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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평론

[김창균 칼럼] 소총 세 발에 멈춰선 ‘秋 탱크’, 文은 그래도 느낀 게 없나

2일 징계로 尹 제거 정권 계획
감찰위·법원·법무차관이 제동
권력도 순리 거스르면 힘 못 써
하루 만에 차관 임명한 대통령
秋의 실패 되풀이한다는 뜻
維新이 맞은 최후 안 두려운가

김창균 논설주간

입력 2020.12.03 03:20

 

 

계획대로 풀려 나갔다면 문재인 대통령, 추미애 법무장관, 그리고 정권의 핵심 지지층은 구름 위를 떠다니는 행복감 속에 3일 아침을 맞았을 것이다. 2일로 예정됐던 법무부 징계위가 윤석열 검찰총장 해임을 결정해서 ‘정권의 앓던 이’를 뽑아냈다면 얼마나 개운했겠나. 논란이 됐던 박재동 화백 만평처럼 윤 총장은 목이 잘려 나가고, 추 장관은 “내 부하가 아니라더니, 소원처럼 됐네”라며 비아냥대는 대사를 읊조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권력자들이 머릿속에 그린 시나리오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윤석열 제거 고지를 향해 폭주하던 문재인 정권은 12월 1일 하루 동안 과속방지턱에 세 번 부딪혔다. 법무장관 자문 기구인 감찰위원회가 신호탄이었다. 위원 11명중 7명이 참가한 가운데 “징계 청구, 직무 정지, 수사 의뢰 등 추 장관이 윤 총장에 대해 취한 조치는 모두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당초 추 장관은 감찰위를 건너뛰고 징계위로 직행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외부 위원들의 반발로 징계위 하루 전 감찰위가 열렸다. 추 장관이 취임 후 감찰위 외부 위원 비율을 3분의 2로 늘린 것이 화근으로 작용했다. 검찰 구성원끼리 짬짜미를 못 하게 하려던 의도였는데 오히려 추 장관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법원이 윤 총장 직무 정지 중단 결정을 내린 것이 두 번째였다. 추 장관이 스스로 벌어서 맞은 매였다. 만일 윤 총장에 대한 직무 정지 없이 징계만 청구했다면 법원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징계위에서 해임 결정이 나온뒤 윤 총장이 행정소송을 제기해 본들 1년, 2년 뒤에 나올 판결은 실익이 없다. 그런데도 추 장관은 법원에서 뒤집힐 가능성이 높은 직무 정지까지 함께 밀어붙였다. 판단력 부족이 빚은 자충수라고밖에 달리 해석이 안 된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직무 집행정지 처분에 대한 집행정지 신청 인용 이튿날인 2일 경기 과천 법무부 청사에서 추미애(왼쪽) 법무부 장관이 청사를 나오며 축하 꽃바구니를 살펴보며 같은 날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 업무 복귀한 윤석열 총장을 응원하는 화환과 입간판이 놓여 있다 2020.12.02.뉴시스

고기영 법무부 차관의 사표는 추 장관에게 의외의 일격이었다. 자신이 직접 고른 2인자마저 “총장 징계는 부당하다”고 했으니 “기득권 검사들의 반발”이라고 변명을 대기도 궁색하다. 더구나 고 차관 사퇴로 그가 위원장을 맡기로 예정됐던 징계위는 4일로 미뤄졌다. 무리하고 어설펐던 윤석열 잘라내기라는 비판을 48시간 더 감내하는 것 자체가 고통일 뿐 아니라, 그사이에 동력 자체가 상실될 위험도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는 요즘의 문 정권 행태를 보면서 “아버지의 의원직 제명을 밀어붙였던 유신 정권이 떠올랐다”고 했다. 1979년 10월 4일 유신 정권은 신민당 김영삼 총재 징계 동의안을 국회 법사위와 본회의에서 몰아치기로 처리했다. 경찰 300명이 야당 의원 진입을 막은 가운데 몇 분 단위로 진행한 군사작전이었다. 그때 그 권력의 야만과 무도를 자칭 촛불 정권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짐작도 못 했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수원의 일선 고검장 6명 전원과 전국 지방검찰청, 지청 전체 59곳 평검사들이 빠짐없이 총장 징계가 부당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추 장관 밑에서 검찰국장을 지낸 총장 권한대행마저 “장관님, 한 발만 뒤로 물러나 달라”고 했다. 대통령의 대학 후배인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과 한 줌 충견 검사들을 제외하면 검사 2100명 전원이 추 장관에게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윤석열 참수 작전에 티끌만 한 명분이라도 있었다면 검사들이 이렇게 똘똘 뭉쳐 인사권자에게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2020년 12월 1일은 대한민국 정치 교과서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다. 법과 규정, 상식과 원칙을 깔아뭉개며 돌진하던 추미애 탱크가 법무부 감찰위원, 행정법원 판사, 법무부 차관 같은 소총수들의 저격을 받고 멈춰 서는 것을 보면서 국민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포악한 맹수처럼 날뛰던 절대 권력도 순리(順理)를 거스르자 생쥐처럼 무기력해지는 광경을 생생하게 지켜봤다.

추 장관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던 통수권자는 그래도 느낀 게 없는 모양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 했다. 추가 쓰러진 곳에서 대통령은 가던 길을 계속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우리법연구회 출신 법무차관을 하루 만에 임명한 것도 그런 뜻일 것이다.

김영삼 총재 제명에 반발해 부산과 마산 시민들이 들고일어난 것이 10월 16일 부마 항쟁이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각하, 캄보디아에서도 300만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시위대 100만~200만명 정도를 탱크로 밀어버리는 게 대수입니까”라며 강경 진압을 밀어붙였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이 철권통치의 심장을 멈춰 세운 것은 그로부터 딱 열흘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