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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14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14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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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0 - 제2회 파리 올림픽 개막

인류가 최초로 전 세계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900년 7월 14일 프랑스

 파리에서 제2회 올림픽이 개최됐다. 메인 스타디움도 없었고 개회식-폐회식도 없었다. 육상 경기장은 블로뉴 숲속,

버려진 경마장을 개조한 곳에서 열렸다. 잡초가 잔뜩 자라 발이 걸려 넘어지는 선수가 속출했다.

미국의 알빈 클렌츠레인은 60m 달리기, 110-200m 허들, 넓이뛰기 등 육상 4개 종목에서 우승한 파리 올림픽의 스타였다. 그러나 그의 손에 4개의 메달이 전달된 것은 폐막 2년 후의 일이었다. 20세기 최초 올림픽인 프랑스 파리 올림픽은

그렇게 어떤 상업주의도 어떤 정치적 의도도 끼어 들 틈 없이, 우정과 만남의 상징으로 열렸다. 20세기 올림픽은 전쟁

갈등 이해를 잠시 잊고 세계를 통합, 지구화로 가는 최초의 계기를 만들었다. 여성이 처음 출전한 것이 파리 올림픽,

흑인이 처음 출전한 것이 4년 뒤인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이었다. 최초의 비 서구권 대회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최초의 아시아권 대회는 1964년 도쿄올림픽이었다.

전쟁터에서 누가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 뛰고 찌르고 던질 수 있느냐를 가르기 위해 시작된 올림픽을 한편으로는

평화의 마당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능력의 한계에 대한 도전의 장으로 만든 것은 20세기적

인류가 마땅히 역사로부터 받아야 할 훈장이다. 

 

2) 1918 - 스웨덴의 영화 감독 베리만(Bergman, Ingmar) 출생
베리만  [Bergman, (Ernst) Ingmar, 1918.7.14~ ]

베리만은 스웨덴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이다. 웁살라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스톡홀름대학교에서

 미술·역사·문학을 공부했다. 일찍부터 연극에 관심을 갖고 각본을 쓰고 연기 및 연출 활동을 했다. 1944년 스벤스크필름인두스트리의 사장 칼 안데르스 뒴림의 의뢰로 집필한 각본 <고통 Hets>이 스웨덴의 유명감독 알프 시외베리가 영화화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자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으로서 본격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가벼운 희극에서부터 심오한 형이상학적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화들을 만들었다. 특히 인간과 신의 관계를 다룬 <제7의 봉인 Det sjunde inseglet>(1956), 노년에 대한 명상과 함께 인간 심리를 깊이 천착한 <산딸기 Smultronstalet>(1957) 등으로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3부작 <유리를 통하여 어렴풋이 Sasom i en spegel>(1961)·<겨울빛 Nattsvardsgasterna>(1962)·<침묵 Tystnaden>(1963)은 신의 존재, 신앙 상실, 사랑의 가능성, 대화 단절 등 심오한

주제들을 탐구한 역작들이다. 그는 작가·감독·제작자로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표현했으며,

총체적 영화제작자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다른 어떤 예술 형식도 영화만큼 일상의 의식을 넘어서서

우리의 감정에 직접 작용하거나 영혼 내면에 깊이 이르지는 못한다."

 

- 잉그마르 베리만

 


3) 1912 - 캐나다의 교육자, 문학비평가 프라이(Frye, Northrop) 출생

프라이 [Frye, (Herman) Northrop, 1912.7.14~1991.1.23]

캐나다의 교육자·문학비평가.

유명한 비평이론서를 저술했다. 프라이는 토론토대학교, 토론토에 있는 에매뉴얼대학, 그리고 옥스퍼드대학교 머턴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1939년부터 빅토리아대학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하여 1952년에 영문학과 학과장이 되었고 이후 학장(1959~67)과 명예총장(1978~)으로 재직했다. 미국 여러 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도 있었다.

