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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흔적

민족의 한이 서린 고려 궁지

 

 

 

 

 

 

 

 

강화도에 있는 고려궁지는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이다. 고려 고종19년(1232)부터 원종11년(1270)까지 39년간 몽골의 난을 피하여 머물렀던 곳이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재위:1213∼ 1259)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를 높이든 고려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로 천도하여 1234년에 궁궐과 관아 건물을 완성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었고, 도성(都城)도 지금은 ‘강화읍성’ 으로 불리는 내성만 남았지만 당시에는 중성과 외성까지 쌓아서 삼중으로 요새를 만들어 장기 저항 태세를 갖추었다.

 

고려 궁정의 건물로는 본궁인 연경궁(延慶宮), 그 북동쪽 언덕에 강안전(康安殿), 소동문을 들어가 성마루터 북쪽에 경령궁(景靈宮), 옥림리 자문고개 서쪽에 건덕전(乾德殿), 그 동쪽에 장녕전(長寧殿), 뒤쪽에 만녕전(萬寧殿), 그리고 북창문 밖의 대묘동에 태묘전각(太廟殿閣)으로 대관전(大觀殿)과 신격전(神格殿)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없어졌고, 이 밖에 이궁(離宮)과 가궐(假闕)도 곳곳에 세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방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39년 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강화로 천도해온 고종은 약 2년에 걸쳐 연경궁을 본궁으로 궁궐과 관아를 지어 건물의 명칭을 전부 개성의 궁궐과 똑같이 하고 궁궐뒷산도 송악산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1270년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한 뒤 궁궐과 성은 무너졌다.

 

조선시대인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며 1637년 병자호란 시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된 사실이 있다. 그 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 시 프랑스군에 의해 건물 등은 소실되고 지금은 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 건물만이 남아있다.

동헌(東軒)과 이방청(吏房廳)은 조선시대 강화유수부 건물이고 고려궁과는 무관한 건물들이다.

 

이곳은 1977년 보수 정화되어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국민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고려궁지 내에는 외규장각이 있었는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들이 이곳에 있던 많은 서적들과 은궤, 지도 등을 약탈해 갔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고서들 중에서 이곳에서 약탈해간 고서가 돌아온다고 한다. 고려궁지에는 오래된 역사와 함께 그 자리를 지켜온 몇 그루 고목이 지난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민족의 한이 서려 있는 곳으로 민족이 힘이 없으면 끝임 없이 외세침략을 당하고 국가와 국민이 도탄에 빠지게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그런 곳이기도 하다.

옛 궁퀄 터에는 지나가는 바람만이 지난날을 알고 있어서 무언으로 입증 해주는 듯하며 근래 심어진 잔디 속에 개량종 양귀비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서 자라면서 양귀비 이름 만큼 애딺픈 역사의사연을 말하고 있었다.

 

양귀비꽃 전설

중국 당나라에 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총명해서 춤과 노래에 특출한 재주까지 겸비했다.

당나라 현종은 아름답고 총명한 양귀비를 몹시 아꼈다.

그러나 현종은 양귀비에게 너무 빠져들어서 나랏일을 거의 보지안았다.

이에 안녹산이 들고 일어나 반역을 꾀했다.

양귀비를 죽이라는 거센 함성에 현종은 눈물을 먹음고 양귀비를 목메어 죽게 했다. 그 후 이 꽃을 양귀비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양귀비꽃 유래되었다 한다.

현종의 사랑을 받던 양귀비처럼 양귀비꽃은 아름답지만 한편 아편의 재료를 만들어내는 무서운 꽃이었다.

요즘은 마약성분이 전혀 나오지 않은 개량종 양귀비가 나와 시민들이 많이 오가는 길기에나 공원에 많이 재배하고 있어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하는 꽃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