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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의 우표와 사건 06.25 6.25사변일

오늘의 우표와 사건 06.25     6.25사변일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0 - 한국전쟁 60돌 

[사설] 한국전쟁 60돌, 그 긴 상처와 불안한 평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한 갑자가 지났지만 우리의 마음은 가볍지 않다. 분단체제가 여전한데다 우리 내부의 극복 노력조차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의 한반도 정세 불안은 과거의 부정적 유산에 기초한 남북 당국의 섣부른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보여준다.

전쟁은 3년 만에 끝났지만 그 상처는 지금도 아물지 않고 있다. 전쟁의 직접적 피해자만 당시 인구의 10%에 이르렀고,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이산가족이 생겼다. 현재 60만~70만명으로 추산되는 남쪽 이산가족 가운데 북쪽 가족을 만난 사람은 대면·화상 상봉을 다 합치더라도 2만4000여명에 불과하다. 전쟁 당시 곳곳에서 있었던 민간인 학살, 납북자·월북자 가족의 고통, 국군포로·납북자 문제 등도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

한국전쟁은 분단체제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심심찮게 일어나는 남북 군사충돌과 휴전선 주위에 배치된 대규모 병력은 한국전쟁의 직접적 잔영이지만, 남북 대결을 앞세운 비민주적 억압구조가 사라지지 않는 것도 한국전쟁과 무관하지 않다. 남북의 적대적 공존을 바탕으로 성장한 냉전세력은 한국전쟁에서 자양분을 얻어왔고, 그 관성은 아직도 이어진다. 이런 현실은 지금의 불안한 정전체제를 극복하지 않는 한 평화는 수시로 깨지고 민주주의 발전도 지체될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평화체제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한 까닭이다. 사실 정전체제가 60년 가까이 지속되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다. 평화체제 얘기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이미 1990년대에 평화협정 체결 문제가 관련국들 사이에서 제기됐고, 2005년 9·19공동성명에도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를 논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미국도 북한 핵 협상과 평화체제 논의를 함께 진전시키는 데 동의한다. 평화체제의 주체는 남북이며, 논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정부의 전향적 태도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까닭이다.

대통령 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최근 정책 건의서에서, 천안함 사건에 매몰되지 말고 남북관계 출구전략 마련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평화를 바라는 민심은 지방선거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이제 정부는 막연한 북한붕괴론에서 벗어나 한반도 평화를 보장하고 핵문제를 풀 수 있는 실질적 행동에 나서기 바란다. 이제 한국전쟁이라는 긴 터널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사설] /한겨레 2010-06-24 오후 09:15:16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427400.html

 

 

 

 

2009 -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공개 전시 기념행사

다시 북녘을 향해… ‘달리고 싶은 철마’

경의선 마지막 증기기관차 임진각 야외전시장서 공개

반세기 이상 비무장지대에 방치돼 있던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등록문화재 제78호)가 일반에 공개됐다.
문화재청과 경기도 등은 한국전쟁 발발 59주년인 25일 파주 임진각 독개다리 입구(옛 경의선 하행선) 야외전시장에서 장단역 증기기관차 공개 기념식을 열었다.
장단역 증기기관차는 야외전시장(1670㎡)에서 북쪽을 향해 전시됐으며, 보존처리 과정에서 발견된 파편 등 425점도 함께 선을 보였다. 또 증기기관차 연실에 쌓인 50㎝ 두께 흙속에서 자라던 산뽕나무 한 그루도 전시장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증기기관차는 일본 가와사키사가 1943∼45년에 제작한 길이 15m, 폭 3.5m, 높이 4m, 무게 80t의 산악지형에서 화물운송에 적합한 마터형이다.
이 기관차는 1950년 12월 31일 마지막 기관사 한준기(83)씨가 군수물자를 싣고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던 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황해도 한포역에서 후진 운전해 다시 개성역을 거쳐 장단역에 도착한 뒤 폭격을 당해 멈춰섰다.
그 뒤 반세기 이상 비무장지대에 붉게 녹슬고 부식된 채 방치돼 있었으나 ‘남북 분단의 상징물’로 문화재로 등록되면서 보존처리과정을 거쳐 임진각 옛 경의선 하행선 철로 위에 전시하게 됐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기념사를 통해 “증기기관차에 남아있는 1020개 총탄 자국보다 가슴속에 더 많은 상처를 가진 이산가족들이 ‘달리고 싶은 철마’를 보면서 평화와 통일의 꿈을 이어갈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경의선 마지막 기관사 한씨는 “통일이 이뤄져 기관차를 타고 평양을 거쳐 신의주, 만주까지 갈 수 있는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파주=김영석 기자 /세계일보 2009.06.26 (금) 11:21
http://www.segye.com/Articles/News/WholeCountry/Article.asp?aid=20090625005007&ctg1=09&ctg2=00&subctg1=09&subctg2=00&cid=0101070900000

 

 

 

 

 

2009 -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Jackson, Michael) 사망

잭슨 [Jackson, Michael, 1958.8.29~2009.6.25]

