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싫고 좋고 지지하고 반대하고를 떠나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지난 7월 8일 오후, 일본 전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 피격 사건 직후 일본인 친구 W와 인터넷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W는 피격 뉴스 생중계를 지켜보는 중이라 감정을 조절하기 어렵다면서 사과를 했다. 필자의 30여년 친구인 W는 교육계에서 일하는 인물로, 평균적인 관점을 가진 일본인이다. 평소 편견 없이 담백하게 제3자 입장에서 일본의 현황을 설명해줬다. 그가 아베를 보는 눈도 ‘좋은 점도 있고, 나쁜 부분도 있고’라는 식이다. 그런 W가 “아베 피격 소식을 접한 일본인 대부분이 큰 슬픔에 빠질 것”이란 말은 빼놓지 않았다. “정치 견해와 관계없이 일본 국민을 위해, 일본이란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한 정치인이 아베”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아베 피격 사건 직후 일본의 신문·방송은 ‘심폐정지’란 용어를 사용했다. 이 의학 용어를 사용해 일단 사망이 아닌 상태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W를 포함해 일본인 대부분은 피격 직후부터 아베가 사실상 사망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총기 전문가는 범인 야마가미 데쓰야(41)가 만든 사제무기가 총이 아닌 대포 수준이라고 말한다. 3m까지 다가와 6개 총알이 한꺼번에 발사되는 ‘대포’를 쏜 셈이다. 아베는 피격 직후 의료기기에 의존해 강제 호흡을 했을 뿐, 이미 회생 불가능한 상태였다. 일본에서 의사의 최종 사망선고는 가족의 동의하에서만 가능하다. 아베의 부인 아키에 여사가 병원에 도착한 지 10분 만에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지난 7월 8일 오후 5시3분이었다. 피격 사건이 터진 오전 11시32분부터 5시간31분 동안 아베의 심폐정지 상태가 지속된 셈이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이 5시간31분 동안 지속된 일본 열도 내 ‘공기’였다. TV 생중계를 지켜봤지만 이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한 일본인 99%가 아베의 ‘쾌유’를 기원했다. 피격 사건을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 분노하면서, 아베가 다시 연설에 나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한 일본인들이 많았다.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심폐정지’ 아베를 대하는 일본인의 자세, 아니 결의로 느껴졌다.
‘이를 악문’ 기시다
아베 사망이 최종 선언되자 일본 전역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물을 보이지는 않는다. 예외 없이 눈이 퉁퉁 부어 있지만 소리 죽여 가슴을 달래고 있다. 한·일 간 감정 표현의 차이지만 눈물과 울음 소리가 넘칠수록 솔직하고 자연스럽다고 평가하는 곳이 한국이다. 일본은 정반대다. 공식석상에서는 물론, 평소에도 눈물을 터부시한다. 슬픈 분위기를 이용해 동정을 받으려는 싸구려 연출 정도로 풀이한다. 눈물을 참으며 감정을 통제하는 모습을 미덕으로 여긴다.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흐를 경우, 아무 말 없이 뒤돌아 앉아 혼자서 삭힌다.
7월 8일 아베 피격 당일, 일본 총리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는 기자회견을 두 번 가졌다. 심폐정지 때와 사망 선고 직후다. 기자회견에 나선 기시다 얼굴을 보면 눈 주변 전체가 부어 있다. 눈동자 속에서 슬픔이 터져나올 듯하지만 역시 눈물은 없다. ‘이를 악문다’는 말은 원래 일본어(‘歯を食いしばる’)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슬픔, 고통, 시련을 극복하려는 모습을 의미한다. 기시다는 기자회견 도중, 실제 이를 악무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줬다.
아베 사망 후 일본 전역의 조문 열기는 상상 이상이다. 피격 현장은 물론, 아베와 관련된 거의 모든 곳에서 조문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남녀노소 구별도 없다. 필자가 보기에 33년 전인 1989년 1월 7일 쇼와 천황(昭和天皇) 조문 당시 분위기에 준할 정도다. 일본은 지금 바이러스 BA-5 확산으로 다시 방역 비상사태에 접어들고 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을 피하는 분위기가 이미 시작됐다. 그러나 전국에 세워진 아베 조문 분향소로 향하는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지난 7월 12일 도쿄에서 열린 고별식 중계를 보면 조문객이 수백 미터 이어져 있다. 아베에 대한 개인적 기억들이 조문객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한 번 더 총리에 오를 위대한 정치가라 생각했다” “선거유세 때 항상 자기의 명함을 주변에 돌렸다. 사기 사건에 악용될 수 있는데도 악수를 하면서 자기 이름이 새겨진 명함을 하나씩 나눠줬다” “아베는 일본과 일본인 그리고 세계평화를 사랑한 정치가였다”….
