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의 뉴스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13

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7-13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2 - 캐나다의 사진작가 카르시(Karsh, Yousuf) 사망

카르시(카쉬) [Karsh, Yousuf, 1908.12.23~2002.7.13] 

카르시는 아르메니아 태생으로 캐나다와 미국에서 주로 활동한 인물 사진 전문작가이다. 그는 전시(戰時) 영국의 고집스러우면서도 강인한 사회 이미지를 윈스턴 처칠의 초상 사진 속에 담아냄으로써 국제岵� 명성을 얻었다.

이후 그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J. F. 케네디, 버나드 쇼,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피카소, 험프리 보가트 등 당대

최고의 인사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무엇보다 인공적 조명을 극도로 배제하고 자연스런 빛의 실루엣을 통해 인물의 내밀한 욕망·열정·회한을 표현하고자 애썼다. 그의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시카고 미술관,

영국 국립초상미술관 등 세계 유명 미술관에 영구 소장되어 있다.

 

"사진으로 분위기를 창조하거나 선택할 수 있었다.

분위기를 변화시키거나 강조할 수도 있었다.

나는 이 사진이라는 표현수단에 전율과도 같은 감동을 느꼈다.

(중략)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의 문이 내게 열렸던 것이다."

 

- 유쉬프 카르시

                  1)                                         2)                                     3)

 

1) 1930 - 제1회 월드컵축구대회 개막 (월드컵 1호골 주인공은 프랑스의 루시엥 로랑)

- Jose Nasazzi (1901~1968)(제1회 월드컵 우루과이 축구대표팀 주장 나사시-cantona)
제1회 월드컵축구대회가 1930년 오늘 남미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개막됐다.
이날 개막전에서 프랑스가 멕시코를 4대 1로 물리친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복구사업과 대공황, 그리고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우루과이에서 개최되는 점 때문에 대회 시작 두 달 전까지 유럽에서 단 한 나라도 월드컵 참가를 신청하지 않았다. 결국 국제축구연맹 FIFA 회장인 줄 리메(Jules Rimet)가 적극적인 교섭에 나서고서야 유럽 4개 국 등

모두 13개 나라가 지역별 예선 없이 초청형식으로 출전하게 됐다.
대회는 같은 달 30일까지 19일 동안 몬테비데오의 3개 경기장에서 진행됐다. 대회 결과 개최국인 우루과이가 우승하고 아르헨티나가 준우승, 미국이 3위를 차지했다.결승전에서 뛴 22명의 축구선수 가운데 아르헨티나의

프란시스코 바라요(Francisco Varallo)만이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

 

2) 1954 - 한국일보에 만화 <블론디> 연재 시작

칙 영(Chic Young)의 <블론디>는 7월 13일부터 2면 체육란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아 호평을 받았다. <블론디>는 당시 내자아파트에 머물고 있던 INS특파원을 통해 미국측 만화 배급 회사인 킹 피처스 신디케이트와 한국 독점게재 특약을 맺어 선보였다. 처음에는 외신부장 崔秉宇가 우리 말로 번역했으나 나중에는 그 일이 문화부를 거쳐 다시 국제부 소관으로 옮겨졌다.
이 만화는 미국의 중산층 샐러리 맨인 대그우드와 부인 블론디가 주인공으로 이들의 평범한 가정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그린 한국일보 지면의 마스코트였다. 특히 부부가 주고 받는 짤막한 대화는 영어회화를 배우려는 독자들에게 인기였다. 칙 영이 1930년, 그의 나이 29세 때부터 그린 <블론디>는 1백60개 국 1천6백38개 신문에 매일 연재되어 전세계 1억에 가까운 독자들의 사랑을 오랫동안 받은 인기만화였다.
<블론디>는 주인공 블론디 양과 대그우드 군이 1933년 2월 13일 만화 속에서 연애결혼하여 부부가 된다. <블론디>가 대 히트, 인기 정상을 누리면서 칙 영의 연간수입은 50만달러로 추정됐다. 한국일보사

 

3) 1930 - 미국의 사회운동가 스콜닉(Skolnick, Sherman) 출생  

 (정식 발행 우표가 아닙니다. ^.@)

스콜닉 [Skolnick, Sherman, 1930.7.13~2006.5.21]