[어제의 오늘]2009년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사망

ㆍ인기만큼 루머에 시달린 일생

마이클 잭슨은 1958년 8월29일 미국 인디애나주 게리에서 9남매 중 7번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클라리넷 연주가, 아버지는 기타리스트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던 마이클 잭슨은 5살 때 아버지에게 이끌려 ‘잭슨 파이브’로 데뷔한다. 리드 보컬을 맡은 그는 미성의 고음 처리로 눈길을 끌었고 잭슨 파이브는 당시 흑인 그룹 최초로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마이클 잭슨의 음악인생은 최고 뮤지션이자 실력파 작곡가인 퀸시 존스를 만나면서 도약대에 선다. 79년 발표한 첫 솔로앨범 ‘오프 더 월’에서 그는 재즈, 펑크, R&B, 댄스 등 다양한 장르의 화려한 흑인음악을 선보였다. 폴 매카트니, 스티비 원더 등이 게스트로 참여한 이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1500만장 넘게 팔리며 79년 당시 가장 많이 판매된 앨범으로 기록됐다. 이후로도 앨범 ‘스릴러’(82년)가 전 세계적으로 1억400만장 판매되는 등 지금까지 팔린 그의 앨범은 모두 7억5000만장이 넘는다. 특히 ‘스릴러’에 수록된 곡 중에서 ‘비트 잇’과 함께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빌리 진’은 문워크(Moon walk)라 불리는 독특한 안무로 전 세계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치솟는 인기와 그를 향한 세상 관심의 크기만큼 이런저런 루머가 그를 따라다녔다. “성형중독이다” “백인이 되고 싶어 피부를 벗겨냈다”는 등의 의혹은 시작에 불과했다. 93년 터진 아동 성추행 고소사건으로 그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을 맞게 된다. 훗날 무죄로 밝혀졌지만 한 번 덧씌워진 세간의 부정적 시선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음악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때 한국을 방문하는 등 그는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팝의 전설이 되었다.
마이클 잭슨은 지난해 영국 런던 등에서 콘서트를 열고 화려한 부활을 선포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콘서트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지난해 6월25일 급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뜬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검시소는 올해 초 부검보고서에서 사망원인을 타살로 결론지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의 주치의는 잭슨에게 강력 수면제 프로포폴을 처방한 사실을 시인했다.
LA 경찰은 과실치사 혐의로 주치의를 기소한 상태다.

권재현 기자 jaynews@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6-24 17:38:0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6241738035&code=100100&s_code=ap005

 

 

 

 

 

2009 - 미국의 배우 파라 포셋(Fawcett, Farrah) 사망  

포셋 [Fawcett, Mary Farrah Leni, 1947.2.2~2009.6.25]

원조 ‘미녀 삼총사’ 파라 포셋 사망

연인 라이언 오닐 곁에서 눈감아

텔레비전 시리즈 <미녀 삼총사>(Charlie’s Angels)에 출연해 1970년대를 상징하는 ‘섹스 심볼’로 떠올랐던 배우 파라 포셋이 25일 암투병 끝에 숨졌다. 향년 62.  

2006년 희귀한 항문암 판정을 받은 뒤 투병생활을 해온 포셋은 이날 산타 모니카의 병원에서 오랜 연인 라이언 오닐 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에이피>(AP) 통신 등이 전했다. <러브 스토리>의 주연 배우이자 포셋의 오랜 연인, 아들 레드먼드의 아버지였던 라이언 오닐은 “암과 용감하게 싸워온 사랑스러운 파라가 세상을 떠났다”면서 “가족과 친구들은 아주 힘들지만 파라와 함께 했던 아름다운 시간과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었던 그의 인생을 알기에 위안을 찾는다”고 말했다.

포셋은 자신의 암투병과 사생활 보호를 위한 노력을 담은 진솔한 비디오 일기인 <파라의 이야기>를 제작해 지난달 <엔비시>(NBC)를 통해 방영하기도 했다.

텍사스주 출신인 포셋은 텍사스주립대학 10대 미녀로 뽑힌 사진이 영화계 인사의 눈에 띄어 연예계에 데뷔했다. 1976년 비밀에 싸인 백만장자의 지시를 받고 범죄와 싸우는 여성들의 이야기인 <미녀 삼총사>에 출연하면서 빛나는 금발과 환한 미소로 금새 스타가 됐다. 당시 포셋이 몸에 꼭 붙는 붉은 수영복을 입고 찍은 포스터는 수백만장이 팔리면서 그 시대의 상징이 됐고, 그의 금발 헤어스타일도 미국 여성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포셋은 <미녀삼총사>로 유명세를 얻은 뒤 곧 이를 그만 두고, 영화와 연극 등에 출연하면서 ‘섹스 심볼’ 이미지를 넘어선 진지한 역할을 맡아 연기력을 보이려 노력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600만불의 사나이>의 리 메이저스와 이혼 한 뒤 1980년부터 17년 동안 오닐과 함께 살다 헤어졌다. 하지만 두 사람은 2001년 오닐이 백혈병 진단을 받은 뒤 다시 만났으며, 오닐은 암투병 중인 포셋의 곁을 지켰다. 오닐은 “포셋이 건강해지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웨딩드레스도 준비했다”고 밝혔으나, 포셋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한겨레 2009-06-26 오후 06:23:18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362574.html

 

 

 

 

2002 - 한국, 월드컵 준결승전서 독일에 0대1 패

 

아시아 국가로서는 사상 최초로 4강에 진출한 한국은 독일과 결승 진출을 놓고 격돌했으나, 1대 0으로 패했습니다.

세계적인 강호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차례로 무너뜨린 한국 대표팀은 25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02 한일월드컵 축구대회 준결승에서 체력 부담을 극복하지 못하고 독일에 0-1로 아쉽게 패했습니다.

이로써 한국은 오는 29일 대구 월드컵경기장에서 브라질-터키전 패자와 3-4위전을 갖게 됩니다.

