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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6-30 (1)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6-30 (1)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                                           3)

 

1) 2009 -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전시회 (6.30~9.17, 덕수궁미술관)

해학 넘치는 ‘뚱뚱보의 미학’

남미 예술의 거장 보테로 전시회

작은 눈코입, 터질 듯 통통한 볼살과 몸집. 콜롬비아 출신의 작가 페르난도 보테로(77)의 ‘뚱뚱보’ 그림은 말 그대로 풍만하고 해학이 넘친다. 1932년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태어난 보테로는 풍만한 양감을 통해 인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감성을 환기시킴으로써 20세기 유행과 상관없이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추구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남미 예술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보테로의 그림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 중구 덕수궁미술관에서 30일부터

9월17일까지 열린다. 1996년 경주 선재미술관에서 열렸던 초대전 이후 13년 만에 국내에서 열리는 보테로전이다.

전시는 1980년대 이후 최근까지의 작품 가운데 회화 89점, 조각 3점이 선보인다.
1998년 작 '악기'와 2006년 ‘꽃’은 보테로 작업의 출발점이 된 정물 작품들이다. 르네상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장의 작품들을 패러디한 작품들도 전시된다. 2005년 작 ‘벨라스케스를 따라서’는 벨라스케스의 ‘왕녀 마르가리타’를, 2006년 작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니를 따라서’는 얀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테로식 뚱뚱한 인간으로 패러디한 것이다.

라틴댄스를 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춤추는 사람들’과 스페인 소설 ‘칼리스토와 멜리베아의 희비극’에 등장하는

셀레스티나를 모델로 한 ‘셀레스티나’ 등은 라틴 아메리카 출신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는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또 투우와 서커스도 작품의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1992년 작 ‘자화상’에서

그는 투우복을 입은 투우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김지희 기자 kimpossible@segye.com 세계일보 2009.06.29 (월) 17:54,

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90629003413&ctg1=

07&ctg2=00&subctg1=07&subctg2=00&cid=0101050700000

 

2) 1971 - 소련 유인우주선 소유즈 11호의 세 우주비행사 지구귀환중 사망

1971년 6월 6일 발사되어 24시간의 우주비행과 궤도 스테이션 "살류트"와의 도킹을 성공시킨 소련 유인우주선 소유즈

11호가 지구귀환을 위해 대기권에 돌입, 낙하산으로 예정지점에 연착륙을 시도했지만 3명의 비행사는 좌석에 앉은 채로 사망했다.

세 비행사의 사망원인은 명확치 않지만 계기류가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우주선내에 화재 흔적도 없었기 때문에 우주선내의

기압이 어떤 이유로 해서 갑자기 저하되어 세 비행사의 혈액이 비등해 절명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이 사고는 획기적인 유인우주 정거장의 실험을 성공시켰고 게다가 24일에 가까운 장시간기록도 수립했지만

후의 비극적인 사고로 막을 내렸다. 조선 (29일자)

 

3) 1981 - 중국, 실용주의 체제 선언

덩샤오핑은 류사오치[] 등과 함께 경제발전을 위하여 물질적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노선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마오쩌둥과 노선갈등을 빚어 1966년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으로부터 반모주자파()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하였다.

1973년 3월 총리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으나,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죽자 마오쩌둥의 추종자인 4인방()에 의하여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죽고 화궈펑[]이 저우언라이

계열의 노간부인 예젠잉[], 특무부대장인 왕둥싱[]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하였으나 화궈펑의 힘만으로는

정국수습이 어려웠으므로 예젠잉의 종용으로 1977년 7월 덩샤오핑은 복직되었다.

