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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07 04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07.04

                  1)                              2)                                     3)

 

1) 1804 - 미국의 소설가 호손(Hawthorne, Nathaniel) 출생

호손 [Hawthorne, Nathaniel, 1804.7.4~1864.5.19]

매사추세츠주 세일럼 출생.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기의 청교도()를 선조로 모신 가정이었으므로 청교도의 사상·생활태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작품을 썼다. 1825년 보든대학교를 졸업 후 1828년 최초의 소설 《판쇼》를 출판하였으나 뒤에 미숙한 작품임을 깨닫고 회수해 버렸다.
1837년 단편집 《트와이스톨드테일스》를 발표했으며, 1839년 경제적 불안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보스턴 세관에 근무하였다. 그후 1850년 그의 대표작이 된 《주홍글씨》를 발표하였다. 17세기의 청교도 식민지 보스턴에서 일어난 간통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그린 이 작품은 청교도의 엄격함을 교묘하게 묘사하고 죄인의 심리 추구, 긴밀한 세부구성, 정교한 상징주의로 말미암아 19세기의 대표적 미국소설이 되었다. 1851년 청교도를 선조로 가진 고가()의 자손에게 악의

저주가 걸린 《일곱 박공의 집 The House of the seven Gables》을 발표하였다. 이듬해 자신이 참가했던 실험적 공동농장을 무대로 한 《블라이스데일 로맨스》를 출판하여 지상낙원에 모인 사람들의 심리적 갈등을 그렸다.

1853년 영국의 리버풀 영사()로 부임하였으며, 그후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이 여행 뒤에 목신()이 죄를 짓고 비로소 지성과 양심의 깨달음을 경험하는 《대리석의 목신상》(1860)을 집필하였다. 청교도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 전통을 계승한 그는 범죄나 도덕적·종교적 죄악에 빠진 사람들, 자기중심벽·고독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내면생활을 도덕·

종교·심리의 세 측면에 비추어 엄밀하게 묘사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일면으로 교훈적 경향이 강하면서 상징주의에 의한 철학적·종교적·심리적으로 의미심장한 세계가 전개되는 정교한 면도 있다.

 

2) 1826 - 미국의 작곡가 포스터(Foster, Stephen) 출생

포스터 [Foster, Stephen (Collins), 1826.7.4~1864.1.13]

미국의 작곡가.

민스트럴 노래(minstrel songs)와 감상적인 발라드를 작곡·발표해 미국 음악계에서 영예로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서부 변방의 도시 근교에서 성장했으며 비록 정규적인 음악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선천적으로 음악적 재능을 타고나

어려서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는 누이들이 부르던 전승민요, 하인이었던 올리비아 피즈와 다니던

흑인 교회에서 부르던 노래, 당시 인기 있던 민스트럴 쇼에서 부르던 노래들, 그가 시간제로 일하던 피츠버그 도매상의 흑인 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래 등에서 음악적인 영향을 받았다.

1842년 가곡 〈사랑하는 이여, 창을 열어다오 Open Thy Lattice, Love〉를 발표했다. 1846년 그는 경리일을 얻어 신시내티로 갔다가 1850년 내과의사의 딸인 제인 맥도웰과 결혼하기 위해 피츠버그로 돌아왔다. 1848년에는 〈오, 수재너 Oh, Susanna〉를 100달러에 팔았는데 이 노래는 〈네드 아저씨 Old Uncle Ned〉와 더불어 출판업자에게 약 1만 달러의

수익을 올려주었다. 1849년 그는 전에 〈넬리는 좋은 아가씨였다 Nelly Was a Lady〉(50부 인쇄)의 판권을 넘겨주었던

뉴욕의 출판사 퍼스폰드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에드윈 P. 크리스티의 민스트럴 쇼를 위한 노래를 의뢰받아 작곡했다.

