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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의 사건 06.24

오늘의 사건 06.24  

 

베네수엘라카라보보 전투 기념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2009 - 관악산 기상관측소 시민에 개방

[앵커멘트]
날씨 예보를 위해 전국의 산 정상 10곳에 만들어진 기상레이더 관측소가 모두 일반인들에게 개방됐습니다.
생활과 밀접한 기상예보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를 높이고 갑작스런 악천후에는 대피장소로도 활용될 것으로 보입니다.
[리포트]
관악산 정상의 흰색 둥근 돔.
기상 레이더 관측소가 있는 자리입니다.
1970년 관측을 시작해 40년동안 서울·경기지역의 바람과 구름의 움직임을 잡아왔던 곳입니다.
보안상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던 이 곳이 40년 만에 시민들에게 개방됐습니다.
숨가쁘게 산을 오른 등산객들에게 서울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산 정상의 변덕스런 날씨 변화에 대피장소로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오승준, 등산객]
"산 경치좋은 꼭대기에 기상관측소가 있다는게 전 잘 못봐서 신기할 따름이고 기상관측소안에 구급약이나

일반시민이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나 물같은 것이 있어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서 그게 좋은 것 같습니다."
관측소 내부에는 기상레이더와 일기도들을 직접 보고 설명을 들을 수 있어

기상예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전병성, 기상청장 ]
"국민과 소통을 강화시키고 국민들에게 좋은 날씨 기상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섭니다. 모든 시설을 국민들에게 개방을 해서 누구나 어느때나 기상에 대해서 궁금할 경우 찾아오도록 할 계획입니다."
관악산 기상레이더의 개방으로 전국 열 군데의 기상레이더 관측소가 모두 일반에 공개됐습니다.
산 정상에서 만나는 기상 레이더 관측소는 등산객들에게 편안한 휴식처는 물론 빠르게 변화하는 기후에 관심을

높이는 일석이조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사이언스 TV 2009-06-24 17:14:05

http://www.sciencetv.kr/theme/theme_view.php?s_mcd=0101&key=200906241714019273&tcd1=01&tcd2=07

오현명 교수

 

2009 - 원로 성악가 오현명 교수 별세

'백발의 성악가' 오현명씨

‘우리 가곡의 전도사’로 불리던 원로 성악가 오현명 한양대 음대 명예교수가 24일 오후 6시55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5.

중국 만주에서 출생한 고인은 1948년 서울대 음대 성악과 졸업 후 서울예고 교감, 한양대 음대 학장 등을 역임하며

평생을 가곡 발전과 성악 교육에 힘써온 한국 성악계의 산증인이다.

1948년에는 한국 최초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 데뷔한 이래 60여 편의 오페라에 출연하면서 ‘한국 1세대 오페라

가수’로 이름을 날렸다. 또 64년부터 82년까지는 국립오페라단 단장을 지내면서 50여편의 오페라를 연출하는 등

오페라 발전에도 헌신했다. 특히 한국 가곡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1963년부터 한국 가곡만으로 10여차례 독창회를 여는 등 ‘가곡 전도사’로서 활약해왔다. 특히 변훈의 ‘명태’를 즐겨 불렀던 고인은 당당한 풍채에서 나오는 묵직한

바리톤 베이스의 저음, 백발의 곱슬머리, 넉넉한 웃음으로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고인은 암투병으로 고통을 받던 최근까지도 세일문화재단의 진행으로 자신의 삶과 60여년의 성악 인생을 정리하는

회고록 발간을 위해 구술 작업을 해왔다. 세일문화재단은 고인을 기리기 위해 25일 회고록 <다시 부르고 싶은 노래>를

비매품으로 출간하고 1천부를 조문객과 성악계 인사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유족으로는 영인(58·성신여대 교수·오페라 연출가)씨와 영석(52·사업), 영진(48·배재대 음대 교수·성악가),

딸 순방(55·주부)씨 등 3남 1녀가 있다. 빈소는 한양대병원이며, 발인은 27일 오전 8시 성악인장으로 치러진다.

(02)2290-9457.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한겨레 2009-06-25 오후 07:12:00

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362373.html

 

‘가곡 전도사’ 오현명 한양대 명예교수 별세

한국 성악계의 '거목'으로 꼽히는 원로 성악가 오현명 한양대 음대 명예교수가 24일 저녁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중국 만주에서 출생한 고인은 1948년 서울대 음대 성악과 졸업 후 서울예고 교감, 한양대 음대 학장 등을 역임하며

평생을 가곡 발전과 성악 교육에 힘써온 한국 성악계의 산증인이다.

1948년 한국 최초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 출연한 이래 60여편의 오페라에 출연하고, 50여편의 오페라를

직접 연출한 그는 1964년부터 1982년까지 국립오페라단장을 맡는 등 오페라 발전에도 헌신했다.

특히 한국 가곡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1960년대부터 한국 가곡만으로 독창회를 여는 등 '가곡 전도사'로서

역할을 든든히 해왔다.

생전 인터뷰에서 "외국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성악가 스스로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일침을 놓으며 "우리 나라 사람이 우리 노래를 안 부르면 누가 대신 부르겠냐"고 말했던 오현명은 2003년 '문학의집.서울'로부터 주옥같은 우리 시를 노래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노래의 시인'이라는 칭호를 선물받기도 했다.

당당한 풍채에서 나오는 묵직한 바리톤 베이스의 저음, 백발의 곱슬머리, 넉넉한 웃음으로 대중에게 도 큰 사랑을 받은 그는 특히 변훈의 '명태'를 비롯해 해학적 정서를 지닌 한국 가곡 분야에서 독보적 경지를 이룩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구수한 목소리로 열정을 담아 들려주던 '명태'는 대중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다.

고인은 최근까지도 노래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해왔다.

침체일로에 놓여있는 우리 예술가곡을 살리기 위해 성악가, 작곡가, 시인 등이 모여 2006년 결성한 가곡문화예술협회 명예회장을 맡아 가곡 부흥에 팔을 걷어붙이는가 하면 지난해 3월에는 오페라 한국 도입 60주년을 기념해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라 트라비아타' 콘서트 무대에 서기도 했다.

또한 가곡에 얽힌 뒷이야기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암투병으로 고통을 받던 최근까지도 세일문화재단의 진행으로 구술 작업을 진행해왔다.

유족으로는 아들 영인(오페라 연출가), 영석(사업), 영진(성악가), 딸 순방(주부)씨 등 3남 1녀가 있다.

빈소는 행당동 한양대병원이며, 발인은 27일 오전 8시, 장지는 경기도 강촌의 경춘공원. ☎02-2290-9442.

현윤경 기자 ykhyun14@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9-06-25 오전 09:19:27

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362285.html

 

원로 성악가 오현명 교수 별세

원로 성악가 오현명 한양대 음대 명예교수가 24일 지병인 간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1924년 중국 푸순(撫順)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국립오페라단장, 한양대 음대 학장 등을 역임했다.
48년 공연된 한국 첫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비롯해 50여 편의 오페라에 출연했다. 국립오페라단 단장(1964~82년)재직 시절에는 40여 편의 오페라를 연출했다. 63년부터 한국 가곡으로만 프로그램을 꾸민 독창회를 열었다.

변훈(1926~2000)이 작곡한 가곡 ‘명태’를 구성지게 불러 대중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문화예술상 대통령상(1975년)·국민훈장모란장(1990년)·보관문화훈장(1999년) 등을 받았다. 유족은 영인 영석 영진 순방 등 3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한양대병원에 마련됐고 장지는 경기도 강촌의 경춘공원, 발인은 27일 오전 8시. 02-2290-9442
한편, 고인의 회고록 ‘다시 부르고 싶은 노래’가 25일 출간됐다. 고인의 삶과 60여년의 성악 인생을 정리한 책이다.