그후 화궈펑과 5년간의 권력투쟁 끝에 1981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실용주의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한 개혁조치들을 단행하였다. 그의 집권 후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보장, 지방분권적 경제운영, 엘리트 양성, 외국인투자 허용 등으로

중국경제가 크게 성장하였다. 1989년 4월 톈안먼[]사건으로 그의 정치적 거취가 불안해 보였으나 위기를 수습하고,

중국 정계의 최고 실권자로서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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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3 -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시작

그해 여름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KBS의 "특별생방송-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1983년 6월 30일부터 방송이 시작돼

장장 138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처음 방송할 때 만해도 90분 길이 단발성 특집이었다. 이산가족 150명을 초청한 방청석에 1000명이 넘게 몰려왔다.

방송도중 방송사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전화가 쏟아졌다. 진행을 맡은 유철종 이미연씨는 이날 새벽 3시까지 연장방송을

해야했다. 방송은 연장에 연장을 거듭 결국 138일간 계속됐다. 진행자로 김동건 신은경 황인용 강부자씨 등이

합세했고 잠도 잊은 채 마이크를 잡았다.방송과는 별도로 여의도 KBS 본관 벽과 그 앞 광장에는 이산가족을 애타게

찾는 이들이 붙인 벽보가 어지러이 등장했다. 한국전쟁후 생사를 모른채 33년을 애태우던 남북이산가족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방송이벤트였다. 방송중 10만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참여해 애탄 절규를 했고 1만189가족이 상봉의 기쁨을 맛보았다.

독일의 공영 ZDF를 비롯, 일본 NHK, 미국 CBS 등 해외 미디어 취재도 뜨거웠다.

 

2) 1992 - 경부고속철도 기공식 거행

1989년 5월 정부는 경부고속철도 건설방침을 결정하였고, 1990년 6월에는 전 노선이 결정되어

1992년 6월 30일 천안아산역 예정지에서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공사는 열차의 방식 결정, 열차 도입 국가 선정, 문화재 훼손 논란, 잦은 설계 변경, 부실 공사 의혹,

외환 위기 등 많은 위기에 봉착했으며, 결국 6년으로 예정되었던 공기를 훨씬 넘는 12년의 공사 끝에

일부 구간이 2004년 3월 31일 개통되었다. 위키백과

(2004 년 4월 1일 고속철도가 1단계 개통 운행되었습니다. ^.@)

 

3) 1992 - 피델 라모스, 필리핀 대통령에 취임 

피델 라모스(Ramos, Fidel V.)가 1992년 6월 30일 제12대 필리핀 대통령에 취임했다. 지난 5월 11일 실시된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차기 대통령에 당선된 피델 라모스 전 국방장관은 아키노 대통령의 6년 재임기간 중 군합참의장과

국방장관직을 차례로 맡았었다. 라모스는 1986년 2월 그의 사촌형인 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에

대항한 군부반란을 주도하면서 국제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당시 군부반란은 피플스 파워로 대변되는 국민들의 대규모 민주시위를 촉발, 마르코스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어 후임 대통령에 오른 아키노 정권하에서는 7차례나 군부 쿠데타를 진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써 아키노

대통령의 신망을 공고히 했다. 이를 계기로 마르코스 정권에서 탄압의 주체였던

그의 이미지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탈바꿈됐다.

그는 1928년 3월 18일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1백76㎞ 떨어진 링가옌의 명문가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마르시소 라모스는 외무장관 및 대만대사를 역임한 바 있으며 여동생 레티시아 샤하니는 현재 필리핀 상원의원이다. 1950년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1년 뒤 미 일리노이대에서 건축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에는 필리핀군 소대장과 중대장 계급으로 공산게릴라 토벌작전에 참여했으며 한국동란에도 참전, 필리핀군 정찰소대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981년에는 군부에서 일단 퇴임했으나 마르코스 대통령이 그의 임기를 연장, 군의 다른 주요 장성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그는 1986년 대선 때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후안 폰세 엔릴레에 합세해 군부반란을 주도,