가장 유명한 〈고향 사람들 Old Folks at Home〉(1851, 〈스와니 강 Swanee River〉이라고도 함)은 원래 크리스티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으며, 1879년 이후에야 포스터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1852년 평생 한번뿐이었던 남부 여행을 했다.

'가장 훌륭한 에티오피아(흑인 민스트럴을 뜻함) 가요 작가'가 되는 것이 자신의 포부라고 밝혔지만 사실 그는 민스트럴 노래(대부분 이 노래들로 기억되고 있음)와 당시 유행하던 감상적이고 고상한 양식의 노래를 작곡하는 것 사이에서 방황했다. 자신의 재능을 지키고 키울 만한 흥행사가 못 되었던 그는 1857년에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되어 자신이 앞으로 작곡하게 될 모든 노래의 수익권을 출판업자에게 약 1,900달러에 팔아넘기고 말았다.

따라서 그의 노래로 벌어들이는 수익금의 거의 대부분은 연주자들과 출판업자에게 돌아갔다.

이미 절망과 알코올 중독과의 싸움에 지쳐 있던 그는 1860년 뉴욕 시로 갔다. 그 이후 그의 노래들은 〈Poor Drooping Maiden〉처럼 감상적인 것이 많았다. 1862년 아내와 잠시 사이가 좋아지는 듯했으나 아내마저 그의 곁을 떠났고,

그는 여생을 빚더미 속에서 살았다. 약 200여 곡의 노래를 남겼는데 대부분 가사까지도 자신이 직접 썼다. 대표작으로는 〈캠프타운 경마 Camptown Races〉·〈넬리 블라이 Nelly Bly〉·〈켄터키 옛집 My Old Kentucky Home〉

〈Massa's in de Cold, Cold Ground〉·〈늙은 개 트레이 Old Dog Tray〉·〈올드 블랙 조 Old Black Joe〉

〈금발의 제니 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아름다운 꿈 Beautiful Dreamer〉 등이 있다.

 

3) 1802 - 미국 육군사관학교 개교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 (West Point Academy)

미국 육군사관학교의 통칭. 원래 웨스트포인트는 미국 뉴욕주() 남동쪽에 있는 도시의 이름이지만,

이곳에 미국의 육군사관학교가 소재하고 있는 데에서 일반적으로 미국 육군사관학교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1802년 7월 4일에 5명의 교관과 10명의 생도로 창립되었다. 17세~22세의 독신 미국시민 중에서

선발된 사관생도에게 4년간의 소정 교육을 실시한 후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시키고 이학사(Bachelor of Science) 학위를 수여한다. 최근에는 여성에게도 입학이 허용되고 있으며, 졸업생 가운데에는 D.D.아이젠하워,

D.맥아더와 같은 저명한 정치가나 고위장성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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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67 - 일본의 작가 다키자와 바킨[瀧澤馬琴] 출생

다키자와 바킨[瀧澤馬琴, 1767.7.4~1848.12.1]

19세기초 일본의 저명한 작가.

도덕성이 짙은 장편 역사소설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급무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1780년 에도에 들이닥친 기근과 전염병을 겪은 뒤 혼자 집안의 대를 이었다. 많은 방황 끝에 무사의 지위를 버리고

상인의 미망인과 결혼한 뒤 50년간 글쓰기에 몰두했다.

그는 요미혼[讀本:에도 시대 후반기의 전기적(傳奇的)·교훈적 소설]으로 알려진 30편이 넘는 장편소설을 써서 역사소설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냈다. 궁정소설·군사연대기·노[能]·대중극·전설과 중국의 구어소설 등에서 소재를 얻었으며 에도 시대의 소설을 본격적인 소설 장르로 확립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충성과 효도, 몰락한 가문의 영화를 되찾는 것 등이 그의 작품의 주된 주제였다. 중국 문명, 불교철학, 일본 역사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언어와 문체에 대한 진지한 태도, 동료들에 대한 애정,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으로 다소 순화되었다. 그러나 무사의 전통과 타고난 완고함 때문에

