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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 문화

폭군 광해군 기다렸다 수저 들 정도…정승 자리 뒤흔든 별미 [백종원의사계MDI]

폭군 광해군 기다렸다 수저 들 정도…정승 자리 뒤흔든 별미 [백종원의사계MDI]

중앙일보

입력 2022.02.19 07:30

업데이트 2022.02.19 09:28

광해군 때 정승의 자리를 뒤흔든 별미는?
강원도의 햇더덕, 고추장과 삼겹살을 만나다

티빙 '백종원의 사계' 더덕편. 인터넷 캡처

‘백종원의 사계 MDI’는 티빙(Tving) 오리지날 콘텐트인 ‘백종원의 사계’ 제작진이 방송에서 못다 한 상세한 이야기(MDI·More Detailed Information)를 풀어놓는 연재물입니다.

어린 시절, 더덕을 처음 봤을 때 ‘굉장히 큰 인삼인가’하고 생각했다. 뭔가 살집이 있는 뿌리 식물이라고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삼이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더덕과 인삼은 누가 봐도 닮았는데 더덕에 비해 인삼이 수백 배 비쌌으니 그다음에 일어날 일은 누가 봐도 불 보듯 뻔했다. 『해동역사』에는 한국의 가장 오랜 특산물 중 하나인 인삼을 설명하면서, 시중에 자주 등장하는 가짜 인삼의 정체로 사삼(沙蔘), 제니(薺苨), 길경(桔梗)을 꼽았다. 이 세 식물은 바로 더덕, 모싯대, 그리고 도라지다. 모두 초롱꽃과의 식물들로, 뿌리가 통통하게 자라고 쓴맛이 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인삼으로 속여 파는 경우들이 있었던 것 같다. 옛날 신문을 뒤져 보면 20세기에도 더덕을 인삼으로 속여 팔려다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 보인다.

우리나라 각 지역의 사계절 풍광과 제철 식재료를 함께 소개하는 '백종원의 사계'는 티빙(Tving)에서 볼 수 있다. 인터넷 캡처

티빙 '백종원의 사계' 더덕편. 인터넷 캡처

(사삼은 엄밀히 말하면 더덕이 아니라 같은 초롱꽃과 약재인 잔대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런 구분은 한의학 전문가들 사이의 이야기고, 대부분의 기록에 남아 있는 사삼은 대개 더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동의보감』에도 사삼은 우리말로 더덕을 가리킨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더덕도 오래전부터 약재로 사용됐고, 옛날 어른들은 ‘더덕이 100년 묵으면 산삼보다 좋은 영약’이라고 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더덕을 본 적이 없어 약효에 대해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맛으로 따지면 절대 산삼은 더덕을 따를 수 없는 게 분명하다. 더덕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 중 하나인 서긍의『고려도경』에서는 “관아에서 늘 반찬으로 나오는 나물이며, 약으로 쓰이는 것은 아닌 듯하다”고 했고,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 때 기록을 보면 맛있는 더덕을 이용해 권력에 아부한 신하들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당시 광해군은 폭군답게 입맛도 꽤 까다로웠던 모양이다. 광해군 11년 기미(1619) 3월 5일의 기록을 보면 “이충은 수시로 진기한 음식을 해서 왕에게 바쳤는데, 왕은 반드시 이충의 집에서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 수저를 들곤 했다”고 되어 있다. 한편 한효순의 집안은 더덕을 이용해 꿀떡을 만들었는데 이 또한 임금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티빙 '백종원의 사계' 더덕편. 인터넷 캡처

그러다 보니 당시 항간에서는 ‘더덕 각로(閣老, 내각의 원로, 즉 고관이라는 뜻) 세도가 처음에 중하더니/ 잡채 상서 세력은 당할 자 없구나’ 라는 시가 유행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더덕 각로는 한효순, 잡채 상서는 이충을 말한다. 두 사람은 각각 좌의정과 우찬성(죽은 뒤 우의정에 추증)에 오르는 등 권세를 누렸는데,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실은 이게 다 음식으로 광해군에게 아부한 덕분이었다고 비웃은 것이다.

이렇듯 최고위 관직을 좌지우지했던 마성의 별미 더덕. 본래 1년 내내 유통되는 식재료지만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가 수확철이고, 저장한 더덕보다는 갓 캐낸 것이 아무래도 향과 맛이 더 뛰어나다는 게 중론이다. 그래서 ‘백종원의 사계’는 겨울 별미로 그 더덕을 먹으러 강원도 정선으로 향했다.

