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제국 로마 멸망의 원인 분석
로마는 그 건국 기원을 BC 753년으로 잡습니다. 로물루스와 레므스의 신화로 시작되는 로마 역사는 초기의 전설적인 왕정기를 거쳐 BC 510년 경부터 공화정기에 들어섭니다. 이들은 왕을 선출했고 경력이 있고 나이가 든 귀족들을 원로로 추대하여 원로원을 구성했는데 약 300명 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시민을 다 합쳐 8만 4천명이라고 하니 작은 도시 국가이지만 민주 정치를 해 낸 셈입니다. 그러다 7대 왕 타르퀴니우스의 폭정에 온 나라가 홍역을 치루고 난 뒤 부터 원로원은 다시는 왕을 뽑지 않기로 결의하고 원로원 의원 중 해 마다 두 사람씩 뽑아 집정관으로 세워 일하게 했고 나라가 위급할 때는 한 사람의 지휘가 필요하다는 단서를 붙여 6개월로 기간이 한정된 독재관이라는 제도를 둘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로마에서 집정관에 뽑힌 사람은 정말 일년동안 혼신을 기울여 일했고 원로원 의원들 가운데 물망에 오르게 된 사람은 평소에 많은 연구와 업적을 쌓아 갔습니다. 이것이 로마가 빠른 시간에 발전한 이유라고 할 수 있지요. 그들이 공을 세우는 가장 빠른 길은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워 이기고 돌아오면 집정관이 될 가능성은 높아 졌습니다.
로마에서 부를 누릴 수 있는 길도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는 것이었는데...막대한 전리품과 노예를 차지한 사람들은 일약 귀족의 자리에 오르고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어 사회는 점차 귀족과 평민, 그리고 노예 신분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평민들의 불만이 쌓이게 되지요. 모든 정치가 귀족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평민들끼리 또 다른 로마를 건설하겠다는 의식이 싹트자 원로원은 충격을 받고 평민의 대표를 원로원이 인정하여 평민의 민의를 수렴할 것을 약속하고 호민관 제도를 도입합니다.
평민들은 10명의 호민관을 두어 귀족들이 만든 정책이 맞지 않으면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고 이후 로마 공화국은 한 층 더 발전하게 됩니다. 해마다 교체되는 호민관은 평민의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함으로 귀족과 평민의 차이는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개선되었고 더 나아가 호민관을 뽑던 민회가 발전하여 집정관 이하의 모든 관리를 뽑을 수 있는 국가 최고 세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후 로마는 더욱 성장해 BC 397년 북쪽 에트루리아의 도시 베이이를 합병하게 됩니다. BC 387년 북쪽의 켈트족에게 처음을 패하기도 하지만 전 시민들의 재건 의지는 다시 하늘을 찌르고 유능한 인재가 있으면 귀족이나 평민을 가리지 않고 등용한 로마는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이 때 평민 출신의 집정관이 나오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의 타렌툼을 복속하고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게 됩니다.
이렇게 역사발전을 거듭하여 온 대 로마제국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정치개혁의 실패에 기인했으며. 이러한 혼란이 가중되자 개혁안에 의하여 로마를 4등분 하여 분권 시켰을때 황제 중 한명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혼란의 극치인 로마를 버리고 비잔티움에 새로운 로마의 수도를 건설한다.
콘스탄티누스의 수도이전을 기화로 마침내 로마는 "동 로마"와 "서 로마"로 분열을 하게 되며, 때맞춰 중국 본토에서 살던 흉노족이 중국의 이민족 토벌에 의하여 쫏겨 나 서진하자 흉노족을 피하여 남하하던 게르만 민족에게 서 로마제국이 마침내 먼저 멸망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참으로 한심한 일이 로마에서는 벌어진다.
그리스도교인들의 체제에 대한 저항(로마제국 내부에서 기독교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저항)의 일환으로 교리에 따른 평화의 외침을 들고 나와 그리스도 교인들의 병역거부는 물론이고 군대에서의 이탈을 종용했고 그런 것들이 로마의 저 출산, 제국의 총체적 혼란과 맞물려 로마는 군인으로 징집할 인원이 절대 부족 했었다
이에 로마는 용병을 모집하여 군대를 편성했고 그 용병들이 미개하지만 싸움은 잘하는 게르만족들 이었다. 로마에 고용된 게르만족 용병들은 침략자 게르만 편에 서서 창을 거꾸로 돌린 것이다
동 로마 제국은 서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도 존재했지만 영토의 대부분은 미개 야만족에게 빼앗기고 도시국가 형태로 남아 명맥을 근근이 유지 하다가 결정적으로 이슬람 족에게 멸망을 당하여 1.000년 이상을 세계의 강대국으로 존재하던 로마는 영원히 스러지고 만다.
로마 제국은 서기 3세기부터 중앙권력의 불안과 게르만족의 침략에 시달리다가 결국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인 오도아르케에 의해 멸망했다. 이것이 바로 역사서에 나오는 공식적인 로마 멸망 관련 기록이다
.하지만, 로마사를 기후변동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떨까?
기원전 1세기에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한 후, 로마 제국은 꾸준한 팽창을 거듭했다. 제국 역사상 최대 영토에 달했던, 2세기초 트라야누스 치세에는 게르마니아의 일부까지 손을 넣어, 국경선이 지금의 라인 강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제국이 번영을 누린 시기는, 공교롭게도 유럽의 지중해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를 가름하는 추이대가 북상한 시기와 일치했다. [추이대? 推移帶, ecotone 숲과 초원의 경계부위와 같이 서로 다른 두 식물군락(植物群落) 사이에서 나타나는 식생의 전이지역.] 즉, 유럽의 온난기를 맞아, 갈리아 속주에서는 식량 자급은 물론, 로마 주둔군을 위한 대량 생산도 가능했다. 토지를 매년 재분배하던 켈트 시대의 토지소유 제도 대신에, 사적 토지보유 제도로 진일보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이였다.
3세기 이후, 로마 제국이 쇠락한 데는, 역사적 이유들도 있으나 – 가령, 영토 확장의 중단, 군인황제의 등장, 끝없는 내전 – 상대적으로 북부의 게르만 족이 발흥한 탓이 크다. 이렇게, 추이대의 북상이 로마 제국만이 아니라, 게르만 족에게도 발전의 촉매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 5세기, 이 추이대가 남하하면서, 게르만 족의 남하도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로마제국의 흥망은 유럽의 기후 변동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지구상에 발생하는 이상기후 현상과 각 징조들은 오늘날 어떻게 보고 생각을 해야 되는지 유추 해 볼 수도 있지 아니할까. 세계가 지금 겪고 있는 이런 것들로 인하여 곡물 파동이 도래한다면 70억 인구가 생존해 갈 수가 도저히 없다. 없는 기후변화는 인간의 소관이 아닌 하늘에 속한 일로 보아야한다. 그러기에 참으로 걱정되며 인류의 미래가 암담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길은 기후변화를 사정에 예측하고 막아나가는 길을 찾아 서 행동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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