아베를 추모하는 목소리 가운데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북한에 납치된 요코타 메구미(横田めぐみ)의 86세 어머니가 남긴 메시지다. “아베 총리는 납치문제를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고 싶다는 얘기를 (나에게) 항상 들려줬다. (그 결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납치문제에 관한) 협력을 얻어낼 수 있었다.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다.”
한국 내 아베의 이미지는 ‘극우’라는 단어 하나로 집약되는 듯하다. 아베의 가계(家系)를 태평양전쟁 기간 중 전범으로 연결하면서 군사대국화로 치닫는 극우파 선봉에 아베가 서 있다고 이해한다. 부분적으로 옳지만, 전부는 아니다. 특히 한국·중국 이외의 나라에서 통하는 아베의 이미지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
3188일 집권 중 타임 표지에 4번 등장
아베는 일본뿐만 아니라 국제정치 무대에서의 영향력이 남달랐다. 국제 무대에서의 힘자랑을 기준으로 한다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단연 최고 영향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협상·중재·비전에 주목하는 국제 무대의 외교력을 기준으로 하면 아베가 월등히 앞선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 톱에 들어갈 정도의 인물로 평가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사후(死後) 아베를 대하는 세계의 반응을 보면 그 같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글을 쓰는 순간,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에 차려진 아베 분향소에 들렀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베트남 응우옌 쑤언 푹 국가주석을 비롯한 20여명의 세계 정상들이 윤 대통령 이전에 ‘이미’ 현지 대사관의 아베 조문 분향소에 들렀다. 윤 대통령은 조문에 앞서 위로 메시지를 일본에 보냈다. 그러나 한국 대통령에 앞서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먼저’ 위로 메시지를 일본에 띄웠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의장 주도하에 아베 추모 묵념을 회원국과 함께 거행했다.
반일(反日)에 익숙한 한국 입장에서 보면 ‘극우’ 아베에 대한 전 세계의 추모 열기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7월 12일 자 시사잡지 타임(Time.com)은 글로벌판 표지로 아베의 전신 사진을 올렸다. 이번까지 포함하면 아베는 타임 글로벌판 표지에 전부 4번 올랐다. 21세기 아시아 지도자 가운데 가장 많다. 한국의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이 타임 표지에 올랐다는 홍보성 기사가 가끔 나오지만 글로벌판이 아닌 아시아 한정판 인터뷰 기사에 불과하다. 지역 뉴스라는 말이다. 물론 20세기에 타임 글로벌판 표지에 무려 5번이나 오른 인물도 있다. 82세에 세상을 뜬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국가주석이 주인공이다.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 이후 1976년까지 무려 55년간 중국을 지배한 인물이다. 타임 글로벌판 표지에 오른 횟수로 3188일 집권한 아베와 2만여일 독재자로 군림한 마오쩌둥의 국제적 위상을 견주어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베 레거시’ 쿼드와 황화론
아베는 왜 세계적 정치가 대열에 오르게 됐을까? 1963년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암살 사건에서 보듯, 극적으로 저세상으로 갔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국내정치만이 아니라 국제정치에서의 ‘아베 레거시(Legacy·유산)’를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층 본격화되고 있지만 이른바 ‘가치관 외교’는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를 하나로 묶는 원칙이 되고 있다. 언제부턴가 글로벌 뉴스를 통해 거의 매일 접하는 말이 있다. ‘자유·인권·법치·민주주의에 기초한 동일한 가치관 공유’란 말이다. 이것이 바로 아베가 창조해낸 ‘21세기 외교 수사’에 해당한다. 서방에서 원래부터 존재하던 말이지만, 쿼드(Quad·미국, 일본, 호주, 인도의 안보 협의체)가 본격 가동하면서 핵심원칙으로 재부상한다.
쿼드는 아베가 주도해서 만들어낸 안보협의체다. 원래 미국이 무심하게 대했지만, 아베가 직접 나서 인도를 끌어들이면서 갑자기 국제 무대에 핵심 키워드로 부상했다. 인도는 원래 비동맹을 원칙으로 하는 나라다. 미국 중심의 안보체제를 불신하던 나라지만 아베의 설득 끝에 쿼드에 참가했다. 인도 역시 ‘자유·인권·법치·민주주의에 기초한 나라’라는 점이 주목받으면서 쿼드가 제 궤도에 오르게 된 셈이다.