1947년에 〈놀라운 대칭:윌리엄 블레이크 연구 Fearful Symmetry:A Study of William Blake〉를 출판했는데,

이 책은 블레이크의 환상적 상징주의에 대한 개괄적이며 해박한 연구서였다. 〈비평의 해부 Anatomy of Criticism〉(1957)에서 다양한 문학비평 양식을 분석했고, 문학에서 전형적인 상징들의 반복되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중의 저서들에서는 엘리엇(1963), 밀턴의 서사시(1965), 셰익스피어의 희극(1965) 및 비극(1967), 영국 낭만주의(1968)를 연구했다. 1970년에 〈엄격한 구조:비평과 사회에 관한 에세이 The Stubborn Structure:Essays on Criticism and Society〉, 1982년 성서에 나타난 신화와 구조를 연구한 〈위대한 법전:성서와 문학 The Great Code:The Bible and Literature〉을 출간했다. 다른 비평물들은 문학에서의 집단적 신화의 존재, 문학적 상징, 장르, 비평의 체계적

분류를 균형 있게 강조하고 있다.


  

                             1)                                       2)                                    3) 

 

1) 1993 - 가야금병창 인간문화재 박귀희(朴貴姬) 사망

박귀희 [朴貴姬, 1921.2.6~1993.7.14]

인간문화재 23호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인 박귀희 여사(72)가 1993년 7월 1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1921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박 여사는 보통학교 시절부터 국악 가락만 나오면 가던 걸음을 멈출 정도로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소녀였다.
결국 박 여사는 보통학교 졸업 후 "국악을 하면 기생이 된다"는 아버지의 만류도 뿌리치고 당시 명창 이화중선이 이끄는 대동가극단에 들어갔다. 16세 때에는 서편제 소리의 박동실 선생, 동편제 소리의 류성준 선생 등 기라성 같은 스승의

문하에서 판소리 다섯마당을 익혔고, 강태홍 오태석 두 선생으로부터 가야금도 배웠다.

남다른 정진으로 그는 19세쯤부터는 국악계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처음엔 가야금 병창보다는 판소리로 이름을 날렸다. 한양창극단에 들어간 이래 20여년 간 판소리에서 1급의 자리를 지켰고 뒤늦게 그의 숨은 가야금 솜씨도 인정받아

1969년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소리와 가야금에 평생을 바친 국악계의 거목 박귀희 여사는 60여년의

국악인생을 통해 가야금병창의 맥을 이으며 우리소리와 가락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일깨워주었다.

 

2) 1933 - 독일에서 나치 당을 제외한 정당이 법으로 금지되다 

나치당 내각 성립

1929년 세계 대공황이 터지고, 독일의 경제는 혼란스러워진다. 히틀러는 이때다 하고 생각하여 국민을 선동한다. 그 말에 넘어간 국민은 히틀러를 지지하게 된다. 자본가와 군도 히틀러를 지지한다. 결국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나치는 의원이 과반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수정당인 독일국가인민당과 연립 내각을 구성한다. 그리고 나치에는 프릭, 괴링, 히틀러만 임명을 한다. 그리고 수상이 된 히틀러는 3월 5일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하고 국회를 해산한다.

일당 독재

히틀러는 정권을 잡고 독재를 하기 시작한다. 히틀러는 나치가 총선거에서 승리하자 전권위임법으로 모든 정당을 해체 시켰고, 바이마르헌법을 페지한다. 그리고 전권위임법을 제국의회에서 통과시킨 뒤 다음날에는 동맹국인 독일국가인민당까지 해체시킨다. 그리고 10월에는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군대를 재정비 하였다.

 

3) 1959 - 한국 최초의 원자로 기공식
국내 첫 원자력 도입
우리나라 원자력의 첫 도입은 국제원자력 기구가 설립되기도 전인 1956년 2월에 한·미원자력협력

협정이 공식 체결되면서 시작됐다.이 후 IAEA가 본격 출범하자 그해 8월8일 IAEA헌장에 서명하고 협약체결과

동시에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원자력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주목해 미국과 원자력에 관한 기술협력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다. 이에 따라 6·25전쟁 이후 빈곤과 무질서 속에서도 원자력법 제정을 비롯해 1959년 한국원자력과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원자력 국가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이 기구들은 원전 타당성 및

부지조사 등 원전도입을 위한 준비 작업을 수행하면서1957년부터는 연구용 원자로 도입도 추진했다.