                  1)                                         2)                                                3)

 

1) 1954 - 멕시코의 여류 화가 칼로(Kahlo, Frida) 사망

칼로 [Kahlo, Frida (de Rivera), 1907.7.6~1954.7.13]

멕시코 화가. 코요아칸 출생. 1925년 버스 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고 상처가 회복되는 동안 혼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29년 벽화가인 D. 리베라와 결혼했다. 그와 함께 멕시코의 전통을 이어 강렬하고 화려한 색조의 그림을 그렸다. 1943년 교육부 부설 미술학교인 라 에스메랄다에 회화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A. 브르통의 찬사를 받는 등 종종 초현실주의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코요아칸에 있는 그녀의 집은 현재 프리다 칼로 미술관이 되었다. /yahoo

 

1907년 멕시코시티 교외 코요아칸에서 출생하였다. 독일인인 프리다 칼로의 아버지는 그에게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독일어로 평화를 의미한다. 그녀의 어머니가 멕시코 혁명 당시 농민 지도자인 자파의 부하들을 보살펴 준 것을 계기로 멕시코 청년공산당에 가입하여 죽을 때까지 골수 스탈린주의자였다.
7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게 되었고, 1925년 18세 때 교통사고로 척추, 오른쪽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의 수술을 받는 등 이 사고는 그의 삶 뿐만 아니라 예술 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사고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그의 작품 세계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1939년 르누와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출품하여 파블로 R.피카소(Pablo Ruizy Pacasso)·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등으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받았으나 프리다 칼로 자신은 자신의 작품 세계가 유럽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멕시코적인 것에 뿌리를 둔 것이라며 정체성을 강하게 지켰다.
삶은 매우 연극적이었고 항상 여사제처럼 전통 의상과 액세서리를 착용하였으나 사회 관습에는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에게는 20세기 여성의 우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작품으로는 사고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고자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내면 심리 상태를 관찰하고 표현했기 때문에 특히 자화상이 많다.
가장 심각한 것은 세 번에 걸친 유산과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으며, 이는 고통스러운 재앙으로 받아들여져 《헨리포드 병원》(금속에 유채, 38×30.5㎝, 1932), 《나의 탄생》(캔버스에 유채, 173.5×173㎝, 1932), 《프리다와 유산》(종이에 리소그래피, 31.7×23.5㎝, 1932) 등과 같은 작품들로 형상화되었다. 이 작품에서 프리다 칼로의 모습은 탯줄과 줄 혹은 뿌리 같은 오브제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친 사슴》(나무에 유채, 22.4×30㎝, 1946) 속의 그녀의 모습은 비록 여러 개의 화살 때문에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은 매우 투명하고 강한 빛을 발하는데 이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신의 고통이 오히려 예술로 승화되었음을 나타낸다.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대두되면서 그녀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고,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하였다.

 

2) 1949 - 로마 교황청, 공산주의를 믿는 가톨릭교도는 파문할 것이라고 선언 

로마 교황청이 1949년 7월 13일 "공산주의의 反그리스도적 유물론 사상을 변호하거나 홍보하는 신자는 교회로부터 전면적 파문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교령(敎令)을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포고했다. 또 "자진해서 공산당에 가입하거나 이를 지지하고 그 사상 내지는 활동을 옹호하는 문서를 작성한다든지 읽는다든지 하는 사람에게는 세례, 혼인, 병자성사 등 7성사를 행하는 것을 거부하라"고 성직자에게도 지시했다. 이 교령은 교황 비오 12세가 직접 지도하고 여러명의 추기경이 작성했다.