마르코스 정권에 종지부를 찍는데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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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0 - 콩고민주공화국 독립
1960년 오늘, 콩고민주공화국이 벨기에로부터 독립했다.
벨기에는 앞서 같은 해 초에 콩고에서 철수하고 독립을 승인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독립 직후 쿠데타와 내전에 휩싸였다.
초대 총리가 된 루뭄바(Lumumba)는 같은 해 11월 모부투 대령의 군대에 체포돼 이듬해 1월 카탕카주에서 처형됐다.
이후 촘베 총리가 콩고민주공화국을 다스리다 1965년 11월 모부투가 다시 쿠데타에 성공해 정권을 장악했다.
모부투 정권은 32년 뒤인 1997년 5월 로랑 카빌라(Laurent Kabila)가 이끄는 반군세력에 의해 무너졌다.

 

2) 1950 - 트루만 미국 대통령, 미군 한국 출동 명령
트루만 미국 대통령은 6.25 가 발발 되자 26일 미극동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즉시 공군 및 해상으로부터

공격전을 부여하고, 27일에는 이들 공-해군이 출동 개시했고, 맥아더 장군은 도쿄에서 내한하여 수원에 도착,

자동차로 한강에서 적정을 시찰하고 돌아갔다. 그후 트루만 대통령은 30일을 기해 맥아더 장군에게

미군 지상군 사용권을 승인했다. 이로써 제일먼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사단 이
한국에 오게 됐다. 이로써 미국은 한반도의 자유 수호에 단호한 결의를 보이게 한 것이다.

http://blog.joins.com/21mole/4995441 

 

6월 27일 다시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어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남한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남한

대한 해,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6월 30일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 7월 1일미국 육군제24사단 21연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대대장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7월 5일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

 

3) 1948 - 트랜지스터 개발 발표 

1948년 6월 30일, 20세기 기술혁명의 단초가 된 트랜지스터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윌리엄 쇼클리(Shockley, William, 1910~1989), 존 바딘, 월터 브래튼 등 3명의 연구원이 6개월 전에

이미 개발을 끝냈지만 특허획득을 위해 함구해오던 미국 벨연구소가 이날 그 실체를 공개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진공관을 220분의 1 크기로 줄였다는 기자회견 발표를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쇼클리가 1950년에 최초의 개량형 트랜지스터를 들고 나오자 이 신개발품이 가져올 혁명적 변화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에너지 소비가 적고 수명도 몇 배나 길며 덩치도 작은 트랜지스터의 등장은 진공관 시대의 막을 내리게 했고, 최초의 전자계산기 `에니악`도 현역에서 퇴장시켰다.

개발은 미국이 했지만 정작 재미를 본 것은 일본이었다. 1955년에 소니사가 세계최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

`TR-55`를 시장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2009 - 마이클 잭슨 콘서트 사상최대 환불 사태

환불 대신 티켓 간직하겠다는 팬도 많아

마이클 잭슨은 다음달 13일 영국 런던의 O2아레나 공연을 시작으로 12년만의 복귀 콘서트를 준비했다.

그러나 잭슨이 지난 25일 사망하면서 '디스 이즈 잇(This is it)' 50회 공연은 물거품이 됐다.

티켓을 구매한 75만명의 팬들은 물론이고 공연을 계획한 공연기획사 AEG 라이브도 충격에 빠졌다.

AEG는 30일 성명을 내고 공인된 경로로 구매한 티켓은 티켓가격과 수수료를 모두 돌려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환불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8월 14일까지 신청을 마치면 잭슨이 디자인한 그래픽이 새겨진 실제 티켓을 받게 된다.

티켓 판매액이 무려 8천5백만 달러에 달했던 만큼 이번 환불은 사상 최대 규모의 티켓 환불 사태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AEG가 전액환불방침을 밝혔지만 이번 콘서트를 둘러싼 '회계악몽(accounting nightmare)'은

당분간 사그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잭슨이 남긴 상당한 빚과 자산, 3명의 자식들 양육 등 재정문제를 둘러싼 법적분쟁에 수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AEG가 잭슨의 사망으로 생긴 재정 위기를 어떻게 넘길 것인가는 보험사들이

손실을 어느 선까지 보전해 줄 것인가에 달려 있다.

