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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흔적

남성 4중창단 쟈니 브라더스

1960년대중음앋추억
제목
  남성 4중창단 쟈니 브라더스
이름
  그날까지  작성일 : 2005-08-03 23:26:56  조회 : 1362 


 

‘쟈니 부라더스’는 남성 4중창단 전성시대를 활짝 열었던 1960년대의 슈퍼스타였다.

최초의 남성보컬그룹 ‘블루벨즈’와 ‘멜로톤 쿼텟’에 이어 3번 째로 탄생한 대학생보컬그룹 ‘쟈니 부라더스’는 아름다운 하모니의 4성 화음뿐만 아니라 무용수 뺨치는 율동까지 곁들인 무대매너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던 만능 엔터테이너들이었다. 전쟁의 포화를 딛고 일어서려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동과 더불어 월남파병으로 온 나라가 희망과 우울함이 뒤섞인 1960년대 초. 그들은 도회풍의 밝은 노랫말을 스탠더드 팝 계열의 경쾌한 가락에 얹어 대중들에게 위안을 안겨 주었다.

이들의 국민가요 급 히트곡인 ‘빨간 마후라’는 단순한 행진곡풍 노래가 아닌 팝적인 요소를 가미한 가락으로 메가톤급 사랑을 받았다.

1962년 데뷔이래 40여 년 동안 외곬 음악인생을 걷고 있는 창립멤버 김준은 가요계의 신사로 후배 가수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본명이 김산현(金山鉉)인 그는 1940년 1월14일 만석꾼이었던 부친 김득수와 모친 최창선의 1남1녀 중 3대 독자로 평안북도 신의주 마전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김준은 또래 아이들은 상상하기 힘든 당꼬 바지에 소가죽 구두를 신고 장난감 칼과 진짜 기상나팔을 부르며 동네를 주름잡았던 골목대장이었다.

음악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던 집안이었지만 부친은 노래 잘하는 아들을 자랑스러워 했다. 동요를 잘 불렀던 그는 유치원 때 5개 국어로 노래하는 프로에 소련어로 노래를 불러 주위를 놀라게 했다.

7살 무렵 토지개혁으로 집안의 재산을 몰수당하자 가족들과 함께 월남해 서울 남산초등학교에 입학해 1년간 다니다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광산촌의 주천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부친은 한때 강원도 일원에서 꽤나 알아주던 ‘달별표 비누’공장을 세워 사업을 일으켰다.

이미 노래 잘하는 아이로 소문났던 김준은 6ㆍ25가 터져 인민군이 들이 닥쳤을 때 행사가 있으면 불려가 인민군 노래를 강제로 불렀다. 1ㆍ4후퇴 때 목포를 거쳐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대전부락 향교에서 어렵게 살던 중 어머니가 영양실조로 돌아가시자 토끼부락으로 옮겨 구멍가게를 차렸다.

고단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가곡으로 도내 음악 콩쿠르를 휩쓸었던 그는 아침조회시간에 교단에서 노래를 불렀던 제주 대정고교의 유명한 노래꾼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한동안 인근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일하기도 했다. 이때 미군교회의 흑인목사 채플린 게이를 통해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도 배우고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과 마할리아 잭슨의 재즈와 흑인영가를 접했다. 


고교 졸업 후 경희대에서 주최한 ‘전국 남녀 중고 음악 콩쿠르’ 성악부에 3등으로 입상을 하며 경희대 음대에 60학번 장학생으로 입학했던 김준은 “고백할 것이 있다”며 어려운 말문을 열었다.

김준은 “이미 졸업하고 쉴 때 대정고의 정남혁 음악선생이 학교 대표로 콩쿠르에 내 보낼 학생이 마땅치 않자 나를 찾아와 다시 머리를 깎게 해 고등학생으로 만들어 콩쿠르를 참가시켰다”며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미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한 고교동기 장철우 목사가 소개한 교회 음악선생 이동일의 도움으로 입상을 했다. 이후 용산 수도여고 건너편 캠프 코이너 채플의 시온 성가대 합창단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잡무를 도와주며 숙식을 해결하고 악보를 익혔다. 이 시절은 그의 음악적 기초와 인성을 정립해준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1학년 수료를 하고 2학년 올라갈 때 장학제도가 없어지자 직업이 필요해 김종필이 단장이었던 예그린악단 합창단원모집에 응시해 들어갔다. 김준은 “이때 처음으로 하루 세끼를 먹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예그린 시절은 여러 장르의 음악을 접해 좋았다.

또한 멜로톤 트리오 멤버 중 한 명이 군에 입대해 임시멤버로 영입되어 시민회관무대에 서기도 했다. 1년 후 예그린 악단이 해체하자 김산현은 김준으로 예명을 만들어 평소 배짱이 맞았던 동료단원 진성만, 김현진, 양영일과 보컬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브라더스 포, 에임스 브라더스 등의 노래를 좋아했지만 ‘콰이어강의 휘파람’을 부른 ‘미치 밀러 합창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포크 싱어 전석환은 연습실을 빌려주고 하몬드 올갠을 쳐주며 이들을 지도해 준 은인이었다. 1962년 율동을 겸해서 노래 연습을 해 새롭게 개국한 동아방송 노래자랑 연말결선에 올라 최고상을 받 으며 화려하게 가요계에 데뷔했다.