중국을 겨냥한 이른바 ‘황화론(黃禍論)’은 국제 무대 관점에서 본 ‘아베 레거시’의 핵심이다. 전 세계가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에 만족하던 시기에 아베 혼자 중국 경계령에 나섰다. 일본은 이미 2012년 시진핑이 최고 실력자에 오르는 순간 중국의 변화를 감지했다. 중국이 힘자랑을 하는 이른바 ‘깡패국가’로 나서면서 홍콩은 물론 대만을 제압한 뒤, 주변국과 태평양에까지 무력 진출할 것으로 내다봤다. 반중 전선을 본격화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하기도 전인 2013년, 아베의 황화론 경고가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중국 내 일본 기업의 투자패턴이 갑자기 바뀐 것도 아베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기업의 중국 탈출이 시작되고, 일본 핵심기술의 중국 이전과 수출이 급격히 축소된다. 놀랍게도 당시 한국은 일본과 정반대 정책으로 나간다. 중국과의 밀월관계를 전 세계에 과시하면서 투자도 한층 더 늘린 것이다.
2014년 상황이지만, 한국 언론 대부분이 ‘아베=박근혜 대통령 스토커’라고 비하한 적이 있었다. 당시 아베는 쿼드의 전신인 ‘안보 다이아몬드 협력체’를 구상하고 있었다. 중국 황화론에 대비한 집단안보기구다. 다이아몬드 협력체는 현재의 쿼드 4개국에다 한국을 포함시키는 다자간 안보협력을 골자로 한다. 4개국의 쿼드가 아니라 5개국을 의미하는 ‘퀸퀘(Quinque)’가 원래 구상이었다. 아베는 이 새로운 안보협력체 구성과 관련해 한·일 정상회담을 요청했다. 황화론에 관한 일본 측 생각을 전하고, 미국에 아시아판 안보협력체를 공식 제의하기 위한 사전포석이라 볼 수 있다. 한·일이 하나로 뭉친 뒤 미국·인도·호주로 확산시키려던 것이 아베의 당초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종군위안부 문제를 이유로 아베를 노골적으로 멀리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중재에 나서면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를 하나로 엮으려 했지만, 결과는 ‘스토커 아베’란 기묘한 비난으로 끝났다. 결국 아베는 인도를 먼저 끌어들여 미국·호주와 함께 4개국 안보협의체 쿼드로 방향을 튼다. 한국 스스로 원해서 아시아 집단안보체제에서 멀어진 것이다.
돌이켜보면 8년 전, 아니 문재인 정권 때까지만 해도 ‘중국=21세기 프랑켄슈타인’이란 생각 자체가 없었다. 홍콩의 반중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뒤, 대만까지 삼키려는 상황인데도 ‘설마’로 버틴 나라가 한국이다. 뒤늦게 윤석열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쿼드 참가를 적극 요청하고 나선 상태다. 미국은 ‘환영한다’는 말만 던질 뿐 구체적인 협력방안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만, 쿼드에서 제외될 경우 혼자서 중국에 맞서야 할지 모른다. 2015년 9월, 한국 대통령은 중국 천안문광장에 올라 전 세계 독재자들과 악수를 나눴다. 7년 전 남긴 오만과 과오는 앞으로 한국이 풀어나가야 할 무거운 멍에로 남아 있다.
반일 외교는 좌만이 아니라 우성향 한국 정부도 즐기는 만병통치약이다. ‘독도는 우리 땅’을 외치는 순간, 지지율 10%가 오를 수 있다. 밖에서는 ‘자유·인권·법치·민주주의’에 기초한 반중전선이 구체화되고 있지만, 안에서는 만병통치약인 반일감정에 매달린다. 상식이지만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울면서 과거사를 하소연하는 것은 한국에서나 통하는 세계관이다. 한국에서는 ‘아베=극우, 스토커’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세계 무대에서는 ‘아베=국제정치를 선도한 시대정신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아베 사후에 나타난 국제사회의 반응이 그 증거다.
