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멋진 것은
일생을 바처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2.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인간으로서 교양이 없는 것이다.
3.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것은
할 일이 없는 것이다.
4.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은
타인의 생활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5.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남을 위해 봉사하고 결코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6.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든 사물에 애정을 갖는 것이다.
7.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福澤諭吉) 교원
- 출생 - 사망 :
- 1835년 1월 10일 (일본) - 1901년 2월 3일
- 경력 :
- 1882년 시사신보 창간
1873년 메이로쿠사 창설, 실학 장려
1868년 학숙 이전, 게이오기주쿠로 개칭
1858년 네덜란드 어학교 난학숙 개교
저서
후쿠자와유키치자서전
학문을 권함
학문의 권장
학문의 향기
젊은이여 지금은 공부할때다.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의 개략`
현재 일본의 최고액 지폐인 만엔권에 그려져 있는 인물이 후쿠지와 유키치(복택유길· 1835~1901)라는 것은 그 나라에 가 본 사람이면 대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국부처럼 대접받고 있는 것은 오늘날에 비롯된 일이 아니다. 20세기 벽두에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일본국회는 이 재야 지식인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는 극히 예외적인 결의안을 채택한바 있었다. 또한 그는 일찍이 김옥균과 박영효와 같은 우리나라 개화파의 스승이었고, 이광수는 “하늘이 일본을 축복하셔서 이러한 위인을 내려셨다”고 부러워했다.
사실 후쿠자와는 부러운 존재이다. 그의 대표작인 「문명론의 개략」(1875)을 보면, 그가 서양정신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의 이해방식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견문기도 아니고 또 채장보단의 입장에서 쓴 것도 아니다. 그는 서양의 발달된 문명의 근원에는 회의의 정신과 자유로운 탐구가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일본 역시 그런 철저한 지적활동을 위하여 봉건적 제도와 기존사상을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않으면 문명권에 접어들 수 없다고 역설한다. 그가 양이론자나 부분적 개방론자의 비난을 무릅쓰고 “단연코 서양의 문명을 취해야 한다”고 천명한 것은 그런 원리적, 규범적인 뜻에서이지 결코 표면적인 구화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당 제기되어야 할 질문이 있다. 그것은 무엇을 위한 문명화인가라는 질문이다. 한데 후쿠자와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이중의 대답을 제시한다. 첫째는 보편적인 차원의 대답이다. 그에 의하면 문명이란 다름아니라 “사람의 몸을 안락하게 하고 마음을 고상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며, 인류공통의 이 이상은 한없이 추구되어 나가야한다. 달리 말하면 그는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고른 발달로 말미암아 인간의 완전가능성을 겨냥했던 19세기 서양의 진보사관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보의 이데올로기는 탓할 수 없을뿐더러, 인류의 영원한 이상으로 남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가 문명화의 이유로서 제시하는 또하나의 근거는 시대적, 상황적인 것이다. 서양의 본을 딴 조속한 문명화는 이번에는 서양의 긴박한 침략의 위협에 대처하여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인식된다. 「문명론의 개략」은 이 측면을 더 강조하고 있는데, 19세기 후반기의 극성스런 서양 제국주의에 노출되었던 일본의 사정을 생각하면 국력배양을 위한 문명화라는 후쿠지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논리에는 이미 금이 가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문명을 나라의 독립을 위한 수단으로 볼때 문명의 본래의 목적은 왜곡되거나 소외될 가능성이 없겠는가? 더더구나 그것이 자신의 존립을 위하여 타자의 존립을 부정하는 이른바 적자생존의 경쟁에 동원된다면 “인간 만사 문명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보편적 명제는 다만 빛좋은 개살구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후쿠자와에 바친 찬탄을 걷어들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을 들었을 때이다. 그는 문명을 궁국적, 전인류적 목적으로 삼는 동시에 국가안보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이중성이 가져올 수 있을 모순을 두고 크게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그가 생각한 침략세력에 대한 국가의 방위가 일단 이루어지고 나서야 다시 문명의 본의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주 ‘지금으로서는’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그 본의로부터 일탈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이 ‘지금으로서의’ 문명의 수단화는 다만 독립수호에만 한정되었던 것이 결코 아니다. 그의 야망은 그 한계를 넘어, “평시에는 물건을 팔아 서로 이를 다투고 유사시에는 무기를 잡고 살상하는” 열강의 일원으로서 일본이 당당히 끼어들어 승자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 ‘문명’이란 말의 뜻이 드디어 뒤틀려서 동원된다. 이제 문명은 사람의 몸을 안락하게 하기 위한 지식의 활용이 아니라 대포를 만드는 기술을 의미하고, 또 정신면에서는 마음을 고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패기를 진작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명론의 제국주의적 편향이 드디어 결실을 보게 된 것이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였다. 후쿠자와는 그 승전보에 접하자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면서 크게 기뻐했고, 그 후 한일합방으로 향해 가는 일본의 더 노골적인 책동에도 매우 동조적(동조적)이었다.
이제 그러던 후쿠자와의 시대로부터 한 세기가 지났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지금으로서는’일본은 그 국가주의와 제국주의를 청산하고 후쿠자와가 애초에 정의했던 문명의 본의로 되돌아 온 것인가? 식민지통치, 정신대, 남경대학살, 태평양전쟁, 교과서편 왜곡 등의 문제를 둘러쌓은 일본의 지배층의 행위를 보면 그것은 극히 의심스럽다. 그래서 내 눈에는 만엔권의 후쿠자와의 초상이 문명의 본뜻을 밝힌 지성인의 모습으로 보다는, 제국주의의 과거를 정당화하기까지 하려는 끈질긴 국가주의적 발상의 배후에 깔려 있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는 도덕적 인간과 보편적 자유와 세계평화를 위한 투쟁의 전통이 일본의 리버럴리스트 사이에서 굳건히 자리잡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런 국가주의가 그들의 노력에 의해서 마침내 극복되리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