기획사들은 공연 취소나 스타의 불참석 등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하는데 보험조항은 매우 자세하고

취소이유에 따라 지급액이 달라진다.

영국 재보험사인 로이즈의 바트 내시 대변인은 이번 공연을 위해 AEG가 가입한 보험이 여러 개라고 밝혔다.

그는 "보험에는 변수가 매우 많고 작은 것들도 모두 중요하게 작용한다"며 예를 들어 죽음의 원인이

평소 건강상태 때문이라고 발표되거나 의학적 부주의가 발견되면 보험들마다 지급액이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만약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의 검시관들이 6주 후에 마이클 잭슨의 사망 원인을 약물로 결론 내린다면

AEG가 받는 보험액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이베이나 비아고고 같은 입장권 재판매 사이트는 티켓 전액환불을 일찌감치 약속했지만

환불 대신 티켓을 간직하겠다는 팬들도 적지 않다.

airan@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9-06-30 오전 11:24:58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363116.html 

 

2002 - 브라질 월드컵축구 사상 5번째 우승, 2002 한일월드컵 폐막

브라질이 2002년 6월 30일 일본 요코하마경기장서 열린 제17회 2002 FIFA 한·일 월드컵축구 결승에서

호나우두가 혼자 두 골을 터뜨리는 활약에 힘입어 독일을 2대0으로 꺾고 FIFA컵에 입맞춤했다.

1958·1962·1970·1994년에 이어 통산 다섯 번째 우승이었다. 21세기 처음이자, 아시아에서 최초로 열린

월드컵의 패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것도 대회 1회전부터 결승까지 7전 전승이라는 완벽한 성적으로 거둔

영예였다. 1930년 1회 대회 이후 72년 만에 처음으로 독일과 벌인 월드컵 맞대결에서 승리하는 기쁨도 누렸다.

대회 8골을 넣은 브라질의 호나우두는 득점왕에게 주어지는 "골든 슈"를 차지했다.

15억명 이상이 TV로 시청한 결승전은 FIFA랭킹 2위 브라질의 화려한 공격과 11위 독일의 수비가 충돌하는 양상이었다. 하지만 주도권은 3대회 연속 결승에 오른 강호 브라질이 쥐었다. 결승골은 후반 22분 터졌다. 히바우두가 상대진영 왼쪽에서 강하게 때린 중거리슛을 독일 골키퍼 올리버 칸이 잡다 놓치자 호나우두가 달려들며 가볍게 차 넣었다.

호나우두는 12분 뒤 클레베르손의 패스를 받아 페널티지역 정면에서 땅볼슛, 쐐기골을 성공시켰다.

한편 5월 31일 개막되어 한 달간 전세계를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렸던 월드컵도 결승전과 함께 폐막됐다.

이번 대회는 우려했던 축구장 난동꾼(훌리건) 관련 사고가 한 건도 없었고, 금지약물 복용 케이스도 나오지 않았으며,

경기 배분, 선수단과 관중의 이동, 교통, 숙박, 미디어 서비스 등 공동개최에 따른 문제점들도 거의 불거지지 않아

여러모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기력 측면에선 한국이 4강, 일본이 16강까지

오르면서 아시아축구의 약진을 주도했으며, 터키·세네갈·미국 등도 선전해 "축구 평준화"에 이바지했다. 

 

2002년 FIFA 월드컵 한국/일본™(영어: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 일본어:2002 FIFAワールドカップ

韓国/日本™)은 대한민국일본이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공동 개최한 제17회 월드컵으로, 2002년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열렸다.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을 기본 이념으로 시작했다. 대한민국일본에서 각각 10곳,

모두 20개의 도시에서 31일간 64경기를 치렀다.

