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 최고 명문가 남평 문씨
본관 연혁
남평(南平)은 전라남도 나주시(羅州市) 남평·산포(山浦)·금천(金川)·봉황면(鳳凰面) 등 동부지역 일대의 옛 지명이다. 백제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 지역이었는데,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한 뒤에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을 두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현웅현(玄雄縣)으로 고쳐 무주(武州: 光州)에 속하게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남평군(南平郡: 永平郡)으로 바꾸었고, 1018년(현종 9)에 나주목의 관할이 되었다.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두어 독립했으나, 1390년(공양왕 2) 화순감무가 겸하여 통치하였다가 1399년에는 다시 감무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으로 남평현이 되었다. 오산(烏山)으로도 불렸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남평군으로 나주부 소속이 되었다가 1896년 전라남도의 관할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남평군이 폐지되어 나주군(羅州郡)에 통합되고 1995년 통합 나주시가 되면서 나주시 남평면(南平面)이 되었다.
전남 나주시 남평읍에 있다. 본래 남평군 군내면의 지역으로서 남평 읍내가 되어 남평읍내 또는 읍내, 남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장기리와 대교리, 하촌리의 각 일부와 두산면의 구등리, 정자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남평리라 해서 나주군 남평면에 편입되었다.
성씨의 시조
휘는 다성(多省)이시고 字는 명원(明遠) 號 : 삼광(三光) 이시며 시호는 무성(武成)공입니다
문다성(文多省)에 관해서는 탄생에 관련된 일화가 있다. 472년(신라 자비왕 15) 남평현(南平縣) 동쪽에 장자지(長者池)라는 큰 못가에 큰 바위가 솟아 있는데 그 위의 석함 속에 피부가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 있었다. 기이하게 생각된 군주가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불과 5세에 문사(文思)에 저절로 통달하고 무략이 뛰어날 뿐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달아 문자(文字)로서 성(姓)을 삼고 다성(多省)이라 이름하고 명원(明遠)으로 자(字)를 삼으니 그 시대 사람들이 칭송하여 말하기를, 문군(文君)은 밝기가 해와 달 같고 맑기가 별 같다 하여 호(號)를 삼광(三光)이라 하였다
나이 14세에 대사도(大司徒)가 되었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購大將軍)에 이르렀으며 삼중대광보국(고려초 9품계의 향직중 첫째등급) 삼한벽상공신(三重大匿輪國三韓壁上功臣 : 후삼국 통일에 협력한 당대의 세력가들에게 내린 공신호임)으로서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에 봉해지고, 태사태부(太師太博)가 되시었다. 그는 그 후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금자광록대부 삼중대광보국 상주국 동 평장사 고려개국 벽상공신 남평백으로 봉군 되시고 식읍 3천호를 받으셨으며 98세에 별세하셨다고 합니다.
1993년 탄강지인 전남 나주시 남평면 풍림리의 문바위 옆에 설단하고 매년 3월20일 단제를 모시며 장연서원에 배향하여 9월 중정일에 유림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무성공 諱 다성 시조님의 묘소가 전하지 않으므로 전남 나주시 남평면 풍림리의 문암바위 옆에 설단을 하였고 매년 3월20일 전국의 일가들이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남평문씨 시조비 : 전남 나주시 남평읍 서산리 주막거리 남쪽에 있다.
문암은 민속자료 32호로 시조단의 서쪽이며 문암각을 지어 문암을 보호하고 있는데 2004년 단청작업을 마쳤습니다.
장자못은 1970년경에도 고기가 많아 수렵도 하고 시조단의 앞으로 배가 다녔으나 토사가 쌓여 매립이 되어 주변은 논이 되었고단소 입구까지 차량진입이 가능합니다. 장연서원은 직선거리로 300m 정도로 마주 보입니다.
시조의 생졸연대와 벼슬길에 이르신 사적과 배위와 묘소는 일찍이 문헌의 증거가 없으므로 기록치 못하였으며
후에 그 기록이 없는 것은 대개는 이와같은 것이나 근자에 상고한즉 각처에 간혹 초한 족보와 인출한 족보가 있는데 동경사를 상고한 즉 시조가 신라 자비왕(20대왕) 15년(474) 미동부리현에 나시어서 벼슬이 삼광상중대부(신라관직) 상구국 대아손 대원수 남평개국백이며 시호는 무성이라고 하고 또 부인 김씨라하였는데 정묘년 가을 경주에 가서 동경사를 상고한즉 처음부터 실린 것이 없으니 위에서 말한 것은 어디 근거를 두고 말한 것인지 알수없다.
《고려사》 〈세가(世家)〉 태조 34년조에 처음 나타난다. 936년(태조19)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4년뒤인 940년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하고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우고 공신당의 동서 벽에 삼한공신의 모습을 그렸다. 벽에 그린 삼한공신이라 하여 삼한벽상공신으로 부른다. 공신당에 그려진 삼한벽상공신은 고려의 개국공신 가운데서도 큰 공을 세운 인물들로
①홍유(洪儒:殷悅 의성) ②배현경(裵玄慶 성산) ③ 유금필(庾금弼무송) ④복지겸(卜智謙 목주)
⑤ 신숭겸(申崇謙 평산) ⑥김선필(金宣弓 선산) ⑦이총언(李총言 벽진) ⑧김선평(金宣平 안동)
⑨권행(權幸 안동) 10.장정필(張貞弼 인동) 11.윤신달(尹莘達 파평) 12최준옹(崔俊邕 동주)
⑬문다성(文多省 남평) ⑭이능희(李能希 청주) ⑮이도(李棹 김의) 16.허선문(許宣文 양천)
17.구존유(具存裕 능성) 18.원극유(元克猷 원주) 19.금용식(琴容式 봉화) 20.김훤술(金萱術 해평)
21.한란(韓蘭 청주) 22.강여청(姜餘淸 냉천) 23.손긍훈(孫兢訓 밀양) 24.방계홍(房係弘남양)
25.나총례(羅聰禮 금성) 26.이희목(李希穆 부평) 27.염형명(廉邢明서원-파주) 28.최필달(崔必達 강릉)
29.김홍술(金弘述 ) 30. 김락(金樂) 등이다
중시조 문익(文翼)
중시조는 문익(文翼)이전은 역사적으로 입증할 자료가 없었다. 남평 문씨 족보는 근래 고려사에 의존하여 익 이후기록을 근거하고 있다. 익은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으며 1098년(숙종 3) 좌찬선대부ㆍ급사중으로 임명되었으며, 1099년 요(遼)나라에 가서 원자(元子)의 책명(冊命)을 받아와 직문하성(直門下省)으로 승진되었다. 1102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역임하였고, 1103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냈다.