미하엘 발라크의 골로 월드컵 통산 7번째 결승에 오른 독일은 30일 요코하마에서 4회째 우승에 도전합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들의 소진된 체력을 감안해 차두리, 이천수를 선발 투입하고 16강전 이후 비교적 출장시간이 적었던 황선홍을 안정환 대신 처음부터 뛰게했으나 한국팀의 움직임은 둔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여러 차례 독일 문전을 위협해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점을 과시했습니다. 한국은 후반에 들어서 노이빌레의 패스를 받은 미하엘 발라크에게 결승골을 내줬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수비 홍명보 대신 설기현을 투입하며 총 공격을 펼쳤지만 마지막의 몇차례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결국 1대 0으로 패했습니다.

/VOA news 06/25/2002
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2-06/a-2002-06-25-1-1.cfm?moddate=2002-06-25
 

 

 

 

    

 

1997 - 프랑스의 해양탐험가 쿠스토(Cousteau, Jacques-Yves) 사망  

쿠스토 [Cousteau, Jacques-Yves, 1910.6.11~1997.6.25]

프랑스의 해양학자·영화제작자·발명가.

자신의 해저탐사를 담은 많은 책과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등을 통해 해양환경연구를 대중화시켰다. 과학자가 되기 위한 정기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쿠스토는 바다와 잠수를 좋아해 해저탐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3년 프랑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소위로 임관했다. 해군비행사가 되고자 했던 그의 꿈은 자동차 사고로 양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좌절되고 말았다. 요양 기간에 쿠스토는 잠수안경을 착용한 잠수법을 착안했고, 여기에 매력을 느낀 그는 에밀 가냥과 함께 스쿠버로 알려진 잠수용 수중호흡기를 발명했다. 스쿠버는 1946년 상업화되었다. 쿠스토는 그밖에도 조작이 쉬운 소형 해저 탐사용 잠수정과 수중 카메라 등 해양학자들에게 필요한 도구들을 발명하는데 기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 쿠스토는 프랑스에서 포병장교로 복무했으며,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싸웠다. 훗날 그는 첩보활동의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쿠스토의 수중촬영실험은 전쟁기간에 이루어졌으며, 전쟁이 끝나자 쿠스토는 프랑스 해군의 해저연구단을 창설하고 단장이 되어 수중촬영에 대한 연구를 계속 이어나갔다. 1948년 프랑스 해군의 소령이 되었고, 1950년에는 프랑스 해양학단체(French Oceanographic Campaigns) 회장이 되었는데, 그 해 영국의 소해정을 인수해 해양탐사선 칼립소호로 개조하고 부함장으로서 수많은 탐사활동을 수행했다. 해양탐사 연구활동의 일환으로 쿠스토는 수많은 판매·제조·공학·연구 기구들이 설립했으며, 이들은 1973년에 쿠스토그룹에 통합되었다. 그는 〈침묵의 세계 The Silent World〉(1953)를 발간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2년 후 쿠스토는 이 책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었는데, 이 영화는 1956년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1957년에는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그가 제작한 영화 2편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1956년에 대령으로 해군에서 전역한 쿠스토는 이듬해 모나코 해양학박물관 관장이 되었다. 1957년 컨셀프 세처레이션 다이브 프로그램(Conshelf Saturation Dive Program)의 책임자가 된 뒤 1960년대초 각각 컨셀프 1호, 컨셀프 2호, 컨셀프 3호로 명명한 해저실험실에서 대륙붕을 따라 상당한 깊이에서 인간이 얼마나 오랫동안 생존하고 작업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수행했다. 쿠스토는 1968~76년 미국에서 방영된 시리즈물 〈자크 쿠스토의 해저세계 The Undersea World of Jacques Cousteau〉를 포함해 많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출연했다. 1974년 그는 바다의 환경을 보존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비영리 환경단체인 쿠스토협회를 설립했다. 저서로 〈수심 18m를 통과하여 Par 18 mètres〉(1946)·〈살아 있는 바다 The Living Sea〉(1963)·〈갈라파고스·티티카카·블루홀스에서의 모험 Three Adventures:Galágos, Titicaca, the Blue Holes〉(1973)·〈돌고래 Dolphins〉(1975) 등이 있으며, 사후에 〈인간과 문어와 난초 Man, the Octopus, and the Orchid〉가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993 - World Conference on Human Rights, Vienna (14~25)

On 25 June 1993, representatives of 171 States adopted by consensus the Vienna Declaration and Programme of Action of the World Conference on Human Rights, thus successfully closing the two-week World conference and presenting 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 common plan for the strengthening of human rights work around the world. 

The conference was marked by an unprecedented degree of participation by government delegates and the international human rights community. Some 7.000 participants, including academics, treaty bodies, national institutions and representatives of more than 800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NGOs) - two thirds of them at the grass-roots level - gathered in Vienna to review and profit from their shared experiences.

United Nations Secretary-General Boutros Boutros-Ghali, in a message to the Conference, told the delegates that by adopting the Vienna Declaration and Plan of Action they had renewed the international community's commitment to the promotion and protection of human rights. He saluted the meeting for having forged "a new vision for global action for human rights into the next century". 

The Vienna Declaration and Program of Action marks the culmination of a long process of review and debate over the current status of human rights machinery in the world. It also marks the beginning of a renewed effort to strengthen and further implement the body of human rights instruments that have been painstakingly constructed on the foundation of 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since 1948. ...