이어서 미국 정부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계획에 따라 우리 정부에 35만 달러를 무상 원조하기로 해 트리가 마크 2(TRIGA Mark-Ⅱ)와 부속기자재를 72만 달러에 구입할 수 있었다.
1959년 7월 14일에는 이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과 외교사절, 과학기술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원력연구소가 있던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서 역사적인 트리가 마크 2 기공식이 열렸다.
또 1967년에는 원자력원이 원자력청으로 개편됐고, 1960년대 초부터 강조돼온 원자력발전 타당성 조사를 본격 추진함으로써 우리나라도 원자력 발전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돈도 기술도 없던 시절 선진국에서 조차 쉽게 결정하지 못했던 원자력 발전을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박정희 정부가 1960년대 의욕적으로 추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과를 거두면서 전기소비량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1967년 10월 정부는 장기 전력수급계획에서 50만㎾급 원전 2기를 1976년까지 건설하기로 확정하고 경남 고리를 부지로 확정했다.
당시 우리나라 전력수요의 중심지는 서울과 부산, 그리고 대대적인 개발이 진행되던 울산 공업지대였다. 따라서 서울과 가까운 한강 하류, 또는 부산과 울산을 연결하는 동남해안선을 중심으로 원전을 건설해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 이였다.
그러나 기초조사 과정에서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냉전시대에서 휴전선 가까운 곳에 원자력 주요시설을 두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상황을 반전시켜 고리로 결정하게 됐다.
가압경수로인 고리 1호기는 설비용량 58만7천㎾로서 외자 1억7천390만 달러, 내자 717억 4천200만 원 등

총 1천560억 7천300만 원이 투입돼,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최대 규모의 단위사업이었다.
정부는 한전을 통해 미국 웨스팅하우스사를 계약 상대자로 결정했고 석유파동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계획보다

2년이 지난 78년에 준공을 했다.기획취재팀/대구신문 입력시간 : 2008-11-05 09: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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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1 - 한국 여자농구, 최초로 존스컵국제여자농구대회서 우승

월리암 존스컵 국제여자농구대회

레나토 윌리엄 존스(Renato William Jones)를 추모하는 대회입니다.

윌리엄 존스컵 농구대회는 매년 대만의 타이페이에서 개최되는 국제 농구대회로써 국제 농구 연맹(FIBA)의

창설 멤버인 레나토 윌리엄 존스(Renato William Jones)를 추모하는 대회입니다. 이 대회는 1977년에 시작되어

사스가 만연했던 2003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개최되고 있으며 초청대회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레나토 윌리엄 존스는 1906년에 태어나 1981년에 사망하였으며 유럽과 아시아에 농구를 보급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1932년에 국제 농구 연맹 창설을 주도하고 1936년부터 총재를 지냈으며

그동안 농구를 올림픽 종목에 편입시켰습니다. http://ask.nate.com/qna/view.html?n=8399631

 

2) 1968 - 한국의 축구 선수, 감독 황선홍(黃善洪) 출생

황선홍 [黃善洪, 1968.7.14~ ] 

황선홍(黃善洪, 1968년 7월 14일 예산 - )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및 현 지도자이다. 현재 부산 아이파크의

감독직을 맡고 있다.

개요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태어나 서울숭곡초등학교, 용문중학교, 용문고등학교를 거쳐 건국대학교를 졸업했다.

긴 다리와 성씨가 '황'씨인 것, 어려운 가정 형편 덕에 학창 시절 약점이었던 체격을 만회하기 위해 물배라도 채워

 뒤뚱뒤뚱 뛰는 모습에 착안해서 '황새'라는 별명이 붙었다.