가곡관련 뒷이야기와 고인의 인생사를 사진과 함께 실었다.
강경지기자
bright@newsis.com [뉴시스 2009-06-25 14:36]
http://news.msn.co.kr/article/read.html?cate_code=6100&article_id=200906251437216029&pos=life2 

  

2005 - 노무현 대통령 바르톨로메오스 정교회 세계 총대주교 접견

2003 - 배리 본즈 500홈런-500도루 달성

 

2002 - 북경 한국총영사관과 대사관 등 진입한 탈북자 26명 서울 도착

2002 - 탈북자 26명 인천공항으로 입국(2002)
주중 한국 총영사관과 캐나다대사관에 각각 진입했던 탈북자 26명이 2002년 오늘 제3국을 거쳐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했다.
이들은 비행기에서 내린 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한국에 오게 돼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탈북자들은 정밀 건강진단과 정부 부처 합동신문을 받은 뒤 탈북자 정착지원 시설인 하나원에 입소했다.

2001년 6월 24일 오후 국방부에서 박정화 합동참모본부 해상작전과장이 이날 사건에 해 설명하고 있다.

 

2001 - 해군,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어선에 경고사격

우리 해군이 2001년 6월 24일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어선을 경고사격으로 물러나게했다. 백령도 레이더 기지에

북한 선박 1척의 NLL 침범이 처음 포착된 것은 이날 오전 2시50분경. 4시5분쯤 대청도에 있는 150t급 `참수리` 고속정 편대(3척)가

시계 200야드의 안개를 뚫고 현장에 접근해 뱃고동 소리와 발광으로 정선을 명령한 뒤 국적을 물었다. 갑판 승조원은

 "접근하지 말라우"라고 대답, 북한 선박임이 확인됐다. 9t급 소형 목선으로 배에는 `ㄴ-함-7501`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고속정은 어선으로부터 80~90m쯤까지 접근, 정선을 명령했으나 북한 어선은 각목을 휘두르고, 횃불을 고속정 10m 앞에까지 던지는 등 위협 행동을 계속했다. 고속정은 사격 경고방송을 3차례 한 뒤 2함대사령관의 지시로 4시52분 K-2 소총으로 공포탄 9발을 발사했다. 5시쯤 북한 어선은 북상 의사를 밝힌 뒤 30여분 뒤 NLL을 넘어 북측 지역으로 넘어갔다. 이로써 2시간37분간의 상황은 종료됐다.

이날 우리 군의 경고사격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6월 한달동안만 해도 북한 선박이 수차례 우리 영해를 제집 드나들 듯이 유린해도

우리 정부와 군은 속수무책으로 관대한 대응해왔다.

북한 선박이 조직적으로 NLL을 침범한 것은 2001년 6월부터였다. 북한측은 6월부터 8월 사이에만도 10여 차례 이상이나

서해 북방한계선은 물론 제주해협 심지어는 독도 영해까지 잇달아 침범을 시도했다. 북한측의 동시다발적인 우리 영해 침범은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유례없는 일이었며, 남북 해빙 무드를 틈탄 고도의 정치적-군사적 의도가 포함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국민과 여론은 "국토수호의 의무를 유기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야당인 한나라당도 `북한 선박의 NLL 침범 및 6.15 남북공동선언 이면합의 의혹사건의 진상조사를 위한 국정조사 요구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1999 - 네로 `황금궁전` 18년 만에 재공개  

1988년 4월 11일, 동경 돔에서 열린 컴백 콘서트에서의 미소라 히바리.

그녀의 마지막 콘서트인 이날에 5만명의 청중이 모여들었다. 

 

1989 - 엔카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 사망

한국계로 알려진 일본 가요계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가 1989년 6월24일 5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미소라는 2년전 만성간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한 이래 투병생활을 계속해왔었다.
생선장수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노래에 남다른 소질을 보인 그녀는 9살 때 첫무대에서 천재소녀란 명성을 얻었다.

뛰어난 미모, 가창력에 매끄러운 스테이지 매너를 지닌 미소라는 1950년 ‘슬픈 휘파람’의 대히트로 예능계 여왕의 자리에 군림하며

일본 국민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패전후 황폐해진 국토, 그 잿더미 속에서 고달픈 삶을 살아야했던 일본인들의 마음을

그녀의 노래가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다. ‘항구의 13번지’ ‘슬픈 술’ 등이 그 대표곡으로 그녀가 남긴 노래는 1천4백여곡에 이르며

음반판매량만도 4천만장에 달했다.
이렇듯 일본 가요계에서 신격화됐던 그녀이지만, 현실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1962년 배우인 고바야시 아키라와 결혼,

1년반 만에 파경에 이르렀다. 이후 혼자 살아오던 그녀는 1988년 4월 동경 돔에서의 컴백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이날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일본의 정통 엔카 세대는 막을 내렸다. 그녀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의 신문들은 1면 또는 사회면 머리기사로 취급,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 일본대중문화에 기여한 그녀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 조선

 

미소라 히바리 우표

왼쪽의 우표는 Kanashiki Kuchibue 悲しき口笛 (1949) 의 한 장면입니다. 이것은 미소라 히바리(전설적인 엔카 가수)가 12살 때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흑백 영화입니다. 슬프고도 코믹한 분위기의 영화였습니다.

영화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우측의 우표는 미소라 히바리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의 사진입니다. 미소라 히바리의 아버지가 한국인이었다는

소문이 많은데, 제가 보아도 미소라 히바리는 역시 일본인보다는 한국인의 얼굴에 가깝더군요. 위의 우표 사진만 해도,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형입니다. 오히려 일본에서는 이런 얼굴이 흔치 않지요.
미소라 히바리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옆에 있던 아이스크림 장수가 넋이 나가서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아이스크림(하드)을 다 도둑맞곤 하는 장면이 있는데 悲しき口笛 인지 다른 영화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東京キッド(Tokyo Kid, 1950) 의 한 장면인 것도 같고...
http://mwultong.blogspot.com/2006/07/80-misora-hibari.html 

장쩌민

 

1989 - 장쩌민 중국 당총서기 임명(1989)

1989년 오늘 개최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자오쯔양이 당 총서기직에서 해임되고 이 자리에 장쩌민이 선출됐다.
장쩌민은 무력으로 톈안먼 사태를 진압한 중국의 최고실권자 덩샤오핑을 적극 옹호함으로써 당내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장쩌민은 국무원 전자공업부장 등 기술관료직을 두루 거쳐 1985년 상하이 시장에 올랐다.
1987년 상하이시의 당 서기직도 맡아 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중국 정계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장쩌민은 이후 1990년 4월 덩샤오핑의 마지막 공직인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됨으로써

당과 정부의 전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장쩌민은 2005년 5월 국가 주석 자리를 후진타오에게 물려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다. - YTN

 

1989 - 장쩌민, 중국 당총서기에 선출

1989년 6월 24일 중국공산당 제13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에서 그 후임으로 덩샤오핑(등소평)에 의해 장쩌민(강택민)이

당중앙위원회총서기로 발탁되었다.

장쩌민은 장쑤성 양저우시 출신으로 상하이교통대학에 다니던 1946년 공산당에 가입, 1955년 모스크바 유학 후 기술경제 관료로

성장하였다. 문화혁명으로 한동안 밀려났다가 복귀한 뒤, 1985년 7월 상하이시장이 되어 상하이를 중국의 금융·산업중심지로 발전시켰다. 1989년 6월 천안문사태로 실각한 조자양에 이어 당중앙위원회총서기가 되고 11월 덩샤오핑에게서 당군사위원회주석을,

1990년 4월 국가군사위원회주석을 물려받은 데 이어 1993년 3월 국가주석까지 겸함으로써 당과 행정, 군을 총괄하게 되었다.