교황이 마르크스주의를 기독교의 가장 큰 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1918년부터 1929년까지 바티칸 대사로 베를린에 주재할 때 독일공산주의자의 폭동을 가까이서 보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

 

3) 2000 - '국제 환경 NGO 포럼' 오키나와서 개막

오는 21~23일 오키나와(沖繩)에서 열리는 주요 8개국(G8)정상회담에 제출할 비정부기구(NGO)들의

환경 관련 입장을 정리하기 위한 국제 환경NGO 포럼이 13일 오키나와에서 개막됐다.
오키나와 환경 네트워크 주관으로 열리는 국제 환경 NGO 포럼에는 40여명의 각국 대표들이 참석했다.
대표들은 개막 첫날 2차대전 당시 오키나와 전투 현장과 미 해병여단 기지를 비롯한 미군 시설들을 방문했으며

미군 시설들이 초래하는 환경 오염 실태에 관해 주민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 영토에서는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졌던 오키나와는 지난 72년까지 미군 통치하에 있었으며

일본 전체 국토면적의 0.6%에 불과하지만 일본 주둔 미군 시설의 약 75%가 이곳에 밀집해 있다.
각국 대표들은 14일 나하에 있는 오키나와 대학에서 전체회의를 열고 실질 토의에 들어간다.
류큐스대학의 이케하라 사다오 명예교수는 전체회의에서 미군 시설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주제 발표를

할 예정이다.대표들은 또 오는 16일 G8 정상회담 장소인 오니카와 북부 나고에서 심포지엄을열고 미 해병여단의

후테마 공군기지내 헬기장 이전 문제를 논의한다.
이번 포럼은 오는 17일 G8 정상들에게 제출할 성명서를 채택한뒤 폐막한다.
연합뉴스 2000-07-14

 

1998 - 프랑스 월드컵 결승전에서 프랑스가 브라질을 3 : 0으로 완파하며 우승

개최국 프랑스가 1998년 7월 13일 열린 98프랑스월드컵 결승전에서 1994년 미국월드컵 우승국 브라질을 3대0으로

대파,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을 품에 안았다. 20세기 마지막 월드컵인 98프랑스월드컵축구대회는 6월10일 개막

33일간의 열전끝에 이날 결승전과 함께 폐막됐다.

사상 최초의 월드컵 우승으로 프랑스 전 국토는 환희와 함성, 폭죽과 불꽃놀이 그리고 삼색기로 뒤덮였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미셀 플라티니 월드컵조직위원장은 선수들과 시상식 테이블로 뛰어 올라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합창했다. 폐막후 FIFA는 '경기 내용은 물론 관중수, 경기장 시설과 분위기, 대회운영,

심지어 날씨까지도 완벽했다'고 칭찬했다.

 

 

1985 -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자선공연
1985년 오늘!  영국 런던 웸블리(Wembley)국립경기장에서 기아로 고통 받는 아프리카 난민들을 위한 자선공연이

시작됐다. 찰스 왕세자 부부가 개막 테이프를 끊었다.

공연 제목은 '라이브 에이드 (Live Aid)'!  미국 필라델피아 케네디경기장에서도 동시에 열렸다.
퀸(Queen)과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엘튼 존(Elton John) 등 세계유명 가수 2백여 명이 참여한 이 난민돕기

공연은 장장 16시간 동안 160개 나라에 생중계되는 등 지상 최대의 쇼를 연출했다.

라이브 에이드 공연을 통해 모은 기금은 7천만 달러! 예상보다 4배나 많은 규모였다.
이 공연을 기획한 아일랜드의 록스타 밥 겔도프는 아프리카 기아 해결에 기여한 공로로

1985년도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

 

아프리카 기아구제를 목적으로 세계의 록그룹이 다수 참여한 사상최대의 자선 록콘서트 `Live Aid` 가 영국 런던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1985년 7월 13일 동시 개최됐다. 런던 콘서트에는 7만2천명의 관중이 운집했고 미국 필라델피아 존 F,

케네디 경기장에는 10만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We are the world`를 합창했다.

콘서트에는 세계 최고의 가수들이 참가했다. 16시간에 걸쳐 위성 생중계한 콘서트는 80여개국 18억명이 TV로 시청했다.

기금 모금액수만도 5천만달러에 달했다. 예상외로 대성공을 거둔 콘서트 기획자 봅 겔도프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고

엘리자베스여왕으로부터 기사 칭호를 수여받았다.

 

1973 - 신라 금관 발견 -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관

1973년 7월 13일 삼국시대 초기의 것으로 한국 最古로 추정되는 신라 금관이 경주에서 발견됐다.

이 금관은 1969년 3월 최종호씨가 경주시 교동 68, 그가 세 들어 있던 집 옆 적성총에서 파내 3년여를 숨겨 오던 것을

6백57점의 부장품과 함께 문화재관리국이 회수한 것이다.