기존의 질서를 지지해 작품도 짙은 도덕성을 띠게 되었다. 가장 뛰어난 작품은 집안의 영화를 되찾는다는 주제를 다룬

〈난소사토미핫켄덴 南總里見八犬傳〉(1814~42)으로 이 작품은 일본 문학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2) 1865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출판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겪은 모험’)》는

영국의 수학자이자 작가인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이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이라는 필명으로 1865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어린이를 위한 동화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많은 수학적인 대칭과 언어 유희가 담겨 있다.

앨리스는 어느날 토끼를 따라가다 구멍에 빠져, 동물들과 인간 모양을 한 카드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모험을 펼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의 모델은 헨리 조지 리들의 넷째 딸인 앨리스 리들이다.

 

1826 -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제퍼슨(Jefferson, Thomas) 사망

제퍼슨 [Jefferson, Thomas, 1743.4.13~1826.7.4]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났다. 윌리엄앤드메리대학을 졸업하고, 1767년 변호사가 되었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아 정계로 진출, 1769년 버지니아 식민지의회 하원의원이 되었다. 1775년 버지니아대표로서 제1·2차 대륙회의에 참가하였고,

1776년 독립선언문 기초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자유와 평등을 외쳐 미국 건국의 이상이 되었던 그 해 7월 4일의 독립선언문은 주로 그가 기초한 것이다.

그 후 버지니아로 돌아와 주의회 의원·주지사 등을 역임하였고, 봉건적인 장자상속제의 폐지와 정교()분리를 위한

신교()자유법의 제정에 노력하였다.

1783년 연방의회 의원이 되자 달러를 단위로 하는 통화제도와 오하이오강 북서부지역에 관한 정부안을 입안하여 신생공화국의 기초를 닦는 데 공헌하였다. 1785년 프랑스 주재공사에 임명되고, 1790년 G.워싱턴 행정부의 초대 국무장관에

취임하였으나, 강력한 중앙정부제를 주장하는 재무장관 A.해밀턴과의 정책대립으로 1793년 사임하였다. 해밀턴이

주도하는 연방파()에 대하여 민주공화당을 결성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민주당의 기원이다.

1796년 부통령, 1800년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새 수도 워싱턴에서 취임식을 거행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재임 중 문관의 무관에 대한 우월, 소수의견의 존중, 종교·언론·출판 자유의 확립 등에 주력하고, 1803년 캐나다 국경에서 멕시코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지금의 루이지애나)을 프랑스로부터 구입하여 영토를 거의 배가()하는 한편,

나폴레옹전쟁에 의하여 국제긴장에 휩쓸리지 않도록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유지하면서 중립을 지켰다.

1804년 재선되고, 1809년 4월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 후 버지니아의 몬티셀로에 돌아가 1819년 버지니아대학교를 설립하고 스스로 학장에 취임하여 민주적 교육의 보급에 노력하였다. 또한 철학·자연과학·건축학·농학·언어학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몬티셀로의 성인()'으로 불리었다.

독립선언 50주년 기념일에 사망하였다. 저서는 적지만 많은 서간이 남아 있으며, 그것들은 민주주의사상의 고전으로

 간주되고 있다. 생전에 자신이 직접 정해 놓았다는 묘비명 "미국독립선언의 기초자, 버지니아 신교자유법의 기초자

버지니아대학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여기에 잠들다"라는 글귀가 유명하다.

 

나는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

 

- 토머스 제퍼슨 

 

1863 - 빅스버그 함락

[어제의 오늘]1863년 빅스버그 함락

ㆍ남북전쟁 고전하던 북군 대역전

미국 남부의 11개주가 1861년 2월 독립적인 남부연방을 선언하면서 시작된 남북전쟁은 여러가지 면에서 북군에 우세했다. 군사력·인구·산업 발달 등 각종 여건에서 북군은 남군에 비해 현저히 앞서 있었다. 북군이 곧 남군을 제압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은 그해 7월21일 양측의 최초 교전인 ‘불 런 전투’에서 남군이 일방적 승리를 거두면서 빗나가기 시작했다.

