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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13-2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7-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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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                                       3)

 

1) 1849 - 스위스의 법학자 후버(Huber, Eugen) 출생

후버 [Huber, Eugen, 1849.7.13~1923.4.23]

스위스의 법학자, 스위스 민법전(1912)의 기초자. 1880년 후버는 바젤대학의 스위스 민법과 연방법 및 법제사 교수가

되었으며, 1888년에는 할레대학의 독일 민법 및 국가법 교수가 되었다. 그는 1892년에 스위스 민법전의 기초를 의뢰받아 1904년에 이를 완성했으며, 스위스 민법전은 1912년 1월에 발효되었다. 그는 스위스 국민의회 의원으로 봉직했으며(1903~11), 연방법률고문으로서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에서 스위스를 대표하기도 했다.

그는 1892~1923년에 베른대학교에서 민법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공간된 저작들 중에서 여러 칸톤의 법체계에 대한

포괄적 연구인 〈스위스 사법의 체계와 역사〉(4권, 1886~93)·〈독일의 물권에서 법적 점유의 중요성〉

(1894)은 법학연구의 이정표들로 평가되고 있다.  

 

2) 1793 - 프랑스의 혁명가 마라(Marat, Jean Paul) 피살

마라 [Marat, Jean Paul, 1743.5.24~1793.7.13]

프랑스의 혁명가. 스위스 뇌샤텔 출생. 16세 때 보르도에서 의학을 배우고, 1765∼1775년 런던에서 의학을 연구하면서 1774년 《노예제도의 사슬》을 저술하여 절대주의적 정치구조를 비판하였다. 1789년 7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9월 《인민의 벗 Ami du Peuple》지()를 창간하여 혁명을 인민의 입장에서 감시하면서 민중의 정치참여를 고취하였다. 1792년 8월 16일 민중봉기시에는 파리코뮌을 지도하면서 지롱드당과 대항하였고, 국민공회()의 산악당() 출신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정치강령은 철저하게 인민주의로 일관되어 있었으며, 소농민과 소시민층의 절대생활권 보장과 모든 특권층과 기생계급을 없앨 것을 염원하였다. 정견()은 냉혹하여 정계의 퇴폐를 통렬하게 공박하는 한편, 냉소적이고 집요해서 지도자로서의 역량이 결여되어 있었다. 1793년 7월 산악당의 독재를 증오하는 반혁명파

여성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에게 자택 욕실에서 척살()당하였다.

 

3) 1729 - 프랑스의 제독 쉬프랑 드 생 트로페(Suffren de Saint-Tropez, Pierre André de) 출생

쉬프랑 드 생 트로페 [Suffren de Saint-Tropez, Pierre André de, 1729.7.13~1788.12.8]

프랑스의 제독·전술가. 상카네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1743년 해군사관후보생이 되었다. 1747년 비스케이만()의

해전에서 영국 해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1748년에 아헨조약 체결 후 석방되었다. 7년전쟁에서는 해군대위로서 활약하다가 1757년에 또다시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1772년 해군대령으로 승진, 1778∼1779년 미국 독립전쟁을 원조하기 위해 파견된 함대의 함장으로 활약하였고, 1781년에는 인도 방위를 위한 함대사령장관이 되어 베르데곶() 제도에서

영국함대를 습격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1782∼1783년 인도 동해안의 마드라스 및 네가파티남 부근에서 영국함대와 싸우고 트린코말리(실론)를 점령하였다.

이 동안에 근대의 함대전법의 기초가 된 전술을 익혀 책으로 펴냈다. 귀국 후 해군중장으로 승진하였고, 1787년 대영()관계의 긴장과 더불어 루이 16세는 그를 프레스트의 함대사령장관에 임명하였으나 이듬해 파리에서 죽었다.