브라질이 우승, 독일이 준우승하였다. 주최국인 대한민국일본은 이 대회에서 각각 4위, 16강 진출의 성과를

달성하였다. 대한민국의 4위 뿐만 아니라 터키의 3위와 세네갈의 8강 진출, 그리고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프랑스아르헨티나, 포르투갈 등 의 조기 탈락 등 많은 이변이 일어났다.


1989 - 전대협 대표 임수경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 

1989년 6월 30일 전대협 대표 임수경(외국어대 불어과 4년)양이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위해 단신으로

평양을 방문했다.전대협은 정부가 평양축전에 참가하지 못하게하자 극비리에 임수경대표를 제3국을 통해

평양축전에 파견했다고 밝혔다.

평양에 도착한 임양은 북한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평양축전에 참가하는 동안 북한학생위원회 위원장

김창룡과 함께 조국통일의 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8개항의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백두산을 출발,

한라산을 향해 국토를 종단하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했다. 축전이 끝난 후 임양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파견한 문규현 신부와 함께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는 평양에서 개최되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임수경을 파견하였다. 임수경은 1989년 6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여 도쿄에 도착하고, 6월 28일 도쿄를 출발하여 6월 29일 서베를린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다시 동베를린을 거쳐 평양으로 갔다. 6월 30일 오후 1시 30분에 평양의 순안비행장에 도착한 임수경은

7월 1일 오후 7시 평양 능라도경기장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식 행사에 전대협의 대표 자격으로

전대협의 깃발을 앞세우고 참가하였다. 7월 7일 평양시내 청년공원 야외극장에서‘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조선 인민과 청년학생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연대성집회’가 열렸다. 평양축전에 참가한 여러 나라의 청년 대표들이 참석하여 연설하였는데, 마지막 순서로 임수경과 조선학생위원회 김창룡 위원장이 8개 항으로 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관한 남북 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채택하였다. 백두산 천지에서부터 국제평화대행진을 시작하여 7월 27일 판문점에

도착한 임수경은 판문점 귀환에 동행하기 위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대표로서 파견된 문규현 신부와 함께 미군 정전위원회에 판문점을 통한 귀환을 요구하였다.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판문점 귀환이 거부되자, 8월 1일까지 6일간 판문점 귀환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8월 15일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분단 이래 최초로 판문점을 돌파하였다. 그 결과로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군사분계선을 넘자마자 미군에 의해 연행되어 곧바로 구속되었다.

그 후 임수경은 1990년 6월 11일 항소심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오늘의 사건-6/3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http://www.kdemocracy.or.kr/Minju/Minju2_History/sub_01_view.asp?Num=7183 

 

1981 - 사랑의 선교회 한국 선교

우리나라 사랑의 선교 수녀회의 시작은 1981년 5월 (3일)에 마더 테레사가 한국을 방문한 데 이어

6월 30일,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으로 수녀 3명이 한국에 들어온 것이 시작이었다.
(사랑의 선교 수녀는..1982년 첫 한국인 수녀를 배출했다.)
http://blog.aladdin.co.kr/747940194/2513705



 

1981년 5월, 마더 데레사의 방한을 계기로 당시 서울대교구장이던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정식으로 초청함에 따라 같은 해 6월 30일 세 명의 인도 회원이 입국하였다. 원래 사랑의 선교회 본부에서는

9월경에 회원을 파견하기로 잠정적으로 결정하였으나 일본·대만과 동시 진출이 결정되면서 당초 계획보다

3개월 앞당겨 회원을 파견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봉천동 본당 관할 봉천 `1동 공소의 사제관에서 2개월 동안 생활하다가 같은 해 8월 21일 봉천 1동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됨에 따라 용산에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휴양의 집’으로 거처를 임시 옮겼으며, 1981년 9월에는 ‘휴양의 집’ 내에 ‘평화의 집’(양로원)을 마련하여 20여 명의 무의탁 할머니들을 돌보면서 본격적인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2년 1월에는 11명의 지원자가 입회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9명이 같은 해 6월 수련을 위해 필리핀으로 떠났다.
그후 1983년 4월에 경기도 안양에 본원을 건립하였으나 안양시 도로 확장공사로 수녀원 부지 가운데 일부가 편입됨에 따라 1993년 10월 8일 안산시에 수녀원을 완공하고, 이듬해 5월 10일 본원을 이전하였다.