그룹 이름이 없던 이들은 전석환의 별명 ‘쟈니’를 따 ‘쟈니 부라더스’로 이름을 정하고 본격적으로 대중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정상 중창단



1962년 MBC가 주최한 동대문운동장의 ‘5ㆍ16혁명 1주년 기념 콩쿠르 대회’는 ‘쟈니 부라더스’라는 공식이름으로 대중들 앞에선 첫 무대였다. ‘황화의 골짜기’와 흑인 영가를 부르는 신출내기 보컬그룹의 흥겨운 무대에 대상의 영예가 안겨지며 수많은 관객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 ‘마포사는 황부자’에 이어 영화주제가 ‘빨간 마후라’가 공전의 히트를 하며 정상의 인기그룹으로 급부상했다.

‘당시 연속극과 영화주제가 대부분을 도맡아 불렀다’는 김준의 말처럼 데뷔부터 1967년까지 6년 간 ‘방앗간 집 둘째 딸’, ‘니가 잘나 일색이냐’등 히트 퍼레이드로 ‘쟈니 부라더스’는 황금기를 누렸다.

1968년 가수라면 누구나 출연을 꿈꾸던 TBC방송의 최고 인기프로인 ‘쇼쇼쇼’ 레귤라 그룹으로 매주 출연하며 최정상의 중창그룹으로 군림했다. 멋들어진 화음과 함께 건장한 남성들의 무용수 뺨치는 율동은 장안의 화제를 불러오며 쟈니 부라더스는 감당키 힘든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인기는 최정상이었지만 음악적인 한계에 부딪쳤다. 4중창단의 화음 보다는 쇼프로그램의 성격에 따라 멜로디위주로 솔로나 듀엣으로 제멋대로 팀의 음악구성을 변경하는 강요된 활동은 각자의 개성을 살리지 못했고 멜로디 멤버가 아프면 그룹활동을 한동안 중단해야 했다.

지금도 여전한 중요 보컬에만 무게중심을 두는 당시 가요계 풍토 때문에 멤버들이 불만을 터뜨리면서 팀이 균열하기 시작했다.

음악적 갈등을 느낀 김준은 ‘보컬그룹 활동이 영원하지는 못할 터이니 각자 솔로로 나가 멜로디 보컬을 익혀 실력을 쌓자’고 제안했지만 다른 멤버들은 ‘우리 인기가 최고인데 그냥 이대로 그룹을 지키자’고 반발, 의견충돌이 빚어졌다.

결국 김준은 인기만을 위한 소비적인 그룹 음악활동 보다는 어릴 적부터 가슴속에 품어오던 재즈를 하고 싶은 자신의 음악 색깔을 찾기 위해 결별을 선언했다. 1968년 7월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쟈니 부라더스의 해체선언에 대중들과 방송국들은 경악했다. 



이후 각자 새로운 직업으로 흩어져 있던 쟈니 부라더스 멤버들에게 MBC는 재결합을 강력하게 권유했다. TBC와 오락프로그램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던 MBC로서는 경쟁력 있는 쟈니 부라더스 멤버들로 TBC에 대항하려 했다.

지인을 통한 방송국의 강력한 압박에 멤버들은 자기 직업을 유지한 채 재기의 무대를 갖기로 합의했다. 일과 후 저녁에 모여 연습을 강행하여 결국 1969년 12월 30일 MBC 특별방송으로 ‘쟈니 부라더스 쇼’로 재기무대를 가졌다.

이후 1970년 첫 방송부터는 ‘전국에 메아리 친다’는 순수 우리말의 의미를 따 그룹명을 ‘메아리 진’으로 개명하며 음악활동을 본격화했지만 음악적인 변화 없이 방송사의 기획에 의존한 재기활동은 반짝 반응에 그치며 단명했다.

1970년 김준은 퇴계로 아스트리오 호텔에서 최상룡 마스터에게 미8군 오디션을 받고 8군무대에서 본격적인 솔로 재즈가수로 거듭났다.

이후 싱어 송 라이터로 재 탄생한 김준은 1969년 펄씨스터즈 공연에 함께 출연한 장우, 박상규, 차도균과 함께 이백천이 붙여준 ‘포 다이나믹스'라는 노래동아리를 결성했다.

이들 4명은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하모니카를 불며 명동거리에 나가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즉흥 모금연주회를 가지는 진보적 음악활동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개성이 강했던 멤버들은 1974년 남산 드라마센터의 ‘다이나믹스’공연을 끝으로 동아리활동은 중단했다. 이후 음악적 배짱이 맞았던 ‘김준ㆍ장우’두 사람은 듀엣 활동으로 주목을 받으며 재즈의 대중화에 힘썼다.

쟈니 부라더스 멤버들 중 김준 만이 줄곧 음악인생을 걷고 있다. 가톨릭 의대 출신 베이스 진성만은 배우 김지미의 여동생과 결혼, 1987년 ‘지미필름’을 설립했고 현재는 청담동에서 ‘로바다야케 재인’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 외대출신 리드 김현진은 아마추어 바둑3단으로 서울에서 건설업을, 경희대 음대 출신인 하이테너 양영일은 팀 해체 후 MBC TV 코미디언으로 변신했다가 현재 코스모스 악기사 부산지점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김준은 1990년대 초 한국재즈클럽을 만든 이래 현재 의정부에서 재즈까페 준을 운영하며 수많은 재즈음반과 공연으로 중단 없는 재즈보급운동을 펼치고 있다. ‘순간적인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진실한 음악을 추구하는 가수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의 소박한 음악관에서는 한없이 자유롭고 풍요로운 대중 음악가의 아름다운 풍모가 느껴진다.

그는 재즈 1세대들의 친목과 후배 가수들의 음악활동을 이어주는 아름다운 가교로 선후배들의 신임을 받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 출처 : 주간한국( http://weekly.hankooki.com/ ) 추억의 LP여행 2002. 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