공의 선세(先世)는 문호무로 조정에서 높은 벼슬하였고, 조부와 증조 고조는 모두 가첩(家牒)에 실려 있다. 익(翼)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였는데 네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공인(公仁)이요 차남은 공원(公元) 막내 공유(公裕) 모두 재상(이부상서)가 되었고, 다음 가관(可觀)은 조계종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명문의 기초를 다졌다. 인종 때의 재상이었던 공유(公裕)ㆍ공인(公仁), 의 아버지이며, 명종 때 명재상으로 이름난 문극겸(文克謙)의 할아버지이다.
공유(公裕)
개명(改名)고수(顧壽), 자는 항적(亢迪).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익(翼)의 아들이고, 공인(公仁)·공원(公元)과 조계종대선사(曹溪宗大禪師) 가관(可觀)의 동생이다. 김국진(金國珍)·민수(閔脩)·김원석(金元碩)·김장(金璋) 등은 매제이다. 한안인(韓安仁)의 사위로 극겸(克謙)·극순(克純)·극이(克易)는 아들이다.
1104년(숙종 9) 한림학사 정문(鄭文) 주관하의 남성시(南省試)에 합격하고, 1112년(예종 7) 오연총(吳延寵)·임언(林彦) 주관하의 문과에 급제하였다.
생애와 활동인종의 즉위 후 이자겸(李資謙)이 집권하자, 그와 맞섰던 장인 한안인이 죽게 되었으며, 합문지후(閤門祗候)였던 그는 형인 공인 및 정극영(鄭克永)·이영(李永)·임원준(任元濬)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이자겸이 몰락한 뒤, 1127년(인종 5) 합문지후에 복직되고, 1129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133년 형인 공인과는 대조적으로 시어사로서 직문하성(直門下省) 이중(李仲)과 함께, 묘청과 백수한(白壽翰)을 성인(聖人)으로 삼고 천거한 근신(近臣) 김안(金安)·정지상(鄭知常)·이중부(李仲孚)와 환자(宦者) 유개(庾開) 및 이들을 추종한 대신들을 배척하라고 요청하였다가 충주목부사로 좌천되었다.
묘청의 난이 진압된 뒤 충의(忠義)로서 탁용되어 호부낭중 동궁시독사 지제고(戶部郎中東宮侍讀事知制誥)가 되었다. 1147년(의종 1) 지어사대사로서 우정언 정지원(鄭知源)과 함께 시사(時事)를 간언하였다. 1148년 서북면병마사 시우산기상시(西北面兵馬使試右散騎常侍), 1149년 보문각학사 시형부상서(寶文閣學士試刑部尙書), 1150년 예부상서, 1152년 형부상서·병부상서를 역임하였다.
4형제에 공이 그 막내이다. 백씨(伯氏)와 중씨(仲氏), 계씨(季氏)가 서로 차례로 정승에 올라 세상에서는 공의 집을 재상집이라 하여 심히 영화롭게 여겼다
공은 풍채(風采)가 당당하고 문장(文章)이 뛰어났으며, 더욱이 예서(隸書)를 잘썼다. 병신년에 조정에서 중국에 사신을 보내며 보행(補行)할 사람을 선택할 때 공이 사무직으로 뽑히어 수행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사신으로 금(金)나라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또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儀射) 지추밀원사(知權密院事) 남평개국자(南平開國子: 공,후,백,자,남의 5등급중 4등급) 식읍삼백호(食邑三百戶)를 받고 금나라 하등극사(賀登極使)가 되었다 일찍이 동북서북(東北西北) 양계(兩界)의 안찰병마사(接案兵馬使) 도통병마사(都統兵馬使)를 지냈다.
저술활동글씨에 능했으며, 주로 문한직을 역임하였다. 작품으로는 「묘향산보현사창사비명 妙香山普賢寺創寺碑銘」과 음기(陰記)가 있다. 그의 서풍은 당송간에 드날렸으며, 서체는 북송의 4대가 채양(蔡襄)의 서풍을 바탕으로 하여 개성을 살렸고 해서 전성시대에 행서 비문으로 회유 가치가 있다. 남평의 장연서원(長淵書院)에 제향되었다.
공원(公元)
1084(선종 1)∼1156(의종 10). 고려 중기의 문신.
개설본관은 남평(南平).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익(翼)의 아들이며, 이자연(李子淵)의 아들이자 이자겸(李資謙)의 숙부인 의(顗)의 사위이다. 공인(公仁)의 아우이고, 조계종대선사(曹溪宗大禪師) 가관(可觀) 공유(公裕)의 형이며, 최사추(崔思諏)ㆍ한안인(韓安仁)과는 사돈간이다.
아버지의 음서(蔭敍)로 기용되었다가 예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인종 때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에 발탁되고, 1130년(인종 8) 전중시어사로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이주연(李周衍), 중승 임원준(任元濬), 잡단(雜端) 황보 양(皇甫讓), 시어사 고당유(高唐愈)와 함께 시폐(時弊)를 상소하였으나 2, 3사(事)만 받아들여졌다.
1135년 낭중으로 금나라에 가서 만수절(萬壽節)을 하례하였다. 1148년(의종 2)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어사대부지추밀원사 판삼사사(御史大夫知樞密院事判三司事)가 되었다. 1150년 지공거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참지정사에 올랐다.
1151년 판형부사(判刑部事)가 되었다. 이 해 대령후 경(大寧侯暻 : 의종의 동생)과 교결(交結)했다고 하여 내시낭중(內侍郎中) 정서(鄭敍)를 탄핵하였다. 또한 대간을 무고한 천례 출신인 환관 정함(鄭諴)을 탄핵하였다. 이어 중서시랑평장사 판이부사(中書侍郎平章事判吏部事)를 거쳐 수사공(守司空)이 되었다.
1152년 서경유수사 문하시랑동평장사(西京留守使門下侍郎同平章事)에 올랐으나, 우간의 신숙(申淑)의 정함 탄핵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의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경(貞敬)이다.
공인(公仁)
?∼1137(인종 15). 고려 중기의 문신.
개설본관은 남평(南平). 초명은 공미(公美).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낸 익(翼)의 맏아들로, 공원(公元)과 조계종대선사(曹溪宗大禪師) 가관(可觀)공유(公裕)의 형이다. 김국진(金國珍)·민수(閔脩)·김원석(金元碩)·김장(金璋)은 매제(妹弟)들이다. 한안인(韓安仁)과는 사돈지간이며 이자겸(李資謙)과는 동서지간이다.
