는 부정의 기분을 간간이 겪어내야 합니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라, 계속되는 행복만을 원하나, 실상은 행복에 언제나 행복을 더하고 싶어 하며, 나중엔 하찮은 행복 따위엔 예전만큼의 행복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연속되는 육신의 행복들을 만끽 할 만큼 우리의 삶이 만만치 않음으로, 우리는 행복의 영원성을 꿈꾸기도 합니다. 곧 우리의 만만치 않은 간혹 불행하기도 한 우리의 삶이 행복을 행복으로 느낄 수 있는 감식력을 부정의 방식으로 부여해 준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사유의 기초한 행복이란 오욕 칠정을 벗어나는 길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라는 것으로 정서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좋지 않은 일에도 좋지 않음이라는 정서를 느끼지 않고, 반대로 좋은 일에도 좋음을 느끼지 않으며, 이러함으로 해서 해탈하신 분이라면 인생의 희노애락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불교처럼 선악의 분별과 그로인한 온갖 정서에서 해탈하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기독교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같은 의인이 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었고 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인간의 삶을 관찰한 결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 니체라는 만일 신이 있다면, 또한 그 신이 만일 인격신이라면 그 신은 죽었다. 라고 극단적인 말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은 신을 부인하고 좌절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이치입니다. 인간의 다원화한 논리 발전으로 인간에는 어쩌면 새로운 가치관에 입각한 구원의 종교가 기대 되고 있는 것인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게 합니다.
'우리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가 선용으로 남녀노소 구별 없이 보드 게임을 권한다. (0) | 2015.07.01 |
---|---|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본 천부교 (0) | 2015.06.27 |
애달픈 사연의 달맞이꽃 사랑 (0) | 2015.06.01 |
사랑한다는 뜻 (0) | 2015.05.30 |
장미꽃 넝쿨 아래서 (0) | 2015.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