더덕은 날로 씹어 먹어도 살짝 쌉쌀한 맛에 비해 단맛이 월등하지만, 양념을 하면 특유의 달콤한 맛이 더 살아난다. 두들긴 뒤 무쳐서 양념해 나물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껍질째 초간장에 담가 장아찌를 만들어 먹어도 맛있지만, 뭐니뭐니해도 더덕을 이용한 요리의 꽃은 양념구이다. 특히 단백질과 함께 구우면, 냄새만 맡아도 침이 넘어가는 별미다.

티빙 '백종원의 사계' 더덕편. 인터넷 캡처

티빙 '백종원의 사계' 더덕편. 인터넷 캡처

티빙 '백종원의 사계' 더덕편. 인터넷 캡처

더덕구이는 장작불에도, 가스불에도 구울 수 있지만 백종원 대표의 사랑은 연탄불. 지난가을 섭 구이와 오징어 석쇠구이, 얼마 전 양미리구이에 이어 네 번째로 연탄 화덕이 등장했다. 강하지 않으면서도 꾸준한 화력으로 천천히 구워 주는 맛에 비길 것이 없다는 백 대표의 주장. 그러나 연탄불은 처음 불을 붙여서 화력이 정점에 오르기까지 꽤나 긴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가 있다. 종일 연탄을 갈며 일정한 화력을 유지하다가 때때로 그 위에 음식 재료를 얹어 익히는 시스템이라면 큰 문제가 없겠으나, 필요할 때 바로 불을 피워 원하는 화력을 얻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한 가열 도구다. 그래서 생기는 문제는… 잠시 후에.

아무튼 백종원 대표는 더덕 손질을 시작했다. “더덕은 까는 게 준비의 반이야. 옛날 어머니들이 더덕 선물 들어와도 썩 반가워하지 않았던 게 바로 껍질 손질이 귀찮아서거든. 먹는 사람은 좋지만 까는 사람은 고생이지.” 아마도 껍질 손질의 난도를 비교하면 더덕은 채소 중에서 생강 다음쯤 될 듯.

다 까고 나면 두드려야 한다. 더덕의 억센 섬유질을 뭉개 적절한 식감을 유지하면서 양념이 속살까지 배게 하기 위한 과정이다. 이때도 요령은 ‘적당히’. 너무 살살 치면 의미가 없고 너무 세게 치면 더덕이 깨지면서 진액이 빠져나갈 수 있다. 살이 뭉그러지되 조각조각 부서져 나가선 안 된다.

양념장의 배합도 물론 중요한 요소다. 고추장을 베이스로 꿀, 고춧가루, 간장, 다진 마늘, 설탕이 ‘적당량’ 들어가야 한다. 물론 백 대표의 팁인 “좀 달아야 한다”는 여기서도 유효하다. “조금 달아도 된다”가 아니라 “안 달면 맛이 안 난다”다. 지금까지 모든 연탄 구이 요리에서 그랬듯, 이 더덕구이도 양념장의 상태에서 꽤 달다고 느껴져야 구워진 다음에 심심하지 않은 맛이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결과물을 먹어 본 경험으로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 빻아진 더덕에 양념장을 투입하고 참기름 두어 바퀴를 둘러 향을 입힌다. 그리고 나면 바로 석쇠 사이에서 익어가는 순서. 연탄불의 화력이 여의치 않아 조개탄과 숯불이 잇달아 등판하는 위기 상황이 있었지만 백종원 대표는 노련했다. 때맞춰 프라이팬과 토치를 동원한 끝에 더덕과 삼겹살의 결합은 행복한 결말을 이뤘다. 삼겹살은 익어가며 더덕에 농후한 기름기를 흘렸고, 잘 양념된 더덕은 삼겹살에 양념과 향을 나눠줬다. 아름다운 한 쌍이 아닐 수 없다.

한입에 넣고 씹으면 맵싸하면서도 달콤한 더덕의 아삭함과 두툼한 삼겹살의 묵직함이 한데 어우러진다. 채즙과 육즙의 절묘한 조화. 고추장 양념과 삼겹살의 조화가 틀릴 수가 없지만 거기에불향 입혀진 더덕을 더하면 세상 아쉬울 것이 없다. 잘 불린 시래기를 된장에 조물조물 버무려 지은 시래기밥에 곁들이면 그야말로 강원도의 겨울을 통째로 먹어치운 느낌이다.

티빙 '백종원의 사계' 더덕편. 인터넷 캡처

정선 깊은 산 속 오두막에서 이렇게 먹고 밖으로 나왔을 때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면 그야말로 겨울 정취가 제대로 살아났으련만 이날은 얼음 같은 비가 내리면서 길은 온통 진창. 문득 이렇게 강원도 산골에서 소주 한 잔에 삼겹살이며 더덕을 구워 먹다가, 소복소복 내리던 눈이 폭설이 내려 길이 차단되고, 한 2박 3일 정도 눈 속에 고립되면 좋겠다는 직장인의 헛된 꿈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