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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어퍼컷' 주역 떠났다…'탈원전 선봉' 산업부 줄사표

'후쿠시마 어퍼컷' 주역 떠났다…'탈원전 선봉' 산업부 줄사표

중앙일보

입력 2021.10.31 08:01

업데이트 2021.10.31 12:02

손해용 기자 

산업통상자원부에서 통상·무역업무를 담당했던 H과장은 지난 18일 공직을 떠나 한 중견기업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강화조치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 대표로 협상에 나섰던 인물이다. 산업부 통상교섭본부 내에서 장래를 촉망받던 ‘에이스’로 꼽히던 그의 퇴직에 산업부 공무원들 사이에서 적잖은 동요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산업부 30·40대 중간 관리자들의 이직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 든든한 신분 보장과 공무원 연금, 해외 공관 근무 등의 혜택을 마다하고 민간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이직하는 곳은 기업·학계·법조계 등 다양하다.

산업통상자원부 전경

31일 윤영석 의원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출범(2017년 5월) 이후 올해 9월까지 산업부를 떠난 부이사관(3급)·서기관(4급) 공무원은 61명으로 집계됐다. 최근만 해도 에너지 기술을 담당했던 P과장이 한 대기업으로 이직했고, 기계·로봇 관련 업무를 총괄했던 또 다른 H과장도 퇴직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일본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 관련 세계무역기구(WTO) 분쟁의 역전승을 이끌며 이른바 '후쿠시마 어퍼컷'의 주역으로 불렸던 K사무관이 이직하는 등 사무관(5급)까지 합치면 30·40대 퇴직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산업부는 문재인 정부의 핵심 과제인 탈원전의 선봉에 선 곳이다. 청와대에서 내려오는 일방적인 업무 지시와 무리한 정책 전환 요구 등이 공직생활의 회의감을 키웠다. 갈수록 책임질 일은 많아지고 실무진으로서의 권한은 사라지고 있다. 여기에 인사 적체에 대한 불만, 고위직에 오를수록 민간 이직이 어려워지는 제약 등이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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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통상자원부 전경

익명을 요구한 한 산업부 관계자는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 추진과정에서 이른바 옛 정권의 에너지 라인이 숙청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봤다”며 “전 정권에서 열심히 일했다는 이유로 옷을 벗거나, 불이익을 받는 선후배들을 보면서 공직 사회가 ‘행정’이 아닌 ‘정치’가 되고 있다는 실망감이 크다”라고 전했다.

조직에 대한 불만도 많다. 월성1호기 조기폐쇄로 검찰 조사와 감사 등을 받는 과정에서 조직 구성원을 보호하지 않았다는 의식이 팽배하다. 또 성과를 낸 직원들이 보상받는 시스템이 아닌 이해하기 힘든 정치적 인사가 잇따르면서 묵묵히 일하던 과장들의 소외감이 커졌다는 게 내부 목소리다.

또 다른 산업부 관계자는 “주로 과장급인 부이사관·서기관은 중앙부처의 중추인데, 산업부 내 과장급의 퇴직이 다른 부처나 과거에 비해 유독 많다”며 “기본적으로 산업부는 시장경제와 기업활동을 중시하는데, 이를 경시하는 현 정부의 정책 기조가 민간 이직을 부추기는 것 같다”라고 귀띔했다.

윤영석 의원은 “한 산업부 최고위급 인사가 정치권 ‘줄대기’를 시도하고, 다른 최고위급 인사는 대내외 ‘갑질’ 언행 논란으로 구성원들의 불만을 일으키는 등 산업부 조직이 와해되는 분위기”라며 “이런 민간 엑소더스는 한국 산업 정책의 연속성을 무너뜨린다”고 지적했다.

세종=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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