전형적인 기술관료로서의 장쩌민은 마오쩌둥(모택동)이나 덩샤오핑과 같은 카리스마는 갖지 못했으나, 대신 남다른 성실성과 정치력으로 인구 13억의 대국을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장쩌민이야말로 사회주의 중국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지도자로서 평가받고 있다. 

 

1984 - 프랑스 파리서 사학자유 요구 데모

1983 - `외교관 등 국제적 보호인물에 대한 범죄 및 처벌에 관한 협약` 국내 발효

1983 - 서방19개국 정치지도자, 런던서 사회주의인터내셔날에 대항하기 위한 국제민주연합(IDU) 발족

 

1982 - 화산재 구름으로 여객기 엔진 손상되어 불시착

[지평선/4월 20일] 화산재 & 항공기

1982년 6월 24일 인도네시아 상공(고도 1만1,000m)을 지나던 영국항공 소속 보잉747 여객기의 엔진 4개가 갑자기 멎었다. 런던을 출발, 쿠알라룸푸르에 기착했다가 뉴질랜드의 오클랜드로 가던 중이었다. 기장은 연신 "메이데이(Mayday 항공기 조난신호)!"를 타전하며 살핀 끝에 엔진 속의 공기압축기가 알 수 없는 물질로 손상됐다고 판단했다. 항공기를 급강하,

맑은 공기로 '엔진 세척'을 시도하며 자카르타 공항에 글라이딩 착륙했다. 상공 400m 지점에서 엔진 2개의 기능이

일부 작동했지만 263명 모두가 목숨을 건진 것은 기적이었다.
■ 불시착한 뒤에야 자바 섬 화산 폭발로 형성된 화산재 구름이 원인이었음이 밝혀졌다. 화산재가 구름 속에 섞여 항공기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경우는 종종 있다. 1989년 12월 15일 앵커리지 상공에서 KLM네덜란드 항공 보잉747도 화산재 구름과 만나 엔진 4개가 모두 꺼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때에도 급강하하며 엔진을 '자동 세척'했는데, 3분 여 뒤에 정상화했다. 모두가 운이 좋았던 경우들이었다. 유사한 사례는 처음 원인이 밝혀진 1973년 이후 30건 이상 보고됐다.

화산 활동을 완전히 예측할 수 없으니 피해 가는 게 최선이다.
■ 지난 14일 아이슬란드 화산이 폭발, 화산재가 유럽을 뒤덮고 오늘쯤엔 우리나라 상공까지 날아온다고 한다. 화산에서 나오는 물질은 액체인 마그마와 함께 고체로 화산탄, 화산암조각, 화산자갈, 화산재(크기 순) 등이 있다. 화산재는 대개 지름이 1㎜ 이하지만 4~5㎜로 뭉쳐지기도 한다. 이것들은 화산가스나 공기의 수증기와 합쳐 화산구름이 되기도 하고, 일반 구름에 섞이기도 한다. 마그마 속에서도 녹지 않고 고체로 남았던 것들이니 그 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항공기 엔진 속에

반죽처럼 끼이기도 하고 조종석 유리를 손상시키기도 한다.



■ 사고는 예방하는 게 최선이지만 불가피한 경우가 없을 수 없다. 사고 후 대처하는 지혜와 용기는 예방 만큼이나 중요하다. 앞서 언급한 영국항공 기장의 당시 기내방송은 지금도 모든 항공사가 귀감으로 여기고 있다. "승객 여러분, 기장입니다.

작은 문제(small problem)가 발생했습니다. 엔진 4개 모두가 멈췄습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do our damnedest)

정상화시키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항공기가 자유 낙하하는 16분 동안 승객들은

난리를 피우지 않았고, 승무원들은 2개의 엔진이나마 살려낼 수 있었다

정병진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한국일보 2010/04/19 20:59:39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004/h2010041920593924440.htm

 

아이슬란드 화산재와 항공기 운항  

EU는 4월 19일(현지시간) 긴급 교통장관회의를 열어 항공기 운항금지를 점진적으로 완화하기로 하고 21일(한국시간)부터 2만피트 이상 공역에 대한 운항통제를 해제하는 조치를 발표함에 따라 유럽으로 가는 하늘길의 숨통이 트였다.

지난 4월 14일, 아이슬란드 에이야프얄라요쿨(Eyjafjallajökull) 빙하 아래서 화산이 폭발하면서 화산분연(噴煙)이

유럽의 하늘을 덮는 바람에 유럽지역 항공로가 거의 1주일간 마비됐었다.
화산재와 연기는 6~11km 상공까지 치솟았다. 또 바람을 타고 서부‧중부유럽지역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영국·아일랜드·노르웨이·덴마크 등에서 항공기 운항이 전면 금지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유럽 모든 나라의 항공당국에 비상이 걸렸지만 그 중에서도 영국이 특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외국에 발이 묶여있는 약15만 명의 자국민을 수송하기 위해 군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이 중 1척을 20일 스페인

북부 산탄데르(Santander)항에 도착시키기도 했다.



영국이 화산재에 대해 이같이 과민할 정도로 대처하는 것은 지리적으로 아이슬란드 화산재가 많이 날아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28년 전의 아찔했던 영국항공 BA009편 사고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BBC 방송도 이번 화산폭발 소식을 전하면서 악몽같은 BA009편 사고를 상기시켰다.

1982년 6월24일, 승객 248명, 승무원 15명을 싣고 쿠알라룸푸르 공항을 이륙, 오스트레일리아 퍼스(Perth)로 향하던

영국항공 BA009편(B747-236B)이 20:40 경 자바섬 상공에서 제트엔진에 화산재가 들어가는 바람에 엔진 4기가

모두 멈추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달도 없는 캄캄한 하늘에는 안개가 자욱했고 37,000피트(약11,300미터) 고도에서 자카르타 상공을 통과하고 있었다.
무디(Eric Moody) 기장은 화장실에 가있었고 부조종사는 바로 착륙등을 켰다.
기묘한 광경이 조종실 앞창을 가로질렀다. 파란 섬광 바로 '세인트 엘모의 불'(Saint Elmo's fire)이었다.

간혹 뇌운(雷雲)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코로나 방전' 현상이지만 기상레이더에는 그런 구름 따위는 비치지도 않았다.

폭풍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 좌석벨트 착용 사인을 점등시켰지만 순간 기내에 오존 냄새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변을 느낀 그리브스(Roger Greaves) 부조종사는 즉시 기장에게 연락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기장은 에어컨닥트에서 연기가 나오는 것을 보고 기내에 화재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종석으로 돌아온 기장은 계기판이나 레이더에 이상이 없었지만 엔진이 하얀 색깔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항공기관사가 전기계통에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시스템을 체크하던 중 우측 끝 4번엔진의 출력이 삽시간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기장은 4번엔진을 끄고 소화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어서 2번, 3번 등 4개 엔진이 모두 꺼져버렸다. 이 순간 BA009편은 더 이상 항공기가 아닌 활공기(글라이더)가

돼버린 것이다.



부조종사는 긴급히 조난을 의미하는 “Mayday”를 타전하고 항공기관사는 엔진을 재시동 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무선장치 작동이 원할치 않아 자카르타공항 관제사와 커뮤니케이션에 애를 먹었다.
다행히 부근을 비행 중이던 가루다항공 GA875편 조종사가 이 긴급한 상황을 듣고 관제사에게 전달했다.

계기판은 제멋대로 돌아가고 무선은 잡음투성이가 되었다.
기장은 기체를 매분 500피트씩 내리면서 자카르타로 향했다.
다행히 발전기와 유압펌프만은 제대로 작동해 조종은 계속할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140마일(약224 km)은 날 수 있다.
다행히 기장은 2개월 전에 모든 엔진이 멈췄다는 상황을 가정한 시뮬레이션 훈련을 받은 터였다.

기장은 이 사실을 승객에게 알렸다.
그렇지 않아도 유황냄새에 연기까지 났고, 엔진이 멈춘 것을 대부분의 승객들이 짐작하고 있는 터였다.