Tunis, Tunisia                2-6 November 1992

San José, Costa Rica    18-22 January 1993

Bangkok, Thailand         29 March-2 April 1993

Vienna, Austria              14-25 June 1993

/Google

 

 

 

   

 

1987 - 김대중, 자택 연금에서 해제

감금해제 1987. 6. 25
정치인 김대중 씨가 자택에서 연금 된지 78일 만에 감금에서 해제되었다.
동교동 집에 국내외 기자들이 몰려와서 집중적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거실 한쪽 벽에 감금 날짜를 지워 나간 '불법감금'이라고 씌어있는 현판 앞에서 김대중 씨가 전화를 받고 있다.
그는 1985년 2월에 미국에서 귀국한 후 54차례에 걸쳐 186일 동안 연금을 당해왔는데, 한번에 78일의 연금이 가장 길었다고 한다.
야당 정치인을 가둬놓고 정치하는 것이 민주주의는 아닐 것이다.
페어플레이를 하지 못하는 암울한 한국 정치의 현실을 언제까지 찍으려 다녀야 하는 것인지 몰라 씁슬했다.

/전민조(田敏照)의 사진기자 수첩(1968-1991)
"그때 그 사진 한 장"
(눈빛,2000년8월15일 초판1쇄 발행 ,총221페이지, 가격9500원) 

http://phototeq.com/phototeq2001/photo_minjo.html 

 

 

 

 

1986 - 한국의 쇼트트랙 선수 이호석(李昊錫) 출생

이호석 [李昊錫, 1986.6.25~ ]

이호석(李昊錫, 1986년 6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이다. 현재 고양시청 소속 이다.

학력

경희대학교대학원

선수 활동

* 200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하면서 세계무대에서 처음으로 주목을 받았고, 2004년 베이징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와 2005년 베오그라드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를 내리 석권, 최초로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종합 우승 3연패를 달성하였다. 이는 현재까지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남자 5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1000m와 1500m에서 은메달을 땄다.

* 2009년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종합우승을 했다.

* 2010년 벤쿠버 동계 올림픽 남자 1500m 결승전에서 성시백과 마지막 코너에서 경합하다가 성시백 선수의 진로를 방해하며 무리하게 추월을 시도, 성시백과 함께 넘어져 실격처리되었다. 남자 1000m에서는 이정수에 이어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 2010년 3월에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여 남자 1000m와 3000m 슈퍼파이널에서 우승하면서 세계선수권 종합 우승 2연패를 달성하였다. 3000m 슈퍼파이널에서 세계기록에 불과 3초 뒤진 4분 35초 71의 대회 신기록으로 피니쉬 라인을 통과하였으나, 레이스를 한 선수 전원이 1바퀴 덜 돈 사실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으며 결국 순위는 인정받았지만 기록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별명 /위키백과

 

 

 

 

1984 - 임시수도기념관(부산) 개관(지정) 

임시수도기념관(구 경남도지사 관사)
임시수도기념관은 서구 부민동 2가 2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진주에 있던 경상남도 도청이 부산부 부민동으로 옮겨 온 것은 1925년 4월 17일이었다. 그에 따라 부민동 3가 221번지에 경상남도지사 관사가 1926년 8월에 준공되었다. 건물은 목조 2층 일식기와집 양식이다. 그 이후 줄곧 도지사 관사로 쓰이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 수도가 서울에서 대전·대구를 거쳐 8월 18일에 부산으로 옮겨져 경상남도 도청은 중앙정부 청사의 중심부가 되고, 도지사 관사는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게 되었다.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고, 도지사 관사가 대통령이 집무하는 관저가 된 것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정부가 부산으로 이전한) 1950년 8월 18일 이후였다. 그러나 그해 9월 28일 서울 수복과 함께 정부는 서울로 환도(10월 27일)하였다. 하지만 중공군 개입으로 1951년 1.4후퇴로 다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어 1953년 7월 27일의 휴전협정 성립과 함께 환도(8월 15일)할 때까지 부산은 중앙정부의 임시수도 역할을 하였다.
1963년 부산시가 정부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경상남도의 관할에서 벗어나고, 경상남도 도청은 1983년 7월 1일 창원에 새청사를 신축하여 옮겨갔다. 1984년 11월 1일부터는 부산지방검찰청과 부산지방법원청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도지사 관사는 1984년 6월 25일 임시수도 당시의 역사적인 사실과 유물전시를 위하여 임시수도기념관으로 지정되었다.
기념관에는 임시수도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의 유품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품이 여섯개 방에 전시되었다. 임시수도기념관은 한국전쟁 44주년을 맞아 1997년 6월 24일에는 한국전쟁의 내용과 임시수도로서의 부산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기념관으로서 민족상잔의 역사를 이해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새천년을 맞아 시에서는 건물의 개·보수와 한국전쟁 당시의 생화유물 등을 수집, 구입을 토해 새롭게 단장하여 재개관 하였다. 시에서는 건물의 전면 개보수를 통하여 전시공간의 재단장을 위한 시설공사를 진행하여 2001년 상반기 개관예정이다. 부산광역시에서는 기념물 제53호(2002. 5. 6 지정)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네이버 지역정보

http://local.naver.com/lin/lin_detail.php?dir_id=1202&docid=699164&status=db

 

 

 

 