전쟁 발발 2년이 지나도록 북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남군은 뛰어난 지략가인 로버트 리 사령관의 지휘 아래 북군의

수도인 워싱턴을 끊임없이 위협한 반면 북군은 남군의 수도인 리치먼드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이 같은 전황이 극적으로

역전된 것은 1863년 7월이었다. 특히 미시시피 강변의 작은 도시 빅스버그에서 벌어진 전투는 전쟁의 승부처였다.

멤피스와 뉴올리언스 사이에 위치한 빅스버그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북군은 압도적인 해군력을 가졌지만 강변에 위치한 빅스버그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빅스버그는 도시 자체가 가파른 경사로 이뤄져 있고 외곽이 강과 늪지대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다.
북군 사령관인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은 1862년 겨울부터 빅스버그 공략에 골몰했다. 그는 3번에 걸친 대규모 정면 공격에서 모두 실패를 맛봤다. 그랜트는 1893년 5월 빅스버그 남쪽 먼 곳에서 미시시피강을 건너 병력을 투입시켰다. 보급도 없이 적진에 침투한 이들은 교두보를 확보하고 2만5000명의 북군 병력이 도강할 수 있는 길을 텄다.
강을 건넌 대병력이 내륙으로 진군하자 남군 총지휘관 조지프 존스턴은 빅스버그 수비군을 철수시켜 자신과 합류하게

했다. 그러나 이 명령은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의 ‘빅스버그 사수’ 명령과 혼선을 빚었다. 결국 빅스버그를 지키던

존 펨버턴 장군은 주력부대와 합류할 시기를 놓쳤고 3만명의 병력과 함께 빅스버그에 고립됐다.
그랜트 장군은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지 않고 빅스버그를 봉쇄한 채 장기전을 폈다. 결국 펨버턴은 2개월 뒤인 7월4일 항복하고 말았다. 이 승리로 북군은 미시시피강을 장악했고 남군은 강을 기점으로 허리가 잘렸다. 때마침 리 장군이

지휘하는 남군의 북부 공략이 펜실베이니아 게티즈버그에서 저지되면서 전황은 급속히 기울었다.
그랜트 장군은 빅스버그 승리에 이어 이듬해 채터누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전쟁 종식에 쐐기를 박았다.

국민적 영웅이 된 그랜트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4성장군이 된 데 이어 1868년 46세의 나이로 최연소 대통령에 올랐다.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은 전투에서 치욕적 패배를 당한 빅스버그시는 1944년까지 미국 독립기념일을 축하하지 않았다.

유신모기자  경향신문 2009-07-03 17:55:17

 

1807 - 이탈리아의 혁명가, 군인, 정치가 가리발디(Garibaldi, Giuseppe) 출생

가리발디 [Garibaldi, Giuseppe, 1807.7.4~1882.6.2]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국가통일운동)를 위해 몸바쳐 싸운 애국자·군인·공화주의자이다.

이탈리아가 사보이 왕가를 중심으로 통일을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36~48년 남아메리카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당시 혼란과 혁명으로 들끓던 남아메리카 대륙의 생활에 큰 영향을 받았다. 1848년 오스트리아에 대항한 독립투쟁에 가담하기 위해 귀국해, 밀라노마치니와 함께 이탈리아의 해방전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에게 패해 다시

남아메리카로 망명했고, 1854년에 피에몬테 왕국의 총리인 카보우르 백작의 허락을 받아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1850년 '붉은 셔츠단'을 이끌고 시칠리아, 나폴리, 팔레르모를 점령해 당시 통일운동을 이끌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넘겨주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용감한 애국자로서 일반인의 존경을 받았고,

그 파란만장한 애국적 생애는 이탈리아인의 신화로 남았다.

