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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행

로마의 기원’이었지만… 이젠 나뒹구는 돌들만

 

[문화] 김병종의 시화기행 게재 일자 : 2021년 11월 02일(火)
‘로마의 기원’이었지만… 이젠 나뒹구는 돌들만

 
김병종의 시화기행 - (94) 로마, 팔라티노 언덕에서

로물루스가 쌍둥이 동생의 피 뿌리고 이룩한 로마
가슴이 강한 자라는 뜻 ‘Ruma’에서 유래

아우구스투스는 아폴로 신전 세우고 번성시켰지만
이젠 궁터에 시간 파편처럼 무너진 벽돌이 애잔

로마를 걷는다. 로마를 걷는 것은 그냥 땅 위를 걷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숨결 위를 걷는 일이다. 시간뿐 아니라 공간 이동을 하며 걷는 일이기도 하다.

로마. 지상에 인간이 세운 도시 중 이토록 불가사의한 곳이 또 있을까.

피의 제국으로 탄생해 성지(聖地)가 된 곳. 기독교의 성지일 뿐 아니라 고전 미술과 건축의 역사가 된 곳. 조그마한 도시로 시작해 정복국가로 유럽의 중심이 됐던 곳, 그리해 허다한 종교인과 유럽 지성인들의 순례지이자 종착지가 된 곳. 도시 전체가 담 없는 박물관인 곳. 나는 그 로마가 태동했다는 팔라티노(Palatino) 언덕을 향해 걷는다. 로마는 거기서부터였단다. 무너진 옛 성벽과 풀 사이에 나뒹구는 돌멩이와 그 돌멩이 위로 부딪치는 햇살과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콜로세움, 포름, 판테온, 개선문. 즐비한 고대문명의 흔적이 오늘의 삶과 함께 있는 곳. 역사와 시간과 문명의 공존. 검투사의 붉은 피와 순교자의 백색 피가 섞여 흐르는 도시.

 

 
김병종 화백이 로마 유적지를 스케치하고 있다.


키 큰 소나무 아래의 철책에서 마치 숯 굽는 가마터 같은 유적지를 내려다본다. 여기저기 무너진 벽돌들은 시간의 파편들 같다. 까마득한 옛날에 늑대 젖을 먹고 자라났다는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이 언덕 위에 나라를 세우기로 했고 팔라티노와 아벤티노(Aventino)라는 두 언덕을 각각 후보지로 정했단다. 하지만 어느 날 동생이 형의 영지인 팔라티노를 탐내 넘어오게 됐고 이에 격분한 형은 동생을 죽인다. 이곳에서도 카인과 아벨 같은 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동생을 죽이고 유일 자가 된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나라를 세우고 자기 이름을 따서 로마(Roma)라고 명명했다는데 이는 에트루리아어로 가슴이 강한 자라는 뜻의 루마(Ruma)’에서 왔단다. ‘가슴이 따뜻한신의 아들 예수 탄생 753년 전의 일이었다. 이 신화와 전설을 한사코 사실로 내세우고 싶었던 것일까. 고대 로마의 중심지인 포로 로마노로 내려가 보면 실제로 로물루스의 집이 있다. 궁전이라기보다는 얼기설기 지은 움막 같은 곳인데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곳을 신전처럼 보살폈다고 전해진다. 무너지거나 뼈대만 남아 있는 포로 로마노는 마치 거대한 묘원 같은데 이 팔라티노 언덕 아래의 터를 옛 로마인들은 천하의 길지(吉地)로 생각했단다. 귀족과 재력가들이 속속 모여들어 저택을 짓기 시작했고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 명성이 계속됐다. 뒹구는 돌, 무너진 집터들이 애잔하다. 이곳이 바로 한때 세계 문명의 중심이었다니 허망한 생각이 든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아폴로 신전을 세우는데 이곳에 자신의 거처와 신전을 함께 짓게 된 것은 자신이 바로 로물루스의 진정한 계승자임을 표방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는 것. 아우구스투스를 이은 2대 황제 티베리우스 또한 아우구스투스의 집 옆에 도무스 티베리나 궁전을 짓게 됨으로써 양치기들의 땅이었던 팔라티노 언덕은 팔라조(Palazzo) 즉 팰리스(Palace)로 환골탈태하게 된다. 하지만 진정한 팰리스의 위용을 드러낸 것은, 형인 10대 황제 티투스 사후 즉위한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였을 것이다. 그는 10년 이상 세월에 걸쳐 총력을 기울여 전무후무한 새 궁전과 거대한 규모의 스타디움(Stadium)이라 불리는 옥외 건물을 짓게 되는데 건축을 완성한 지 5년 후인 96년에 자신의 침실에서 자객의 손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팔라티노에서 몇 장 스케치를 하고 나니 멀리 병풍 같은 건물들에 그늘이 내린다. 사람은 가고 집은 남아 있다. 노는 아이들도 돌아가고 천지는 고요하다. 무너진 고려 궁터 만월대를 돌아보며 지어졌다는 황성 옛터의 구절들이 떠오른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月色)만 고요해/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팔라티노 언덕을 떠나오면서 다시 돌아보니 그 푸른 풀밭 위로는 어스름 저녁 빛이 스며들고 있다. 이제 곧 폐허 위로도 교교한 달빛이 떠오를 것이다.

화가, 가천대 석좌교수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 동상.


팔라티노 언덕은

화려한 왕궁과 신전 있던 언덕
전성기엔 대저택·경기장 밀집

 


로마의 탯자리로 알려져 있는 팔라티노 언덕의 라틴어 명칭은 몬스 팔라티누스(Mons Palatinus).

흔히들 팔라티움(Palatium)이라고 줄여 부른다. 이탈리어로 팔라초(Palazzo), 스페인어로는 팔라치오(Palacio), 프랑스어로는 팔레(Palais)로 불리는데 화려한 대규모의 궁전혹은 황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원래의 의미는 양치기들의 수호여신 팔레스(Palas)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이 수호여신 팔레스의 축제가 열리는 421일에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는 늑대 젖을 먹고 함께 자란 쌍둥이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자기 이름을 딴 로마(Roma)를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테베레강을 의미하는 루몬(Rumon)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팔라티노 언덕은 로마 흥망의 역사와 궤를 함께해 전성기에는 왕궁과 신전들, 경기장, 대형 목욕탕, 대저택이 밀집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