높이 13cm, 관대직경 14cm 외관으로 종이장같이 얇은 금관으로, 이마위에 얹혀지는 밑들레에 단지형입식을 달았고

관대는 금판을 오려 붙여 띠처럼 만들었으며 뒤에 구멍을 뚫어 매어 쓸수 있게 했다. 작고 간결한 양식이 특징이다.

이번 금관은 우리나라 것으로 여섯 번째 발견된 것이다. 1921년에 발굴된 금관총 금관, 1924년에 금령총 금관, 1926년

서봉총 금관, 이병철씨 소유의 금관, 일본 오쿠라씨가 소장하고 있는 금관에 이어 해방후 처음 발견된 신라의 금관이다.

 

1960 - 미국 민주당대회서 대통령후보로 케네디(Kennedy, John F.) 상원의원 지명

1946년 매사추세츠주 제11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투신하였으며, 1952년 같은 구에서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3년 《타임 헤럴드》의 사진기자 재클린 부피에와 결혼하였으며, 1957년 《용기 있는 사람들 Profiles in Courage》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1958년 상원의원으로 재선되었으며,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 뉴 프런티어(New Frontier)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미국 국민의 헌신적인 협력을 호소하여 공화당 후보 R.M.닉슨을 누르고 승리하였다.

1961년 미국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가톨릭 신자로서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이 되었다.  

 

1956 -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운드 독> 음반 발매 

[세상을 바꾼 노래]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운드 독>(1956)

- 50년대 성모럴 뒤흔든 불멸의 고전

1956년 초여름 어느 날, 소년 검프는 읍내에 나갔다가 가게 진열창에 놓인 티비를 통해 낯익은 사람의 모습을 본다.

 “아이들이 볼 게 아니”라며 어머니가 그의 눈을 가렸지만, 티비 속의 젊은이가 자신을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을

소년은 이미 알고 있다. 티비 속 청년의 이름은 엘비스 프레슬리로 밝혀진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1994)의 도입부 한 장면이다. 미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질료 삼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 검프는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과 조우하는데, 그 첫 번째 대상이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포레스트 검프는 물론 가상의 캐릭터다. 하지만 영화 속에 묘사된 그 저녁의 일화는 전미국을 경악하게 만든 실제 사건이었다. 정확히는

1956년 6월5일의 일이었고, 당대의 인기 프로그램 <밀튼 벌 쇼>의 방송 내용이었다. 4천만 명이 시청한 이 방송은

경련하듯 하반신을 흔들어대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모습을 송출한 대가로 곧장 스캔들에 휘말렸다. <뉴욕 데일리 뉴스>의 저명한 매체비평가 벤 그로스는 엘비스가 “선정적이고 상스러우며, 동물적 쾌락으로 채색된 구경거리를 전시했다”고까지 썼다. 이후 프레슬리에게는 ‘엘비스 더 펠비스’(골반을 흔드는 엘비스)라는 낙인이 찍혔고,

더불어 그날 방송된 <하운드 독>은 역사상 가장 떠들썩하게 등장한 노래로 기록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하운드 독>을 둘러싼 섹슈얼리티 논란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4주 후 방영된 <스티브 앨런 쇼>는 엘비스에게 점잖은 턱시도를 입혔고, 당대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 <에드 설리번 쇼>는 엘비스의 상반신만을 찍어 방송했다. 인기는 사되 논란은 피하자는 방송사의 고육책이었지만 기성세대의 반발과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로큰롤에 대한 반감의 표출이었고, 사회적으로는 성 모럴의 급변에 대한 불안감의 표현이었다.