생애와 활동사항집이 한미했으나 문과에 급제해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고 권문(權門)의 사위로서 호사하였다.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사신이 되어 요나라에 갔을 때에는 사사로이 진귀한 물건을 선물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115년(예종 10)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이부상서왕자지(王字之)와 함께 송나라에 사은사로 가서는 진사(進士) 김단(金端)·견유지(甄惟厎)·조석(趙奭)·강취정(姜就正)·권적(權適) 등을 태학(太學)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이듬해 귀국해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고, 1117년 전중소감우승선 겸 태자우찬선(殿中少監右承宣兼太子右贊善), 1122년 예빈소경추밀원지주사(禮賓少卿樞密院知奏事)를 지냈다. 그 해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한안인을 중심으로 이영(李永)·정극영(鄭克永) 등과 함께 이자겸을 반대하다가 최사전(崔思全)의 참소로 유배되었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이 몰락하자 이듬해 이부상서가 되고, 예부상서 지제고 동지추밀원사(禮部尙書知制誥同知樞密院事)에 이르렀다. 1128년에는 지공거가 되어 이원철(李元哲) 등을 시취(試取: 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는 것)하였다. 한편 이중부(李仲孚)·임경제(林京濟)·김안(金安) 등과 더불어 서경천도(西京遷都) 주장에 동조하였다. 동생인 공유가 묘청(妙淸)을 극력 반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정지상(鄭知常)과 함께 묘청을 성인(聖人)이라 추앙하였다. 그리고 묘청에게 국가사(國家事)를 자문하게 하라는 상소까지 올렸다.
그러나 김부식(金富軾)·임원애(任元敳)·이지저(李之氐) 등 소수의 반대에 부딪혔다. 1129년 이부상서 지문하성사(吏部尙書知門下省事)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다. 그리고 이듬해 검교사공 중서시랑평장사(檢校司空中書侍郎平章事)가 되었다. 1132년 내시인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이중부와 더불어 어의(御衣)를 받들고 서경에 가서 묘청이 만들어 낸 법사(法事)를 행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판상서병부사 감수국사(判尙書兵部事監修國史)가 되었다.
1135년 서경에서 묘청의 난을 진압하던 김부식이 난에 가담했다가 항복한 윤첨(尹瞻)을 관대하게 대우하도록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문공인은 한유충(韓惟忠) 등과 더불어 이에 반대하고 윤첨을 옥에 가두게 함으로써 서경인들이 재차 반란을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시켰다. 뒤에 좌상시(左常侍)이중(李仲)과 중서사인(中書舍人)이지저가 묘청을 추앙한 대신을 처형하라는 소를 올리자 그 이듬해 간관(諫官)들의 탄핵을 받아 수태위 판국자감사(守太尉判國子監事)로 좌천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懿)이다.
문극겸(文克謙)
1122(예종 17)∼1189(명종 19). 고려 중기의 문신.
자는 덕병(德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집현전대학사 경정공(敬靖公) 공유(公裕)의 아들이다.
생애와 활동
큰아버지 공인(公仁)의 음보(蔭補)로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이 된 뒤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다가 의종 때 급제하였다. 여러번 자리를 옮겨 좌정언(左正言)이 되어서 위복(威福)을 자행하던 환자(宦者) 백선연(白善淵)과 탐욕을 일삼던 술인(術人) 영의(榮儀) 등을 탄핵하다가 황주판관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왕 측근자의 모함으로 다시 진주판관으로 좌천되려다가 “직신(直臣 : 국정이 혼란할 때에 기탄없이 임금의 과실을 말하는 자)을 외관(外官)으로 좌천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것”이라는 유사(有司)의 상주(上奏)로 안으로 들어와 각문지후(閣門祗候)가 되었고 다시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었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죽임을 당할 뻔 하였으나 앞서 좌정언으로 있을 때 백선연 등의 비행을 탄핵해 좌천된 것이 직신으로 알려져 화를 면했으며, 의종이 거제도로 추방될 때 문극겸의 말을 따르지 않았음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명종이 즉위하자 이의방(李義方)의 추천으로 우승선(右承宣)·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 이공승(李公升) 등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무신들에 대해 고사(故事)의 자문에 응하였으며, 뒤이어 용호군대장군(龍虎軍大將軍)을 겸하였다.
그 뒤 재상이 되었을 때에도 상장군을 겸해 무신정권기에 문신으로 문무를 겸하는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딸을 이의방의 아우 인(隣)에게 출가시켰으며 이 때문에 계사의 난에 일족이 다 화를 면하였다.
다시 대부소경(大府少卿)에 이어 예부시랑이 되었으며, 1173년 예부시랑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윤인첨(尹鱗瞻)과 함께 최시행(崔時幸) 등 진사 32인을 뽑았다. 뒤에 추밀원사가 되었는데, 1179년(명종 9) 송유인(宋有仁)과 틈이 생겨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로 좌천되었다.
1180년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고, 이듬해 수대위(守大尉)가 되었으며, 1183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판호부사(判戶部事)가 되었고, 이듬해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가 되어 금극의(琴克儀) 등 진사 31인과 명경(明經) 5인을 선발하였다. 1185년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어 아상(亞相)이 되었으며, 다시 수국사(修國史)·판병부사(判兵部事) 등을 거쳐 1187년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가 되었다.글씨에도 뛰어났다. 명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문극겸의 후손 문달한(文達漢)은 찬성사를 지낸 문경(文璟)의 아들이다. 1388년(우왕 14) 양광경상도도체찰사(楊廣慶尙道都體察使)로서 공주 반룡사(盤龍寺)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이후 문하평리·찬성사에 올랐다가 탐학(貪虐)이 심하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합포(合浦)·철원(鐵原) 등지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공양왕 즉위 초에도 이임(李琳) 일파의 탄핵을 받아 다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고, 1392년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다.
고려후기 최고 가문
남평문씨(南平文氏)는 문익(文翼)의 아들 문공인(文公仁)(평장사) ㆍ 문공원(文公元)(평장사) ㆍ 문가관(文可觀)(조계종대선사) ㆍ 문공유(文公裕)(예 ㆍ 병부상서)등 4형제가 크게 현달함으로써 가문이 번성하기 시작하여 그 후손에서 문극겸(文克謙)(평장사), 문유필(文惟弼)(참지정사), 문익점(文益漸) 제학(提學), 문달한(文達漢) 찬성사(贊成事)등이 배출되어 고려후기 최고 가문의 하나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삼우당 문익점 (三憂堂 文益漸)
남평 문씨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이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이다. 그는 1329년(고려 충숙왕 16)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배양리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고려 멸망 후 절의를 지켰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이에 왕명으로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효자정각을 세우고 마을 이름을 효자리로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문익점은 고려 말 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목면 종자를 가져와 이를 전파시킨 공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가져온 10여매(餘枚)의 목면 종자가 그의 고향에서 기적적으로 재배에 성공하게 됨으로서 이후 목면 재배법은 같은 시기에 새로이 습득하게 된 직조 기술과 함께 온 나라에 전파되었다.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진 목면 업은 농가 경제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고 의생활을 비롯해서 생활 문화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아울러 조선왕조의 경제 정책과 수취 양식, 유통 질서 등 국가 경제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목면 종자의 전래가 초래한 여러 국가적 공헌은 이후 문익점에게 그 공적이 돌아가게 되었다. 목면의 보급에 따른 공적에 대해서 일찍이 秋江 南孝溫은, "한 집안으 로 말미암아 고을이 혜택을 입게 되고, 한 고을로 말미암아 온 나라가 혜택을 입게 되었으며, 만세토록 천지와 더불어 무궁히 그 혜택이 끼칠 것이다‥‥
그 깊고도 높은 공적을 무어라 이름할 수 없다"라고 극찬하기도 하였다. 그는 후세에 '木綿公'이라는 별칭을 얻었을 만큼 목면의 전래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공적임은 말할 나위 없다.
