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백성일인 [無傷百姓一人]
의미
'백성 한 사람도 상하게 하지 말라'는 뜻으로, 군주가 백성들을 몹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출전 《명사(明史)》 〈장렬제기(莊烈帝紀)〉에 나오는 말
중국의 한민족들은 남송이 멸망하고 만주에 살던 거란족이 세운 요(遼)(AD916-1125) 와 당황족이 세운 서하(西夏) (1038-1227) 여진족이 세운 금(金)(1125-1234) 몽골족의 원(元)(1206-1368)제국까지 근 500년 동안 한민족이 아닌 이민족의 통치와 억압 속에 피지배 민족으로 살아왔다.
서기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응천(應天-지금의 강소성 난징)에서 황제라 칭하고 명나라를 건립한 후 정치와 군사 등 다방면에 제도개혁을 단행하고 권력을 집중시켜 중아집권체제를 강화 하였다.
15세기 성조(成祖) 때는 정화(鄭和)가 일곱 차례나 서양원정에 나서 장거(長擧)를 이룩해 냈다.
16세기 후반에 접어들자 안으로환관의 전횡과 관료들의 당쟁, 밖으로는 새로이 포르투갈을 선두로 서구제국의 교역선이 들어와 자극이 컸다. 거기에다 만주에 거주하던 여진족의 남진에 의하여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진족은 금조(金朝)를 이어받은 만주족의 후예로서 명나라 간접지배에 복속하여 온 터이나 ,16세기 후반 누르하치가 나타나서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에 후금국(後金國)을 세우자 명나라의 위협이 되었다.
이 누르하치가 청조(淸朝)를 일으킨 태조(太祖재위 . 1616~1626)이다. 1618년 누루하치는 사르호(요녕성 撫順市 근교)에서 명나라 군을 쳐부수고 명나라 세력을 만주에서 몰아냈다.
후금은 (後金)은 그 후 태종 혼타이지(재위 1626~1643)가 뒤를 있고, 1636년 국호를 대청(大淸)이라고 고친 뒤 명나라와의 한판 승부를 위해 힘을 기르고 있었다.
중국 명(明)나라 말기에 이르러 관료들의 부패와 당쟁, 환관(宦官)들의 전횡과 만주에서 새로 일어난 청(淸)나라의 계속되는 침입 등으로 국력이 쇠퇴하였다.
이 무렵 명나라는 천계제의 뒤를 이어 아우인 명나라의 제17대 황제 숭전제 (崇禎帝:재위 1628∼1644)는 환관 위헌충 (魏忠賢)을 물리치고 정계를 숙정하였다. 그러나 당쟁이 점점 심각해지고 청나라에 대한 군비 증가와 더불어 대기근으로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자성(李自成)·장헌충(張獻忠) 등의 반란이 대표적이다.
섬서성에서 거병한 이자성(1606~1645)은 틈왕(闖王)이라 자칭하고 각지를 전전하다가 명나라 군이 장성 (長城)의 의수비로 동원되어 간 틈을 타서 숭정(崇禎) 17년 (1644년) 3월 북경에 육박했다.
이때 황제에게 충절을 바쳐야 할 관료들은 오히려 이자성과 결탁해 버리고 황제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숭정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여, 「너는 어째서 하필이면 제왕의 집에 태어났느냐.」라고 눈물을 지으면서 황녀를 어루만졌다. 옆에 있던 황후는 자결하고 황제는 황성의 뒷산인 만세산(萬歲山을 바라보며 옷깃에) 「 적(賊) 의 분열에 맡길지언정 백성 한 사람도 상하지 말 지어다」라고 적어놓고 목메어 죽었다. 이는 얼마나 임금이 백성을 간절히 사랑한 의지를 표현 이였던가?
자신의 몸은 어떻게 되더라도 백성에게 화가 미치지 않기를 원한 이 말은 숭정제의 황제로서의 愛民의 뜻을 표현 한 것이었다.
황제의 죽음과 더불어 명나라제국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명나라 군대가 청나라의 침략에 대비해 산해관 [山海關](화북성 북동부 長城의 동쪽 끝)에서 방어하던 명나라장군 오삼계(吳三桂)는 원수를 갚는다면서 청나라에 항복 한 후 청나라군을 선도하여 북경으로 향했다.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내세워 남진한 청나라군은 이자성을 내 쫓고 새로운 중국의 지배자로부각 되고, 숭정제에게 장렬제 (莊烈帝)라는 이름을 지어 올렸다.
그러나 이것으로 청나라가 천하 통일 달성한 것은 아니였다. 남경에서는 복왕 (福王)등이 자립해 있었고 이 나라를 남명(南明)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남 명 정권은 공격하는 청나라 군에게 쫓겨 버마로 피한 영명왕(永明王)도 1661년 현지에서 붙잡혀 이듬해 곤명(昆明)에서 죽음을 당했다.
한편 정성공(鄭成功)은 대만에서 복명(複明)운동을 벌었지만 그 자신마저 1683년에 패하게 되자 명나라 재건 움직임은 영원히 살아져버렸다.
난 여기에서 명나라 역사를 소개하면서 숭정제가 마지막 남긴 한마디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너무도 고귀하고 크다는 것이다
"적에게 넘어가 찢어질지라도 백성 한 사람도 상하게 하지 말라" 라는 글을 옷깃에 적어 두었던 숭정제의 애민정신(愛民情神)은 18세기 서양 철학자들이 떠들기 전 휴머니즘정신을 몸소 실천한 황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천하에 절대 권력자인 황제로서 자신과 가족들이 처한 비운 속에서도 백성들만은 다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휴머니즘정신을 몸소 실천으로 역사에 보여준 위대한 역사의 한순간을 접하면서 우린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게 된다
우리는 해방 후 국토분단과 남북전쟁이란 피눈물 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다. 세계유일 단일민족이 이념으로 갈라서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살기를 반세기동안 거듭하고 있다. 북한은 아직도 적화 야욕의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낡은 이념으로 무장해나가기 위해 300만 명의 주민을 굶주려 죽인 권력자가 정권을 움켜지고 있다. 이런 자가 진정 역사에 남을 백성을 위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내부의 철학 없는 일부몰지각한 무리들이 동조하는 경향마저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남북교류를 위해 협상하여나가되 원칙은 지켜 저야 한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변하여도 역사의 진실한 기록은 변할 수가 없다. 한 민족에게 죽음과 절망을 안겨준 그 정권은 결코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자유를 자랑하고 휴머니즘사상을 가진 자라면 그 누구도 평양 금수산 기념 궁전에 참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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