자카르타로 가려면 자바섬의 산악지대를 넘어야 한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고도를 11,500 피트(3,500m)를 유지해야한다.
엔진이 꺼진 상태에서는 이 고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엔진이 걸리지 않으면 칠흙같은 바다 위에

비상착수하는 도리밖에 없다.





승객들은 창밖으로 재시동에 실패할 때마다 엔진에서 불꽃이 튀기는 광경을 쳐다보면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객실승무원들은 이런 승객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기내를 살피고 다녔다.

많은 승객들이 황급히 메모를 적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여압장치가 작동을 멈추면서 조종사의 마스크가 깨져버렸다.
이대로는 산소결핍증에 걸린다고 보고 더 빠르게 강하하여 산소를 흡입할 수 있는 고도까지 내리기로 했다.
그만큼 엔진을 재가동할 수 있는 유예시간이 짧아진 것이다. 승객들은 점점 공포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12,000 피트까지 내려와서도 엔진이 가동하지 않으면 바다에 내리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11,600 피트 아래로 내려왔지만 허사였다.
기장은 승객에게 짧막하게 비상착수한다고 알렸고 객실승무원들은 비상사태에 대비했다.
엔진이 멈춘 지 12분이 지나 고도는 이미 11,400피트 (4,300m)까지 내려왔다.
불시착을 각오한 바로 그 순간, 기체가 맑은 공기 속으로 들어가면서 4번엔진이 작동했다.  

그리고 엔진은 차례로 모두 되살아났다.
기장이 자카르타로 향하겠다고 방송하자 객실은 환희로 들끓었다.
그러나 막상 착륙할 때쯤 되어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조종석 앞창이 화산재를 맞아 젖빛유리로 변해버린 것이다.
기장은 창 가장자리 몇 센티 빈 틈을 통해 바깥을 확인하면서 22시25분,

할림 페르다나크수마 국제공항(Halim Perdanakusuma International Airport:HLP) 착륙에 성공했다.




사고원인은 화산의 분연이었다.
자카르타 남동 160킬로에 있는 갈룽궁(Mount Galunggung)산이 분화를 일으켜 여기서 나온 화산재가 바람을 타고 인도양 상공에까지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엔진에 화산재가 빨려 들어가는 바람에 배기관이 막혀서 공기의 흐름을 막아 엔진을 멈추게 한 것이다.
기내에 들어온 이상한 냄새와 연기는 화산의 분연이며 세인트엘모의 불이나 앞창이 흐려진 것도 모두 화산재의 입자와 마찰을 일으킨 때문이었다.

기체는 화산재와 마찰로 인해 도장이 벗겨졌고 창문은 온통  젖빛유리로 변했고 엔진도 크게 손상됐다. 또 속도, 고도 등을 측정하는 피토관(Pitot tube)이 화산재로 막히는 바람에 계기판도 작동하지 못했다.
무선이 잘 통하지 않았던 것도 화산재로 전파가 혼선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기상레이더는 수증기를 감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화산분연을 감지할 수 없었다.
정해진 항공로를 비행하던 BA009에게는 모든 것이 불가항력이었다.

다행히 13,500 피트(4,100 미터) 이하에는 분연이 많지 않아 엔진 내부의 온도가 내려갔고 막혀 있던 화산재가 벗겨져 떨어져나가면서 가까스로 엔진이 재작동할 수 있었다.

생과 사를 오가는 악전고투 끝에 엔진 재시동에 성공해 공항에 긴급착륙했고 사상자는 없었다.
실로 기적적인 일이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항공로에서 화산재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게 됐다.

에이야프얄라요쿨(Eyjafjallajökull) 빙하 화산폭발 뉴스를 집중보도하는 가운데 BBC방송 'Good Morning Scotland'에서 당시의 무디 기장(이미 은퇴)은, "It was, yeah, a little bit frightening" 며 무서웠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이번 화산분화가 일어난 후 유럽 여러 나라들이 빨리 운항을 재개하자고 종용했지만 영국은 끝까지 신중을 기했다.

유럽항공교통안전기관(본부·브뤼셀)은 화산재 영향으로 15~21일까지 전체 운항편수의 60%에 해당하는 9만4000편이 결항했다고 밝혔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는 세계 항공업계가 하루 4억 달러씩 손실을 입은 것으로 보고 있다. 2001년의 9‧11테러 때보다 큰 금액이다.
최악의 경우 항공사, 여행사 등을 포함해 피해 총액은 3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 뉴스클리핑은 http://www.ontimes.kr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 - 2010년04월22일 13시49분

http://www.ontimes.kr/print_paper.php?number=6456&news_article=news_article

 

1981 - 세계은행(IBRD), 중국에 첫 차관 제공 결정

1980 - 김종필, 이후락씨 모든 공직 사퇴

1979 - 카터 미국 대통령 방일

 

1978 - 북한, 유아의 가정양육 금지

북한당국은 여성 노동게급화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사 및 가정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추진하였다. 여성의 경제적 활동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여성을 자녀양육 및 가사노동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북한은 가정의 혁명화를 여성의 혁명화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삼았다. 특히 1972년에 제 정된 「사회주의 헌법」과 1978년

「사회주의 로동법」은 국가가 여성을 가정일의 무거운 부담에서 해방하여 사회적 노동에

적극 참가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고 규정하였다.

다른 현존 사회주의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북한 역시 자녀양육 및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중심으로 여성의 노동계급화를 지원했다.

아동의 사회적 집단교육은 건국 초기부터 강조되 어 탁아소와 유아원의 설립이 증가되어왔다. 특히 1972년에 제정된 「사회주의 헌법」은 "모든 학령 전 어린이들을 탁아소, 유치원에서 국가와 사회의 부담으로 키운다"(제43조)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http://apwinc.sookmyung.ac.kr/unification/policy/wlaw01.html - Google

 

1977 - 볼쇼이 발레 대회(1977)
1977년 오늘!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볼쇼이 발레단에서 주최한 국제 발레경연대회가 열렸다.
세계 30여개 나라의 발레 무용수들이 참가했다.
발레리노 부문은 예상을 뒤엎고 호주출신인 까닐로 로도주비치가 차지했다.
발레리나 부문 우승은 키예프 발레단 소속의 니나 세미조르바에게 돌아갔다. - YTN

1976 - 구마고속도로 기공

1976 - 미국의 식물 사진 작가 커닝엄 사망

1976 - 베트남 첫 남북통일국회 개막

 

1976 - 로물로 필리핀 외무장관, 아세안독트린 제창

1975 - 미국 여객기 추락, 113명 사망(1975)
1975년 오늘!
미국 이스턴 항공 소속 보잉727 여객기가 뉴욕의 존.F.케네디 공항에 착륙하려다 인근 고속도로로 추락했다.
이 사고로 승객과 승무원 등 탑승자 113명이 모두 숨졌다.
여객기 추락 당시 고속도로에는 자동차가 지나가지 않아 추가 피해는 생기지 않았다.
풍속과 풍향이 갑자기 바뀌는 이른바 '윈드 쉬어(wind shear)'라 불리는 돌풍 때문에

여객기 날개가 제대로 조작되지 않아 생긴 사고로 분석됐다. - 조선

  

1973 - 카다피, 이집트 방문(1973)
1973년 오늘!
리비아의 최고 지도자 카다피가 이집트를 방문했다.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을 만나 두 나라의 연합문제를 논의하러 왔다.
이집트 국민들은 카다피를 열렬히 환영했다.
카다피는 열달 전인 1972년 8월 사다트와 아랍연합을 건설한다는 데 합의했었다.
중동 지역에 대한 서방 강대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아랍연합으로 자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카다피는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 후에 사다트의 온건평화정책과 갈등을 일으키고 아랍연합의 꿈은 무산된다. -YTN

1973 - 미국-소련 가상병기 사용금지 합의

1965 - 월남, 프랑스와 단교

1960 - 국회, 군정법령 55호, 88호 폐기. 신문, 정당등록법안 통과

 

1960 - 미국,일본 안보조약 발효

1950 - 육군본부 정보국의 북한 대규모 병력 38선 집결 보고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9월 30일 외신 기자 회견에서 이승만은 "우리는 북한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으며 북한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이

북한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 (한국 전쟁)

 

1950 - 제4회 브라질 월드컵 개막

1950 - 제4회 월드컵 브라질에서 개막  

베를린 시민의 식량공급을 위한 비행기. 1948년 6월 26일부터 미국,

영국에 의해 시작된 물자공수는 1949년 10월 31까지 계속됐다. 