한편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살펴보면,그는 道學의 창명과 덕행 및 충절 때문으로도 당대 및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평가되었다. 金宗直을 비롯해서 鄭汝昌, 金宏弼, 曺植, 李滉, 宋時烈 등한 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들이 한결같이 그가 끼친 '衣被生民之功'을 찬양하는 한편, 그의 道學과 德行 忠節을 더불어 칭송하는 시문을 남기고 있는 경우가 그러하다.
문익점의 공적은 후대에 이를수록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영조는 그의 후손에 대해서 거듭되는 특전을 내리면서 "우리나라가 3백년전 이래 衣冠 文物이 빛나게 일신된 것은 실로 江城君이 목면 씨를 가져옴에서 비롯된 것이니 공이 강성군 보다 클 수 없고 덕이 강성군 보다 훌륭할 수는 없다"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문익점이 남긴 행적에 대해 후대의 유명 인사들의 칭송은 줄을 이었다
이황은 문 익점이 목면전래를 통해 일국의 의관문물(衣冠文物)을 새롭게 일신시켰다고 하고 효행과 절의 를 통해 그가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극찬하였다.
송시열도 문익점의 목면 전래의 사실을 들어 그는 동방의 후직과 같다고 평가하였고, 안유와 문익점 두 분이 아니었으면 우리 동방은 오랑캐 문화에 빠지는 것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극찬 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인물이 문익점을 칭송하는 글을 남겼다. 그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이 켰기 때문에 국가의 포전은 성대했다. 우왕 9년에 조정에서는 문익점이 살던 마을인 배양리에 효자비를 세우게 하였고, 후에는 비각도 세워졌다. 정종 2년 문익점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제도(祭圖)을 내리고 묘사(墓祠)를 건립하게 함과 동시에 수총(守塚)과 복호(復戶)를 내려주었다. 그가 조선왕조에 와서 관직을 지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태종 원년에는 예문관 제학 (藝文館 提學)을 증직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하였으며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하였으며. 그에 대한 부조(不廟)도 세우게 하였다.
세종 22년(1440)에는 영의정을 추가해 증직하고 부민후(富民侯) 봉하였으며, 세조 7년에는 고향인 단성에 사우도 건립된다. 그리고 후대에 가떤 이 도천서원과 함께 전라도 장흥에 세위진 강성사에 사액이 내려진다.
문익점의 아들 문중용(文中庸)·문중성(文中誠)·문중실(文中實)·문중진(文中晋)·문중계(文中啓) 등 다서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문익점(文益漸)과 그 손자 문래(文萊) 문영(文英)
문래(文萊)는 문공유의 7대손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다가 금수(禁輸)로 되어 있는 목화씨를 붓대 속에 들여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그 재배에 성공. 우리 나라 의류 혁명을 가져왔다. 문익점의 손자 문래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지리 산수에 이르기까지 통달한 학자였다. 조부가 거둔 목화를 베로 짜기 위해 실을 뽑아 내는 물레를 고안하여 유명하다. 물레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문영(文英) 목은 이색문하에서 수학 1393(태조2) 문과급제 홍문관 교리를 거제 직제학 역임 베짜는 방법을 연구하여 만든 베를 문영베라 했는데 무명베로 변함 증 자헌대부 이조참판
동정의 역사
동정이란 한복의 목이 닿는 부분에 덧 붙이는 좁은 백색천의 테두리를 말합니다.
동정을 달 게 된 유래는 세종원년 기해년 강성군 문익점 할아버지의 목면으로 인하여 이룩된 산업의 혁명과, 외화획득의 공로, 의류혁명의 위대한 공덕을 이 세상에 영원히 기념하는 뜻으로 세종임금이 특별히 만조백관을 모아 조야에서 명하기를 "이나라 백성이면 남자든 여자든 옷을 입는 것은 문익점 선생의 공덕인고로 동정을 달아 기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색깔있는 동정을 달지 못하게 하고 흰 동정만 달 게 한 것은 문익점 선생의 사후였기 때문에 영원히 상복을 입는다는 뜻입니다.
문가학의 모반사건
태종때 삼우당문익점 선생의 조카인 가학선조의 역성혁명 실패로 단성에 살던 일족은 멸문지화의 화를 당하고 친족들은 고향을 버리고 숨어 살아야 하는 불행으로 조선시대 문과 급제하신 분은 52명으로 위축되었습니다
역대 중요 인물(*장관급,시호를 받은 분).
문공인;-고려,시호 충의,평장사.남평백.
문공원;-고려,시호 정경,평장사.
문공유;-고려,시호 경정,판삼사사.
문극겸;-고려,시호 충숙,평장사.
문후식;-고려,시호 충열,동북면 지병마사.
문극검;-고려,시호 정열,예부상서.
문숙선;-고려,시호 충정,제학.
문달한;-고려,시호 충익,찬성사.
문익점;-고려,시호 충선,제학.
문중성;-고려,시호 순질,간의대부.
문중계;-고려,시호 성숙,예부상서.
문효종;-조선,시호 호간,판중추원사.
문 화;-조선,시호 경혜,도승지.
문 빈;-조선,시호 평익,첨절제사.
문 영;-조선,시호 양민,직제학.
문 치;-조선,시호 충양,한성판윤.
조선시대의 문씨 인물
조선조에서 공신 3명,문과 급제자 61명을 배출했다. 그 중 40명이 남평 문씨이고 그 밖에 감천 5명, 개령 4명, 영산 3명, 안동 1명, 본관 미상 1명이다. 남평 문씨는 고려조에서는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명문세족의 영예를 누렸으나 조선조에서는 삼우당 문익점(三憂堂 文益漸)이 절의를 지키고 은거불사(隱居不仕)한 영향을 받아 벼슬 열력이 고려조에 비해 적은 편이다
문중성(文中誠)(高麗 諡號 : 純質 官職 : 諫議大夫)
1385년(우왕 11) 5월에 문과에 급제, 한림원 학사가 되고, 합문지후ㆍ간의대부로 사직했다. 창왕 때 병부상서에 임명됐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405년(태종 5) 강성군의 후예라 하여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문중계(文中啓)(高麗 號 : 滄洲 諡號 : 成淑 官職 : 禮部尙書)
문과에 급제하고 예부상서가 되었다. 조선이 개국되자 은거, 1395년(태조 4)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문효종(文孝宗)(朝鮮 諡號 : 胡簡 官職 : 判中樞院事
음보로 등용되어 좌군총제를 지내고, 1425년(세종 7) 진향 겸 등극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판중추원사를 지내고 치사, 궤장을 하사 받았다.