 

1902 - 오스트리아의 우편엽서 창안자 헤르만(Herrmann, Emanuel) 사망

헤르만 [Herrmann, Emanuel, 1839.6.24~1902.7.13]

1839년 클라겐푸르트에서 태어나 비인의 기술대학교수로 있던 헤르만은 1869년 1월 26일 ‘신자유언론’이라는 매체에

대한 기고를 통해 우편에 사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연락수단을 소개하였는 바, 이는 2크로이쩌 요액액면이 인쇄된

서간형태의 공개적인 엽서였다(당시 편지 요금은 4크로이쩌) 이로써 우편엽서가 발명이 됨에 따라 단기간 내

전체 도나우 왕조에서 즐겨 사용하게 되었고 그 후 전 세계적인 성공을 시현하게 되었다. (cantona, 2007-06-08) 

 

1896 - 독일의 유기화학자 케쿨레(Kekule, Friedrich August) 사망  

케쿨레 [Kekule von Stradonitz, Friedrich August, 1829.9.7~1896.7.13]

본명은 Friedrich August Kekulé.

독일의 화학자.

유기화학에서 현대적인 구조이론의 토대를 마련했다. 건축가의 꿈을 안고 기센대학교에 입학했다가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영향을 받아 화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852년 박사학위를 받은 뒤 파리에서 연구를 계속했는데, 그곳에서 샤를 프레데리크 제라르를 만나 그의 유기구조기형설(有機構造基型說)에서 케쿨레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켰다. 1856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의 강사가 되었고, 1858년부터 벨기에의 겐트대학교에서 화학교수를 지내다가

1865년 본으로 옮겨갔다.일찍이 건축학을 공부한 것이 구조이론을 고안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858년 탄소의 원자가는 4가이며 이 원자들이 서로 결합해 긴 사슬을 형성할 수 있음을 밝혔다. 이러한 생각은 지방족 화합물을 이해하는 길을 열었는데, 아치볼드 스콧 쿠퍼와 거의 같은 때에 독자적으로 발표되었다. 1865년 어느날 밤 그는 뱀이 스스로의 꼬리를 물고 빙빙 돌며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모양을 한 벤젠 분자의 꿈을 꾸었다. 그 광경에서 6개의 탄소로 이루어진

벤젠 고리라는 개념이 탄생했고,

이것은 그당시까지 밝혀진 유기화학의 사실에도 부합되었다. 또한 그는 풀민산수은·불포화산·티오산에 관해 중요한 연구를 했고, 4권의 유기화학 교과서를 쓰기도 했다. 그가 작위를 받을 때 그의 이름에 '폰 슈트라도니츠'가 덧붙여졌다.

 

1886 - 미국의 가톨릭 사제 플래너건(Flanagan, Edward J.) 출생

플래너건 [Flanagan, Edward Joseph, 1886.7.13~1948.5.15]

아일랜드 출생으로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한 후 사제가 되었다. 1917년 비행소년을 바로잡기 위한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네브래스카주 오마하 근교에 소년의 마을(보이스 타운)을 설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부랑아 문제가 심각했던 일본을 방문하여 전쟁고아 문제와 기타 봉사활동 문제 등을 지도하였으며, 귀국 후 독일에도 같은 목적으로

들렀다가 비행기 사고로 베를린에서 죽었다.  

 

1882 - 일본의 서양화가 아오키 시게루[靑木繁] 출생

아오키 시게루[靑木繁, 1882.7.13~1911.3.25]

1899년 구루메 중학명선교[久留米中學明善校]를 중퇴한 후 상경해 서양화가 오야마 쇼타로[小山正太郞]가 지도하는

후도샤[不同舍]에 입문했다. 1900년 도쿄[東京] 미술학교에 입학해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 등에게 지도를 받으면서 역사·문학·철학 등을 독학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린 신화화고(神話畵稿) 연작은 제8회 하쿠바카이 전[白馬會展]에 출품되어 하쿠바상을 수상했다.

