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06.29 (2)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3 - 미국의 영화 배우 캐서린 헵번(Katharine Hepburn) 사망
헵번 [Katharine Hepburn, 1907.5.12~2003.6.29]
2003년 6월 29일, ‘할리우드의 전설’이 숨을 거뒀다. 60년 영화 이력 동안 네 번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캐서린 헵번이 파킨슨병을 포함한 여러 합병증에 시달리다 이날 편안히 눈을 감은 것이다.
헵번은 1930~5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연기파 여배우’의 대명사였다. 또렷한 광대뼈, 적갈색 머리, 상류층
억양 등이 특징인 그녀는 강한 여성 캐릭터를 주로 맡았다. 헵번은 ‘모닝 글로리’(1933) ‘초대받지 않은 손님’(1967)
겨울의 사자’(1968) ‘황금연못’(1981) 등으로 네 차례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고 모두 12차례 후보로 지명되는 진기록도 남겼다. 이 때문에 ‘할리우드의 전설’이라는 별명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동시대 여성들은 그녀를 역할 모델로 삼을 정도였고, 1985년 한 여성잡지는 헵번을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여성으로 뽑기도 했다.
1907년 5월 코네티컷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여성운동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볼티모어의 증권사에서 일하다 1928년 뉴욕에서 ‘요즘 나날’이라는 연극으로 데뷔했다. 그해 사교계 인사 러들로 오그덴과
결혼한 헵번은 6년 만에 이혼한 후 “결혼은 사랑과 명예를 갉아먹는 끔찍한 일”이라며 “결혼을 믿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 믿음대로 그녀는 이후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다만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와 함께 9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26년간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헵번은 ‘미국 여성들에게 처음으로 바지를 입힌 여배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배우’(1999년 미국영화연구소(AFI))등에 선정되기도 했다.
1910 - 미국의 작곡가, 작사가 로서(Loesser, Frank) 출생
로서 [Loesser, Frank (Henry), 1910.6.29~1969.7.28]
브로드웨이 뮤지컬 작가로 큰 성공을 거둔 미국의 작곡가·대본작가·작사가.
〈진정한 노력 없이도 성공하는 방법 How to Succeed in Buisiness Without Really Trying〉으로
1962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던 그의 아버지는 어린시절 대중가요에 대한 그의 관심을 돌리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는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고, 뉴욕 시티 칼리지를 중퇴한 후로는 1920년대말 음악출판사에서 작사가의 자리를 얻을 때까지 음악과는 상관없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의 작품은 〈내가 쌍둥이라면 I Wish, I Were Twins〉(1934)이
팻츠 월터에 의해 녹음되기 전까지는 거의 발표되지 않았다. 1936년 할리우드로 간 그는 그곳에서 작사가로서 재능을 인정받아 호기 카마이클과 함께 〈작은 파리 Small Fry〉. 〈따분한 두 사람 Two Sleepy People〉을 만들었으며,
조셉 릴리와는 〈징글, 쟁글, 징글 Jingle, Jangle, Jingle〉을 만들었다. 그밖에 그가 가사를 써준 작곡가로는
버턴 레인, 쥘 스타인, 아서 슈발츠, 프레더릭 홀랜더, 자미 맥휴 등이 있다.
그가 가사를 쓰고 처음으로 작곡한 노래는 〈Praise the Lord and Pass the Ammunition〉으로, 제2차 세계대전중에
최고의 인기를 모았다. 대전중 군인들이 제작하는 병영 쇼를 위해 노래를 썼으며 보병들의 군가인 〈보병대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What Do You Do in the Infantry?〉를 작곡하였다. 1947년 이후부터는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전후 도시에 유행하는 속어를 가사에 사용한 노래로 인기를 끌었다. 그의 노래 〈중국을 향한 느림보배 위에서 on a Slow Boat to China〉는 1948년 최고 인기곡이었다. 소극(笑劇)인 〈찰리의 아줌마 Charley's Aunt〉를
뮤지컬 코미디로 바꾼 〈찰리는 어디에 Where's Charley〉(1948)와 데이먼 루니언의 이야기를 뮤지컬 코미디로 만든 〈아가씨와 건달들 Guys and Dolls〉(1950)은 그에게 토니상을 안겨주었고, 두 작품 모두 영화화되었다(각각 1952, 1955). 〈가장 행복한 펠라 The Most Happy Fella〉(1956)에서는 오페라적 성격을 잠시 보였으나,
다시 초기의 방식으로 돌아가 〈진정한 노력 없이도 성공하는 방법〉을 내놓았다.
