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초가 (四面楚歌)
의미 / 초가(楚歌)는 초나라의 민요, 초나라 군대를 포위한 한(漢)나라 군대가 사방에서 초나라의 민요를 불러서 초군(楚軍)의 심리적인 동요를 노렸다. 이고사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주위 사면이 적으로 둘러싸인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를 「사면초가」라 하게 되었다. 사방에서 빗발치는 비난 속에 외톨이가 된 상태를 비유하기도 함.
[출전] 《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
[내용]
진(秦)나라 말기의 전국적인 농민 봉기는 초(楚)항우(項羽)와 한(漢)유방(劉邦)으로 천하쟁탈전이 집약되었다. 기원전 202년 12월 동으로 돌아가던 초(楚)의 항우가 한의 대군에게 쫓겨 해하(해하․ 안휘성 靈壁懸 동남)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초의 군대는 이미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고 식량도 바닥이 나 있었다. 더구나 성 주위는 한군(漢軍)에 의해 겹겹이 포위당해 있었다. 그 밤에 한군 진영에서는 사방으로 초나라의 슬픈 노래 소리가 들렸다.(項王軍壁垓下, 兵少食盡, 漢軍及諸侯兵圍之數重. 夜聞漢軍四面皆楚歌,)
그 노래 소리는 항우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신의 고향노래인 초의 민요였기 때문이다. 항왕(項王)은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를 점령했다는 말인가, 어째서 초나라 사람이 이토록 많은가” 하고 슬퍼하였다.( 項王乃大驚曰 : "漢皆已得楚乎? 是何楚人之多也!")
항우 뿐이 아니였다. 초군의 병사들도 모두 향수에 젖게 했다. 그래서 그리운 고향의 노래를 무심코 따라 부르자, 두고 온 가족들과 고향생각하며 우는 자가 잇달았다.
이것은 한나라 고조가 꾸며낸 심리작전으로, 사면초가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항왕은 일어나 장막 안으로 들어가서 결별연을 열었다. 항왕에게는 한시도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우희(虞姬)라는 애첩이 있었으며 또한 오추(烏騅)라는 이름의 애마도 있었다.
* (項王則夜起, 飮帳中. 有美人名虞, 常幸從 ; 駿馬名騅, 常騎之.)
마음이 울적해진 항왕은 즉흥시 한 수를 옮으며 마음을 달랬다.
於是項王乃悲歌慷慨, 自爲詩曰 :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기개세) :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세상을 덮었는데
時不利兮騅不逝(시부리혜추부서) : 시세가 불리하고 오추마도 떠나려하지 않는 구나
추不逝兮可奈何(추부서혜가나하) : 오추마가 떠나려 하지 않으니 어찌 하리랴
虞兮虞兮奈若何(우혜우혜나야하) : 우야, 우야 내 너를 어찌할거나
항왕이 반복해서 몇 번 노래하자, 우미인도 이별의 슬픔을 가득 담고 애절하게 화답했다.
항왕의 뺨 위에는 굵은 눈물이 흘렀다.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도 그 앞에 엎드려 소리 없이 흐느끼며 쳐다보지를 못했다.
(歌數闋, 美人和之. 項王泣數行下, 左右皆泣, 莫能仰視.)
우희(虞姬)의 화답가
한병 기략지 사면 초가성 (漢兵 己畧地 四面 楚歌聲)
대왕 의기진 천첩 하료생 (大王 意氣盡 賤妾 何聊生)
한나라 군대는 이미 땅을 차지했지만 사방에서 초가 소리뿐(四面楚歌聲)
대왕의 운이 다 되었거든, 천한 첩이 어찌 살기를 비라리요.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우미인도 항우의 품에서 자결하고, 항우 역시 다음날 오강에서 자결했으니, 그의 나이 31세였다. 고향이 그리워 오강까지 달려갔으나, 패군지장으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자결한 것이다. 무면도강도 (無面渡江東)이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왔다.
무면도강도 (無面渡江東)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면목이 없는 그런 경우를 가리켜[무면도강동(無面渡江東)]이란 문자를 쓴다. 마지막 싸움에 패하고 단신으로 오강(烏江)까지 도망쳐 온 항우(項羽)가 자살하기에 앞서 남긴 말에서 나온 말이다. [강동을 건너갈 면목이 없다]는 뜻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한나라 군사에 포위된 해하(垓下)에 버티고 있던 항우는 휘하 장수 팔백여 명을 거느리고 어두운 밤을 타서 적의 포위를 �고 탈출하게 된다.