 

1948 - 소련, 서베를린 육로 봉쇄 

소련이 1948년 6월 24일 서독과 베를린을 잇는 육로를 봉쇄해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공동 관리하는 서베를린이 고립됐다.

2차대전후 독일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에 의해 점령되었고 특히 소련점령지역인 베를린은 공동관리하에 있었다.

이러한 동서 양진영의 공동보조도 소련과 다른 3국과의 입장차이로 균열이 시작돼 1947년 런던에서

개최된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결렬되기도 했다.

봉쇄 전날 소련군의 소콜로프스키 원수는 독일의 소련점령지역에서의 통화개혁을 발표했고 다른 3국도 같은 날 새로운

통화인 독일 마르크를 발행했다. 소련은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 항공로를 제외한 모든 교통로를 봉쇄했다. 더욱이 25일에는 베를린의 3국 점령지역에 대한 식량수송을 금지했다. 6월30일 미 국무장관 마샬은 `식료품과 물자 보급을 위한 공수를 단행한다`고 발표,

공수작전을 시작했다. 232만 5천톤에 달하는 공수는 1949년 10월31일에 중단됐다. - 조선

 

1948 - 소련, 서베를린 육로 봉쇄

베를린봉쇄[Berlin Blockade]

동서간의 긴장격화의 과정에서 1948년 6월 24일부터 49년 5월 12일까지, 동독(당시 소련 점령지구) 영내에 있는 서베를린과

서독(당시 미국·영국·프랑스 점령지구) 사이의 교통에 대하여 소련당국이 실시한 교통봉쇄조치. 그 계기가 된 것은 서독지역에서의 통화개혁(1948년 6월 30일 실시)이었다. 서방측 3개국이 통화개혁을 서베를린에도 확대하자, 소련은 이에 대항하여 48년 6월 24일

소련 점령지구 내에서 독자적인 통화개혁을 실시함과 동시에, 서독과 서베를린 사이의 육상의 교통·수송을 전면적으로 봉쇄하였다.

이에 서방 3개국은 즉각 서베를린에 대한 물자공급을 위해 대규모의 공수를 개시하였다.

그 연비행회수는 27만 7728회, 공수한 물자는 총량 234만 3300t에 달하였다. 한편 서방 3개국은 <역봉쇄>,

즉 서베를린과 동독 사이 및 동독과 서독 사이의 통상·교통의 제한으로 이에 대응하였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48년 7월 말부터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서방3개국과 소련의 교섭이 진전되지 않아, 9월 이후 문제 해결의 무대는 국제연합으로 옮겨졌다.

난항을 거듭하였으나, 49년 2월 미·소 대표회담이 열렸고 5월 4일 베를린봉쇄해제에 관한 미국·영국·소련·프랑스

4개국협정이 성립하여 베를린봉쇄문제는 11개월 만에 해결되었다.

 

베를린 봉쇄와 공수 

1948-06-24  소련, 서베를린 육로 봉쇄

1948-06-26  미국-영국 베를린 공수 시작

1949-05-04  소련, 베를린 봉쇄 해제에 동의

1949-05-12  베를린 봉쇄 해제

1949-09-30(10-31?)  베를린 공수 종료

 

1947 - 반탁투쟁위 결성

1947 - 전국 반탁운동 전개(1947)
단오절을 맞은 1947년 오늘,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 전국에서 일제히 전개된다.
백범 김구 선생을 중심으로 민족,우익계열의 정치,사회단체들이 모여 구성한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주도로 시작된 시위다.
이 반탁 시위는 같은 해 8월 말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될 때까지 극렬하게 이어졌다.
결국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무산되자 한국 문제는 국제연합 UN에 이관되고 이듬해 5월 10일 UN의 감시 아래 치른

총선거를 통해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다.
미국,영국,소련이 한반도를 신탁통치한다는 결의안은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채택됐었다.

 

1947 - 알려진 것 가운데 최초의 UFO 목격: 케네스 아놀드미국 워싱턴 주에서

찻잔 모양의 빛나는 비행 물체 아홉 개를 목격하다. 

1947 - 케네스 아놀드 최초의 UFO 목격

1947 - 미국 아이다호주, 케네스 아놀드가 비행중 UFO를 목격했다고 보고, UFO 최초 발견

 

미확인 비행 물체(未確認飛行物體, UFO, Unidentified Flying Object)또는 유에프오는, 확인할 수 없으며 조사 이후에도 미확인으로 남아 있는 지상이나 하늘에 나타나는 모든 비행체를 이른다. 그 정체는 우주인의 비행체·기상 기구·행성·유성·

구름·신기루·방전 현상, 구름에 비친 서치라이트의 오인, 테스트 중인 미공개 비행기,

로켓, 인공 위성 등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미확인 비행물체는 사진으로도 보고되었으며, 외계인 목격과 관련하여 화제가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명확한 모습의 비행접시는 보고되지 않고 있다.

역사

하늘에 떠 있는 물체의 기록은 고대의 기록이나 전설, 벽화에도 남아 있었으나,

1947년미국에서 대규모로 목격된 이후 폭넓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연구 및 추정

전 세계적으로 UFO를 목격했다는 제보가 많이 있으나 대부분은 다음과 같이 확인 또는 추정되었다.

- 이동 중인 의 무리

- 곤충

- 고고도 과학관측 기구

- 특수한 구름

- 유성, 유성흔 또는 혜성의 파편

- 접근기의 행성

- 착시

- 비행기

- 인공위성

실제로 1947년은 미국에서 고고도 관측기구를 대규모로 사용하기 시작한 해이며, 대부분의 UFO 관측은

이러한 것에 대한 착각으로 조사되었다.

대중적으로는 외계인우주선을 'UFO'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위스심리학자카를 융은 'UFO'를 '현대인의

신화'라 주장하였다.


 

< 비행접시(Flying Saucer) >
1947년 6월 24일, 미국 최초의 민간 조종사 케네스 아놀드가 최초로 UFO를 목격한 후 다음날 오리건주의 펜들튼 시에서

 (이스트 오리거니안)지와 기자회견을 하였는데, 이때 그가 목격한 UFO를 마치 수면 위를 튀는 듯이 나는 커피 잔 받침과 같다고

묘사하였고, 그 자리에 있었던 신문기자 빌 베게트는 이를 근거로 하여 "비행접시"라는 신조어를 신문에 실었다.
그후 미 전역에서 비행접시는 UFO와 동의어로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보고된 모든 UFO의 형태가 접시모양은 아니며

공모양이나 시가모양,구형,돔형,삼각형,토성형등 그밖의 기학학 도형형태의 UFO들도 많이 목격되고 있다.

/http://biounder.kaist.ac.kr/~kbsh10th/mystery/ufo/studyufo.htm -Google

 

1947년 6월 24일 미국의 소화기 사업가 케네스 아놀드(Kenneth Arnold)가 자신의 전용기를 타고 사업처 확장을 위해 비행하던 중 워싱턴 주 레이니어 산 맥 상공에서 마치 가오리 형태로 생긴 아홉 대의 미확인 비행물체가 목격되었고 아놀드는 이를 지상에 알리게 된다.