축구인 생활

선수 생활

건국대학교를 졸업한 뒤, 1991년 K-리그의 드래프트 제도를 거부하고 바이어 04 레버쿠젠 II (아마추어)에 입단하였다. 첫시즌동안 좋은 활약을 선보이고 그 다음해인 1992년 부퍼탈 SV로 이적하게 되지만, 경기 도중 무릎을 다치는 불의의 부상으로 인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993년 포항 스틸러스에서 K-리그 무대에 데뷔하여, 1995년 팀의 K-리그 준우승 등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98년 J리그의 세레소 오사카로 옮겨 1999년 대한민국 선수로는 유일하게 J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2000년 K-리그의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하였지만, 부상으로 정규 리그에서 뛰지 못한 채, 그 해 샤샤와 맞트레이드 형식으로 J리그의 가시와 레이솔에 임대되어 2002년까지 활약하였다. 2002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계약이 만료되어 무적 상태로 있다가,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하였다.



국가 대표 생활

1988년 12월 6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아시안컵 일본과의 경기에서 A매치 첫 경기를 치른 이후 오랫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활동했다. 때로는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특히, 예선 1차전 폴란드전에서 선제골을 넣어 팀을 승리로 이끌어 월드컵 4강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또한 예선 2차전 미국전에서는 미국 수비수와의 충돌로 이마가 찢어지며 과다출혈을 하였지만,

이후 부상투혼으로 교체될 때 까지 몸을 아끼지 않았다.A매치 통산 103경기에 나서 50골을 기록했다. 특히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의 네팔전(11 대 0승)에서는 무려 여덟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2002년 11월 20일,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브라질전에서 대표팀의 오랜 동료 홍명보와 함께

국가 대표에서 은퇴했다.

황선홍은 대한민국의 선수들 중 3번째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선수이다.

지도자 생활

2003년 은퇴 후, 전남 드래곤즈에서 코치로 활동하였다.

2007년 12월 4일, K-리그의 부산 아이파크의 신임감독으로 취임하며 처음으로 감독을 맡게 되었다.

플레이 스타일

대표팀 A매치 통산 103경기 50골을 넣었을 정도로 가공할 득점력을 선보였고, 빼어난 위치선정 능력과 발군의 헤딩력, 슈팅력 등을 고루 갖추었다. 순간 스피드나 상대 수비수의 덫을 피해가는 능력도 뛰어났다.

폭넓은 활동반경과 시야를 바탕으로 팀 동료를 살려주는 플레이에 능하며 득점감각까지

겸비한 황선홍은 스트라이커가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갖춘 대형 스트라이커였다.



 

3) 1912 - 미국의 가수, 작곡가 거스리(Guthrie, Woody) 출생

거스리 [Guthrie, Woody, 1912.7.14~1967.10.3]

본명은 Woodrow Wilson Guthrie.

미국의 가수·작곡가.

주로 보통사람과 그들의 고뇌를 노래한 그의 많은 곡들은 이제는 고전이 되었다.

15세에 집을 떠나 화물기차를 타고 전국을 여행하면서 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해서 대공황 당시 유랑자와 떠돌이 노동자 숙소에서 환영받는 인물이었다. 고향의 전통에서 따온 노래를 부르고 소외 계층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곡을 써서 노동자와 민중의 정서를 음악으로 나타내는 대변자가 되었다. 〈안녕 So Long(It's Been Good To Know Yuh)〉·〈고달픈 여행 Hard Traveling〉·〈낡은 먼지투성이 길을 걸으며 Blowing Down This Old Dusty Road〉·

〈노조의 시녀 Union Maid〉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에서 영감을 얻은 〈Tom Joad〉같은 노래들은 다른 가수들도 불러 점차 미국 포크송의 고전이 되었다. 뉴욕으로 간 그는 '알마낙 싱어스'(Almanac Singers)에 있는 피트 시거 등과 합류했고,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머천트 마린(Merchant Marine)에 복무했으며

그후 계속 그룹에 남아서 농민과 노동자를 위해 공연했다. 1,000곡이 넘는 그의 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 땅은 당신의 것 This Land Is Your Land〉은 만년에 부른 노래이며 1960년대에 민권운동가들이 즐겨 불렀다.

말년에 뉴욕병원에서 신경계의 퇴행성 질병인 헌팅턴 무도병과 투병하면서 지냈다. 죽기 전부터 이미 민중의 신화적 인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1976년 자서전 〈영광을 위한 도약 Bound for Glory〉(1943)이 영화화되었다.