 

준비된 혀보다는 준비된 손을 주시오."

- 주세페 가리발디

 

1776 - 미국 독립 선언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2차 대륙회의가 독립선언서를 승인함으로써 미국은 영국의 통치로부터 13개

식민지의 독립을 선포했다. 미국사는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607년 영국인들이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정착하면서 북아메리카에 식민지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식민지는 매사추세츠·코네티컷·메릴랜드·캐롤라이나·뉴욕 등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던 중 식민지를 착취하는 중상주의 정책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불만이 쌓여갔고, 결국 1773년 12월 16일 보스턴 차 사건으로 표면화되었다. 이에 식민지들 간에 대륙회의가 구성되어

1774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회의가 열렸다. 미국독립전쟁은 1775년 4월 19일 영국의 토머스 게이지 장군이 매사추세츠 콩코드에 있는 식민지군 탄약창고를 파괴하기 위해 보스턴에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접전이 계속되다가 1778년 6월 28일 총사령관인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식민지군이 뉴저지의 몬머스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뉴욕 시와 그 주변 지역만을 제외하고는 식민지군이 장악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과 연합한 식민지군은 요크타운

포위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1781년 10월 19일 콘월리스가 이끄는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육상의 전투는 모두 끝났다.


 

1753 - 프랑스의 기구 비행가 블랑샤르(Blanchard, Jean-Pierre) 출생

블랑샤르 [Blanchard, Jean-Pierre(-François), 1753.7.4(7.7)~1809.3.7]

프랑스의 기구 비행가.

미국의 의사 존 제프리스와 함께 기구를 타고 영국 해협을 최초로 건넜으며, 영국·북아메리카·독일·벨기에·폴란드에서

최초로 기구비행을 했다.

1770년대에는 노와 키를 사용하여 기류(氣流) 속에서 움직인다는 이론에 바탕을 두고 공기보다 큰 비중을 가진 기계의 설계에 몰두했다. 1783년 프랑스 아노네의 몽골피에 형제들이 열기구(熱氣球) 비행을 하자 그도 기구비행에 착수했다. 1784년 3월 2일 파리에서 그로서는 최초로 기구를 띄웠으며, 1785년 1월 7일 제프리스와 함께 영국 도버에서 이륙했다. 두 사람은 세계 최초의 국제 항공우편물을 제외한 다른 모든 화물을 기구 밖으로 버려야 했지만,

프랑스의 포레드펠모레에 무사히 착륙하여 우편물은 성공적으로 배달되었다. 흥행사이기도 했던 그는 개를 실험용

낙하산에 매달아 기구 밖으로 던졌는데, 나중에는 자신이 낙하산을 매고 뛰어내렸으며,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기구에

기동성을 부여하고 추진력을 얻기 위해 돛을 사용하기도 했다. 유럽에서 여러 차례 시범비행을 한 뒤, 1793년 1월 9일

북아메리카에서 최초의 기구비행을 했는데, 필라델피아의 워싱턴 프리슨야드에서 이륙하여 뉴저지 글로스터에 착륙했다. 이 비행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참관했으며, 미국 내의 기구비행에 대한 흥미를 자극했다. 유럽으로 돌아간

그는 기구비행법을 익힌 부인 마리와 함께 전시비행을 많이 했다. 1808년 2월 헤이그 상공을 비행하던 중에 심장마비를 일으킨 그는 15m 이상 되는 높이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미망인이 된 마리는 계속 기구비행을 했지만,

1819년 파리에서 불꽃놀이를 하고 있을 때 그녀의 수소기구에 불이 옮겨붙어 사망했다.