이에 앞서 1985년 5월 24일에는 3명의 회원이 첫서원을 하였으며, 1985년 6월 14일에는 인천시 만수동에 첫번째 분원을 마련하고 ‘온정의 집’(양로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현재 안산과 인천의 양로원에서 각각 40여 명의 무의탁 할머니들을

돌보며 빈민가·병원·요양소·교도소·양로원·고아원·재활원 등에 있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위로와 작은 사랑의 봉사로 참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며, 생명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 성바오로
http://address.paolo.net/view.php?addrid=603

- 공중전화카드  

 
1980 - 성산대교 개통

한강의 12번째 다리인 성산대교(城山大橋)가 1980년 6월 30일 준공, 개통됐다. 마포구 망원동과 강건너 영등포구

양평동을 잇는 이 다리는 길이 1410m, 폭 21.6m의 6차선으로 양쪽에 보도(2.7m씩)를 갖추었다.

다리의 색깔은 안쪽은 회색, 바깥쪽은 주황색이다.

서울시가 1977년 4월에 착공, 2백57억9천만원을 들여 3년3개월 만에 완공한 이 다리는 1979년 개통한 성수대교에 이어

두 번째로 철재트러스 공법을 연결, 조립한 것이어서 교각사이가 120m씩으로 다른 한강다리보다 2배나 길다.

때문에 다리모습이 날렵해 보이는데다 교각과 교각사이에 반달형 아치를 세워 곡선미가 가미되어 있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중앙청∼사직터널∼금화터널∼연세대앞∼사천고가교∼성산대교∼경인고속도로 입구를 잇는 11.7km의

성산대로건설이 마무리됐다. 다리 양쪽입구에는 각각 입체교차로가 설치돼 차량이 각방향으로 논스톱으로 달리게 돼 있어,

김포공항을 오가는 차량들의 경우 시내중심까지의 주행시간이 종전40분대에서 20분대로 절반이나 단축됐다.

 

성산대교(城山大橋)는 서울특별시한강에 위치한 다리이다. 마포구 망원동과 영등포구 양평동을 잇는다.

1980년6월 30일에 개통되었다. 국도 제1호선국도 제48호선의 일부이며, 서부간선도로를 거쳐 서해안고속도로

이어진다.서부 한강에서는 성산대교가 가장 사진 찍기에 좋다. 1980년 개통 당시에도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서울 시민들에게 각광을 받았다. 당시에도 밝고 어두운 부분의 차이가 뚜렷해 화사하고 선명한 사진이 나온다. 성산대교 남단에서

찍는다. 다리 바로 아래 자전거도로가 포인트이다. 다리 좌우에서 촬영하고, 정중앙에서 허리를 낮춰 교각을 찍는다.

서울 지하철 2호선 당산역에서 걸어갈 수 있다. 무지개색 조명을 설치한 선유교, 당산철교를 묶어 함께 찍는다.

1975 - 전투예비군 부대 창설

국방부는 북한의 대남 적화 야욕이 점차 예의해감에 따라 이에 대한 후방 경비의 강화를 위해 지역 예비군의

정예자원으로 전투 예비군 부대를 편성했다고 발표 했다. 이 전투 예비군 부대는 북한의 제 8군단이나 경보병

여단 병력 등의 후방침투를 분쇄하기위해 마련된 전투 기동타격대이다.

이 전투 예비군의 장비는 국산으로 현역 수준과 동일하게 무장되어 있다.