아들 올로 거스리(1947 태어남)도 포크송 작곡가이자 가수로 크게 성공했고, 또 말년의 아버지 모습을 그린



영화 〈앨리스의 식당 Alice's Restaurant〉(1969)에서 아들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98 - 맥도널드 햄버거의 공동 창업자 딕 맥도널드(McDonald, Richard "Dick" J) 사망

맥도널드 [McDonald, Richard "Dick" J., 1909.2.16~1998.7.14]

딕 맥도날드와 맥 맥도날드 형제가 맥도날드점을 시작한 것은 1940년. 두 사람은 1954년 맥도날드를 본격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한 레이 크록을 첫번째 프랜차이즈 주자로 지정했더랬습니다. 레이 크록은 이듬해인 1955년에

일리노이주에 가게를 차렸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맥도날드사가 공식 출범했습니다.

이후 1959년 시카고에 1백번째 맥도날드점이 문을 열었습니다. 레이 크록은 1961년 맥도날드 형제에게 2백70만

달러에 맥도날드사를 인수습니다. 이후 맥도날드는 급속도로 성장을 거듭, 현재 1백30개 국가에 수만개의

점포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http://blog.joins.com/media/index.asp?uid=sepum&folder=0

- 소파 방정환 탄생 100주년 기념 (1999.11.9. 발행) 

 

1987 - 독립기념관 뜰에 소파 방정환 어록비 건립(계몽사 협찬)

1957년 방정환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소파상'이 제정되었다. 1978년 금관문화훈장 수상하였고, 1980년에는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1983년 어린이날 망우리 묘소에 「소파방정환 선생의 비(碑)」가 세워졌으며,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에

그가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다.  

 

1969 - 축구전쟁 시작, 엘살바도르 공군 육군 온두라스 침공 

축구 전쟁은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간에 벌어진 5일간의 전쟁이다. 축구전쟁은 1969년 1970년 FIFA 월드컵 예선전에서 붙은 시비가 명분이 되었지만, 진짜 이유는 두 나라 간에 정치적 갈등때문이었다, 축구 시합은 기폭제 역할이었다. 이민자 문제, 경제 문제, 영토 문제 등으로 발발했으며, 엘살바도르에서 온두라스로 간 이민자 문제도 포함되었다.

전쟁은 엘살바도르군이 1969년 7월 14일, 온두라스를 전격 침공하면서 벌어졌고, 미주기구의 중재 끝에

8월초 엘살바도르군이 철수하는 것으로 일단 끝났다. 11년 후인 1980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영토 문제 해결 등을 포함한 양국간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축구전쟁 [] - 1969년 7월 축구경기가 계기가 되어 중앙아메리카의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사이에 일어난 전쟁.100시간 전쟁이라고도 한다. 근본원인은 영토확장을 둘러싼 양국의 국경문제에 있으나, 직접적으로는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엘살바도르로부터 수십만 명이 온두라스령()으로 불법월경하여 정착한 데에 기인한다. 온두라스는 1969년부터 농지개혁을 실시하였으나 월경자들은 제외되었고, 같은 해에 온두라스 정부는 수만 명의 월경농민을 국외로 추방하였는데, 그들이 온두라스에서 학대받았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양국 팀의 축구경기를

계기로 전쟁이 벌어졌다. 그해 7월 14일 엘살바도르의 육군과 공군은 국경을 넘어서 온두라스를 공격하였으며, 온두라스는 방위에만 치중하였다. 미주기구(:OAS)가 조정에 나서 7월 29일 엘살바도르는 무조건철수에 합의하였으나 화평교섭은 난항을 계속하다가 1976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양국은 중재자의 교섭개입에 합의하고, 1980년 페루의 리마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전쟁으로 엘살바도르는 인접한 국가와의 무역에 지장을 초래하여 타격을 크게 받았다.


