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6-1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007 - 북송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사망
이인모 [1917.8.24~2007.6.16]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가 6월 16일 사망했다.
이 씨는 북송된 후 ‘신념과 의지의 화신' '통일의 영웅’ 등으로 일컬어졌고 김일성 주석은 자신의 생일날 병원에
입원 중인 이 씨를 찾아 격려하고 노동당 당원증을 수여했으며 ‘김일성 훈장’ ‘영웅칭호’ ‘국기훈장 1급’도 수여했다.
양강도 김형직군에 있는 모교인 파발인민학교는 이인모 인민학교로 이름을 바꿔달았다.
1917년 함경남도 풍산군 안산면 내중리에서 태어나 6.25 발발하면서 인민군 문화부 소속 일선 종군기자로 낙동강
전선으로 남하했다. 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로가 막히자 지리산으로 입산 경남도당 선전부장 대리로 일하다가
52년 지리산 대성골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징역 7년을 선고받은 그는 59년 1월 만기 출소했지만 61년 6월 부산에서 지하당 활동 혐의로 다시 구속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76년 만기가 지났지만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호감호 처분으로 88년 10월까지 복역했다. 34년간 옥살이를 했다.
최종편집 : 2007-07-07 15:45:40
북송 비전향장기수 리인모(이인모)씨 사망
1993년 3월 판문점을 택� 북송된 비전향장기수리인모(89)씨가 16일 사망했다.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내각은 17일 공동으로 "전 조선인민군 종군기자이고
비전향장기수인 리인모 동지가 남조선의 감옥에서 당한 고문의 후과(후유증)로 16일 7시에 89살을 일기로
애석하게 서거했다"고 부고를 냈다고북한방송이 전했다.
부고는 "리인모 동지는 조국의 통일과 주체혁명 위업의 완성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견결히 싸운
신념과 의지의 화신이고 불굴의 통일애국투사"라고 덧붙였다.
리씨의 시신은 인민문화궁전에 안치됐으며 17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조문객을 받은 뒤
18일 오전 8시 발인할 예정이다.
북한은 리씨의 장례를 '인민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하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과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각각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하고, 김영일 내각총리,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 고위 당.정 간부 57명이
참여하는 장의위원회를 구성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날 리씨의 빈소에 조화를 보내 애도의 뜻을 전했으며,북한 당.정.군 및 사회단체, 중앙기관,
평양 주재 각국 대사관 관계자와 6.15 7주년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했던 해외동포 대표단이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노동신문은 이날 1면에 리씨의 부고를 게재했으며 조선중앙통신과 조선중앙방송등 북한 매체들도 잇달아 리씨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고 리인모씨는 북한군 문화부 소속 종군기자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체포돼
34년간 복역한 후 1988년 출소했으며 5년 후 '장기방북' 형식으로 북한으로 송환됐다.
북한은 북송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리씨를 위해 고위간부들이 사용하는 전용병원인 봉화진료소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1996년 5월에는 미국으로 보내 진료받도록 하기도 했다.
리씨의 유족은 부인 김순임씨와 외동딸 리현옥씨 부부, 외손자와 손녀 각 1명씩인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 2007.6.17
2) 1960 - 일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방문 취소
1960년 6월 16일 일본정부가 강력한 좌익계 시위자들에게 굴복하고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신변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을 연기할 것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좌파 사회당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일 연기발표에 즉각적인 승리의 반응을 보여줬다.
전날 15일에 미-일 신안전보장조약과 관련해 발생한 유혈충돌에서 여학생의 희생에 의한 결과였다.
이 때문에 당초 일본을 방문한 후 22일경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3일 앞당겨 19일 한국에 방문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극동 친선방문의 마지막 목적지인 하와이 호놀룰루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도착, 9일간의 일정을 마쳤다. 이번 순방 기간 중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대만에서 우호적이고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며칠간 아시아지역에서 공산주의의 존재가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중국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문 수시간전에 대만 앞바다의
섬들에 공격을 가했다.
1) 1977 - 브레즈네프(Brezhnev, Leonid), 소련 국가원수로 선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Brezhnev, Leonid Il'ich, 1906~1982)가 1977년 6월 16일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에 선임됐다. 브레즈네프는 이로써 당과 국가의 양 쪽을 대표하는 자리에 올라 스탈린
이후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됐다.
소련은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를 해임한 이래 개인지배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당 서기장과
수상, 최고회의 의장을 각각 분리, 트로이카 방식에 의한 집단지도체체를 유지해 왔다.
2) 1940 - 프랑스 페탱(Petain) 내각, 독일에 항복
제2차 세계대전중 1940년 5월 독일군의 공격이 있은 후 당시 프랑스 정부의 수반인 폴 레노는 페탱을 부총리로
임명했으며, 6월 16일 당시 84세였던 페탱 원수는 새 내각을 조직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프랑스군의 패배를 지켜본
'베르됭의 영웅'은 휴전을 요청했다(→ 비시 프랑스). 휴전 조약이 체결된 후 비시에서 소집된 상하 양원은 페탱에게
'국가 원수'로서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다. 독일군이 전국토의 2/3를 점령하고 있는 상태에서
페탱은 독일에 협력해야만 침략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수많은 전쟁포로를 석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휴전 협정으로 침략을 모면한 프랑스 남부에서 페탱은 '일·가족·조국'을 모토로 한 정부를 수립했다.
