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향 제철에 대하여 이야기 하려면 먼저 당시의 우리경제 현황을 살펴보아야 그의 충정어린 애국심이 어떤 것인지 바른 해답이 나온다.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태동기는 광복 전. 그때는 일제에 의한 군수공업의 일환으로 건설된 한국 철강공장이 모태를 이뤘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장이 북한에 위치해 있던 관계로 광복 후 국토의 분단과 함께 남한의 철강공업은 절망적인 상태였다.
남한에 위치한 철강공장은 삼화제철과 조선이연 인천공장 둘 뿐이었으며 이들마저도 한국전쟁으로 공장시설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50∼60년대 철강 불모지
지난 1953년 휴전으로 한국 철강 산업의 복구가 시작됐다. 제선부문에 있어서는 삼화제철소가 전쟁으로 파괴된 총 8기의 소형 용광로 가운데 3기를 보수, 1954년 6월 시험생산을 개시했으며 그외 군소 철강업체들도 전쟁 고철을 이용하여 재생 선철(주물)을 생산하였다.
이후 1962년 경제개발계획 추진으로 공업화가 촉진됨에 따라, 철강재 수요는 크게 증가했다. 이에 따라 기존시설의 확충과 신규공장의 건설이 활발하게 이뤄져 국내 철강 산업이 점차 활기를 띠게 됐다.
60년대는 전기로를 중심으로 철강생산이 확대된 시기다. 당시 삼화제철의 경우 시설의 노후화와 원료 및 연료의 부족으로 실질 가동능력은 3만6000톤에 불과했으나 전기로에 의한 제강능력은 크게 증가하던 때였다.
전기로는 지난 1963년 부산제철소가 처음으로 12톤급 1기를 설치한데 이어 1966년에 동국제강이 20톤급 1기, 한국철강이 15톤급 2기, 극동제강이 20톤급 1기를 각각 설립해 가동했다.
이때 전기로 제강능력은 1966년 22만톤. 이어 1968년 현재 INI스틸의 전신인 인천제철의 전기로 제강능력 확장과 한국철강, 시온제강, 동국제강 등의 설비확장으로 국내전기로 제강능력이 43만톤으로 증가됐다.
박태선 장로의 철강산업 독려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받던 한국천부교는 1962년7월 현(現)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일대에 덕소신앙촌 건설이 시작되었다. 소사신앙촌에 있던 생산 공장들이 덕소신앙촌으로 옮겨지고, 6천여 명의 교인이 입주했다. 이곳에서는 대부분 소사신앙촌에서 생산하던 것을 계속하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일차 5개년계획에서 누락된 제철사업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남양주군 와부면 덕소리에 시온철강(주)을 (1963. 5. 3) 설립하였다. 당시로는 정부에서 생각하지 못한 철강공장을 한 종교 단체 기업이 제철공장에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고 보여 지며 자료들에 의하면 당시 영부인 고 육영수여사, 주한 미 대사. 정부 부처 장관들이 공장을 둘러보고 갔다고 되어있다.
이로 인하여 정부가 철강 사업에 도전할 필요성을 정부가 깊이 인식하게 한 것이 계기로가 되었고 생각된다. 한국 천부교(天父敎)에서는 해를 몇 해 넘기며 포항 종합제철 건설계획이 발표되자 사명을 다하였다고 생각한 경영자는 시온 제강공장(製鋼工場)의 문을 닫고 철인 박태준의 고향마을 옆 현(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일대 기장신앙촌이 건설(1970년 2월 28일)하고 덕소신앙촌에 있던 생산 공장을 기장신앙촌으로 이전한 이런 일이 있었다<천부교 역사관자료 참조>.
포항종합제철 탄생
박정희 대통령은 철강 산업은 타 산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기초 소재산업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경제개발 2차 5개년 계획에는 제철소 건설계획을 수립하였다.