 

그 기저에는 두 편의 킨제이 보고서-남성편(1948)과 여성편(1953)이 발간되고, <플레이보이>(1953) 등 성인잡지들이

창간되면서 성에 관한 프로테스탄트적 믿음을 뒤흔든 50년대의 사회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성의 권위는 로큰롤 특히, 스타로 부상한 엘비스 프레슬리를 통해 불온한 성의식이 확산될 것이라는 판단에 패닉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는 <하운드 독>을 음악으로 평가했다. <하운드 독>은 대중음악계 최고의 송라이팅 콤비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제리 리버와 마이크 스톨러가 만든 노래다. 흑인 여성 블루스 가수 빅 마마 손튼이 발표하여 이미

1952년 리듬 앤 블루스 차트 상위권에 올랐던 이 곡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통해 불멸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1956년 7월13일 발표된 엘비스 버전의 <하운드 독>은 무려 11주 동안이나 팝 차트 정상을 지켰는데, 1992년 보이즈 투 멘의 <엔드 오브 더 로드>가 13주 연속 1위의 신기록을 수립하기 전까지, 무려 36년 동안이나 빌보드의 최장기록으로 남았던 것이다.<하운드 독>에 얽힌 스캔들은 이제 구시대의 해프닝으로 퇴색했다. 하지만 몰입상승이 초래하는

판단착오에 대한 우화로서의 가치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고의 표현처럼,

 “비범하게 평범한 청년” 엘비스 프레슬리가

 남긴 유산 가운데 하나다.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한겨레 2008-04-03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279803.html

 

1951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쇤베르크(Schönberg, Arnold) 사망

쇤베르크 [Schönberg, Arnold, 1874.9.13~1951.7.13]

음악의 성과에 있어 '콜롬버스의 알'이라고 일컫는 업적을 이룬 쇤베르크가 1951년 7월 13일 노후 오랫동안

앓아오던 천식으로 이날 생을 마감했다.
쇤베르크가 46세였을 때 그는 제자 요세프 루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오늘 어떤 한 가지를 발견했다.

그것으로 인해 앞으로 100년에 걸쳐 독일 음악의 패권이 확실해 질 것이다"라고... 그 발견이란 바로 '12음기법'이었다. '12음기법'이란 평균 1옥타브 안에는 12개의 다른 음이 있어 그것들을 한 개씩 이용해 음렬(音列)을 만들게 되는데 이

 '음렬'을 잘 이용해 작곡하면 어떤 조성(調聲)에도 속하지 않는 '무조(無調)'의 음악이 체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말해 '상호간에 만 관계되는 12음에 의한 작곡방법'이었다.
유태인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그가 유태인으로서의 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12음기법의 발견이 있은지

얼마 안되서의 일이었다. 그 후 쇤베르크는 나치스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지만, 지병인 천식을 앓다

이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1921 - 프랑스의 물리학자 리프만(Lippmann, Gabriel) 사망

리프만 [Lippmann, Gabriel, 1845.8.16~1921.7.13]

프랑스의 물리학자.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파리로 이주, 1868년 에콜노르말에 입학했다.

학생시절 《화학 및 물리학 연보 Annale de chimie et de physique》 편집에 관계하여, 독일 논문을 자주 읽게 되어,

당시의 전기() 연구 상황에 정통하게 되었다.

1873년 정부파견으로 독일에 유학, 하이델베르크·베를린에서 키르히호프와 헬름홀츠 밑에서 연구하다가 파리대학 수리물리학 교수(1883), 실험물리학 교수(1886~1921)로 재직하였다. 1873년 전기모세관() 현상을 연구, 모세관전기계를 발명했다. 1886년 간섭현상()을 이용한 컬러사진법을 고안하고, 1891년 그 실험에 성공,

190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이 밖에 무정위()전류계·가속도지진계 창안 등의 업적이 있다.

1912년 과학아카데미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 제14회 런던 올림픽 참가 기념, 1948.6.1 발행

 

1920 - 조선체육회 창립

교육자, 유학생, 언론인 등 각계인사 47명이 중심이 된 조선체육회가 1920년 7월 13일 서울 명월관에서 발기인대회를

열고 창립됐다. 초대 회장은 장두현씨였다. `체육을 통한 민족혼 고양과 조선인민의 생명을 원숙하게 하고

창달하는 사회적 통일적 기관을 만들자`는 것이 창립취지였다.

조선체육회는 같은 해 11월 전국체전의 효시인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하며 이후 한국 스포츠를 이끌어갔다.

창립후 1년간 사무실도 없이 술집 등에서 모임을 가졌던 조선체육회는 1921년 고원훈 보성전문학교장을 2대 회장으로 뽑고 난 뒤 보성전문 사무실에 체육회 책상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38년 7월 조선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된 조선체육회는 1945년 10월 해방후 여운형 선생이 제11대 회장에 취임함으로 부활했다.