 

주요 국방연표


03.17- 1961년 이래 소규모로 실시된 연습을 ‘독수리연습’으로 명칭하여 최초 실시
03.19 - 제2땅굴 발견
04.23 - NPT(핵확산 금지조약) 가입
05.05 - 을지훈련(한), 포커스렌즈 훈련(한·미) 통합
06.30 - 전투예비군 편성
08.27 - 제8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 개최(서울)
09.02 - 중앙학도호국단 발대식 거행
09.22 - 민방위대 창설

 

1970 - 경부고속도로 완공  

경부고속도로

1. 공사기간  1968년 2월 1일 - 1970년 6월 30일 완공 (2년 5개월)
   1970년 7월 7일개통
2. 서울 강남구 제3한강교~부산시 구서동까지 총 428km

www.gangje.go.kr 

 

경부고속도로 연혁

1968년 2월 1일 착공

1970년 6월 30일 완공 (2년 5개월)
1970년 7월 7일 개통

1971년 8월 31일 노선 이름이 서울-부산간고속도로(고속국도 1)로 지정 

 

1936 -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출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는 마거릿 미첼1936년에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1937년

퓰리처 상을 받았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같은 이름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39년에 개봉했다.

이 소설의 배경은 남부 조지아 주애틀랜타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 소설의 양이 방대해 많은 출판사에서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마거릿 미첼은 어느 출판사의 직원에게 원고를 떠넘기다시피 맡겼다. 직원은 원고에 매료되었고 곧 출판이 결정되었다. 결국, 마거릿 미첼이 원고를 억지로 떠넘긴 덕분에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대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탄생한 것이다.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1936년 6월 30일 처음 출판됐다. 신문사 기자였던 작가 마가렛 미첼(Mitchell, Margaret)은 아버지로부터 들은 옛 남부의 분위기와 남북전쟁의 일화에 기초해 10년 동안의 조사와

집필 끝에 이 소설을 완성했다.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바람"에 모든 것을 빼앗기는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는 종래의 연애소설 여주인공과 전혀 다른 당당한 캐릭터로 불황에 빠져있던 사람들의 공감을 샀고, 금새 베스트셀러가 됐다.

작가 마가렛 미첼이 1037쪽 분량의 이 소설에 붙이려 했던 제목은 "내일은 또 다른 태양이 떠오른다"였다. 이것은 "내일 생각하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거야"라고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타라 농장에서 불타는 노을을 배경으로 외치는

마지막 대사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러나 맥밀런 출판사의 종용에 따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결정됐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기였고 이에 미국인들은 황량한 마음을 달래줄 소설을 원했다. 이 소설은 당시 뉴욕타임즈지의

서평란에서 "미국작가에 의해 쓰여진 최초로 주목할만한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6개월 만에 100만 부가 팔렸고,

미첼은 이 소설로 1937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1939년에는 클라크 게이블, 비비안 리 주연의 상영시간 3시간

40분짜리 영화로 제작되어 1년 간 관객 2500만명을 동원했고, 1989년까지 관람 총인원 12억 이상을 돌파했다.


1911 - 폴란드의 시인, 비평가 밀로즈(Milosz, Czeslaw) 출생

1905 -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이론에 대한 논문 출판 

1893 - 동독의 공산당 지도자 울브리히트(Ulbricht, Walter) 출생

 

1884 - 프랑스의 작가 뒤아멜(Duhamel, Georges) 출생

1817 - 영국의 식물학자 후커(Hooker, Joseph Dalton) 출생

1795 - 프랑스의 화학자 카방투(Caventou, Joseph Bienaimé) 출생

 

1789 - 프랑스의 화가 베르네(Vernet, Horace) 출생

1786 - 프랑스의 시인 데보르드 발모르(Marceline, Desbordes-Valmore) 출생

1685 - 독일의 건축가 치머만(Zimmermann, Dominikus)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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