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끊이지 않는 정치인 망언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지난 대선 때부터 정치판에선 ‘1일 1망언’이란 말이 유행했다. 대선 후보를 비롯해 주요 정치인들의 입에서 하루에 하나 이상 망언이 나온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정치인들의 망언과 막말은 하루이틀 일이 아닌데, 최근 들어 도드라지게 보이는 이유는 자기 철학과 성찰이 없는 정치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생중계되고 순식간에 널리 퍼지는 소셜미디어 시대를 맞이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공업용 미싱’ ‘귀태’ ‘레밍’… 정치권 망언의 역사
정치 막말의 역사는 유구한데, 원조로는 김홍신 전 한나라당 의원이 꼽힌다. 김 전 의원은 199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대통령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고 사람들을 너무 많이 속여서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박아야 할 것”이라고 해 물의를 일으켰다. 최근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은 서울 사당동 수해복구 봉사 현장에서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라고 말해 정치권 망언 리스트에 이름을 추가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빅카인즈’에 따르면, 국내 54개 매체는 1990년 1월 1 일부터 2022년 8월 17일까지 ‘망언’ ‘막말’을 핵심 키워드로 하는 정치 기사를 2만9000건가량 보도했다. 정치권 망언·막말 보도량은 시간이 지날수록 많아졌는데, 대선·총선 등의 선거를 앞두고 급등하는 경향을 보였다.
정치권의 망언·막말이 다 같은 결은 아니다. 허만섭 강릉원주대 교수의 연구(2021)에 따르면, 정치권 막말들은 내용상으로 △집단 비하 △개인 모욕 △규범 훼손 △맥락 이탈로 구분할 수 있다. 집단 비하에 속하는 망언·막말로는 “세월호 때부터 국민들이 레밍(나그네쥐) 같다는 생각이 든다”(김학철 전 자유한국당 도의원·2017년),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 가고 망하면 인천 간다)”(정태옥 전 한국당 의원·2018년), “선천적 장애인은 의지가 좀 약하대요”(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2020년), “부산에 계신 분들은 (특정 언론을 많이 봐서) 나라 걱정만 하고 계시는지 한심스럽다”(박재호 민주당 의원·2021년) 등이 있다. 김홍신 전 의원의 ‘공업용 미싱’ 발언은 개인을 모욕하는 대표적 발언인데,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겨냥해) 귀태(鬼胎·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의 후손”(홍익표 민주당 의원·2013년), “(황교안 당시 한국당 대표를 향해) 거의 사이코패스 수준”(이정미 전 정의당 대표·2019년), “(고민정 민주당 의원을 겨냥해) 조선 시대 후궁이 왕자를 낳았어도 이런 대우는 받지 못했을 것”(조수진 국민의힘 의원·2021년) 등도 이에 속한다. ‘공업용 미싱’은 민주당 김경협 의원이 지난해 국민의힘 주호영 당시 원내대표를 공격하며, ‘귀태’는 국민의힘 배현진 의원이 2020년 문재인 정권을 비난하며 사용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규범 훼손에 속하는 발언은 법·윤리 등 기본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말이다. “(성추행으로 피소된 뒤 극단 선택을 한 박원순을 옹호하며) 어떻게 인간이 완전무결할 수 있나”(김진애 전 열린민주당 의원·2021년) 발언은 성추행 가해자 옹호라는 점에서 이에 해당된다.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체계, 상식과 괴리된 발언들은 맥락 일탈에 속한다. 김성원 의원의 수해 현장 발언이 대표적이며, “구명 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박근혜 전 대통령·2014년 세월호 사고 당시), “어떻게 여기 계신 분들 미리 대피가 안 됐나 모르겠네”(윤석열 대통령·9일 신림동 침수피해 현장에서) 등 흔히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불리는 발언도 마찬가지다.
허만섭 교수는 “일부 정치인들은 망언·막말과 정상적 발언의 경계를 자주 식별하지 못하고 자기 점검을 충분하게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최근에는 사회 특정 집단이나 일반 국민을 비하하는 망언이 많아진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최근 “저학력, 저소득층이 국민의힘 지지가 많다”(이재명 민주당 의원), “(사적 채용 논란과 관련해) 9급으로 들어갔는데 그걸 갖고 무슨”(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 등의 발언은 사회 특정 집단과 일반 국민을 비하하는 발언으로 인식돼 공분을 샀다. 허 교수 연구에 참여한 대학생 220명 중 149명(72.3%)은 특정 정치 발언을 막말로 지각할 때 실망, 혐오, 분노, 냉소 순으로 부정적 감정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탕주의와 선정주의가 낳은 정치인 막말
정치인들의 망언과 막말은 왜 끊이지 않는 걸까. 전문가들은 정치판에 만연한 ‘한탕주의’와 ‘선정주의’를 원인으로 꼽았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정치인들에겐 항상 대중적 관심을 끌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데, 평소 정치에 대한 고민이나 철학적 사고를 하지 않기 때문에 부적절한 발언이 튀어나온다”고 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자신이 국민의 대표라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이라며 “김성원 의원 발언은 수해 입은 사람들의 처지를 헤아리기 보다, 자기 사진 잘 찍어서 홍보하려는 마음이 앞선 것”이라고 했다.
‘귀태’와 같이 정적(政敵)을 공격하는 발언은 소속 집단(정당)을 향한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김형준 교수는 “강하고 자극적인 발언들은 대개 자신이 속한 집단(정당), 지지층을 보고 하는 것”이라며 “‘나는 이렇게 강한 말도 할 수 있으니 관심 가져달라’는 미성숙한 사고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이준한 교수는 “강성 지지자들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강하게 표현해줬다’는 생각으로 환호하지만 일반 국민들 정서에서는 벗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 총선에서 미래통합당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아 ‘막말 전력자’ 공천 배제 원칙을 세웠던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우리 정치권에 과격한 언행이 주목받고, 성찰과 사유는 사라진 사나운 풍토가 자리 잡은 지 오래”라고 진단했다. 김 전 의장은 처칠 전 영국 수상을 이상적 화법을 구사하는 정치인으로 꼽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으면서 국민의 마음에 젖어 들어갈 수 있는 진정성, 위트와 농담까지 갖췄다. 이는 끊임없는 성찰과 훈련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했다. 김황식 전 총리는 “정치인의 말에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품격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상대방의 공약이 정말 허황된 경우 ‘동화책을 읽는 것 같다’고 하는 등 우회적이면서도 재미있게 지적했다. 이렇게 점잖게 표현해도 뜻이 충분히 전달된다”고 말했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는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은 어떤 상황에서도 큰 어젠다를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어떤 방향으로 공동체를 이끌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며 “고민하지 않는 지도자, 무한 책임을 망각한 정치인의 입에서 망언이 나온다”고 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정치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닌, 국민이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한다”며 “정치 지도자의 말 한마디가 국민의 가슴에 비수를 꽂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항상 치밀하게 준비된, 그러면서도 진정성 있는 말을 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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