  

멕시코월드컵 예선전과 축구전쟁

1차 예선전 (1969.6.08) (온두라스 테구시갈파) 온두라스 1:0 승리

2차 예선전 (1969.6.15) (엘살바도르 산살바도르) 엘살바도르 3:0 승리

3차 최종전 (1969.6.27) (멕시코 멕시코시티) 2:2 무승부, 연장전에서 엘살바도르 3:2 승리

축구전쟁 시작 (1969.7.14) 엘살바도르 국군(공군, 육군) 온두라스 침공 

 

1958 - 이라크 군사 쿠데타

1958년 7월 14일 아침 이라크에서 청년장교단에 의한 군사쿠데타가 발발했다. 국왕 파이잘 2세와 황태자 부처,

사이드 수상 등이 살해됐고, 카셈 준장을 수상으로 하는 이라크공화국이 수립됐다.

쿠데타는 아랍민족주의에 공조, 요르단과 레바논에 군병력을 지원하는 왕정에 반대한데서 시작됐다. 군부는 요르단과

레바논의 내부반란 진압을 지원했던 파이잘 왕에 반대해 왔었다. 군부는 즉각 이집트 나세르 장군의 반서방,

범아랍 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유럽에 병력 수송기를 파견했고

영국의 맥밀란 수상은 군 일부에 경계령을 내렸다. 레바논 대통령 키밀 샤마운은 즉각 서방 강대국에 자국과 이라크와의 국경폐쇄를 요청했고 요르단의 후세인 왕도 도움을 요청했다.

이라크의 군사 쿠데타는 중동에 새로운 긴장상태를 낳았고, 미국과 소련을 새로운 대결양상으로 몰고 갔다.

 

1939 - 체코의 아르누보 삽화가, 화가 무하(Mucha, Alphonse) 사망

무하(뮈샤) [Mucha, Alphonse (Maria), 1860.7.24~1939.7.14]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체코의 화가.

1860년 7월 24일 체코의 모라비아 지방 이반치체에서 태어났다. 체코의 브르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무대 배경을 그리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1885년 부유한 귀족의 후원으로 뮌헨 아카데미에서

종교 벽화와 역사화를 공부하였다.

1888년 파리로 가 잡지와 책에 삽화를 그리면서 미술 공부를 계속하던 중 우연한 기회로 당대 최고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주연의 연극 포스터를 그리게 되었다. 이후 그녀의 전속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달력,

일러스트, 상품 광고 등 폭넓은 분야에서 아르누보(Art- Nouveau: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서 유럽 및

미국에서 유행한 장식 양식)를 대표하는 대중예술가로 이름을 날렸고, 1901년 레지옹도뇌르훈장을 받았다.

1906년 미국으로 이주, 뉴욕 등지에서 강의를 하며 틈틈이 전시회를 열었다. 이를 통해 부유한 기업가 찰스 크레인(Charles R. Crane)을 만나고, 그의 지원으로 가족과 함께 조국 체코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사망하기까지

체코의 역사와 민족애를 담은 ‘슬라브 연작’을 그리며 말년을 보냈다. 1938년 폐렴에 걸려 이듬해인

1939년 7월 14일 프라하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후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이 프라하에 건립되었다.


 

1933 - 독일정부 `단종법(斷種法)` 공포

1929년 이후 대공황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독일정부가 1933년 7월 14일 일명 유태인 말살 정책인

`단종법(斷種法)`을 공포했다.

정식명칭이 `유전질환자 자손 방지를 위한 법률`인 이 단종법은 `신체ㆍ정신상의 악질 유전`이 예상되는 병을 정해,

이 병에 감염된 당사자가 신청하면 우생(優生ㆍ인종개량)재판소가 단종수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신청을 당사자 이외의 사람 즉, 해당자를 수용하고 있는 병원이나 형무소 감독관 등도 제출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이 단종법은 히틀러가 모든 인류의 악이라고 비난한 유태인에게 제일 먼저 적용됐다. 나치스는 유태인을 `극히 위험스런 외부의 적`으로 조작함으로써 독일인의 통일성을 강화하는 한편, 유태인을 무력ㆍ무능력한 자로 규정해 이들을 추방하거나 공장과 수용소에 보내 강제 노동에 종사케 했다. 이유인 즉 그들의 재산과 직업을 독일인이 차지하게 될 수 있다는

이익 계산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이 단종법 시행 후, 1년간에 걸쳐 독일에 제출된 단종신청은 남녀 약 반반씩 8만4525건이었고 이 가운데 5만6244건이

단종명령을 받았다. 일본에서도 1940년 3월 나치스의 단종법을 모방한 `국민우생법`을 만들지만,

실질적으로 제 기능을 수행하지는 못했다.