지상에 착륙한 아놀드는 각 언론사들의 취재에 응했고 당시 AP통신 기자가 “마치 물위를 톡톡 튀어 날아가는 접시같았다”는 아놀드의 말을 인용해 ‘비행접시(Flying Saucer)’라는 기사를 외신(外信)으로 타전했고 이 말이 UFO라는 용어(用語)가 나오기 이전이 일반대중에게 각인된 용어였다. 
그랬던 것이 로즈웰 사건을 지나 프로젝트 사인에서 시작된 미확인 비행물체에 대한 민관군 합동 조사가 본격화 되던

블루북 프로젝트(Project Bluebook, 1952~1968) 기간동안 이 프로젝트 팀원이었던 에드워드 J.루펠트 대위가 ‘미확인

비행물체(Unidentified Flying Object)’라는 중립적인 용어(用語)를 처음으로 착안 사용하게 된다.

이 말이 UFO의 최초 사용이며 그 근원이다.

http://www.wavero.net/forum/showthread.php?t=9939

 

미확인비행물체 [unidentified flying object, UFO]

훈련을 쌓은 지상 또는 항공요원이나 전파탐지 등의 방법에 의해 확인할 수 없는 비행물체. 일반적으로는 비행접시(flying saucer)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정체불명의 비행체를 말한다. 1947년 6월 24일 미국의 사업가 K. 아놀드가 워싱턴주의 레이니어산 부근 상공을 자가용 비행기로 비행하다가 고속으로 나는 정체불명의 물체를 처음 목격했다고 하는데, 이후 세계 각지에서 그와 비슷한 불명의 비행물체가 보고되었다. 57년 6월 미공군기 RB-47이 불명의 비행물체에 의해 미시시피주에서 오클라호마주까지 약 1,000km를 추적당했을 때는 승무원이 청백색의 빛을 번쩍이면서 고속비행하는 물체를 목격하고 기상의 수신장치에도 지상의 레이더가 발하는 전파 비슷한 신호가 감지되었다고 한다.

http://www.scienceall.com/sa0srch/06/01e/read.jsp?cId=30297&indexType=E /Google

 

UFO연구가들이 현대 UFO사건의 효시라고 보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47년 미국에서였다. 1947년 6월 24일 오후, 미국 서북부 워싱턴 주의 레이니어 산 상공을 자가용 비행기로 날고 있던 실업가 케네스 아놀드는 갑자기 9대의  이상한 비행 물체를 목격하였다.

그는 지상에 착륙하자마자 자신의 목격담을 비행장의 지상 근무  요원에게 말했고, 그를 통해 사건이 널리 알려졌다. 당시 케네스 아놀드는 기자 회견에서 자신이 목격한 물체가 마치 '수면을 튀면서 날아가는 접시' 같았다고  표현하였는데, 이 말이 AP통신의 한  기자에 의해서 '비행 접시'란 이름이 붙여저 널리 보도되었다.
그 뒤 미국의 언론사에는 전국  각지에서 UFO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의 제보가  잇따랐고, 이에 급기야는 미 공군이 정식으로 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 공군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UFO조사,  연구 계획을 수행했는데,

그 결과는 한결같이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계획에 관여했던 몇몇의 미  공군 장교나 과학자들은 UFO의 존재에 대한 회의론자에서 오히려 긍정론자로

변신하여 더욱 연구에 힘쓰는 한편,  UFO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데 공헌하기도 하였다.
/http://blog.theple.com/lilylya/2007.html 

 

UFO의 시작 : 케네스 아놀드

UFO의 경우는 명확한 시작이 있다. 1947년 6월 24일 케네스 아놀드(Kenneth Arnold)라는 사업가가 자가용 비행기로 워싱톤주의 Cascase Mountain Range의 레이니 산 근처를 날고 있었다. 그때 그는 왼쪽에서 초고속으로 날아가는 9개의 물체를 보았다. 그들의 날개는 저녁 햇살에 가끔씩 번쩍이기도 했다. 아놀드는 처음에는 이것이 기러기로 생각했으나 기러기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것이 군사에서 개발한 새로운 것(제트 추진 비행물체)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아놀드는 이 날아가는 물체가 약 시속 천마일 혹은 1500마일 이상의 속도라고 생각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글마다 속도에 대해서 다르게 언급하는데 그것은 아마 그의 진술이 몇 번 언갈려서 그런 것 같습니다. )

이 물체가 날아가는 것에 대해서 "마치 심하게 흔들리는 보트처럼 빠르게, 혹은 중국의 연의 꼬리"처럼 날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의 책 "The Coming of the Saucers"에서 내가 오레곤주의 펜들론의 뉴스담당자들에게 말한 것은 그것이 접시를 물위를 가로질러 던진것처럼 날았다고라고 말했는데 첫 번째 리포터가 이것을 "접시같이"라고 표현했고 이것은 다시 비행접시(flying saucer)가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소련의 새로운 무기나 혹은 화성에서 침공한 외계인으로 생각하기도 하면서 UFO의 공포가 확산되었다.

아놀드가 후에 묘사한 UFO의 모양은 전체적으로는 초승달 모양이고 가운데 부분에 조정석처럼 튀어나와 마치 닻처럼 보이는 그런 형태였다.
이 이야기는 비록 미확인 비행물체의 모양이 와전되면서 비행접시라는 말을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그 당시 믿을 만한 사람의 진지한 이야기로 생각이 되었다. 그러므로 아놀드에게 이러한 일이 없었다고 해도 UFO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후 4일 후 엘러버머주 몽고메리의 멕스웰 공군기지에서 두명의 파일럿과 2명의 정보장교가 불가능한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는 하나의 반짝이는 빛을 보았고, 그날 네바다주에서도 다른 파이롯이 미확인 비행물체의 편대를 목격했으며 이러한 이야기는 갑자기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매스컴이 이 문제를 다루고 다시 그러한 목격담은 기하급수로 늘어가게 된다.

아놀드의 목격담이 없었다면 UFO는 없었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답하기 어렵겠지만 아놀드의 목격담의 이야기는 UFO 목격사건은 바로 UFO에 대한 목격담이 매스컴에 의해서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서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50년이 지난 후지만 아놀드의 목격담을 분석해서 연구한 Martin Kottmeyer의 주장에 의하면 그가본 것이 분명히 새의 일종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Eaton은 인터넷에 forum을 열고 결국 야생조류 관찰자들의 도움으로 아놀드의 새로운 기억을 찾아내어 연구를 시작했다.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아놀드는 최초의 UFO을 목격한 후 며칠 뒤에 다시 비슷한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몇 가지 문제가 발견되었는데 우선 가장 큰 문제는 그의 말이 몇 몇 부분에서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발견한 물체의 고도와 시간에 대한 것들이며 이것은 비행속도와 상관이 있다.

야생조류를 탐조하는 사람들에게 확인한 결과 그가 본 것은 새의 종류라고 생각이되며, 그 주장은 아놀드 케네스가 위의 물체를 보고하기 바로 몇 일 전에 한 파일롯이 그와 똑같은 현상을 보고 사진을 찍어서 확인한 결과 새였다는 기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봐서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새 중에서는 아마도 American White Pelican일것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 펠리칸은 (흔히 사다새라고 함) 매우 큰 종류의 새이다. 워싱턴 지역 고유의 American White Pelican (Pelecan userythrorhynchos)는 북미에서 가장 큰 새의 하나이다. 몸무게는 약 15Kg이나 되고 날개를 펴면 3m나 된다. (새 중에서 날개를 폈을 때 가장 큰 새는 알바트로스이며 이 새는 바닷가에서 사는 새이다.)

우선 그가 비행접시를 볼 때 반짝이는 현상이 나타나고 흔들리면서 날았는데 이것은 pelican의 비행형태와 매우 비슷하며 특히 눈이 내린 산에 반사되는 빛과 더불어 착각을 일으키기엔 충분하다고 보인다.