1981 - 전두환 대통령 아세안 5개국 방문 등정

전두환 대통령 아세안 5개국 순방

1981년 6월과 7월에 걸쳐서 전두환 대통령은 ASEAN(The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5개국(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타일랜드)을 순방하여, 이 지역 국가들과의 협력을 위한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순방으로 한국과 아세안은 아시아 지역의 안정과 평화, 번영, 그리고 선진공업국가들의 보호무역정책에 공동관심을 표명하면서 상호 협력할 것을 천명하였다. 아세안 순방에서 한국은 축적하고 있는 개발 경험을 제공하고 재정, 건설 등 분야에서 합작과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으며 실제로 구체적인 합의를 보았다. 아세안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경제개발계획〉에 한국이 참여하여 인적자원 개발과 사회간접시설 확충에 협력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구체적인 합의사항은 개별국가와의 공동성명에 반영되었으며,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협의가 1981년 7월부터 각국 관계 장관 등의 서울 방문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전두환 대통령의 아세안 방문은 〈통상장관회의〉의 연례개최 등 경제협력 촉진을 위한 정부차원의 합의를 진행시키기로 한 것 이외에, 민간경제협력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또한 한국은 캄보디아문제 해결에 외교적으로 아세안 국가들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한국의 북한에 대한 통일문제에 아세안 국가들의 지지를 유도하였다. 아세아 국가와의 협력시대 개막은 태평양 연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정치적.경제적 상황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태국, 미국, 호주, 캐나다 등 세계의 곡창은 물론, 일본 등 주요 공업국가도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싱가포르, 한국 등이 신흥공업국가로 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과 역사적 추세로 볼 때 태평양연안국가가 참여하는 태평양시대에 대비하여 한국은 이들 국가과의 관계강화를 통해서 장기적으로 ‘태평양공동체’ 구상을 위한 한국 정부의 역할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전상숙(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2006. 12. 01 /국가기록원 나라기록 

http://theme.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jsessionid=

s27HMZdcwyvTn0Lb5FH5VnpZ0ns18g2Tnrgsvg25ppFb4tvvJ23f!-1079504854?id=002833&pageFlag=

 

 

 

- Bobby Fischer & Vladimir Kramnik (Left)

 

1975 - 러시아의 체스 대가 블라디미르 크람니크(Kramnik, Vladimir) 출생

크람니크 [Kramnik, Vladimir Borisovich, 1975.6.25~ ]

Vladimir Borisovich Kramnik (Russian: Влади́мир Бори́сович Кра́мник; born 25 June 1975) is a Russian chess grandmaster. He was the Classical World Chess Champion from 2000 to 2006, and the undisputed World Chess Champion from 2006 to 2007. He has also won the two strongest tournaments (by rating strength) in chess history: the 2009 Mikhail Tal Memorial and the 2010 Grand Slam Masters Final.

In October 2000, he defeated Garry Kasparov in a match played in London, and became the Classical World Chess Champion. In late 2004, Kramnik successfully defended his title against challenger Péter Lékó in a drawn match played in Brissago, Switzerland.

In October 2006, Kramnik, the Classical World Champion, defeated reigning FIDE World Champion Veselin Topalov in a unification match, the World Chess Championship 2006. As a result Kramnik became the first undisputed World Champion, holding both the FIDE and Classical titles, since Kasparov split from FIDE in 1993.

In 2007, Kramnik lost the title to Viswanathan Anand, who won the World Chess Championship tournament ahead of Kramnik. He challenged Anand at the World Chess Championship 2008 to regain his title, but lost.

Kramnik has qualified for the Candidates Tournament which will determine the challenger to face World Champion Anand in the World Chess Championship 2012.

 

Early career

http://en.wikipedia.org/wiki/Vladimir_Kramnik

 

 

 

- '한국에서의 학살' 109.5×209.5㎝, 1951, 파리 피카소미술관  

 

1960 - 북한 황해남도 신천에 신천박물관(역사박물관) 개관

신천박물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황해남도 신천군1960년 6월 25일 건립된 역사 박물관이다.

본래 1947년 신천군 인민위원회 건물로 지어졌다가 한국 전쟁 중 미군이 정렴하여 미군 사령부로 사용한 곳이다. 2003년의 기록에 의하면 1관 16호실, 2관 3호실 등 2개 건물 총 19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신천 지역은 한국 전쟁 중 미군이 전체 군민 수의 4분의 1에 이르는 3만 5천 383명을 학살했다는 곳으로, '죽음의 땅', '원한의 땅'으로 불린다. 북조선에서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한국 전쟁 발발 10주년이 되는 날 이 곳에 신천박물관을 개관하고 반미교양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학살이 일어난 기간은 박물관 측의 주장에 따르면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0여일 동안이며, 희생자 3만여 명 가운데 어린이, 노인, 부녀자가 1만 6천 234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미군이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목을 작두로 잘라 살해하고,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창고에 가둬 아사시키거나 질식시키고 불태웠으며, 잔인하게 고문해 죽이기도 했다는 주장이다.

신천박물관에는 학살 관련 유물과 자료, 폭격 피해, 세균전 및 화학전에 대한 자료 수천 점이 전시되어 있다. 민간인들이 불태워져 학살된 장소로 주장하는 방공호와 '400 어머니묘', '102 어린이묘'와 같은 희생자들의 합장묘가 조성되어 있으며, 생존자의 증언도 들을 수 있다. 북조선의 대표적인 반미교육장이므로 반미 성토모임이나 결의모임 등 관련 행사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김정일1998년 11월 이 박물관을 방문하여, 일부에서 "미 제국주의자의 야수성과 악랄성, 잔인성, 교활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신천박물관이 인민의 미국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과 비타협적인 투쟁정신"을 기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지시한 바 있다. /위키백과

 

'조선에서의 대학살'과 <손님> 

한국전쟁은 한반도 전반에 걸친 우리 민족의 정신적 암흑기였다. 죄 없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좌우익의 대립으로 무참히 죽어갔다. 미군에 의해 400여 명의 피난민들이 학살당한 노근리 사건, 700여명의 거창 주민들이 인민군 부역자로 몰려 국방군에 의해 학살당한 거창 양민 사건, 인민군들이 우익을 처형한 인민재판 등. 전쟁 중 광기 어린 학살은 황해도 신천리에서 아비규환의 절정에 이른다.