 

1913 - 미국의 제38대 대통령 포드(Ford, Gerald) 출생

포드 [Ford (Jr.), Gerald (Rudolph), 1913.7.14~2006.12.26] 





본명은 Leslie Lynch King, Jr.

미국의 제38대 대통령(1974~77).

제40대 미국 부통령으로서 리처드 M. 닉슨 대통령이 사임하자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했는데, 그의 어머니는 미시간 주의 그랜드 래피즈로 옮겨가 제럴드 R. 포드와 재혼했다.

이때 의부에게 입양되어 그의 성을 물려받았다. 미시간대학교 재학중에는 미식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고, 1941년에는 예일대학교에서 법학사학위를 받았다. 1948년 미국 하원에 처음 진출해 그후 계속 당선되었고 1965년에는 하원 소수당 지도자가 되었다. 1973년 10월 12일 스피로 T. 애그뉴 부통령이 사임하자 닉슨 대통령에 의해 부통령으로 지명되었다. 같은 해 12월 6일에 부통령직에 취임했는데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에 부통령에 취임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다.

포드는 닉슨 대통령의 사임에 따라 1974년 8월 9일 대통령에 취임했는데, 미국 역사상 선거에 의하지 않고 대통령이나 부통령직에 오른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포드는 닉슨 행정부 말년의 밀실정치를 불식하기 위해 '공개와 솔직'을 정치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포드 행정부 출범 초기의 편안한 시대도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이유는 1974년 9월 8일 포드가 닉슨이 대통령직에 있을 때 "미국을 상대로 저지른 모든 잘못"을 전적으로 사면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면으로 인해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된 모든 형사소추로부터 면책되었다.

그 사면에 대해 국민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포드는 이를 의식하여 1974년 10월 17일 자진하여 하원 소위원회에

출두, 자신의 조치를 해명했는데 현직 대통령이 의회의 위원회에 나와 공식 증언을 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포드 행정부는 닉슨 행정부로부터 물려받은 높은 물가상승률을 점진적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포드는 1976년말까지 의회가 제출한 법안을 50여 건(이중 40건은 결국 부결)이나 거부했는데 이것은 당시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던 의회와의 불편한 관계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1975년 4월 베트남 전쟁의 막바지 시절 포드는 총 23만 7,000명에 달하는

반공 베트남 난민의 공수를 지시했는데 그들은 대부분 미국으로 수송되었다. 그후 몇 주 뒤에 캄보디아가

미국의 화물선인 마야게스호(號)를 나포하자 포드는 그 행위를 '해적행위'로 규정하고 해병대를 보내 그 배를 되찾았다. 그해말 경호원과 청중을 가장한 사람이 그를 암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1976년 8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강력한 대통령후보 경쟁자인 로널드 레이건의 도전을 물리치고 가까스로 당의 지명을 획득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 민주당 후보인 지미 카터와의 공개 토론에 나섰는데 이로써 그는 야당 대통령 후보와의

공개 토론에 동의한 첫번째 현직 대통령이 되었다. 유세 초기부터 열세에 놓였던

포드는 그해 11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지미 카터에게 패했다.



 

1907 - 이준() 열사 순국

이준 [, 1859.12.18~1907.7.14]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 일제의 조선 침탈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서울을 출발한 것은 1907년 4월 22일이었다. 이상설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위종이 페테르부르크에서 합류해 6월 25일 목적지에 도착한 세 사람은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며 대회 참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패한 의장국 러시아는 면담조차 꺼렸고, 영·일동맹의 두 당사자인 일본과 영국은 훼방을 놓았다.

사무국이 조선 정부에 신임장을 조회하는 전보를 보냈지만 조선의 통신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 통감부가 이에

응할 리 없었다. 세 특사는 할 수 없이 각국 대표에게 호소문을 보내고 신문을 통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려 했다.

