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20.12.11 16:30 수정 2020.12.11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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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석 정당은 안 나올 거라는 가정하에 여야가 타협의 정치를 하라고 법을 만들었는데….”
11일 만난 국민의힘 핵심 관계자는 국회선진화법(선진화법)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후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선진화법 입법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던 이 관계자는 “여야 의견이 맞서는 쟁점 법안은 몸싸움 없이 끝까지 타협해 처리하라는 게 입법 취지였다”며 “하지만 지금 이 법을 근거로 거대 여당의 입법 폭주가 진행되는 반면 야당은 속수무책이게 됐다. 국회선진법화의 역설이다”라고 말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지난 10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손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동안 열린민주당 최강욱 대표가 본회의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오종택 기자
대체 무슨 말일까. 여야 난투극으로 지탄받은 18대 국회(2008~2012년)는 총선 뒤 이를 반성하며 마지막 임시국회(2012년 4월)에서 국회법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쳤다. ‘국회선진화법’으로 불린 이 법으로 몸싸움 금지,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 예산안의 본회의 자동부의 등을 도입했다.
다만 예외 규정으로 ‘180석 이상’을 뒀다. 본회의 또는 상임위 재적 의원 5분의 3(180석) 이상이 찬성하면 다른 당이 반대해도 쟁점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태워 강행 처리할 수 있게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4·15 총선으로 여당은 180석 정당(당선 시점 더불어민주당 163석+더불어시민당 17석)이 탄생했고, 이번 정기국회를 통해 그 위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공수처장 후보 추천 과정상에 보장됐던 야당 거부권을 무력화하는 공수처법 개정안은 법사위 안건조정위(8일 오전, 열린민주당 최강욱 의원 협조)→법사위 전체회의(8일 오후)→국회 본회의(10일, 찬성 187명 반대 99명 기권 1명)를 속전속결로 통과했다. 거여는 여기에 ‘3%룰’을 완화한 상법 개정안과 5·18 왜곡처벌법안 등 야당이 반대해 온 법안들도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현장풀) 국민의힘 의원들이 10일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입구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 등과 관련해 열린 본회의에 입장하는 여당 의원들을 향해 "위선정권 막장정치 민주당에 경고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이에 반발한 국민의힘이 국회 본회의장 발언석에서 필리버스터를 하고 있지만, 이 역시 민주당(174석)이 열린민주당 등 군소정당과 탈당·제명자들을 끌어모아 180석을 채우면 24시간 마다 종결시킬 수 있다. 지난 11일 민주당은 갑자기 “야당을 존중하겠다”며 필리버스터를 강제로 종료시키지 않기로 했지만 길어지면 언제든 마음을 바꿀 수 있다. 이에 국민의힘에선 “선진화법이 결과적으로 민주당 독주에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됐다”(정진석), “정말 야당 노릇 해 먹겠나“(권성동) 등의 반응이 나온다.
야당은 선진화법 중 하나인 ‘몸싸움 방지법’으로 인해 과거처럼 회의장을 점거하거나 입구를 막아 의사일정을 지연시킬 수도 없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윤호중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은 지난 8일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법안 강행처리에 대해 야당 의원 항의가 빗발치자 “선진화법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다”고 맞받아치며 진압했다. 실제로 지난해 말 ‘패스트트랙 충돌 사태’로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의원 24명이 이 조항(국회법 166조 1항)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법정형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1일 오전 경기 화성시 LH 임대주택 100만호 기념단지인 동탄 공공임대주택에서 열린 살고 싶은 임대주택 보고회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은 새정치민주연합(당시 야당) 대표였던 2015년 9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되거나 여당이 되면 선진화법을 개정하겠느냐”는 질문에 “선진화법은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합의의 정치를 실현하자는 취지”라고 답했다. 이어 “정부·여당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로 인한 국회 파행과 여야의 극한대립은 국정운영에 더 큰 혼란과 피해를 준다는 국민적 공감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긍정 평가했다. 또 “여야를 불문하고 폭넓은 합의를 이루지 못한 법안을 일방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약속이다. 우리 당은 앞으로도 합의의 정치를 실천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의 5년 여 전 발언은 국민의힘 의원들 사이에 최근 회자되고 있다.
현일훈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타협의 정치' 선진화법 역설...거여 폭주에 날개 달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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