1904년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메라 해안[布良海岸]에서 그린 〈바다의 풍요 海の幸〉(브리지스턴 미술관)는 커다란

상어를 짊어지고 바다에서 걸어나오는 구릿빛 벌거숭이 어부들을 그린 걸작으로 당시의 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 그림을 비롯해 메라 해안을 묘사한 많은 그림들은 그의 예민한 감수성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1841 -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교육자 바그너(Wagner, Otto) 출생

바그너 [Wagner, Otto, 1841.7.13~1918.4.11]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펜칭에서 태어났다. 1857년 빈 공과대학에 입학하였고, 베를린 건축학원과 빈 미술학교 건축학부를 거쳐, 1894년 빈 미술학교 교수가 되어 많은 후진을 기르고 이론과 설계면에서 근대 건축을 주도하였다.

처음에는 고전적 작풍을 지향했으나, 1890년대에 아르 누보에 공명하여 19세기에 유행하던 건축에 있어서의 역사주의적 경향을 부정하고, 새로운 형식은 모두 새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야 한다는 견지에서 실용적인 양식을 제창하였다.

건축의 양식은 실용목적 ·재료 ·구조 ·미적 입장에서 규정된다는 그의 견해는 G.젬퍼의 예술이론에 근거를 둔 것이 분명하지만, 이러한 건축 이론에 입각하여 간소화된 형태가 그의 후기작품에 잘 반영되어 있다. 대표작으로는 빈 광장 정거장(1894∼1897), 빈 우체국(1904∼1906), 그리고 헤이그 평화궁의 설계 등이 있다. 그의 건축관은 J.올브리히,

 J.호프만 등의 후계자에 의하여 제체시온(Sezession: )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저서에 《현대 건축 Moderne Architektur》(1895)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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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 - 영국의 탐험가 쿡(Cook, James), 2차 탐험 출발

1768년 태평양에서 실시한 금성의 태양면 통과 관측의 관측대장에 선임, 엔데버호()를 인솔하여

많은 학자들과 동행, 타히티섬에서 그 관측에 성공하였다.

그 후 소시에테제도()를 발견하고, 뉴질랜드를 주항() 중에 쿡해협을 발견하여 뉴질랜드가 두 섬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밝혔다. 다시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을 탐험하여, 이것을 영국 영토로 선언, 1771년에 귀국하였다.

1772∼1775년의 제2차 항해 때는 해군성의 명령으로 옛날부터 수수께끼인 남방 미지의 대륙(테라 아우스트랄리스

인코그니타)을 찾아 사상 처음으로 남극권에 들어가 남위 71 °10 '까지 2만 km 이상을 항해하여

마침내 이 해역에 대륙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1607 - 보헤미아(체코)의 에칭 판화가 홀라르(Hollar, Václav) 출생

홀라르 [Hollar, Václav(Wenceslaus), 1607.7.13~1677.3.28]

그의 작품들은 17세기에 대한 정보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다. 홀라르는 1627년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판화가이자

출판업자인 마태우스 메리안 밑에서 공부했으며, 뒤에 스트라스부르로 갔다가 1633년 쾰른으로 갔다. 거기에서

애런들의 백작이자 수집가인 토머스의 주목을 끌어 생애의 대부분을 그와 관계를 맺고 살았다. 홀라르는

1637년 영국에 정착했지만, 1644년경 안트웨르펜으로 이주했다가 1652년 다시 돌아갔다. 그의 뛰어난 에칭

작품은 지금도 감식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수많은 책에 삽화를 그렸으며, 1666년의 대화재 이후

유명한 〈런던의 풍경 Views of London〉을 그렸다. 약 3,000점의 판화를 남기고 아주 가난하게 살다 죽었다.

 

1592 - 임진왜란 당항포해전

당항포해전 [唐項浦海戰]

1592년(선조 25) (음력) 6월 5~6일과 1594년 3월 4일 두 차례에 걸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제1차 당항포해전과 제2차 당항포해전으로 나뉜다.