(일부 자료에는 생일이 7월 7일로 나옵니다. ^.@) 

 

1187 - 이슬람의 살라딘(살라흐 앗 딘, Saladin), 하틴전투 승리

유대교ㆍ이슬람교ㆍ그리스도교 모두가 성지로 여겨온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 수중으로 넘어간 것은 이슬람군이

1차 십자군 전쟁에서 패한 뒤인 1099년 7월이었다.

이 예루살렘이 다시 이슬람의 영토가 된 것은 불세출의 영웅 살라딘이 등장하고 부터였다. 쿠르드족이었던 살라딘은

종족과 종파로 뿔뿔이 갈라진 아랍을 하나로 묶은 위대한 군주였다. 그에게 예루살렘은 늘 눈엣가시였다.

1187년 7월4일, 1만5000명의 그리스도교군과 1만8000명의 이슬람군이 지중해와 갈릴리 호수 중간에 위치한 하틴에서 맞붙었다.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초전, 그리스도교군은 참패했다. 살라딘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팔레스타인 해안가에 위치한 유럽인들의 영토로 쳐들어가 10월2일, 88년간 유럽인들의 왕국이었던 예루살렘을 마침내 굴복시켰다.

살라딘은 이때도 관대한 군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였다. 예루살렘의 왕을 풀어줬고 성안에서 결혼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공격을 하루 늦출 정도였다.

그 이후 예루살렘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 760여년간을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1999년에 미 타임지는 ‘지난 1000년 세기의 인물’을 선정하면서 살라딘을 12세기의 인물로 당당히 올렸다. 

 

하틴전투 [Battle of Hattin]

팔레스타인 북부에서 일어난 전투(1187. 7. 4).

예루살렘의 왕 구이 데 루시난(1186~92 재위)이 이끄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군대가 살라딘(1169~93 재위)이 지휘하는 이슬람 군대에게 대패해 괴멸되었다. 이슬람 국가로 하여금 예루살렘 시(1187. 10)와 라틴 3국인 트리폴리·안티오크

·예루살렘의 대부분을 재점령하게 하는 길을 열었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지도자들이 성지(聖地)에 건설한 업적들을

파괴시켰고 유럽인에게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자극시켰다.

1187년 7월 그리스도교도들이 갈릴리 호(湖) 남단의 세포리스에 진지를 구축하자 살라딘이 북쪽에 있는 티베리아스 시(市)를 공격했다는 전갈이 도착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자신들의 막사를 버리고 포위된 도시를 구조하기 위해 출발했다. 그러나 살라딘은 티베리아스에 이르는 주도(主道)를 차단하고 그들을 하틴 마을 근처의 습지로 몰아넣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마을 외곽을 감고 있는 구층을 배경으로 하틴 마을의 한 고지대에 진지를 구축했다. 살라딘은 야음을 틈타 부대를 이동시켜 그리스도교도들을 포위하고 그들의 수원(水源)을 끊고 공격 채비를 갖추었다. 새벽녘에 갈증을

느낀 그리스도교도 부대는 근처 호숫가로 달려갔지만 2개의 가장 큰 구릉지대인 호른스오브하틴에서 이슬람군에게 공격을 받고 달아났다. 약 1만 5,000명의 그리스도교군은 1만 8,000명의 이슬람군에게 참패당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도가 전장에서 살해되었지만, 살라딘은 구이 왕과 많은 그리스도교 족장들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이 전투가 벌어진 다음날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재탈환하기 위한 전투를 개시했다.

 

하틴 전투1187년 7월 4일 예루살렘 왕국기독교 십자군 병력살라흐 앗 딘이 이끄는 이슬람 아이유브 왕조

군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살라흐 앗 딘의 이슬람군은 이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어 대부분의 십자군 장군들과 병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이 전투의 패배로 군사력을 상실한 예루살렘 왕국은 결국 예루살렘을 이슬람에게 내주게 된다.

전투 장소는 현재의 이스라엘 갈릴리티베리아스 근처로 티베리아스와 아크레의 중간에 "하틴의 뿔"로 불리는

두 개의 산 중간의 지역이다.