문 화(文 和)(朝鮮 字 : 養中 호 : 晩隱 諡號 : 景惠 官職 : 都承旨)
1397년(태조 6) 낭증이 되고, 승정원 도승지ㆍ예문관 직제학ㆍ상서원정ㆍ경연참찬관ㆍ춘추관 수찬관 등을 지냈다.
문 빈(文 彬)(朝鮮 諡號 : 平翼 官職 : 僉節制使)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고, 1401년(태종 1) 좌명공신 4등으로 월천군(越川君)에 봉해졌다. 1409년 풍해도 첨절제사를 지냈다.
문 래(文 萊)(朝鮮 字 : 子蓬 號 : 理谷 諡號 : 靖惠 官職 : 學者)
경사에 통하고 천문ㆍ지리ㆍ음양ㆍ산수ㆍ척도등에 밝았으며, 물레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문 영(文 英)(朝鮮 號 : 海隱 諡號 : 襄敏 官職 : 直提學)
1393년(태조 2) 문과에 급제, 홍문관 교리를 거쳐 직제학이 되었다. 그는 베 짜는 방법을 창안해 냈는데, 베가 되어진 것을 문영(文英)이라 한 데서 「무명」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문천봉(文天奉)(朝鮮 字 : 以敬 官職 : 漢城判尹)
1400년(정종 2) 사복시 부정으로 방간(芳幹)의 난 때 태종을 호위한 공으로 포상을 받고, 한성판윤을 지내고, 개령군(開寧君)에 봉해졌다.
문 민(文 敏)(朝鮮 官職 : 判通禮門事)
1431년(세종 13) 호군을 거쳐 1441년 판서운관사, 이듬해 판통례문사에 이르렀다. 딸이 세종의 친선으로 세자의 승휘(承徽)가 되었다.
문충세(文忠世)(朝鮮 官職 : 右都知管)
1402년(태종 2) 세습되어 온 탐라국의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를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 문충세를 우도지관으로 삼았다.
문승서(文承瑞)(朝鮮 字 : 顯照 官職 : 水軍節度使)
무과에 급제하고, 부승지로 공충도 수사를 지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녹훈되었다.
문치창(文致昌)(朝鮮 官職 : 監察)
문종 때에 사헌부 감찰이 되고, 1455년(세조 1) 노산군(단종)의 화를 구하려다가 연폄되었다. 1461년(세조 7) 국형을 받았으나 충신의 후예라 하여 사유되어 구성으로 유배되었다. 저서에 ≪삼우당실기(三憂堂實記)≫가 있다.
문여령(文汝寧)(朝鮮 官職 : 監察
1427년(세종 9)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 검열ㆍ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황제로부터 의대를 상으로 받고 귀국 후 홍문관 교리ㆍ헌납이 되었다.
문상행(文尙行)(朝鮮 諡號 : 敬肅 官職 : 禮曹參議)
생원으로 1411년(태종 11) 문과에 급제, 판관ㆍ주부를 거쳐 용담현령에 이르렀다. 뒤에 예조참의에 올랐다.
문회지(文繪地)(朝鮮 號 : 錐錁齋 官職 : 學者)
사마시에 장원하여 생원이 되었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가 피화되자 은거하여 도학에 전념, 실천궁행에 힘썼다.
문익성(文益成)(朝鮮 字 : 叔 號 : 玉洞 官職 : 府使)
1549년(명종 4) 사마시를 거쳐 1566년(명종 21)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사헌부 지평과 성균관사예를 지냈다. 합천의 도연서원(道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 치(文 致)(朝鮮 字 : 思成 諡號 : 忠襄 官職 : 漢城判尹)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 정국공신 4등으로 문원군(文原君)에 봉해졌으며, 한성판윤 겸 지의금부사를 지냈다.
문자수(文自修)(朝鮮 字 : 道叔 號 : 勉修齋 官職 : 縣監)
세종 때 생원시에 합격, 1454년(단종 2) 7월 장흥고 부직장에 이르고, 1455년(세조 1) 12월 녹사로서 좌익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이어 곡성ㆍ함열의 현감을 지내고 난향, 능주향교에다 사마재와 향사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했다. 능주의 삼현사(三賢祠)에 제향되었다.
문 려(文 勵)(朝鮮 字 : 子善 號 : 雲溪 官職 : 大司諫)
1553년(명종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 정자가 되고,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토적의 공으로 2등 공신이 되고, 왕을 호종하여 선무공신 1등에 녹공되었다. 헌납ㆍ교리를 거쳐 대사간을 지냈다.
문경동(文敬仝)(朝鮮 字 : 欽之 號 : 滄溪 官職 : 司成)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벼슬을 거쳐 비안현감ㆍ강원도 도사를 역임, 종부시첨정으로 승진, 춘추관 편수관을 겸했다. 1508년(중종 3) 양산군수가 되고 1510년 삼포왜란 때 왜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사성이 되었으며, 예천군수ㆍ청풍군수를 지냈다. 시문에 뛰어났다. 영양의 창계서원(滄溪書阮)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창계집(滄溪集)≫이 있다.
문 걸(文 傑)(朝鮮 初名 : 彬 字 : 彦章 官職 : 府使)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의정부 사록, 회덕ㆍ영동의 현감, 헌납을 지내고 1499년(연산군 5) 양양부사가 되었다.
문 근(文 瑾)(朝鮮 字 : 士輝 號 : 梅溪 官職 : 參判)
사마시에 합격, 1495년(연산군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고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여≪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여러 청환직을 역임하고, 김해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1508년(중종 3) 금산군수로 치적을 올려 상을 받았다. 1516년 대사간ㆍ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를 지냈고, 특히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신진사류로 중종의 신임을 받아 경상도 관찰사로 전직, 1910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처형을 통박하다가 파직되었다. 1521년 다시 참판에 기용 되었으나 또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용궁의 기천서원(箕川書阮) 제향되었다.
문 관(文 瓘)(朝鮮 字 : 伯玉 號 : 竹溪 官職 : 掌令)
사마시에 합격, 1507년(중종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안음현감으로 부임하여 전임인 정여창(鄭汝昌)과 같이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전정(前鄭)ㆍ후문(後文)이라고 찬양했다. 지평을 거쳐 1518년 주청사의 검찰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장령ㆍ장악원 첨정을 지냈다. 용궁의 기천서원에 제향되었다.