초대사장으로는 박태준으로 그는 육군사관학교 6기 출신으로, 1963년 소장으로 예편해 대한중석 사장을 거쳐, 1968년 4월 포항제철의 초대 사장이 되어 철강공장 건설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박태준은 1967년 종합제철소(綜合製鐵所) 건설추진위원장을 맡아 “실패하면 오른쪽에 있는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우향우 정신’으로 포항제철소(浦項製鐵所)를 탄생시켰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30분 포항제철소 용광로에서 황금빛 쇳물이 흘러나오자 건설일꾼들이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오렌지색 섬광이 사람 키보다 높이 치솟는 순간 박태준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대형 고로(高爐)에서 ‘산업의 쌀’이라는 쇳물이(1973년 103만t 규모)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우리 손으로 자체 생산한 값싸고 품질 좋은 철강은 오늘날 한국이 조선 자동차 가전 등에서 세계시장을 선도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故박태준회장은 “철(鐵)은 산업의 쌀”이라는 박정희 대통령과 의기투합해 43년 전 철강 불모지인 포항의 뻘밭을 매립한 바닷가 허허벌판에 종합제철공장을 지은 이후 이제 연산 3000만t이 넘는 세계 최고의 종합제철회사로 우뚝 서게 하고 공학도 배출의 산실로 자리 잡은 포항공대(현 POSTECH)를 건학한 '철인(iron man)'이자 교육 위인으로 탐욕을 모르는 청정, 청렴하였고 국가, 사회, 경제계의 거목 지도자이며 가난한 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고 나눔과 배품을 행동으로 실천해 보여주었다.
박태준의 애국심과 철학
돈·기술·경험 그 어느 하나도 없는 맨손으로 시작했지만 “역사는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자의 몫이란 사실을 기억하라.” 며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대로 일평생 살아온 박 회장은 용광로 보다 더 뜨거운 열정과 집념으로 경제발전의 선봉장 역을 다했기에 총리·여당 대표 같은 최고위직 경력보다도 세계 최고 수준의 철강국가 기적을 이뤄낸 '철인(鐵人)’ 으로 국민들에 각인된 경제거목이다.
고인은 한국경제의 압축 성장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불굴의 기업가정신의 화신이었다. 1970년 1인당 국민소득 254달러였던 가난한 농업국가가 선진 산업국가로 나아가자면 철강의 생산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과업을 받은 박태준은 뜨거운 애국심과 군인정신으로 맨땅에서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시대적 소명을 이뤄냈다
박태준은 1927년 9월 29일 경상남도 동래군 출신으로 포철과 인연하여 강철왕’ 또는 ‘한국의 카네기’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한국철강산업을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렸고 호는 청암(靑岩)이다.
고인은 우리시대에 애국 ,구국, 호국, 보국, 충국 정신과 선각 선지자로서 이룬 위업 또한 행동으로 실천하는 추진력, 판단력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면서 조국부강과 민족애에 불타는 유훈(遺訓)이 역사에 길이 남겨 질것을 확신한다.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안장
'한국의 철인(鐵人)'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영결식이 17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엄수됐다.
영결식에는 박희태 국회의장을 비롯한 정ㆍ재계 인사, 포스코 전ㆍ현직 임직원 등 600여명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김동건 아나운서의 진행된 영결식은 고인에 대한 경례와 약력보고, 조사, 추도사, 조전낭독, 영상 및 육성성취, 조가, 헌화 및 분향, 축도, 조총 및 묵념 순으로 진행됐다
맺는말
입으로 주여 한마디 한다고 천국 간다고 떠들고 있는 종교도 있는데 당신은 조국과 민족 및 세계 인류를 위하여 기여한 그 공로가 너무도 큽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은 당신이 행한 공적으로 천국에 임하게 할 것 입니다. 우리국민은 이제 철인박태준을 기쁘게 역사 속으로 보내어 드립니다. 하나님의 품속에서 우리와 영원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가집 문 풍지소리 (0) | 2012.01.31 |
---|---|
어머니 얼굴 (0) | 2012.01.14 |
21세기 스포츠포럼의 '올해의 인물' 문동후 (0) | 2011.12.17 |
부 부 (夫 婦)의 소중함 (0) | 2011.11.28 |
낙엽의 의미와 추억 (0) | 2011.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