1950년 10월 17일부터 같은 해 12월 7일까지 황해도 신천에서는 당시 군 인구의 약 4분의 1이었던 3만 5000여 명이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전 세계 언론은 신천대학살을 집중 보도하였고, 이것을 소재로 현대 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는 '조선에서의 대학살'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피카소는 갑옷으로 중무장한 군인들의 총칼 앞에 벌거벗겨진 여인과 어린아이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섬뜩하게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은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그린 '게르니카'와 함께 대량 학살의 잔인성을 폭로하는 피카소의 대표적 반전 작품이 되었다. 피카소는 프랑스의 공산당원이었으며, 자신의 그림을 공산주의자의 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레닌 평화상을 수상하였고 스탈린의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북한은 신천대학살을 미군의 만행이라고 주장하며, 신천박물관을 세워서 반미의식을 고취시키는 장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신천대학살이 좌우익간의 충돌이 빚은 비극으로, 미군에 의한 만행이라고 단정할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좌우익간의 충돌이란 신천지역의 기독교인을 주축으로 구성된 반공청년단이 봉기하여 빨갱이와 그 가족들을 무참히 살상하였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작가 황석영은 그의 소설 <손님>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적대적 대립이 신천에서 상호학살의 계기가 되었다고 조명한다.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두 손님인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신천에서 그 손님의 역할을 바꿀 때마다 어떻게 학살을 정당화하였는가 냉정하게 밝히고 있다. ...

[최상한 집사 schoi1@fau.edu 플로리다아틀란틱대학 행정학과 객원교수]
글쓴이: 최상한 집사, 남부플로리다한인연합감리교회 FL
올린 날: 2007년 12월 5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  

http://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12524

 

 

 

 

 

1959 -  이몬 발레라 아일랜드 대통령 취임
1959년 오늘!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아버지 이몬 드 발레라(Eamon de Valera)가 77살의 나이에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발레라의 대통령 취임식은 더블린궁에서 엄숙하게 거행됐다.
발레라는 1973년 6월까지 아일랜드의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발레라는 1917년 신페인당 의장이 돼 영국에 항전하는 등 젊은 시절부터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937년 국호(國號)를 '에이레'로 정하고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1949년에는 부활절봉기 33주년을 기념해 국명을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개칭하고 영국연방에서 이탈해 완전독립을 이뤄냈다. /YTN


 

 

 

1952 -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어제의 오늘]1952년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ㆍ저격범 “이런 대통령, 그냥 못 둬”

6·25 전란이 한창이던 1952년 6월25일 임시수도인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는 ‘6·25멸공통일의날’ 기념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오전 11시 이승만 대통령의 훈시 도중 단상 뒤 VIP석에 앉아있던 한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와 이 대통령을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거리는 불과 3m 남짓, 하지만 탄환 불발로 저격은 실패한다.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은 의열단(義烈團) 출신 유시태(柳時泰·1890~1965·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였다.
62세의 유시태는 민주국민당 소속 김시현(金始顯·1883~1966·왼쪽에서 두번째) 의원의 양복을 빌려 입고 김 의원의 신분증을 소지한 채 행사장으로 들어왔다. 유시태와 김시현은 같은 경북 안동 출신이며 두 사람은 일제 때부터 의열단원으로 상하이를 비롯해 해외 각처에서 일본인들을 공격했다가 10여년의 옥고를 치렀던 애국지사들이었다. 유시태에 이어 그에게 권총과 양복을 제공한 혐의, 사실상 암살 사주 혐의로 김시현 의원 역시 체포됐다. 이때 부산은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을 위한 ‘발췌 개헌’을 추진하면서 정치파동이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두 달 뒤인 8월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저격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김시현은 사실심리에서 암살시도 동기를 묻는 재판장의 질문에 “이 대통령은 독재자이며 정실인사를 일삼을 뿐만 아니라 민생문제를 해결할 역량도 없다”고 답한다.
“6·25 발발 6개월 전부터 북한은 전쟁준비로 분주했음에도 정보에 어두웠다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이고 “개전 이튿날 방탄차를 타고 도망가면서 백성들에게는 안심하라고 뱃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한강 철교를 끊어 시민들의 피란을 막았으면 국가원수로서 할복자살을 해도 용납이 안될 판에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으니 어찌 대통령이라 하겠는가”라며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또 “국민방위군사건·거창양민학살사건 등으로 민족 만대의 역적이 된 신성모(申性模·1891~1960·전 국방장관)를 죽이기는커녕 되레 주일대사를 시키는 그런 대통령을 그냥 둘 수 없었다”며 “암살 후 누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에 둔 사람은 없으나 누가 하더라도 이승만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김시현은 자신은 30년간 조국광복을 위해 살인·파괴를 해 온 사람이라고 강조하며 70세의 노인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정정한 기력으로 명쾌하게 응수했다고 전한다.
유시태는 법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권총 탄환을 일부러 물수건에 적셔 두었다가 불발탄으로 만들었다”고 진술, 살해의사가 없었음을 주장했다. 하지만 4·19혁명 이후 석방될 때는 “그때 권총이 발사되기만 했더라면 이번에 수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지 않았을 터인데, 한이라면 그것이 한이다”라고 출소 소감을 밝혔다.
두 사람은 53년 12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듬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다 60년 ‘4·19 혁명’ 후 과도정부에서 국사범 제1호로 출소했다.
정진호 기자 hotmail@kyunghyang.co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6242122395&code=100100&s_code=ap005 

 

 

 

 