아놀드 케네스의 주장을 새가 아니라 다른 물체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의 근거는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불일치에서 온다기 보다는 케네스 아놀드 의 주장이 서로 불일치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이 물체의 크기가 길이가 넓이보다 약 20배 정도된다고 말한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운석으로 생각되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 운석이 많이 떨어지는 시기였다. 그러므로 운석설도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펠리칸 설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그것은 바로 아놀드 가 그린 비행물체의 모양이 펠리칸과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그의 진술의 혼동으로 인하여 다른 연구가들이 여러 가지 해석을 했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펠리칸이라고 생각한다

 

1940 - 프랑스-이탈리아 휴전협정 조인  

1933년에 아우토반 공사 현장을 방문한 히틀러가 삽질을 하고 있다. 
 

1933 - 아우토반 건설 公社 설립

히틀러는 정권을 장악하는 즉시 아우토반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명칭은 ‘라이히스 아우토반(독일제국 자동차도로)’. 아우토반 건설을 담당할 공사(公社)를 설립(1933년 6월24일)하고 3개월 뒤에는 프랑크푸르트ㆍ다름슈타트 간의 제1기 공사를 시작했다.

17년동안 1만7000km의 도로를 까는 것이 목표였지만 2차대전 발발로 히틀러는 생전에 4000km 만 볼수 있었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 공사가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1926년부터 ‘하프라바(HAFRABA)’라는 민간단체가 아우토반 건설을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하프라바’는 고속도로 연결 예정지 함부르크ㆍ프랑크푸르트ㆍ바젤(스위스)의 머리글자에서 딴 명칭이다.

히틀러가 아우토반에 매달린 이유는 1차대전 때 마른 전투의 패인이 수송력 부족에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650만의 실업자를 구제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이를테면 공황타개를 위한 독일판 뉴딜정책이었던 셈이다.

아우토반은 경부고속도로와도 인연이 깊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 방문길에 올라 본ㆍ쾰른 간 20km

구간을 160km로 달려본 뒤 경부고속도로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1928 - 프랑스 프랑크화 5분의1로 평가절하

1915 - 미국, 연합국측에 대차관 제공

마추픽추

 

1911 - 마추픽추 발견

1911년 6월 24일 미국의 고고학자인 히람 빙엄이 인간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페루 안데스 산맥 지역에서 잉카

잃어버린 도시 마추픽추를 찾아냈다. 마추픽추는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에 있다. 면적은 13㎢이고 신전 하나, 3,000개가 넘는 계단, 테라스식 정원으로 이루어졌다. 빙엄은 1906년부터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예일대학교 역사학

교수를 지내면서 잉카에 대한 옛 기록을 단서로 마추픽추를 찾아나섰다. 1911년 6월 24일 그는 요새화한 도시 마추픽추에 도착해

잘 보존된 석조물의 유해를 발견했다. 이어 8월에는 또 다른 중요한 잉카 유적 비트코스도 발견했다. 빙엄은 안데스 문명에 관한

<잉카의 땅>·<마추픽추>·<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등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말년에는 정치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서울 남산에 있던 일제 통감부 건물

 

1910 -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합병하다.

1910 - 일제, 한국 경찰권 완전박탈

1910 - 대한제국 경찰권 일본에 이양
1910년 6월 24일 조인된 '한국의 경찰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에 따라 대한제국의 경찰권이 일본에 이양되었다. 한국의 경찰행정은

고려시대 2군6위, 조선시대 순군만호부·포도청으로 이어지다가, 갑오개혁 때 내무아문 소속의 경무청이 신설되면서 근대적 경찰제도가 도입되었다. 1907년 기존의 경무청은 경시청으로 개칭되었다. 경찰권이 일제에 이양된 이후에는 통감부 경찰서 관제에 따라 통감부 직속으로 경찰통감부가 설치되었다. 통감부 경무총감은 한국 주둔 일본 헌병사령관이 겸임했으며, 각도 경무부장 역시 각도 헌병대장이 겸임함으로써 헌병경찰제가 시작되었다. 8·15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청의 경무국이 경찰업무를 담당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내무부에 치안국이 설치됨으로써 국립경찰제도가 확립되었다. -브리태니커

 

1905 - 국고증권조례 공포

1903 - 국문학자 양주동 출생

박경원
 

1901 - 한국최초의 여류비행사 박경원 출생

1901년 6월 24일에 태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朴敬元)이 조종사로서 일본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27년 1월, 3등 조종사 시험에 합격하면서였다. 이 당시의 도쿄 아사히 신문은 ‘조선출신 여성비행사 1호 탄생’이란 기사를 실어 그의 존재를 알렸다.

고국의 하늘을 날고 싶었던 박경원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33년. 서울을 경유해 중국 창춘(長春)까지 ‘일·만(日·滿)친선, 황군 위안’을 위한 장거리 비행이 허락된 것이다. 몰고갈 비행기가 없었던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고이즈미 현 총리의 조부인

고이즈미 마타지로 체신대신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신사참배도 함께 하는 등 만남이 잦아져 둘 사이의 염문이

일본 신문 가십란에 실리기도 했다.

1933년 8월 7일 오전, 박경원이 장장 2000km의 비행을 위해 청연호(靑燕號)를 몰고 고국을 향해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그러나 50분 만에 그의 애기(愛機)는 하코네 중턱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청연호의 동체는 두동강났고 박경원은 핸들을 잡은 채 숨져 있었다.

피카소의 `자화상`(1901년작).

 

1901 - 피카소, 첫 파리 개인전

1901 - 피카소 19세로 파리에서 첫 개인전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피카소가 1901년 6월 24일 19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전해 1900년에 이어

재차 파리에 온 피카소는 화상(畵商) C. 보라르와의 친분 덕에 그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피카소의 개인전을 관람한 한 미술평론가는 이 무명의 청년화가를 두고 ‘피카소는 화가이다. 근성부터 화가이다. 그는 색채를 색채로서 찬미하고 있다’고 격찬했다. 파리에서의 데뷔는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향과 달리, 작은 체구에 까만 피부의 스페인 출신 청년화가 피카소의

그림은 단 한 장도 팔리지 않았다.
청년시절을 모국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보낸 피카소는 그 즈음 캬바레나 선술집을 강렬한 색채와 역동감 넘치는 터치로 그려냈다. 그러던 어느날 풍운의 꿈을 안고 파리에 동행했던 절친한 친구 카사게마스가 실연으로 권총 자살을 한다. 이 소식은 피카소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그는 이 때부터 온통 푸른색으로만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1901년부터 1904년까지 계속된 `청색시대`의 시작이었다.
로맨틱한 파리생활의 또 다른 얼굴에는 잔인한 고통, 정신이상이 될 것 같은 현실이 있었다. 질병과 추위, 배고픔을 체험한 피카소는 밑바닥 삶의 근원적 외로움을 짙푸른 청색을 통해 나타냈다. 이 시절 파리에서의 체험은 향후 그에게 사회 저변에 꿈틀거리는 어두운 존재들을 어두운 파란 색을 주조로 그리게 했다. 
 