하지만 열강 대표들이 여전히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이준 열사는 통분을 참지 못하고 분사(憤死)한다. 7월 14일이었다. 자결설·병사설·단식순절설 등 사인(死因)을 놓고 여러 설이 난무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헤이그 밀사를 빌미로 5일 뒤에 고종을 강제퇴위시킨 일제는 분이 안 풀렸는지 궐석재판으로 세상을 떠난

이준 열사에게 종신징역을 선고했다. 헤이그에 묻혔던 시신은 1963년에 서울 수유리에 안장됐다.




 

헤이그 밀사사건

1907년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상동교회의 전덕기, 이동휘 등은 고종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고종에게도 동의를 받아 특사로는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이준이 정해졌다.

이준은 고종의 신임장을 들고 만주의 이상설, 러시아의 이위종과 차례로 합류하여 헤이그로 향했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이 일본에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 했던 계획은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준은 헤이그의 숙소에서 객사했는데, 만국평화회의 불참으로 인한 울분을 못 이겨 앓다가 사망한 병사가 사인이었다. 그 증거로 당시 네덜란드 유력 일간지 《헤트·화데란트》등을 쓰고 1907년7월 15일자 기사에서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과 같이 온 차석대표 이준씨가 어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이미 지난 수일동안 병환중에 있다가 바겐 슈트라트가 있는 호텔에서 죽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장지연의 《위암문고(韋庵文稿)》등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이준이 할복 자살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왔으나,

이는 당시 일제의 억압에 대한 반일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준이 영웅화되면서

할복 자살설이 떠돈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하였다.

1962년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유해는 본래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년 봉환되었다. 서울장충단 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고, 헤이그에는 이준 열사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1890 -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조각가 자킨(Zadkine, Ossip) 출생

자킨 [Zadkine, Ossip, 1890.7.14~1967.11.25]

러시아 태생 프랑스의 조각가.

파리파(派)에 속하는 그의 작품은 매우 독창적이고 자유분방한 형태를 특징으로 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편인데, 대표적인 작품은 로테르담의 기념비인 〈파괴된 도시 The Destroyed City〉(1951)이다. 그리스 라틴어 교수의 아들로,

어린시절부터 공부보다는 점토로 모형을 만드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인의 훌륭한 예의'를 배우도록 그를 영국에 보냈지만, 그는 그곳에서 장신구 제작자로 일했다. 런던과 스몰렌스크를 오가며 살다가 파리로 가 에콜 데 보자르에서 조각을 공부한 뒤 1911년 전시회를 가졌다. 초기에는 입체파와 고전적인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았지만,

1920년부터는 우아한 느낌을 주는 〈음악가들 Musicians〉(1924)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개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39년 느릅나무를 재료로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는 〈그리스도 Christ〉를 제작했는데

팔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연상시킨다.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로 도피해야 했다.

그뒤 미국으로 가서 뉴욕의 아트스튜던츠 리그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에 돌아왔으며 폭격당한 로테르담을 방문한 후 그곳의 황폐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것이 동기가 된 〈파괴된 도시〉는 실물보다 큰 인물상이 공포에 떨며 두 팔을 뻗고 있다. 기법적인 면에서는 복합구조인 〈형태의 탄생 Birth of Forms〉(1947)에서처럼 볼록면·오목면·선·평행면 등을 사용함으로써 신선한 리듬감과 다차원적 공간의 결합을 보여준다. 1950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와 1960년 파리에서 주최한 전람회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1960년대에는 예루살렘과

암스테르담 등 여러 도시로부터 조상(彫像) 제작을 의뢰받았다.

 

1889 - 제2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 창립
1887 - 자멘호프, 에스페란토 창안
1862 - 오스트리아 화가 클림트(Klimt, Gustav) 출생

 
1858 - 영국의 여성운동가 팽크허스트(Pankhurst, Emmeline) 출생
1834 - 미국 태생의 화가 휘슬러(Whistler, James McNeill) 출생

1789 - 바스티유 감옥 함락 

 

1762 - 프랑스의 교육자, 정치가 라카날(Lakanal, Joseph) 출생  

1743 - 러시아의 시인 데르자빈(Derzhavin, Gavrila Romanovich)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