할리우드에서 그가 만든 작품 가운데는 다니 케이가 주연했던 영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1952)의 영화음악이 포함되어 있다. 〈이봐요 바깥은 추워요 Baby, It's Cold Outside〉로
1949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1926 - 뉴질랜드의 시인 백스터(Baxter, James K.) 출생
백스터 [Baxter, James K(eir), 1926.6.29~1972.10.22]
뉴질랜드의 시인.
탁월한 작시법과 인상적인 이미지 구사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뉴질랜드 문단에서 중심인물이 되었다.
뉴질랜드와 영국에서 공부한 뒤 첫 시집 〈울타리 너머 Beyond the Palisade〉(1944)를 펴내면서
촉망받는 젊은 작가로 떠올랐다. 〈불어라, 풍요의 바람이여 Blow, Wind of Fruitfulness〉(1948)는 얼핏 보아서는
그저 그렇지만 깊이 있는 시집이다. 첫 비평집 〈뉴질랜드 시의 최근 동향 Recent Trends in New Zealand Poetry〉(1951)에서는 나이에 비해 원숙한 판단력이 엿보인다. 그뒤에 펴낸 시집으로는 〈쇠락한 집 The Fallen House〉
(1953), 풍자적인 〈쇠로 된 빵도마 Iron Breadboard〉(1957), 〈돼지섬에서 온 편지 Pig Island Letters〉
(1966)가 있다. 〈뉴질랜드 시의 양상 Aspects of Poetry in New Zealand〉(1967)을 펴내기도 했다.
1950 - 맥아더 원수 한국 전선 시찰
북한군의 즉각 철퇴를 요구하는 유엔의 요청은 북한에 의해 묵살된 채 전쟁은 계속되었고, 27일 미국대통령 트루먼(Truman, Harry S.)은 한반도의 전쟁이 타이완 등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미 제7함대를 급파,
중국의 움직임을 견제하면서 미국의 해·공군을 파견하여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28일 도쿄[東京(동경)]에 있던 미국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MacArthur, Douglas) 원수가 내한하여 전선을 시찰하고, 미국 국방성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하였다. 맥아더 장군의 보고를 받은 트루먼대통령은 6월 30일 지상군 투입을
명령하였고, 7월 7일에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그 관할권을 미국에게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맥아더가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로써 남한에서의 군사지휘권은 미국의 맥아더
원수에게 주어졌으며, 남한을 원조하기 위하여 파견된 16개국의 군대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1987 - 노태우 민정당 대표, '6.29 선언' 발표
개헌논의 금지 및 제5공화국 헌법하에서 차기 대통령을 뽑도록 한다는 4.13호헌조치 이후 이에 대한 철폐를
요구하는 성명, 집회 및 시위가 전국민적 차원으로 확산되면서,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으로 대통령후보로 지명됐던
노태우(盧泰愚) 의원이 1987년 6월 29일 전격적으로 8개항의 시국수습대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1.여야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이양을 실현 2.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도록 대통령선거법 개정 3.김대중씨를 포함한 시국사범에
대해 광범한 사면,복권 실시 4.구속적부심 등 인권보장 조항의 강화 및 기본권 신장 명시 5.언론자유 창달을 위한
언론관계법 개정 및 언론의 자율성 보장 6.균형있는 사회발전을 위한 지방 교육자치제의 실시 7.정당활동의
자유보장 및 육성 8.맑고 밝은 사회건설을 위한 과감한 사회정화조치 및 사회비리척결 등이었다.
6·29 선언은 1987년6월 항쟁 직후인 6월 29일, 민주정의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자인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특별선언이다.
선언 내용
1.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이양
2. 대통령선거법 개정을 통한 공정한 경쟁 보장
3. 김대중의 사면복권과 시국관련사범들의 석방
4. 인간존엄성 존중 및 기본인권 신장
5.자유언론의 창달
6.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7. 정당의 건전한 활동 보장
8. 과감한 사회정화조치의 단행
노태우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공식 사과도 포함시키려고 했지만 군부의 반발을 우려해 마지막에 철회했다.
5공화국의 내각제 헌법초안 작성에 참여했던 고려대학교 교수 한승조의 증언에 따르면, 6·29 선언문 초안은
박철언이 작성했고, 박철언의 주도하에 노재봉, 이홍구, 김학준 등 당시 서울대학교 교수팀이 참여하여
최종 문건으로 완성되었다.