새로 등장한 시대정신 ‘황금 3년’
국제사회에 무시 못 할 레거시를 남긴 아베 사후, 정작 일본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필자는 앞으로 일본 정치와 관련해 자주 들을 말이 ‘황금 3년(黄金の三年)’이라고 생각한다. 약 두 달 전부터 간헐적으로 일본 언론에 등장한 말이다. 처음에는 일부에서나 통하는 기대와 희망이 섞인 ‘반짝’ 유행어 정도로 취급됐다. 하지만 7월 10일 저녁 7시 이후 일본 신문·방송을 비롯해 일본인 모두가 ‘시대정신’의 상징어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7월 10일은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날이다. 아베가 숨지고 정확히 50시간 정도 흐른 뒤다. 당시 선거 승리가 확정된 뒤 자민당 선거대책중앙본부는 승리의 함성이 아니라 눈물과 슬픔으로 뒤덮였다. 각 지역구에서 승리한 자민당 국회의원들은 아베 영정사진 앞에서 승리 보고회를 갖기도 했다. 선거로 지친 탓도 있겠지만, 아베 영정 앞에서 실신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황금 3년’은 현재의 중의원 임기 종료 시기인 2025년 말까지를 의미한다. 일본 선거 일정에 따르면, 그때까지는 임기 종료에 따른 선거가 없다. 중간에 국회를 해산하지 않는 한, 국회의원 과반수 이상의 자리를 차지한 자민당 파워가 3년간 지속될 수 있다. 그러나 황금 3년은 단순히 2025년 총선까지의 물리적 시간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현재 추진 중인 수많은 자민당 정책들을 국가 방침으로 결정할 시간이란 의미가 더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집권’ 3년이 아닌 ‘황금’ 3년이란 단어가 붙는다. 기시다를 앞세운 3년간의 ‘안정된’ 정권이 펼칠 ‘일본의 근본적인 변화’가 황금 3년 속에 녹아 있는 진짜 의미다.
누가 뭐래도 아베는 ‘황금 3년’을 만들어낸 최대의 공헌자다. 7월 10일 참의원 선거를 자민당 압승으로 만든 주인공이 아베이기 때문이다. 선거 이틀 전 사망했다는 점에서 동정표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민당 압승은 선거 이전부터 예상됐다. 기시다와 여당인 자민당에 대한 일본 국민의 지지율은 선진국 가운데 최상위다.
일본 정치권에서 ‘아베 1강’은 아베의 정치력을 한마디로 압축한 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생전의 아베는 일본 정치사에서 최장 총리로 기록된 정치인이었다. 선거가 닥치면 전국 격전지에 불려나간 ‘선거의 간판’이 아베였다. 가장 많은 청중을 동원하는 자민당 정치가가 바로 아베였던 것이다. 2017년 10월 중의원 선거 당시 도쿄 긴자(銀座)에서 아베의 선거 지원 유세를 접한 적이 있다. 일단 사람들이 아베 얼굴을 보기 위해 엄청나게 몰려든다. 아베 연설은 짧고도 분명한 메시지로 이뤄져 있다. 대략 1분에 한 번씩 청중들의 웃음을 유도하는 유머도 ‘반드시’ 들어가 있다. 정열적이면서도 긴장감이 도는, 그러나 웃음과 재미로 채워진 매력적인 유세현장으로 기억돼 있다.
기시다와 아베의 관계
‘아베가 없는 일본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베 사망 후 현재 일본 곳곳에서 들을 수 있는 비원(悲願)이다. 아베를 잇는 기시다는 그 같은 물음에 답해야 할 첫 번째 정치가일 듯하다. 기시다는 1993년 아베와 함께 자민당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른바 정치 동기생이다. 두 사람은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족의원(族議員)이란 공통점도 갖고 있다. 경쟁관계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두 사람은 아주 친했다. 아베와 기시다는 국회의원 재직기간 중 한 번도 자민당을 이탈하지 않은 정치가로도 유명하다. 당선을 목적으로 당을 옮기며 돌아다닌 철새 정치가와 다른, 자민당의 본류이자 정통파 정치가임을 자부한다. 아베는 지난해 11월 출범한 기시다 내각의 킹메이커 역할을 했다. 94명에 달하는 아베파(派)의 지지를 보내면서 총리 기시다는 물론 내각과 자민당 요직 상당수가 선출되는 데 입김을 행사했다. 황금 3년이 아베 1강 레거시의 연장선에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아베가 사라진 상황에서 과연 기시다의 리더십만으로 황금 3년에 어울릴 새로운 레거시를 창조해낼 수 있을까? 답은 기시다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자민당에 달려 있다. 아베 개인의 리더십에 의해 창조된 아베 1강과 같은 기시다 1강이 황금 3년에 당장 나타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시다가 아니라 자민당과 94명의 아베파가 황금 3년의 주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긴다고 했던가? 생전의 아베 1강만이 아니라 피격 후 자민당에 드리워진 아베의 영향력이 황금 3년 내내 펼쳐질 전망이다.