1951 - 미 CBS방송, 최초의 상업 칼러TV방송 개시

미국의 콜롬비아방송(CBS)이 세계 최초로 상업컬러 방송을 1951년 6월 25일 오후 4시 35분부터 시작했다. 제1회 출연자는 FCC(연방통신위원회) 이사와 연예인들이었다. 방송은 CBS가 개발한 회전원반방식(回轉圓盤方式)으로 진행됐다.
컬러TV방송은 이 CBS방식과 RCA의 3전자총방식(3電子銃方式)이 경쟁하고 있었다. CBS방식은 화질이 뛰어나지만 전용 수상기를 필요로 하고, RCA 방식은 흑백의 화상으로 되어있는 종래의 수상기에서도 수신이 가능하지만 색번짐이 심했다.
그래서 FCC는 CBS를 허가, 이날 정기방송을 개시할 수 있었다. RCA는 소송을 제기하며 반격했다. 그러나 10월 19일 국방동원국은 6·25전쟁의 전략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컬러TV 수상기 생산중지를 CBS에 요청, 컬러방송은 연말에 중지됐다. 나중에는 호환성의 문제가 제기되어 RCA사의 全전자식 NTSC(National Television System Committee) 방식이 미국의 표준규격으로 채택되어 1954년 1월부터 방송되기 시작했다. /조선

 

 

 

    

 

1950 - 6.25 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38선 여러 지역에서 북한의 공세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북한 인민군이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만에 대구, 부산 등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을 장악하게 됐다. 그러자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 국제연합군 참가를 결의하게 되고 이로써 전쟁은 국제전화되었다.

미군을 주로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1950.9.15), 서울을 탈환하고(9.28), 38도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10.13), 한국군 일부가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10.26)하였으나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공이 개입(10.25)함에 따라 전세가 역전, 휴전 교섭에 들어가게 되었다. 소련 유엔대표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받아들여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휴전회담이 진행되어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 인민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전쟁은 끝나고 휴전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6.25전쟁은 남북 쌍방에 약 150만명의 사망자와 360만명의 부상자를 냈고, 국토의 피해를 가져왔다. 해방후 5년 만에 일어난 민족통일을 표방한 전쟁이었으나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분단체제를 강화시키는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1916 - 일제, 조선총독부 청사 착공식(지진제)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는 명분으로 경복궁의 흥례문 구역을 몽땅 헐어낸 것이 1914년 7월이고, 다시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겠다고 지진제(地鎭祭)를 올린 것이 1916년 6월 25일이었다. 그로부터 건물을 완공하여 이른바 시용식(始用式)을 거행한 것이 1926년 1월 4일이었다. 그러니까 다 지어올리기까지 무려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http://www.sacho.pe.kr/bbs/board.php?bo_table=news&wr_id=57&sfl=

wr_subject%7C%7Cwr_content&stx=%C3%BB%BB%E7

 

그 후 1926년 10월 1일 오전 11시, 총독부 청사 완공식. 그날 오후 5시, ‘아리랑’이 개봉되었다. 무성영화 ‘아리랑’은 4개월의 제작기간, 1200원의 제작비, 9000피트의 필름을 사용해 조선총독부 건물 준공에 때맞춰 개봉된 것이다.

http://blog.empas.com/sisc60/

 

 

[조선총독부 청사 건축] 

기 공 식  - 1916.06.25

시 용 식  - 1926.01.04

청사이전 - 1926.01.06

준 공 식  - 1926.10.01  

 

 

 


1907 -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알리기 위한 헤이그 밀사 3명, 헤이그 도착 
1906년 6월 고종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로부터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 2차 만국평화회의 초청장을 받았다. 이 회담이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제의 한국침략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고종은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평리원 검사 이준, 주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등 3명을 밀사로 파견했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이상설과 이준, 이위종 등 대한제국 대표단 일행 3명은 각 국 대표를 만나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설명하고 호소문 제출 등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주희 동아닷컴 기자 zooey@donga.com /동아닷컴TV 2010-06-24 13:17:57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사설칼럼][내생각은…] 헤이그 특사 100년 … 세계를 향한 평화의 외침

1907년 6월 25일은 고종황제가 비밀리에 파견한 한국특사가 헤이그에 도착한 날이다. 이상설·이준·이위종 등 3인의 한국특사는 이후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갑작스러운 이준의 분사(憤死)는 이들의 존재를 국제적으로 더욱 부각시켰다. 하지만 헤이그 특사가 몸을 던져 이루려던 평화의 화두는 일본의 사주를 받은 열강의 반대로 좌절되고 말았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도 이들의 좌절로부터 잉태된 것이다. 헤이그 특사 100주년을 맞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것은 이런 평화의 메시지다.
제국주의 열강의 마당에서 외롭게 한국 독립과 세계 평화를 외친 헤이그 특사의 의의를 되새기는 작업은 여러 방면에서 진행되고 있다. 학술 분야에서는 세 차례의 학술회의를 통해 헤이그 특사의 의의가 재조명됐다. 헤이그 현지에서도 학술회의와 기념행사가 준비돼 있다.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행사 추진위원회와 이준 열사 기념관, 중앙일보가 공동주최하는 국제심포지엄과 기념행사가 개최된다. 7월 13일에는 이준 열사 추모 국제심포지엄, 14일에는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식이 거행된다. 정보통신부도 27일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미국·이라크 사태, 중동 분쟁, 일본의 군사대국화, 중국의 중화주의 회귀, 북한 핵무장 등 국제사회가 무력분쟁의 위협에 노출되고 있다. 100년 전과 오늘의 상황이 맞물려 헤이그 특사의 역할을 되새겨 보게 한다.
고종황제와 한국정부는 1902년부터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기 위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했다. 그것이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활동을 돕기 위해 미국인 헐버트 목사가 특별위원으로 파견됐다. 이들은 국제사회와 인류의 양심에 평화의 화두를 던지고, 제국주의 열강에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이준 열사, 안중근 의사 등 우리 선열들은 여러 차례 세계를 향해 평화의 메시지를 던졌다. 하지만 번번이 무시됐고, 그 결과는 비극으로 남았다. 그래서 국제사회는 다시 한번 헤이그 한국특사가 던진 메시지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김용달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원 /조인스 뉴스 2007.06.25 20:20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771823  