문 위(文 緯)(朝鮮 字 : 順甫 號 : 茅溪 官職 : 縣監)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김면(金沔)과 함께 왜군과 싸웠다. 후에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동몽교관이 되고, 이어 선공감 주부ㆍ감찰을 역임, 광해군이 즉위하자 낙향했다가 인조반정 후 고령현감이 되었다. 거창의 용원서원(龍元書阮)에 제향되었다.
문덕교(文德敎)(朝鮮 字 : 可化 號 : 東湖 官職 : 刑曹佐郞)
1585년(선조 18)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전적ㆍ형조좌랑을 지냈으며 문명이 높았다. 임진왜란 때 일가족이 왜적과 항거하다가 순절하였다.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阮)에 제향되었다.
문 삼(文 參)(朝鮮 字 : 汝魯 號 : 白草堂 孝子)
진사로서 형 벽(壁)과 함께 극효하더니 부모상을 당하여 3년 여묘할 때 근처의 초엽이 빛을 잃다가 3년 후에 복영하니 그 마을을 백초동이라 하였다. 장흥의 백동사(白洞祠)에 제향되었다.
문홍운(文弘運)(朝鮮 字 : 汝幹 號 : 梅村 官職 : 進士)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원종훈에 책록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행의가 독실해서 유림의 추앙을 받았다. 합천의 임천서원(臨川書阮)에 제향되었다.
문홍원(文弘遠)(朝鮮 號 : 慕杜軒 官職 : 內禁衛將)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 임해군이 역모죄러 정배당하자 내금위장으로서 궁내의 경비를 맡아보다가 3개월 만에 ≪불귀사(不歸詞)≫를 짖고 고향에 돌아가 은거하였다.
문경호(文景虎)(朝鮮 號 : 嶧陽 官職 : 察訪)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더불어 창의하였다.
문광복(文光福)(朝鮮 字 : 仲綏 號 : 奎軒 官職 : 習讀官)
명종 때 진사가 되고 음보로 훈련원 습독관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호섭(虎燮)과 함께 금산성 싸움에 참가, 왜적과 싸우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아들과 함께 순사하였다.
문위세(文緯世)(朝鮮 字 : 叔章 號 :楓庵 官職 : 牧使)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朴光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 조달 등으로 공을 세워 1595년(선조 28) 용담현령이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읍민을 동원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많은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1600년(선조 33) 파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의 아들 원개(元凱)ㆍ영개(英凱)ㆍ형개(亨凱)ㆍ홍개(弘凱)가 모두 차의하니 충절의 모범이 되었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다. 장흥의 강성서원(江城書阮)에 제향되었다
문홍헌(文弘獻)(朝鮮 號 : 敬庵 官職 : 進士)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진사로서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금산에서 싸우다가 패하자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막하에서 진주성에서 집결한 의병장들과 합류하여 분전, 성이 함락되자 최경희와 함께강에 투신 자살했다.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에 제향되었다.
문희성(文希聖)(朝鮮 號 : 止軒 官職 : 知中樞府事)
1594년(선조 27) 무과에 급제, 1597년 정유재란 때 전공을 세웠고, 광해군 때는 광주목사를 거쳐 방어사로서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요동 싸움에 출전하여 강홍립과 함께 후금에 투항했다. 화의 후 돌아와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문재도(文載道)(朝鮮 字 : 戒器 號 : 休軒 官職 : 左水使)
1597(선조 30) 정유재란 때 백의로 관군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3군 수령을 거쳐 경상좌도 수군절조사가 되었다.
문기방(文紀房)(朝鮮 官職 : 守門將)
무과에 급제, 수문장을 지내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남원에서 싸우다가 적에게 포위되어 격전 끝에 전사했다. 남원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문석생(文石生)(朝鮮 號 : 竹溪 官職 : 義兵)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막하에서 싸우다가 강도(江都)에서 순절했다.
문 회(文 晦)(朝鮮 字 : 自明 官職 : 義禁府事)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고변하여 진무공신 3등으로 오천군(鰲川君)에 봉해졌다. 동지의금부사를 지냈다.
문상례(文尙禮)(朝鮮 官職 :將軍)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의주 서성의 장군으로서 역전 끝에 전사했다. 구암사(龜巖祠)에 제향되었다.
문덕겸(文德謙)(朝鮮 官職 :敎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병이 동래를 침공하자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역전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순절했다.
문희순(文希舜)(朝鮮 號 : 太古亭 官職 :副護軍)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여산까지 갔다가 강화가 이루어지자 분개하여 고향에 태고정을 짓고 은거하였다.
문성흠(文聖欽)(朝鮮 官職 :都摠管 )
무과에 급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웠고, 벼슬을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다.
문수빈(文守彬)(朝鮮 歌人)
숙종 때 김수장(金壽長)ㆍ김천택(金天澤) 등과 함께 경정산 가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해동가요(海東歌謠)≫에 그의 시조가 전한다.
문동도(文東道)(朝鮮 字 : 聖源 號 : 敬菴 學者)
일찍이 성리학을 강마하여 학행으로 문명을 떨쳤다. 숙종 때 후릉참봉과 세자익위사 부솔에 임명되었으나 불취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행의와 문장이 뛰어났다. 합천의 용연서원(龍淵書阮)에 제향되었다.
문도신(文道新)(朝鮮 字 : 聖甫 官職 : 節制使)
영조 때 무과에 급제, 나숭대(羅崇大)의 반란이 있자 동생 도환(道桓: 구례현감)과 같이 토평, 그 공으로 부산 병마절제사를 지냈다.
문시룡(文始龍)(朝鮮 字 : 賢之 官職 : 戶曹佐郞)
1753년(영조 2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교검을 거쳐 예조좌랑ㆍ호조정랑ㆍ춘추관사가 되었다.
문봉익(文鳳翼)(朝鮮 字 : 德徵 官職 : 禮曹參議)
1798년(정조 2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을 거쳐 예조참의가 되었다.
문응규(文應奎)(朝鮮 官職 : 五衛將)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공을 세워 그 공으로 오위장이 되었다. 의주의 학봉사(鶴峰祠)에 제향되었다.
문기호(文基浩)(朝鮮 號 : 養吾 義士)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정주에 가서 홍경래를 설득하려고 성에 들어가 난군을 초유하려다가 살해되었다. 의주의 학봉사에 제향되었다.
문학천(文學天)(朝鮮 字 : 明普 號 白雲處士 學者)
천성이 고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친상에 삼년여묘할 때에 호랑이가 엄호했다. 이어 둔적하여 결초암(백운암)을 세운 후 비바람을 무릅쓰고 종신토록 조석으로 성묘를 했고 학문에 힘썼다. 정재규(鄭載圭)ㆍ정의림(鄭義林)과 종유, 개탄시가를 지었으며 행의로 이름이 높아 세인이 백운처사라 일컬었다. 저서에 ≪백운집(白雲集)≫이 있다.