황금 3년의 기시다, 아니 자민당 레거시의 핵심은 무엇이 될까? 어떤 국가 정책들이 황금 3년에 걸쳐 정리·정돈될 것인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국 입장에서 보면 크게 두 가지 핵심사안이 떠오른다. 첫째 헌법 개정이다. 헌법 개정은 아베가 집권 초기부터 줄기차게 주장해온 국정 제1과제이기도 하다. 중국 황화론과 러시아·북한 같은 힘자랑 국가에 맞설 군사적·제도적 장치로서의 헌법 개정이다. 일본 국민들도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북한 핵무기는 물론, 센카쿠열도(尖閣列島) 주변을 거의 매일 드나드는 중국 전함을 보면서 헌법 개정에 대한 국민 지지율이 이미 60%대에 접어든 상태다. 그동안 헌법 개정에 반대하던 단카이세대(團塊世代)는 이미 80대의 고령층에 접어들고 있다. 구체적인 헌법 개정 문항을 묻는 일부 여론조사에서 결과가 조금씩 다르게 나오긴 하지만 대세는 헌법 개정이다.
헌법 개정과 글로벌 동맹 구축이 핵심
기시다는 아베 장례를 마친 지난 7월 12일 저녁, 헌법 개정을 빠른 시일 내에 추진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자위대의 헌법 명기를 포함한 이른바 ‘개헌 4항목’이 논의의 중심이 될 것임을 예고했다. 이 개헌 4항목은 아베 전 총리가 건재하던 2018년 3월 자민당 대회에서 발표된 ‘개헌 조문 이미지 및 시안’이다. 헌법 초안을 만들기 위한 기초에 가까운 내용으로 △헌법에 자위대 존재 규정 명기 △자연재해 등 긴급사태 대응 △참의원 합구 해소(각 현별로 최소 1명 참의원 선출 규정) △평생교육 등 교육의 충실화 추구가 구체적 내용이다. 물론 이 가운데 핵심은 헌법에 자위대의 존재 규정을 명기하는 것이다.
‘황금 3년’ 일본이 추구할 두 번째 과제는 군사와 경제를 아우르는 서방과의 동맹구축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앵글로색슨, 게르만, 라틴을 연결하는 ‘인류 초유의 전방위 글로벌 동맹관계’가 황금 3년의 핵심과제가 될 전망이다. 길게 보면 일본은 태평양전쟁 이전만 해도 미국·영국이 주도하는 앵글로색슨 국가들에 맞섰다. 게르만의 독일과 라틴의 이탈리아와 동맹을 구축해 대응했다. 결과는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전후에는 방향을 틀어 친(親)앵글로색슨 동맹에 국력을 집중해 왔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중국이 부상하면서 앵글로색슨 동맹 하나만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가 독일,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 나토와의 동맹강화다. 2022년 벌어지는 현실이지만 정경분리 시대는 이미 끝났다. ‘군사동맹=경제 블록’이라는 정경일체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의 상식이다. 황금 3년은 기존의 앵글로색슨 동맹을 넘어, 유럽으로 동맹을 확산, 심화시키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미 시작됐지만, 유럽과의 군사훈련이나 합동작전이 일상화될 전망이다.
헌법 개정과 아베가 주도한 국민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예산 2% 이상 확보는 전방위 글로벌 동맹관계 구축을 위한 전제조건에 해당한다. 주목할 부분은 일본의 전방위 동맹관계를 대하는 아시아 국가들의 반응이다. 과거 일상적으로 되풀이됐던 ‘일본=군국주의 침략자’로 비난하는 목소리가 사그라들고 있다. 중국의 힘자랑과 함께 황화론을 실감하면서 거꾸로 일본을 구원투수로 보는 흐름이 주변 국가들에 자리 잡아가고 있다. 과장하자면, 일본의 헌법 개정과 군사대국화를 오히려 원하는 여론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외교와 국방은 서로를 보충하는 존재다. 하나만 실패해도 둘 다 무너진다.”
케네디 전 미 대통령이 남긴 명언이다. 한참 늦었지만, 일본에 대한 윤 대통령의 적극 외교는 너무도 당연하고 시대정신에도 어울리는 결단이다. 앞으로 전개될 일본 황금 3년의 결과는 한국에 곧바로 들이닥칠 것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일본이 급변할 때 한반도가 가장 먼저 영향권에 들어간다. 과연 어떤 결과가 한반도에 상륙할지는 한국 외교의 역량에 달려 있다. 우물 안에서 ‘반일’을 외쳐봤자 80여년 전 흑백필름 시대 기억에 그칠 뿐이다. “대화를 공포 속에서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대화하는 것 자체를 공포로 받아들이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케네디가 남긴 또 다른 명언이자 경구다. 한·일 외교를 한층 적극적으로 펼쳐야 할 이유이자 근거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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