 

대한 체육회 전신인 조선체육회가 일제 치하에 놓여있던 1920년 오늘 창립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체육단체로

탄생되어 초대회장은 동양물산(주) 사장 장두현을 선출하고 첫 사업으로 1920. 11. 4 부터 3일간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대회를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의 통산회수의 기점으로 삼게 되었다. /KBS
쿠베르탕남작에 의해 근대올림픽이 부활된 1896년, 한반도는 구한말 쇄국정책의 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2년 전인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개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 서영문물이 유입되는 초기였다. 그러나 사회전반엔 아직 쇄국정책의 여운이 남아 있었고, 백성들의 의식도 대부분 "옛날"그대로 였다. 체육분야 역시 "체육"이라는 이름을 부치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현 대한체육회의 모태가 되는 조선체육회가 창립된 것이 1920년 7월 13일 근대 올림픽이

부활된지 24년이나 지나서였고, 대한제국이 제국주의 일본에 병합된지도 10년이나 지나서였다.

그러니까, 서양에서는 근대올림픽이 창시돼 본격적인 세계스포츠 무대가 형성, 발전되고 있을 때 한반도는 올림픽이

무엇인지도 모르는채 문자 그대로 "우물안 개구리"에 머물러 있었다.

 

1919 - 임시정부 내무부령 제62호에 의해 '대한적십자회' 설립 (상하이)

대한적십자사는 1919년 7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한 대한적십자회를 모체로 하여 출발하였다.

1947년 3월 15일 조선적십자사를 거쳐 1949년 10월 27일 대한적십자사로 재조직되었다. 1955년 5월 ICRC(국제적십자위원회)의 인가를 받고 9월 28일 IFRC(국제적십자사연맹)의 회원국이 되었다. 1958년 2월 15일 국립혈액원을 인수하여 대한적십자사혈액원을 개원하였으며, 1971년 9월 남북회담 사무국을 설치하였다.

 

1918 - 영화배우 김승호(金勝鎬) 출생    

김승호 [金勝鎬, 1918.7.13~1968.12.1]

한국의 배우.

본명은 해수()이며,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서울 청진동 부근에서 성장하였다. 보성고보()를

중퇴하였으나 후에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 김두한()의 소개로 동양극장 극단을 통하여 배우로 입문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극단 신협()의 무대에 오르는 등 약 25년간 연극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에 출연하면서 영화배우로 데뷔한 뒤 1956년 《시집가는 날》에서 맹진사 역을

맡아 인기스타로 떠올랐으며, 이후 중후하면서도 서민적인 연기로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성격배우로 자리를 잡았다. 1956년 문교부 주최 우수영화 주연상, 1957년 제1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제7 ·8·10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1967년 청룡상 남우주연상 등 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말년에는 영화사를 설립하여 제작자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964년 영화인협회 연기분과 위원장을 거쳐 1967년 이사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듬해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다. 아들인 영목(예명 김희라)도 뒤를 이어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돈》(1958), 《인생차압》(1958), 《육체의 길》(1959), 《박서방》(1960), 《로맨스 빠빠》(1960), 《마부》(1961), 《삼등과장》(1961), 《굴비》(1963), 《만선》(1967), 《돌무지》(1967) 등을 비롯하여 150여 편에 출연하였다

 
1902 - 오스트리아의 우편엽서 창안자 헤르만(Herrmann, Emanuel) 사망

1886 - 미국의 가톨릭 사제 플래너건(Flanagan, Edward J.) 출생

 

1882 - 일본의 서양화가 아오키 시게루[靑木繁] 출생

1849 - 스위스의 법학자 후버(Huber, Eugen) 출생


1841 -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교육자 바그너(Wagner, Otto) 출생       
1793 - 프랑스의 혁명가 마라(Marat, Jean Paul) 피살

1772 - 영국의 탐험가 쿡(Cook, James), 2차 탐험 출발

 

1729 - 프랑스 제독 쉬프랑 드 생 트로페(Suffren de Saint-Tropez, Pierre André de) 출생

1607 - 보헤미아(체코)의 에칭 판화가 홀라르(Hollar, Wenceslaus) 출생

1592 - 임진왜란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