2002 - 한국 월드컵 3-4위전서 터키에 2대 3 패배, 아쉬운 4위 달성
"대한민국, 터키 그리고 붉은 악마의 하나된 축제!"
대구에서 열린 3,4위전에서 터키는 FIFA월드컵 사상 가장 빠른 골 중의 하나를 득점했고, 결국 한국에 2 대 3의
우승을 거두었다. 하칸 수쿠르가 경기 시작후 불과 11초만에 얻은 선제골을 시작으로 일한 만시즈가 두 골 을 연신
터트리며 공동 개최국인 한국에 대한 승리의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한국도 용감하게 추격하여
이을용의 놀라운 프리킥과 송종국의 뒤늦게 터진 골로 터키를 쫓아갔다.
이번 FIFA월드컵에서 수많은 이변을 일으켰던 한국에게 있어 이날 경기는 다소 실망스러운 경기였지만,
터키는 그 돌풍을 끝까지 몰고 가고야 말았다. 방송문화원
http://www.tvmedia.co.kr/set/set_05_07.html
"아쉬운이 아니고 분에 넘치는 4위.
지금도 한국축구가 세계 4강급 실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상외로 많음."
- Zidane님의 멘트입니다.
1995 - 미국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호 러시아우주정거장 미르에 도킹 성공
아틀란티스호[Atlantis]
89년 5월4일 처음으로 발사되었다. 같은 해 10월18일 발사한 위성 ‘갈릴레오’는 금성의 적외선 이미지와
소행성 이미지를 전송했으며 95년 12월7일 목성에 도착했다. 95년 6월26일 발사되어 10일간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러시아 우주정거장 미르와 랑데부하고 비행사들을 교환하기도 했다. 95년 12월7일 미르와 두번채 도킹할 때
태양전지와 미래의 셔틀 도킹을 위한 도킹 모듈을 운반했다.
김수병 기자 한겨레21 1998년 11월 12일 제232호
http://www.hani.co.kr/h21/data/L981102/1p3pb201.html
1986 - 멕시코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우승, MVP는 "축구의 신" 마라도나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펠레에 이어 또 한 명 "축구의 신"이 탄생했다. 6월 22일 잉글랜드와의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는(Maradona) "신"으로 거듭났다.
그는 잉글랜드 골키퍼와 1대1 상황에서 공중에 뜬 공을 손으로 쳐 넣었다. 주심은 보지 못했고,
경기 후 마라도나는 "그것은 신의 손이 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가 두 번째로 뽑아낸 골은 완벽한 개인기로
빚은 신기(神技)였다. 마라도나는 센터라인에서부터 잉글랜드 수비 5명을 제치며 드리블한 뒤 득점하고 포효했다.
마라도나는 당시 서독과의 결승전 결승골을 어시스트해 아르헨티나에 월드컵을 안겼다. 숱한 화제 속에 끝난
멕시코 월드컵은 지금도 전세계 축구팬에게 "마라도나의 월드컵"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경기장에서는 신이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천재였지만, 사생활에선 끊임없이 광기를 뿜어낸 "문제인간"이었다. 아르헨티나 역대 최연소인 16세에 국가대표로 뽑혔고, 1982년부터 1994년까지 네 차례 월드컵에 출전해,
1986년 우승, 1990년 준우승했다. 마라도나는 국가대표 외에도 그가 소속했던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와
이탈리아의 나폴리팀에 무수한 우승트로피를 헌납했다. 하지만 그는 이탈리아 진출 후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기자들에게 공기총을 쏘아대고, 툭하면 여자문제가 불거졌다.
결국 마라도나는 1994년 미국월드컵 조별 리그 도중 도핑 테스트에서 흥분제를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 쫓겨났다.
마라도나에게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고, 악동과 축구의 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던
마라도나의 선수생활도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1981 - 전두환 대통령, 동남아 순방 중 말레이시아 도착
6.29~7.1 전두환 대통령 말레이시아 공식방문.
1981 - 중국 전인대(全人代) 국가주석에 후야오방[胡耀邦],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덩샤오핑[鄧小平] 선출
1976년 4월 7일 4인방에 의해 세번째로 실각했다 4인방 제거후 1977년 7월 19일 다시 국방상 섭검영의 도움으로
세번째 부활에 성공한 등소평이 1981년 6월 29일 전인대 제11기 6중 총회에서 아직 파워게임에 미숙한 모택동
후계자 화국봉을 실각시키고, 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함으로써 1997년 사망할 때까지 최고지도자로 군림했다.
