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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평론

당파 떠나 ‘민주주의 파괴’ 막을 때다

게재 일자 : 20201209()

 

당파 떠나 민주주의 파괴막을 때다

 

 

이미숙 논설위원

 

                                       트럼프 재선 막은 유권자들

자유 지켜낸 제도적 애국주의

공화당의 합리적 블록도 가세

 

정권 3년 만에 專制政 진입

공수처로 민주독재 더욱 근접

민주·진보 진영도 저지 나서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최근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과의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4년 더 집권하지 못하게 한 것은 미국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했다. 오는 120일 취임할 46대 대통령이 당선 의미로 트럼프 제거를 최우선으로 꼽은 것은 자신의 시대적 소명이 뭔지를 알고 있다는 얘기다. 고령인 데다 결점도 많지만, 유권자들이 그를 선택한 것은 트럼프 퇴출로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파를 초월한 민주주의 수호 의지는 제도적 애국주의(institutional patriotism)라고도 불리는데, 올해 대선에서는 트럼프 시대 뚜렷해진 민주주의 위기 징후로 인해 이 같은 애국심이 발동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공화당의 합리적 보수 세력과 민주당 안팎의 좌파 블록이 바이든을 지지한 것은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애국심 덕분이다. 트럼프 독주가 4년 더 지속될 경우 탈법·편법·위법 국정으로 인해 미국 민주주의 시스템은 파괴되고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주의 국제 질서도 무너져 혼돈의 세계가 됐을 것이다. 미국은 차기 대선까지 최소한 4년간 트럼프식 포퓰리즘의 질주를 제어하며 민주주의를 회생시킬 시간을 번 셈이다.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문재인 정권 출범 37개월 만에 자유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고 있다. 174석을 가진 공룡 여당이 입법 독재의 칼을 휘둘러도 야당은 속수무책이다. 대법관 14명 중 11명이 문 대통령 임명자로 채워진 대법원도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입법부·사법부·행정부 간 견제와 균형이 사라진 상황에서 가뜩이나 강력한 문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공수처까지 쥐고 흔들게 되면 민주주의 제도 파괴를 넘어 전제정(tyranny)으로 갈 것이라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우려는 과장된 게 아니다.

 

문 대통령은 7공수처가 출범하면 한국 민주주의의 새 단계가 열릴 것이라고 호도했는데 그것은 내 편의 부정을 다수의 이름으로 가리기 위한 민주독재일 뿐이다.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 단계로 진입했다는 분석은 지난달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가 개최한 한·미 민주주의 전문가들의 웹 콘퍼런스에서도 제기됐다. 여당이 상호 인내와 제도적 관용을 무시한 채 독주하면 한국 민주주의는 붕괴할 것이란 경고까지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이 차기 대선에서 재집권한다면 한국은 베네수엘라나 헝가리, 폴란드처럼 선출된 독재자가 지배하는 권위주의 국가가 될 수 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선 한국판 제도적 애국주의가 필요한데, 구심점이 돼야 할 국민의힘은 사분오열 상태다. 그렇지만 검찰과 감사원, 법원 등 핵심 기관을 법치주의자 윤석열·최재형·조미연이 지키고, 진중권·김경률·권경애 등 진보 인사들이 친문 세력의 반 법치에 저항하며 야당 역을 하는 것에 희망을 걸어볼 만하다. 민심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이달 초 실시된 차기 대선 관련 갤럽 여론 조사에서 정권 교체론이 정권 유지론보다 3%포인트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오차 범위 내 수치이긴 하지만, 여당과 달리 야당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트럼프 낙선을 위해 바이든에게 표를 던진 미국 대선과 같은 상황이 13개월 후 한국에서도 재현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아돌프 히틀러의 전체주의 진군을 멈춰 세운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그동안의 모든 제도를 제외할 경우, 민주주의는 최악의 통치 체제라고 한 바 있다. 민주주의는 현존하는 최선의 체제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유의지를 갖고 스스로 운명을 결정해 나가는 데 있어 민주주의만 한 제도는 아직 없다. ‘영원한 민주주의자로 불리는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남영동의 모진 고문을 이겨낸 것도 민주주의를 위해서였다. 그의 희생으로 촉발된 국민적 저항이 1987년 민주화를 이뤄냈다.

 

그러나 정권 실세가 된 그의 운동권 동지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헌신하자던 초심을 버린 채 권력에 도취된 독재자처럼 전체주의 길로 가고 있다. 그 폭주를 저지하는 게 오는 309주기를 맞는 김근태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고, 앞세대의 희생 덕분에 선진 민주사회에 살게 된 현세대에게 주어진 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