 

 

 


1903 -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Orwell, George) 출생

오웰 [Orwell, George, 1903.6.25~1950.1.21]

본명 블레어(Eric Arthur Blair). 인도 출생.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얼마 안 되어 영국으로 돌아왔다. 1911년 수업료 감액의 조건으로 사립 기숙학교에 입학, 그 곳에서 상류계급과의 심한 차별감을 맛보았다. 장학금으로 이튼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진학을 포기하고, 미얀마 경찰관이 되었다가 식민지악()을 통감하고 사직, 1927년 유럽으로 돌아와서 불황 속의 파리 빈민가와 런던의 부랑자 생활을 실제로 체험하였다.
처녀작
르포르타주 《파리·런던의 바닥생활》(1933)에 이어서 식민지 백인 관리의 잔혹상을 묘사한 소설 《버마의 나날》(1934)로 인정을 받았다. 그 후에 사회주의로 전향하게 되었으며, 1937년 말경 에스파냐로 건너가 공화제측의 의용군에 투신하였고 바르셀로나 전선에서 부상당했다. 좌익 내부의 격심한 당파 싸움에 휘말렸다가 박해를 벗어나 귀국하였는데, 이 환멸의 기록이 《카탈루냐(카탈로니아) 찬가 Hamage to Catalonia》(1938)가 되었다. 1944년 러시아 혁명스탈린의 배신에 바탕을 둔 정치우화 《동물농장 Animal Farm》으로 일약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지병인 결핵으로 입원 중 걸작 《1984년 Nineteen Eighty Four》(1949)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전체주의적 경향이 도달하게 될 종말을 기묘하게 묘사한 공포의 미래소설이다.
그의 공적은 주로 당대의 문제였던
계급의식과 성실·선예()의 대립을 풍자하고 이것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였으며, 또 일찍이 스탈리니즘의 본질을 간파하고 거기서 다시 현대 사회의 바닥에 깔려 있는 악몽과 같은 전제주의의 풍토를 작품에 정착시킨 점에 있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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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영국의 군인, 정치가 마운트배튼(Mountbatten, Louis) 출생  

마운트배튼 [Mountbatten, Louis, 1900.6.25~1979.8.27]

영국의 정치가, 해군 지도자, 마지막 인도 부왕(副王).

국제적인 왕실가문 출신으로 해군사령관, 인도와 파키스탄 독립을 위한 외교협상가이며 국방의 최고 지도자였다. 바텐베르크 루트비히 공(뒤에 밀퍼드 헤이번 후작)과 헤센다름슈타트 공녀 빅토리아(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손녀) 사이의 4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1913년 영국 해군에 들어가 여러 부 서에서 일했으며 1921년 웨일스 공의 부관이 되었다. 1922년 에드위나 애슐리와 결혼했다(그녀는 세인트존 구급대 책임자로 근무하다가 1960년 북보르네오에서 죽었음). 1932년 대령으로 진급했고 다음해에는 프랑스어와 독일어 통역관 자격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구축함 '켈리'와 제5구축함 소함대를 지휘했고 1941년 항공모함 사령관이 되었다. 남들에 비해 젊은 나이에 해군장교를 맡았던 그는 1943~46년 동남아시아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인척 등용(그는 왕의 사촌임)이라는 비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일본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미얀마를 탈환했다. 인도 부왕을 지내면서(1947. 3~8) 영국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신생독립국인 인도와 파키스탄 정부에 이양했고(1947. 8. 15), 인도 총독으로 재직시에는(1947. 8~1948. 6) 인도 군주들을 설득해 분리 독립한 인도·파키스탄에 각 주를 병합하도록 했다. 1946년 자작작위, 1947년 백작작위를 받았다. 1950~52년 해군본부위원회 제4군사위원, 1952~54년 지중해 함대 총사령관, 1955~59년에는 해군본부위원회 제1군사위원으로 진급했다. 1956년 해군원수가 되었고, 1959~65년에는 영국 국방참모장 및 참모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65년 와이트 섬 총독, 1974년에는 그곳의 주지사가 되었다. 1979년 아일랜드 공화국군 소속 과격파가 배에 장치한 폭탄이 터져 죽었다. /브리태니커

 

 

1894 - 독일의 로켓 과학자 오베르트(Oberth, Hermann) 출생

 

 

1886 - 미국의 군 전략가 아널드(Arnold, Hap) 출생

    

 

1876 - 미 제7기병대, 인디언에게 전멸

 

 

1864 - 독일의 과학자 네른스트(Nernst, Walther) 출생

 

 

 

1860 - 프랑스의 작곡가 샤르팡티에(Charpentier, Gustave) 출생

 

 

1858 - 프랑스의 작가, 극작가 쿠르틀린(Courteline, Georges) 출생



1852 - 스페인의 건축가 가우디(Gaudi, Antonio) 출생  


 

1789 - 이탈리아의 애국자이며 극작가 펠리코(Pellico, Silvio) 출생

 


1783 - 프랑스 화학자 라부아지에, 수소를 연소시켜 물의 조성에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