1차 해전은 1592년(선조 25)년 6월 5일부터 6일까지 이틀 동안,

2차 해전은 1594년 3월 4일 하루 동안 이루어졌다. 당항포는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에 해당하는데,

진해시로 보는 설도 있다.
제1차 당항포해전은 이순신()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수군의 연합함대가 제2차 출전에서 사천·
당포해전에 이어 세 번째로 치른 해전이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전선 23척,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전선 25척, 원균()의 경상우수영 전선 3척 등 총 51척이 참가하였다. 총지휘는 이순신이 맡았다.
당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연합함대는 당포 앞바다에 정박해 전략 회의를 계속하면서 나흘을 머문 뒤, 거제도 주민들로부터 당항포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연합함대는 6월 5일 아침 안개가 걷히자마자 당항포로 진격하였다. 포구에는 왜군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모여 있었다.
연합함대는 당항만 어귀에 전선 4척을 숨겨두고, 거북선을 앞세워 일제히 공격을 가하였다. 조선 수군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일본 수군도 조총을 쏘아 대며 대응 태세를 취하였다. 이에 아군은 왜군의 육지 탈출 봉쇄와 주민 보호를 위해

왜군을 바다 한가운데로 유인한 뒤, 왜선을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였다.
왜선 대부분은 여기서 격침되었고, 도주하는 나머지 왜선들도 모두 추적해 불살랐다. 다만 도망친 패잔병들을 소탕하기 위해 한 척은 남겨 두었는데, 이 역시 이순신의 명을 받은 방답 첨사(使) 이순신()에 의해 6월 6일 새벽에

섬멸되었다.제2차 당항포해전은 수륙 병진책이 무산된 일본 수군이 거제도 내륙을 오가며 살인·납치·약탈을 일삼던

1594년 3월 4일에 행해졌다. 아군 연합 전선 124척이 참가한 대규모 해전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치밀하고

신속하며 정확한 전략으로 압승을 거둔 해전이다. 연합함대의 제6차 출전이자, 전투로는 12번째 해전이다.


3월 4일 새벽 이순신은 함선 20척을 거제도 견내량()으로 보내 수비하도록 하고, 동시에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에서 각각 10척, 전라우수영에서 11척을 선발해 공격 함대를 편성하였다. 공격 함대의 사령관은 어영담()을 임명하였다. 이순신은 나머지 3군 함대를 이끌고 학익진()을 펼치며 함대 시위를 하는 한편, 다른 왜군의 지원과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한 준비까지 철저하게 마친 뒤 공격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조선 수군의 완벽한 전략 앞에서 손 쓸 틈도 없이 일거에 무너졌다. 먼저 어영담 함대에 의해 10척이 격파되고

불태워졌다. 이어 나머지 21척도 당항만으로 진격해 들어간 아군에 의해 모두 불태워지고, 패잔병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육지로 도주하였다.불의의 사태에 대비한 예비대 편성, 신속한 기동력, 적 주력부대의 퇴로 차단 등 이순신의

용의주도한 전략이 돋보인 해전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임진왜란 해전 목록]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 옥포 해전(거제시 옥포) - 이순신/도도 다카토라 - 조선군의 첫 승리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 합포 해전(마산시 산호동) - 이순신

1592년 6월 17일(음력 5월 8일) - 적진포 해전(고성군 거류면 통영시 광도면) - 이순신

1592년 7월 8일(음력 5월 29일) - 사천 해전(사천시 용현면) - 이순신/구루지마 미치유키 -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

1592년 7월 10일(음력 6월 2일) - 당포 해전(통영시 산양읍) - 이순신/카메이 코레노리 -

1592년 7월 13일(음력 6월 5일) - 당항포 해전(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이순신, 이억기

1592년 7월 15일(음력 6월 7일) - 율포 해전(거제시 장목면) - 이순신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 한산도 대첩(통영시 한산면) - 이순신, 원균, 이억기/와키사카 야스하루

1592년 8월 16일(음력 7월 10일) - 안골포 해전(진해시 안골동) - 이순신, 원균, 이억기/구키 요시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