대한제국시대
문달환(文達煥)(朝鮮 字 : 德卿 號 : 遯齋 義士)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인. 그는 스승을 따라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1906년 6월 관군ㆍ일군과 격전 끝에 패전하자 최후까지 스승을 따르다가 체포되어 12의사로 칭송되었다. 그 후 감옥에서 풀려나와 은거생활로 학문에만 전심, 1982년 독립유공자로 포상이 내려졌다. 능주의 부춘사(富春祠)에 제향되었다.
문태수(文泰洙)(韓末 義兵將)
1908년(융희 2)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ㆍ호남ㆍ호서 일대에서 활약, 호남 의병장이 되었다. 이듬해 지례군ㆍ안의군ㆍ용담군ㆍ남원군 등지에서 일본군을 무찌르다 피체되어 사형당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문병현(文炳鉉)(韓末 字 : 士日 抗日鬪士)
국운이 쇠퇴하여지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덕유산 원통사를 거점으로 군사를 양성하고, 박춘실(朴春實)을 선봉장으로 일본군과 싸워 큰 전공을 세웠다. 후에 체포되어 경성미결소에서 죽었다
문석환(文奭煥)(韓末 字 : 英伯 號 : 雲樵 抗日鬪士)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참판 민종직(閔宗直)과 더불어 창의하여 홍양에서 의거,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경성 감옥에서 대마도로 이송되고, 최익현(崔益鉉)과 옥중생활을 같이 하였다. 경술합방이 발표되자 울분으로 병을 얻어 죽었다.
문양목(文讓穆)(韓末 獨立運動家)
미국에 건너가 대동보국회 회장으로 있다가 1908년(융희 2) 한국정부의 외부고문 스티븐스가 귀국하여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보호정치를 찬양하자 이에 격분하여 재미 애국단체와 화합하여 진상규명 총대 4명의 한 사람으로 뽑혀 그를 방문, 여전히 일본의 보호정치를 지지함에 격분하여 구타했다. 이 해 장인환(張仁煥)ㆍ전명운(田明雲) 등이 스티븐스를 살해하자 그들의 변호비용으로 의연금 7백 달러를 모금한뒤 판사 전담위원이 되었다.
문용기(文鏞祺)(韓末 獨立運動家)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있다가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이리역 광장에서 개최된 익산군민대회에서 연설, 궐기할 것을 호소하다 왜경의 칼에 찔려 순국했다.
문창범(文昌範)(韓末 獨立運動家)
시베리아에 망명한 후 1917년 쌍성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를 결성하고 그 회장이 되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 당시 국민의회 대표로 참여, 초대 교통총장이 되었다가 5월 25일 개각 때 사임하고, 그 후에도 계속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문창수(文昌秀)(韓末 獨立運動家)
유학자호 학문을 닦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항일투쟁을 전개, 나중에 일본군에 체포되어 악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눈알을 뽑히면서도 끝까지 항쟁하였다.
문창숙(文昌淑)(韓末 獨立運動家)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참가하였고 나중에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하였다. 그 후 서로군정서에 들어가 부사를 거쳐 중대장이 되었고, 1923년에는 부하 하순경(河舜卿) 등 5명을 거느라고 평북 강계에 잠입,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의 밀정 홍종락(洪鍾洛)을 암살한 후 돌아갔으나, 재차 국내에 잠입하다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문창학(文昌學)(韓末 一名 : 彦俊 獨立運動家)
일본 헌병보조원으로 있다가 전향하여 3ㆍ1운동에 참가하고 만주에 망명, 서로군정서에 가입,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국내에 밀파되어 신건원(新乾阮) 주재소를 습격하다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문명훤(文明烜)(韓末 獨立運動家)
3ㆍ1운동 때 맹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 1920년 임시정부 내무서기사 되고, 1921년 미국에 갔다가 1923년 귀국하여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3년간 복역했다.
문일평(文一平)(韓末 號 湖巖 史學者)
1910년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치학부를 중퇴, 상해로 건너가 대공화보사에 근무했다. 뒤에 귀국하여 중동ㆍ중앙ㆍ배재ㆍ송도 중학에서 교편을 잡고 중외일보 기자로 있다가 1933년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취임, 7년간 논설을 집필하고, 국사연구에 정진하여 많은 논문을 남겼다.
문세영(文世榮)(韓末 號 : 靑嵐 한글학자)
배재교보를 졸업, 뒤에 배재고보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윤재(李允宰)와 함께 사전 편찬 사업에 종사했으며, 1939년 최초로 국어사전인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을 간행했다. 이듬해≪수정증보조선어사전(修正增補朝鮮語辭典)≫을 출판하고, 1954년 국어사전간행회에서 ≪수정증보국어대사전(修正增補國語大辭典)≫으로 다시 개편하여 출판, 그 밖에도 여러 권의 국어소사전과 이와 유사한 사전을 간행했다.
계파
충혜공파,헌납공파,순질공파,의안공파,시중공파,성숙공파,남제공파,순평군파,판도판서공파등이 있다.
주요 세거지
대구직할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동
남평 문씨 화원 본리동 세거지는 조선 말기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까지 약 100 년간에 걸쳐 우리 나라에서 가장 늦게 형성한 최소 규모의 씨족 마을이다. 이 마을은 높은 벼슬이나 권력에 힘입어 이루어진 마을이 아니라, 그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서 마을을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뚜렷이 구별된다.
이 마을은 보기 드물게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주택 사업을 벌여나갔기 때문에, 요즘 계획적으로 세운 일산과 고양과 같은 신도시에 온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전통 한옥 9 채와 재실 2채를 포함해서 모두 11채가 있는 데, 마치 우물 정(井)자 처럼 가로 세로 줄을 맞추어 네모반듯하게 구획을 나누고, 길을 닦고 집을 지워나갔다. 마을 골목길은 끝이 막힌 듯이 곧게 뻗어있으며, 다른 마을에 비해서 골목의 폭이 넒은 편이다.
동네는 언제나 깨끗이 청소하고 있고, 휴지나 빈 병과 쓰레기를 어디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전통 한옥에서 흔히 일어나는 생활의 불편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한옥에 살수만 있다면, 누구나 썰렁한 아파트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옛스러운 분위기가 넘쳐흐르는 광거당은 1980 연대에 영화 배우 장미희가 주연한 황진이의 촬영 장소가 되었고, 강수연이 주연한 씨받이에서도 수봉정사와 종가집이 촬영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흙내 가득한 흙담길을 따라 남평 문씨 세거지를 한 바퀴 돌고 나면, 마치 고향을 찾은 듯한 푸근한 마음을 품게 한다.
주위 경관도 뛰어날 뿐 아니라, 교통도 가깝고 도로도 편리하게 포장되어 있어, 가볍게 다녀오기에는 더 말할 나위 없다
문익점의 18 세손 인산재 문경호 (仁山齋 文敬鎬, 1812년-1923년)가 지금부터 160 년 전 1834년에 지금의 광거당 터에 용호재라는 재실을 지은 것이 그 출발이다. 그 후 1940 연대에 거의 지금과 같은 아홉 채의 한옥과 2 채의 재실을 갖춘 마을을 이루었다.