항우는 양자강을 건널 생각으로 오강까지 왔다. 오강 정장(亭長)이 배를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정장은 항우를 보고 이렇게 위로했다.
막상 건널 수 있게 되자 흥분이 가라앉은 항우는 심경에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는 굴욕을 참지 못하는 직선적인 의기남아였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했는데 건너가면 무얼 하겠는가. 내가 강동 자제 팔천 명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왔었는데 지금 함께 돌아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지 않은가.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임금으로 받든다 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이들을 대하겠는가(我面目見之). 그들이 비록 말은 하지 않더라도 내가 어떻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하고, 다시 돌아서서 한나라 군사와 싸워 수백 명을 죽인 다음 스스로 목을 처 죽고 말았다.
捲土重來 (권토중래)
의미/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온다는 말 .한번 실패하여 물러났어도, 다시 힘을 키워서 돌아온다는 뜻이다.
출전/ 두목시(杜牧詩) 「오강정의 제(烏江亭의 題)」
당(唐)대의 유명한 시인 두목은 ,어느날 오강정(烏江亭)을 방문했다. 산책하고 있는 동안에 역사에 이름 높은 漢과 楚의 싸움의 고사를 생각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두목은 정자의벽에 「승패는…」의 시를 썼다. 그 시의 내용은 楚와 漢의 싸움에 패한 항우(項羽)에 관한 것이었다.
시중의 권토중래「捲土重來」는 혹시 한 때의 수치를 참기가 어려우면 강동에 돌아가서 태세를 바로잡으면 재기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당시, 한의 유방은 수천의 기병대를 조직하여 항우 이하 28기병을 완전히 포위해 버렸다.
철벽의 포위망을 돌파한 항우는 오강(烏江) 근처까지 도망쳤다. 그곳에 오강의 사공이 한척의 작은 배를 저어 와서 배를 타고 강동으로 도망갈 것을 권유 했다.
사공은 말하였다
[강동이 좁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방 천 리 땅에 인구가 수십만에 달합니다. 여기서 재기할 수도 있으니 어서 건너십시오. 현재 배를 가진 사람은 소인 한 사람밖에 없으므로 한나라 군사가 건너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렇게 하지 않았다.「하늘이 나를 무찌른 것이다. 팔천의 강동의 군사를 모두 잃어버린 나다 .유족들을 볼 면목이 없다.」
한군이 곧 접근해왔다. 이미 일각의 여유도 없다 항우는 애마를 사공에게 주고, 겨우 부하 몇 명과 함께 걸어서 오히려 漢軍 속으로 들어갔다.
장열하고도 처참한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항우는 몸에 십 수 군데 상처를 입었다. 일대 영웅「楚의 覇王」도 이제 漢軍의 수십 겹의 포위를 뚫고 도망칠 수 없었다.
당대 패권을 다투던 영웅 항우는 스스로 목을 베어 이렇게 한 시대를 마감하였다. 두목은 혹시 항우가 자살하지 않고 후일을 기약하고 강동으로 도망갔다 면하는 아쉬움에서 그의 시문에서, 권토중래(捲土重來) 할 수 있었다고 애석 했다.
오강정의 제(烏江亭의 題) 원문
오강정은 안휘성(安徽省) 동쪽에 있던 나루터 .항우가 최후를 마쳤던 곳이다, 제(題)는 자신이 지은 詩文을 기둥에이나 벽에 쓰는 것.
勝敗兵家事不期 包羞忍恥是男兒 (승패병가사불기 포수인치시남아)
江東子弟多才俊 捲土重來未可知 (강동자제다재준 권토중래미가지)
싸움의 승패는 전략가도 예측 할 수 없는 것, 수치를 참고 재기를 다짐하는 것이 참다운 사내라 할 터이다
강동의 땅에 뛰어난 인물이 많았으니 흙을 날리며 다시 왔다면 그 결과를 몰랐으리라.
당대 패권을 다투던 영웅의 이야기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서 역사엔 가정법이 통용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한 인간이 천하를 통일하여 황제가 되는 것이나 대권을 놓치고 패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지든 그것에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가치가 주어진다면 어떤 철학과 인생관을 가지고 그 시대가 요구한 국가와 민족과 내 이웃을 위해 삶을 살았는지가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어 보인다. 승자도 패자도 역사의 흐름 속에 모두들 잠들어 있을 뿐이며 그들이 누린 영광은 허무한 한편의 연극에 불과 할 뿐 공과는 그들의 이름에 따라 평가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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