등소평은 "포스트 毛의 최고지도자"로서 중국의 개방-실용노선을 주도함으로써 "모택동 시대"와 결별하는 길을 걸었다.
6중 총회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전면 부정하는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가 채택되기도 했다.
이 역사결의 7항에서는 모택동의 무오류성도 부정되었다.
1979 - 카터 미국 대통령 방한
미 합중국 카터(Carter, Jimmy) 대통령 각하 내외분이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초청으로
1979년 6월 29일부터 7월 1일까지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한다.
카터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1960년), 죤슨 대통령(1966년), 포드 대통령(1974년)에 이어 한국을 공식방문하는
4번째 미국 대통령이며, 이러한 일련의 방한 사실은 한ㆍ미 유대가 얼마나 공고한 것인가를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금번 방한은 양국간 우호 협력관계를 재차 다짐하고 국ㆍ내외에 선양하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카터 대통령은 방한중 박대통령 각하와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 공동 관심사에 대해 광범위한 의견을 교환할 것이며,
한반도 정세 및 아국의 신장된 국력을 직접 시찰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온 국민은 국빈으로 방한하는
우방국 원수에게 따뜻한 영접을 아끼지 말아야겠다.체신부에서는 카터 대통령 각하 내외분의 방한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양국간의 더욱 긴밀한 협조관계 유지를 기원하면서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표발행안내)
1956 - 마릴린 먼로, 극작가 아더 밀러와 결혼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한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Monroe, Marilyn)가 "세일즈맨의 죽음" 극작가로 알려진
아더 밀러(Miller, Arthur)와 뉴욕에서 1956년 6월 29일 세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미국 신문은 이 결혼을 "미국의 위대한 두뇌와 미국의 위대한 육체의 결혼"이라고 표현했다. 신혼여행을 위해 여권을
신청했으나 공산주의운동을 이유로 신청이 기각된 밀러가 국무성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중이어서 이 결혼은
더욱 화제가 되었다.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못하는 먼로는 밀러에게서 지성의 경외로움과 아버지의 정을 느끼며
유태교의 밀러를 위해 유태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그러나 심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성격이었던 그녀는 매스컴의 집요한 추적, 결혼한 아서 밀러에 대한 열등감, 우수한 연기자가 되려는 강박 관념 등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를 유지하다 1962년 8월5일 자살해 또 한번 전 미국을 놀라게 했다.
1944 - 한국의 독립운동가, 승려 시인 만해 한용운(韓龍雲) 사망
한용운 [韓龍雲, 1879.8.29~1944.6.29]
승려이자 시인이었고 무엇보다 독립운동에 힘썼던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44년 6월 29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중풍으로 눈을 감았다.
본명이 정옥(貞玉)인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법호인 만해(萬海)와 법명인 용운(龍雲)으로 더 친숙하다. 충청남도 홍성 출생인 그는 6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는 등 일찍이 글과 독립운동에 눈을 뜬 시대의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1896년 동학농민운동의 실패로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온 그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5년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러던 1910년 한ㆍ일합병의 국치(國恥)를 참지 못하고 중국으로 망명,
독립군군관학교를 방문한 뒤 만주ㆍ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하여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과 불교정신을 널리 펴는 데 힘썼다. 1919년 3ㆍ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명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6년 희대의 시집 ‘님의 침묵’을 내놓으며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조선일보가 중심이 된 일제하 최대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 발기에 참여,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으로 활동했다.
한편, 지난해 8월 만해가 ‘님의 침묵’을 탈고하는 등 심신이 지칠 때 마다 찾았던 백담사 소재 강원도 인제에 ‘백담사 만해마을’이 준공돼 운영되고 있다. 조선일보사는 지난해 12월 18일 이곳에 ‘조선불교유신론’ 1913년 초판본,
‘불교대전’ 1914년 초판본 등 만해의 저서 원본들과 관련된 희귀자료 115점을 전달한 바 있다.
1941 -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작곡가 파데레프스키(Paderewski, Ignacy) 사망
파데레프스키 [Paderewski, Ignacy (Jan), 1860.11.18~1941.6.29]
세기를 장식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그리고 독립 폴란드의 초대 총리를 지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가 1941년 6월 27일 뉴욕에서 사망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배려로 미군 만이 안장될 수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장차 폴란드가 자유의 땅이 될 때까지라는 잠정적 조치였다. 결국 1992년 서거 51주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1860년 러시아령 폴란드 쿠릴쿠프카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12세 되던 해에 바르샤바 컨서버토리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연주가로서는 다소 늦은 나이인 27세부터 빈, 파리, 런던, 뉴욕 등 세계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명성을 얻었다.