계속해서 남평 문씨 집안은 탁월한 경제 능력과 학문을 함께 갖춘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손자 후은 문봉성(後隱 文鳳成)과 그의 아들 수봉 문영박(壽峯 文永樸)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때 남평 문씨들은 50 만평의 토지와 만석꾼에 가까운 막강한 부를 쌓아올렸고, 그 경제력 바탕 위에 일만평 대지 위에 고래등과 같은 기와집을 지어나가기 시작하였다.
문봉성은 다른 마을 에 거주하는 소작인을 통해 광작 농업과 낙동강 수상 교역으로 큰 부를 이루었다. 1910 년에 용호재를 허물고 그 터에 광거당을 새로 세우고, 수많은 책을 모아두고 학자와 문인들을 초대해서 학문과 예술을 꽃피우는 문화의 공간을 만들었다.
문봉성이 거대한 재산을 바탕 위에 지금의 마을을 만들었다고 하면, 그의 아들 수봉 문영박(壽峯, 文永樸)은 남평 문씨 세거지의 이름을 전국에 떨치게 한 인물이다. 수봉은 책을 좋아하여 살림을 털어 일만권의 책을 모았고, 학자와 문인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와서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수많은 선비들이 항상 광거당에 묵으며 수봉과 더불어 학문을 토론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우국지사들이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고, 시국을 토로하는 시국토론장이 되기도 하였다.
남평 문씨 집성촌
1930년 당시 남평문씨(南平文氏)는 충남 서산군(瑞山郡) 일원, 전북 김제군(金堤郡) 공덕면(孔德面), 옥구군(沃溝郡) 일원, 전남 화순군(和順郡) ㆍ 보성군(寶城郡) ㆍ 장흥군(長興郡) ㆍ 영암군(靈岩郡) 구례군(求禮郡) 일원, 경북 군위군(軍威郡), 우보면(牛保面), 청도군(淸道郡) 청도읍(淸道邑), 금릉군(金陵郡) ㆍ 문경군(聞慶郡) 일원, 경남 창녕군(昌寧郡) 일원,산청군(山淸郡) 신안면(新安面), 합천군(陜川郡) 일원, 제주도 북제주군(北濟州郡) 일원, 경기도 응진군(甕津郡) 일원,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ㆍ 장연군(長淵郡) 일원, 평남 순천군(順川郡) 일원, 강서군(江西郡) 초리면(草里面), 평북 용천군(龍川郡) 일원, 함남 함흥시(咸興市)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날 대표적 집성촌은 경북 지례와 전남 영암군(靈岩郡) 영암읍(靈岩邑) 장암리(場岩里)다. 조선 단종조에 직장(直長)벼슬을 지냈던 문맹화(文孟和)가 어린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패륜에 분개, 벼슬을 버리고 이곳 영암(靈岩)으로 옮겨온 뒤 4백여년 동안 지켜내려온 세기의 터다. 장암리(場岩里) 마을에 처음 뿌리를 내린 인물은 문맹화(文孟和)의 증손인 문익현(文益顯)이다.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감리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젊은 청년으로서 전쟁통에 가족을 잃어버리고 전라도 나주에서 단신으로 창녕화왕산 전투에 참가하여 무공을 세우신 감정공 문란의(監正公 文蘭宜) 후손들이 번성하여 감리 산골 네개 마을에 살고 있으며 일부는 고령군 개전면 일부는 밀양으로 이거하였다. 의안공파 士英 후손으로 분파하여 감정공(監正公 )을 파조로 섬기고 있다.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남평문씨는 118,491가구 총 380,530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統譜)》 (윤창현, 보명사, 1929)
《한국지명연혁고 (韓國地名沿革考)》 (권상로, 동국문화사, 1961)
《한국인의 성보(姓譜)》 (삼안문화사, 1986)
《성씨(姓氏)의 고향》 (중앙일보사, 2002)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참고자료
인수문고 (仁壽文庫)
남평 문씨 집안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고서를 가지고 있는 집안으로 알려졌다. 남평 문씨는 인수문고라는 특별한 문고를 갖고 있다. 현재 인수문고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 종류가 약 8500 여 권에 달한다. 보통 고서의 경우에는 1 책이 2-3 권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약 2만 권에 해당한다.
그래서 보통 만권당 (萬卷堂)으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 나라 서원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 안동의 도산서원으로 알려졌는데, 도산서원이 약4400 권을 보관하고 있으므로, 인수문고는 도산서원보다 거의 2 배 이상 책을 보관하고 있는 셈이다. 인수문고는 장서의 양뿐만 아니라, 어느 책도 책의 권수가 하나도 빠지지 않은 낙질(落帙)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 어느 책도 낱권이 아닌 전집으로 완벽히 갖추고 있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문중문고이다.
인수문고의 기반이 되는 만권당의 설립 시기는 경술국치를 당한 1910 년 무렵이다. 나라가 망하던 시기에 설립된 문고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 26대 충선왕이 임금자리에서 물러나고 나서, 원나라 수도 연경의 저택에서 만권당을 짓고 많은 서적을 수집하였다.
고려에서 학자 이재현을 불러와 중국의 학자들과 더불어 학문적으로 교류하면서, 고려 유학의 발전에 큰 자극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아마 인수문고도 망국의 아픔을 책으로 달래고 문화를 일으켜서, 다시 나라의 주권을 되찾아보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만권당을 세워는 지도 모른다.
만권당은 집안의 자녀 교육을 위하여 설립되었다. 남평 문씨 집안에서는 일본이 세운 신식 학교에서 자녀들을 교육시키지 않았다. 일본 사람이 세운 학교에 자녀를 보내면, 결국 자녀들도 일본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그 당시 자녀들에게 전통 서당 교육을 고수하였다. 만권당은 집안 자녀들을 위하여 설립한 사립 학교이며 도서관이고, 일본 침략에 대항하는 정신적인 의지의 상징이다.
인수문고는 1981 년 정부 보조를 받고, 수봉정사 옆 공터에 별도의 건물을 마련해서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자리에 중곡문고(中谷文庫)라는 또 하나의 문고가 추가되었다. 인수문고는 고서를 중심으로 모았는데 비해서, 중곡문고는 최근에 출판된 책을 중심으로, 5000 권 이상을 모아서 보관하고 있다.
인수문고 맞은편에는 거경서사(居敬書舍)라고 이름지은 방 2칸 자리 조그만 독서실을 마련해서, 인수문고를 장기간 열람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개방해 놓고 있다. 마당에는 녹색 잔디가 소담스럽게 자라고 있다. 그 녹색 잔디 위에서 원목 의자에 앉아 고서를 뒤적이고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학문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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