  

1900 - 폴란드의 유대계 법학자 렘킨(Lemkin, Raphael) 출생

렘킨 [Lemkin, Raphael, 1900.6.24~1959.8.28]

 

제노사이드 [Genocide]
'제노사이드Genocide'는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법학자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1900~ 1959)이 처음 만든 용어로, 인종이나 종족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genos에 살인을 의미하는 라틴어 cide를 결합한 복합어다. 1944년 출간된 자신의 책《점령된 유럽에서의 추축국 통치Axis Rule in Occupied Europe》(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1944)에서 엄청난 규모의 인종 학살에 '제노사이드'라는 이름을 부여한 렘킨은 나치 독일이 저지른 것과 같은 만행을 예방하기 위해 제노사이드를 국제법상의 범죄로 규정하고 제노사이드를 명령한 사람과 그 명령을 집행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노력의 결과로 1946년 유엔 총회에서 제노사이드가 국제법상의 범죄로 공인되었고, 2년 후인 1948년 유엔 총회에서 제노사이드에 관한 협약이 체결됨으로써, 제노사이드에 해당하는 범죄 행위와 처벌받아야 할 대상이 정의되었다.
제노사이드 협약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는 "국민?인종?민족?종교 집단 전체 또는 부분을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실행된 행위"로 집단 구성원을 살해하는 것, 집단 구성원에 대해 육체적?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육체적 파괴를 초래할 목적으로 의도된 생활조건을 집단에게 고의로 부과하는 것, 집단 내의 출생을 방지하기 위해 의도된 조치를 부과하는 것, 집단의 아동을 강제적으로 타 집단에 이동시키는 것이 포함된다.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DGT4808970135274

 

1894 - 프랑스의 정치가 카르노(Sadi Carnot, 1837~1894) 사망

1894 - `킨제이 보고서`를 낸 알프레드 킨제이 출생

김은호 
 

1892 - 근현대 동양화단 채색화의 대가 김은호 출생
1892 - 한국화가 김은호() 출생

김은호 [, 1892.6.24~1979.2.7]

김은호는 근현대 동양화단에서 채색화의 대가로 꼽히는 화가이다. 1912년 서화미술회에서 조석진·안중식으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명성을 얻었다. 1925년 이용문의 후원으로 일본에 유학했고, 한국에 돌아와 1936년 후소회라는 미술 단체를 창립했다. 채색 인물화와 화조화에 뛰어났는데, 특히 인물화에 능해 서화미술회 시절에 순종의 초상화를 그렸을 만큼 천부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산수화는 채색 위주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 일제시대의 친일행적으로 해방후 친일파 화가로 따돌림을 받기도 했지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과 추천작가를 지내면서 화단에서 영향력을 키워갔다.

 

"미술은 곧 인공적인 자연물을 그대로 표현하는 기교이며

그 기교가 완벽한 연후에 비로소 예술적 진미가 깃들이는 것이다."

 

- 김은호

 

1886 - 개신교,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

 
1883 -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헤스 출생 

1883 -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헤스(Hess, Victor Francis) 출생  

헤스 [Hess, Victor Francis, 1883.6.24~1964.12.17]

오스트리아 그라츠 부근의 발트슈타인에서 출생하였다. 1901∼1905년 그라츠대학교, 1905∼1908년 빈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910년부터 S.마이어의 조수로 빈과학아카데미 라듐연구소에 재직하였다. 1911∼1913년 경기구()를 사용한 고공() 관측을 실시, 초방사선 즉 우주선()을 발견하고, 그 성질을 정밀히 조사하여 우주선 연구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 연구로 1919년 리벤상()을 받고 그라츠대학교 실험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1921~1923년 미국 라듐협회 연구소장,

1922∼1925년 미국 광산국 고문 물리학자, 1923년 귀국하여 그라츠대학교 교수, 이어서 인스부르크대학교 교수,

1931∼1937년 이 대학에 신설된 방사능연구소장을 겸임하였다.

1936년 우주선 연구 업적으로 미국의 C.D.앤더슨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1938년 나치스에게 쫓겨 미국으로 가서

1944년 귀화하고, 뉴욕의 포덤대학교 교수로 있었다.

 

1881 - 멕시코서 열차 추락. 200명 사망

1852 - 디프테리아균을 발견한 독일 세균학자 뢰플러 출생

1852 - 독일 세균학자 뢰플러 출생

 

1850 - 영국의 군인 키치너(Kitchener, Herbert) 출생

키치너 [Kitchener, (Horatio) Herbert, 1850.6.24~1916.6.5]

 

1839 - 오스트리아의 우편엽서 창안자 헤르만(Herrmann, Emanuel) 출생

헤르만 [Herrmann, Emanuel, 1839.6.24~1902.7.13] 

 

1838 - 독일 경제학자 구스타프 폰 슈몰러 출생

1812 - 나폴레옹(Napoleon) 군대, 동유럽 니멘강 건너 러시아로 진격

1812년 6월24일. 나폴레옹은 전 유럽 12개국에서 끌어모은 65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 침공을 단행했다.

나폴레옹은 “1개월 이내에 모스크바에 들어갈 것이며 6주일 안에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나폴레옹의 보병은

다른 나라 병사들이 1분에 70보를 걸을 때 120보를 걸을 정도로 진군이 빨랐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인들은 우매하기 때문에 모스크바만 점령하면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쿠투조프가 지휘하는 러시아군은 퇴각을 거듭할 뿐 거의 싸움을 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르 1세 러시아 황제는 “설사 캄차카까지 물러난다고 해도 항복은 하지 않는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계획이 어리석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퇴각한다”고 말했다.

나폴레옹군은 더위와 식량난, 음료수 부족 그리고 퇴각하는 러시아군과의 끊임없는 작은 전투 등으로 지칠대로 지쳐갔다.

9월15일 악전고투 끝에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나폴레옹군은 불과 11만명. 텅 빈 모스크바는 러시아군이 파괴하고

떠나버려 보급품을 현지 조달하겠다는 계획도 물거품이 됐다.

곧이어 무시무시한 동장군(영하 10∼30℃)이 찾아왔다. 여름에 파리를 출발한 나폴레옹군에게 변변한 방한장비가 있을 턱이 없었다. 결국 10월19일 나폴레옹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때 퇴각만 하던 러시아군이 돌연 방향을 틀어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코사크병들도 시도때도 없이 나타나 끈질기게 앞길을 막았다.

12월, 마침내 파리에 귀환한 나폴레옹군은 굶주리고 누더기를 걸친 수만 명의 거지군대로 변해 있었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3/04/28/200304280500016/200304280500016_1.html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러시아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벌어진 전쟁이다.

1807년 이래 프랑스 제1제국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가 점차 동유럽 쪽으로 진출해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는 영국에 다량의 곡물을 수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륙봉쇄령에 의한 경제적 타격은 심각하였다. 1811년 알렉산드르 1세는 대륙봉쇄령을 더 이상 준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에 무력 제재를 가하기 위해 자기 지배하의 각국에 병력을 할당하여, 50만 대군을 이끌고 1812년 6월 러시아에 침입했다. 러시아군은 격돌을 피해 항상 후퇴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모스크바 전방에서 벌어진 격전에서 쌍방이 7만의 전사자를 낸 끝에 나폴레옹은 승리하여 9월 14일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러나 러시아 병사의 모습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16일 밤, 모스크바에 화재가 발생하여 4일간이나 계속 탄 끝에 전(全)시가는 재로 화했고, 곧이어 몰아닥친 무서운 한파 속에 숙영지도 없는 채 군량마저 부족해진 프랑스군은 동사자와 아사자를 무수히 냈다. 여기에 러시아군의 맹렬한 반격이 개시되어 프랑스군은 지리멸렬해져 패주했다.

러시아군의 추격은 파죽지세여서 나폴레옹은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간신히 빠져나왔다. 50만의 병사 가운데

러시아 국경을 넘은 것은 불과 2만 정도였다고 한다.

 

1783 - 프랑스 화학자 라부아지에(Lavoisier, Antoine), 물의 분해 성공

1783 - 프랑스 화학자 라부아지에, 수소를 연소시켜 물의 조성에 성공 \ 

1768 - 프랑스 혁명기의 장군 오슈(Hoche, Louis-Lazare) 출생

 

1687 -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성서학자 벵겔(Bengel, Johann Albrecht) 출생

1542 - 스페인의 신비사상가, 시인, 가톨릭의 성인 요한네스(Johannes) 출생

 

79 - 베스파시아누스 로마황제 사망

79 - 제9대 로마제국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사망

79 - 티투스가 로마 황제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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