배경

1186년 어린 소년 왕 예루살렘의 보두앵 5세가 죽자 합법적인 계승자가 된 보두앵의 어머니 예루살렘의 시빌라는 남편 뤼지냥의 기를 공동 왕으로 앉혔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시빌라와 기, 샤티용의 레날드, 성전 기사단의 "궁정파"와 트리폴리의 레몽 3세가 이끄는 "귀족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양측의 긴장은 고조되어 거의 전면전으로까지 벌어지기

직전이었는데 이벨린의 발리앙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한편 이슬람측은 살라흐 앗 딘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져 왔는데 살라딘은 1177년 몽기사르의 패배이후 심자군과 휴전협정을 맺고 이집트와 다마스쿠스에서 힘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레날드는 휴전협정을 위반하고

이슬람 카라반을 공격하고 메카를 위협했다.기는 레몽과 화해하고 아크레에서 레몽의 군대와 힘을 합쳐

살라흐 앗 딘의 군대와 맞서 싸우려고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전투 경과

기는 트리폴리의 레몽과 화해하고 아크레에서 군대를 합쳐 공동으로 살리흐 앗 딘의 위협에 대처하기로 했다. 1187년 7월 십자군은 이 갈릴리 남단의 세포리스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살라흐 앗 딘은 십자군을 세포리스에서 유인하기 위해 친히 일부 병력을 이끌고 북쪽의 레몽의 요새인 티베리아스를 공격했고 주력 부대는 남겨두었다. 티베리아스는 살라흐 앗 딘을 맞아 공물을 바치고 공성전을 피하려했으나 살라딘은 거부했고 7월 2일 도시를 함락시켰다.

이튿 날, 기와 레몽의 기독교 연합군은 티베리아스를 구하기 위해 세포리스를 출발하였는데 레몽이 선발대를 맡고 기는 본진을 발리앙과 레날드, 기사단은 후위를 맡았다. 살라딘은 기가 자신의 미끼를 물었다고 생각하고 주력 부대로 하여금 십자군의 진군로를 포위하고 보급로를 끊었다. 십자군은 하틴 마을 근처의 구릉지에서 이슬람군에 포위된 채 숙영했다. 이슬람군은 근처의 우물을 장악하고 십자군을 고립시켰다.

7월 4일 새벽 이슬람군은 연기를 피워 십자군의 시야를 가렸고 밤새 보강된 병력으로 십자군을 포위했다.

십자군은 전 날의 행군과 밤새 물을 구하지 못해 심한 갈증으로 고통으 겪었고 허둥지둥 전선을 갖추고 이슬람군의 공격을 대비하려 했고 완전히 포위당한 것을 알자 막사를 거두고 근처의 우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이슬람군은 십자군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고 십자군은 갈증과 공황에 빠져 거의 몰살당했다.

결과

대부분의 십자군 기사와 보병은 전투 중에 죽었고 기와 레날드 등 많은 십자군 장군들이 포로로 잡혔다.

레몽과 발리앙은 겨우 살아서 도망쳤다. 살라흐 앗 딘은 막사에 끌려온 기에게를 얼음 물을 주면서 환대했다고 전해진다. 샤티용의 레날드는 살라딘과의 맹세를 깨버린 벌로 살라흐 앗 딘이 직접 목을 잘라 처형했고 예루살렘의 왕 기는

포로로 성십자가와 함께 다마스쿠스로 이송되었다.

이 전투의 패패로 십자군의 주력은 분쇄당했고 살라흐 앗 딘은 9월 까지 아크레, 야파, 시돈, 아스칼론을 차례로 점열했다 티레몬페라토의 코라도의 활약으로 점령 당하지 않았지만 예루살렘여왕 시빌라와 발리앙이 살라흐 앗 딘에 맞서 저항하다가 결국 10월 2일 항복하고 내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