1차세계대전 무렵 그는 폴란드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 폴란드 국가위원회의 일원으로 워싱턴 주재 외교관으로도 일했다. 파데레프스키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조국을 구하는 데 십분 발휘했다.
미국순회공연을 하면서 우드로우 월슨 미국 대통령의 관심을 끌었고 그 결과 윌슨 미국 대통령은 1918년 그의 요청에 따라 의회에서 폴란드 독립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해 줄 것을 요청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는 폴란드가 16세기 야젤로왕조 이후 이웃 독일과 러시아 등 열강들에 의해 계속 유린당하는 역사적 운명을 극복하는 데 헌신했다.
조선 (6월 27일 오늘의 역사)(일부 자료에는 11월 6일 출생 6월 27일 사망으로 나옵니다. ^.@)
1911 - 네덜란드의 베른하르트 공(公)(Bernhart, Prince of The Netherlands) 출생
베른하르트 [Bernhart, Prince of The Netherlands, 1911.6.29~2004.12.1]
정식 이름은 Bernhard Leopold Frederik Everhard Julius Coert Karel Godfried Pieter, Prins der Nederlanden, Prins van Lippe-Biesterfeld.
네덜란드의 공(公).
제2차 세계대전 때 네덜란드 망명정부와 영국군 간의 연락책임을 맡았고, 1944~45년에는 네덜란드 국내군을 지휘했다.
베른하르트 카시미르 공의 아들이며 리페 비스터펠트가(家)의 마지막 통치군주 레오폴트 4세의 조카로서, 로잔·뮌헨·베를린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1933년 이후 대부분의 독일 소공자와 마찬가지로 'SS 기사단'에 가입했다.
1936년 파리에 있는 독일 화학재벌 'IG섬유회사'에서 일할 때 율리아나 공주(뒤에 여왕이 됨)를 만나 1937년 1월 7일
결혼했다. 그뒤 네덜란드 시민권과 네덜란드 공 칭호를 얻었다. 독일군의 네덜란드 침략에 반대해 가족을 안전하게
영국으로 보낸(1940. 5. 12) 뒤 곧 네덜란드로 돌아와 네덜란드 군대를 이끌고 독일군과 싸웠으며, 네덜란드가
독일에 항복 (1940. 5. 14)하자 자신의 잔류부대와 함께 영국으로 도망갔다.
1940년 8월 네덜란드 해군 대령과 육군 대령으로 임명된 뒤 점점 더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1944년에는 네덜란드
국내군 사령관이 되어 전(全)네덜란드 군대를 지휘했다. 영국군과의 연락장교로 일하면서 조종사가 되어 1942~44년에는 영국 공군과 함께 비행하기도 했다. 연합군이 네덜란드에서 공세를 펼 때 네덜란드 군대를 이끌었으며, 네덜란드 와헤닝겐에서 이루어진 휴전협상과 독일 항복식에 참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8년 율리아나 공주가 왕위에 오른 뒤 국제무역과 문화활동을 고무하는 네덜란드의 친선대사로 일했다. 1976년 그는 록히드항공회사와 관련된
뇌물부정사건에 연루되었다. 미국 의회에서 처음으로 그 사실이 폭로된 뒤 네덜란드 특별위원회는 베른하르트 공이,
네덜란드가 록히드사의 항공기를 더 많이 사도록 하는 대가로 많은 돈을 받았음을 밝혀냈다.
이 부정사건은 군주제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만큼 큰 사건이었다.
1900 - 프랑스의 비행사, 소설가 생텍쥐페리(Saint-Exupéry, Antoine de) 출생
1886 - 프랑스의 정치가 슈만(Schuman, Robert) 출생
1880 - 나치에 저항한 독일의 장군 베크(Beck, Ludwig) 출생
1879 - 헝가리의 사실주의 소설가 모리츠(Móricz, Zsigmond) 출생
1866 - 일본의 서양화가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 출생
1818 - 이탈리아의 예수회 사제로 천체물리학자인 세키(Secchi, Pietro Angelo) 출생
1798 - 이탈리아의 시인, 철학자 레오파르디(Leopardi, Giacomo)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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