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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흔적

고사성어유래- 焚書坑儒

고사성어(故事成語)란 문자 그대로 어떤 유래와 결부된 옛일이 한마디 숙어로 정착되어 전해져오는 말이다 .그 유래된 일을 앎으로써 그 말이 지닌 뜻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사용할 수가 있다. 고사성어 속에는 그 말이 만들어진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아울러 그 말을 만든 인간의 체험과 그로 인해 얻어지는 삶의 지혜가 농축되어 살아있기 때문이다. 고사 성어를 익혀둠으로 고금을 통한 인간의 보편적 삶의 지혜를 체득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중국의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제자 백가서(諸子 百家書) 사기(史記) 등에 수없는 보화들을 찾아 볼 수 있다.


焚書坑儒

(병)fenshu kengru (웨)fenshu k'engju.


焚:불사를 분.  書:글 서.  坑:묻을 갱.  儒:선비 유.

[출전]《史記》〈秦始皇紀〉,《十八史略》〈秦篇〉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인다는 뜻으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가혹한 법[苛法]과 혹독한 정치[酷政]을 이르는 말.



중국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시행한 학술·사상의 통일방안.


'분서갱유'란 서적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땅에 묻어 죽인다는 뜻이다. BC 221년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는 법가(法家)인 이사(李斯)를 발탁하여, 종래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하는 등 철저하게 법가사상에 기반을 둔 각종 통일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같은 법가 일색의 정치에 대해 유가를 비롯한 다른 학파들은 이에 반대하고 공공연하게 자기 학파의 학설을 주장했다. 이에 시황제는 이사의 진언을 받아들여 진(秦)의 기록, 박사관(博士官)의 장서, 의약·복서(卜筮)·농업 서적 이외의 책은 모두 몰수하여 불태워버렸다. 또 이것을 위반하는 자, 유교경전을 읽고 의논하는 자, 정치를 비난하는 자 등은 모두 극형에 처한다고 정했다. 이것이 바로 '분서'사건이다. '


사건의 개요


기원전 222년, 제(齊)나라를 끝으로 6국을 평정하고 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천하를 통일한 진왕 정(政)이었다. 자신의 업적을 중국역사에 나오는 삼황오제(三皇五帝)보다 나은 (종래의 왕이라는 칭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함) 새로운 황제(황제)라 칭하고 시법(諡法 ․ 贈名을 붙이는 관습)을 폐하고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도록 했다.

이후 대대로 2세황제 ,3세황제라고 칭해서 만세(萬歲)에 전하려고 했고 자신을 짐(朕)으로 했다. 또 한 황제의 명(命)을 제(制)로, 영(令)을 초(眧)로 고치고 확고부동한 국가경영에 착수 했다.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자 주(周)왕조 때의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사상 처음으로 중앙집권(中央執權)의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채택했다.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이 되는 그 해(B.C. 213) 어느 날,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자 주대(周代)의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을 군, 현으로 바꿔 중앙집권제로 개정했다.

시황제는 B.C 213년에 군신들을 함양궁(咸陽宮)에 모아 주연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박사(博士:벼슬이름) 순우월(淳于越)이 군현제를 폐지하고 종래의 봉건제도로 부활하자고 하자 장내는 긴장된 분위기로 변했다. 시황제가 순우월이 제의한 문제에 대한 가, 부를 신하들에게 물으니 정승인 이사(李斯)가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



“통일 이전까지 봉건시대는 제후(諸侯)가 서로 공격하고 싸움을 되풀이해 천하가 혼란했으나 이제는 천하가 통일돼서 법령이 한곳에 나와 질서가 서고 세상이 안전한데 옛 학문을 하는 자들이 틈만 있으면 시대가 달라진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조정이 하는 일에 흠을 내 비방하는 것을 일삼고 있나이다. 차제 민생에 필요한 이외의 서책은 관에서 거둬 소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시황제가 이사의 제안을 채택해 즉시 시행에 들어가 그러한 선비들을 엄단함과 동시 의약, 점술, 농경(農耕)과 奏의 기록물 이외의 서책은 모든 민가에서 관에 제출돼 소각됐다. 유가(儒家)의 경전(經典),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귀중한 문화재와 희귀한 책들이 속속 불태워졌는데 이 일을 가리켜 '분서(焚書)라고 한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므로, 책은 모두 글자를 적은 댓조각을 엮어서 만든 죽간(竹簡)이었다. 그래서 한번 잃으면 복원할 수 없는 것도 많았다.



이듬해(B.C. 212) 아방궁(阿房宮)이 완성되자 시황제는 불로장수의 신선술법(神仙術法)을 닦는 방사(方士)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는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시황제의 부덕(不德)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다. 시황제는 진노했다. 그 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중의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로부터 '폐하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잡아 가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이나 되었다. 시황제는 그들을 모두 산 채로 각각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는데 이 일을 가리켜 '갱유'라고 한다.



한편 시황제는 나이 50에 가까워 지면서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신선설(神仙說)에 몰입해 선도의 길잡이로 알려진 방사(方士)라는 사람들을 신임했고, 그 중에서도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을 가장 신임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그런데 시일을 끌어 시황제로 부터 돈을 얻을 만치 받아내자 시황제가 불로장생의 술(術)이나 선약(仙藥)을 구하지 못하는 것은 시황제가 덕(德)이 없기 때문이라는 소문을 항간에 퍼뜨리고 도망쳐 숨어버렸다.

폭군으로 이름이 높은 奏의 시황제에게 ‘분서갱유’(焚書坑濡) 사건은 그의 악명(惡名)을 높이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마침 함양(咸陽:오늘의 面安)에 사는 유학자(儒學者)사이에 시황제의 부덕론(不德論)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다는 정보가 시황제 귀에 들어갔다. 대노한 시황제가 “이것은 필경 도망친 방사가 유학자들을 통해 만들어낸 모함”이라 단정하고 비밀리에 내사해 봤으나 뚜렷한 주동자가 없었으나 그들이 시황제를 비방한 것을 사실로 알고 함양에 거주하는 학자 460여명을 잡아 생매장하는데 대다수가 유생이였기에 ‘갱유’(坑儒)라 한다.

후일의 학자들은 이 사건을 전국초기 효공(孝公)이 패권주의를 국시로 정해서 비유(比儒)정책을 취한 것에 연유한다고 보고 있다.



유가(儒家)의 경전(經典)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문집 등 귀중한 문화재 서적을 불사르고, 유명한 학자 460여명을 생매장하는 폭거는 이유를 따지기 전에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역사적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바가 너무도 많다고 생각되며, 공산주의 과정의 모택동이 벌인 문화혁명도 이범주를 벗어날수 없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