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먹거리 문화

‘100점 만점 여섯 번’ 내파밸리 와이너리, 정용진이 3000억 들여 산 이유

‘100점 만점 여섯 번’ 내파밸리 와이너리, 정용진이 3000억 들여 산 이유

[아무튼, 주말]
신세계, 컬트와인 ‘셰이퍼’ 인수
투자·위신·애정이 소유욕 자극

입력 2022.02.26 03:00
 
 
신세계가 3000억원에 인수한 미국 내파밸리 '셰이퍼 빈야드'. /셰이퍼 공식 홈페이지

신세계그룹이 미국 내파밸리 와이너리 ‘셰이퍼 빈야드(Shafer Vineyards)’를 2억5000만달러(약 3000억원)에 인수했다고 지난 16일 밝혔다. 신세계의 셰이퍼 인수는 국내 주류 업계뿐 아니라 전 세계 와인 업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만큼 셰이퍼가 세계적으로 위상이 높은 와이너리이기 때문이다.

셰이퍼는 내파밸리를 오늘날과 같은 미국 대표 와인 산지로 자리매김시킨 와이너리로 꼽힌다. 출판업에 종사하던 고(故) 존 셰이퍼는 1972년 오래된 와이너리를 사들여 셰이퍼를 창업했다. 그는 대학에서 와인 양조를 전공한 아들 더그 셰이퍼 현 대표와 1978년 빚은 첫 와인을 1981년 선보였다. 셰이퍼 와인은 시음회에서 호평을 받았다. 말 한마디로 와인 시장을 좌지우지하던 미국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로부터 “경이롭다. 카베르네 소비뇽(포도 품종) 와인이 다다를 수 있는 최상의 맛”이란 극찬과 함께 한 번도 힘든 100점 만점을 여섯 차례나 받았다.

컬트 와인(cult wine) 반열에도 올랐다. 컬트 와인이란 놀랄 만한 맛과 구하기 힘들 만큼 적은 생산량으로 열광적인 추종자를 거느린 와인을 뜻한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국가들처럼 공식적인 등급이 없는 미국에서 컬트 와인은 최상급 와인과 동의어로 통하기도 한다.

셰이퍼에서 생산하는 최상급 와인 '힐사이드 셀렉트 카베르네 소비뇽'. /셰이퍼 공식 홈페이지

셰이퍼 와인은 풍부하고 농축된 과일·초콜릿 풍미와 비단처럼 매끄러운 탄닌에도 불구하고 장기 숙성이 가능한 견고함을 겸비해 ‘벨벳 장갑을 낀 강철 주먹’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셰이퍼에서 생산하는 최상급 와인 ‘힐사이드 셀렉트 카베르네 소비뇽’은 연도별로 차이가 있지만 병당 80만원을 호가한다. 국내에는 드라마 ‘펜트하우스’ 와인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소프라노 천서진(김소연 역)이 마신 와인이 ‘셰이퍼 릴렌트리스’였다.

이번 인수에 대해 와인 업계에서는 “잘 샀다”는 긍정적 평가가 지배적이다. 와인 전문가 A씨는 “와이너리가 투자처로 떠오르면서 프랑스 부르고뉴·보르도나 내파밸리처럼 유명 와인 산지 포도밭 가격이 급격히 오르고 있다”며 “셰이퍼 같은 컬트 또는 유명 와이너리는 돈이 있어도 사기 어렵다”고 했다. 신세계 측에서도 “프리미엄 와이너리 매물은 희소성이 높으며, 특히 내파밸리는 과거 연평균(2014~2020년) 9%의 부동산 가격 상승 추세를 보이고 있어 향후 지속적으로 가치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며 부동산 가치를 고려한 투자라고 설명했다.

돈 주고도 사기 힘든 컬트 와이너리를 신세계는 어떻게 인수할 수 있었을까. 내파밸리 와인을 주로 취급하는 와인 수입 업체 대표 B씨는 “최근 내파 와이너리 2세들이 상속세 등 문제로 와이너리를 시장에 내놓은 곳들이 몇 있다”고 했다. 1960~1970년대 내파밸리에 와이너리를 세운 창업자들의 은퇴와 사모펀드·기업·개인 자산가들이 대체 투자처로 와이너리에 갖는 관심이 맞물리며 일부 와이너리가 매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신세계의 기존 와인 사업과의 시너지를 기대했다고 보기도 한다. 와인 수입(신세계 L&B)과 유통(이마트)에 이어 생산까지 직접 하면서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국내 와인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와인 전문가 C씨는 “셰이퍼는 워낙 수량이 적은 데다가, 신세계는 막강한 유통 파워로 세계 어떤 와인이건 쉽게 구해다 팔 수 있는데 골치 아프게 와인을 직접 생산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했다.

뉴욕타임스는 “와이너리를 구매할 때는 여러 목적이 있다”며 그중 하나로 위신(prestige)를 꼽았다. 이번 거래는 정용진 부회장이 주도했다고 알려졌다. 와인 유통 업체 대표 D씨는 “아무리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재벌이라도 해외 나가면 누군지 모르지만, 와이너리 그것도 유명 와이너리 소유주라고 하면 대번에 보는 눈이 달라진다”며 “이런 점도 와인 애호가로 소문난 정 부회장이 고려하지 않았을까 싶다”고 했다. 와인 칼럼니스트 E씨는 “와인 메이커라고 하면 단순히 부자가 아닌 문화적 소양을 갖춘 세련된 인물로 보인다는 점이 와이너리 소유욕을 자극하는 듯하다”고 했다.

와이너리는 오래전부터 신분 상승과 위상 과시의 수단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9세기 유럽 최대 금융 세력으로 등극했지만 유대인이라는 태생 때문에 상류사회 진출이 힘들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너새니엘 로스차일드는 당시 프랑스 귀족들처럼 자신의 와인으로 손님을 대접하려고 1853년 프랑스 보르도 ‘샤토 브란 무통’을 사들여 ‘샤토 무통 로칠드’로 이름을 바꿨다. 너새니엘의 삼촌 제임스도 1868년 ‘샤토 라피트’를 매입해 ‘샤토 라피트 로칠드’로 개명했다. 두 와인은 지금까지 프랑스를 대표하는 최고급 와인이다.

한편 더그 셰이퍼 대표는 장기 충성 고객들에게 보낸 성명에서 “나와 와인 메이커 등 핵심 인력은 그대로 남아 품질에 집중하는 기존 원칙과 방식을 고수할 것”이라며 “(이번 매각으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도할 시간과 여유를 갖게 되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