기질적으로나 교육적으로 보수적인 그는 정부가 프리메이슨의 지부들을 해산하고 유대인들이 일정 직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공포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는 피에르 라발 총리가 주장한 독일과의 긴밀한 협력정책에 반대하여 1940년 12월 라발을 해임하고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을 그의 후임으로 앉혔다. 그런 다음 페탱은 중립과 유예를
원칙으로 하는 외교정책을 실시하려고 계획했다. 그는 비밀리에 특사를 런던에 파견하고,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만나 히틀러 군대가 북아메리카로의 자유통행을 거부하도록 촉구했으며, 주(駐) 비시 미국 대사
윌리엄 레이히 제독과 1942년까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 (페탱)
3) 1947 - 제 1회 유엔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 상하이[上海]서 개막
국제연합 경제사회이사회의 하부기구인 지역경제위원회 가운데 하나로서 UN 의 지역위원회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다. ESCAP은 1947년 3월 28일, 제 4 차 국제연합 경제사회이사회 결의 37에 의해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the Far East; ECAFE)라고 하였는데, 점차 아시아 이외의
서사모아·통가·나우루·파푸아뉴기니·피지 등 태평양 여러 섬나라 및 지역의 가맹이 증가하고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경제개발과 함께 사회개발·사회복지의 중요성이 증대되자 위원회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기구 명칭에 반영시킬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74년 9월 12일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개최한 제 30회 ECAFE 총회에서 지금의 명칭으로 바꾸었다.
설립할 때 ESCAP의 목적은 아시아의 전후(戰後) 부흥의 도모였는데, 지금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경제협력·사회개발을 위한 협력기관으로서 여러 가지 지역협력안과 개발계획을 입안, 실시하고 있다. 가맹국은 2004년 현재 61개국이며
그 가운데 홍콩·브루나이 등 9개국이 준가맹국으로 되어 있다. 한국은 1954년 정회원으로 가입하였다. 본부는 처음 설립할 때에는 중국 상하이에 두었으나, 1948년 이전한 이래 태국의 방콕에 있다. FAO 한국협회 www.fao.or.kr
2002 - 전화기의 발명자는 안토니오 메우치라는 사실을 미국 의회가 인정
“전화기 발명자 벨 아니다”
전화기의 발명자는 미국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아니라 이탈리아 출신의 이민자 안토니오 메우치
(1808~89·사진)라는 사실을 미국 의회가 인정했다고 영국 〈가디언〉이 17일 보도했다.
미국 하원은 16일 표결을 통해 메우치가 발명해 1860년 뉴욕에서 시연한 ‘텔레트로포노’가 최초의 전화기이며
벨은 메우치의 자료를 입수해 16년 뒤 특허를 획득했음을 인정했다. 그 동안 역사학자와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미국 정부 등을 상대로 메우치가 전화기 발명자임을 설득해왔다.
이탈리아 플로렌스 출신의 메우치는 미국 뉴욕 부근의 스태튼 섬으로 이주한 뒤 몸이 마비된 아내를 위해 침실과
자신의 작업실을 연결하는 시스템을 개발해 1860년에 공개시연회를 열었다. 이 기계를 좀더 정교하게 고친 그는
영구 특허 신청에 필요한 250달러가 없어 1871년에 1년짜리 특허를 신청했지만 3년 뒤 특허를 갱신하지 못했다.
1876년에 그와 연구소를 함께 사용했던 벨이 전화기 특허를 내고 웨스턴유니언 전신회사와 계약해 큰 돈을 벌자
그는 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대법원이 벨의 사기혐의를 인정함으로써 승리를 눈앞에 뒀으나
1889년 그가 숨지자 재판도 중단됐다.
미국 의회의 표결 결과가 알려지자 이탈리아에서는 “역사의 부정이 바로잡혔다”며 “벨이 부와
명성을 누린 배신자임이 마침내 드러났다”고 환영했다.
이호을 기자 helee@hani.co.kr 한겨레 2002-06-17
http://www.hani.co.kr/section-007100001/2002/06/007100001200206172139114.html
1998 -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소떼와 함께 방북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9년 6월 16일 북한에 제공할 소 1천마리중 1차분인 소 5백마리를 실은 트럭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다. 정주영 회장은 이날 오후 개성을 거쳐 평양에 도착,7박8일간의 방북일정에 들어갔다.
분단 이후 민간차원의 합의를 통해 군사구역인 판문점을 개방, 민간인의 북한방문이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새로 개통된 문산-판문점간 통일대교를 지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도착,평화의 집에서
방북기자회견을 가진 뒤 판문점중립국감독위 회의실을 지나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정주영 회장 초청 단체인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송호경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판문점 북측지역 판문각에 나와 정회장을 영접했다.
이번 정주영 회장의 방북은 북한당국이 지난 1994년 남북 정상회담 실무회담을 제외하고 김영삼 정부기간 굳게 닫아온 판문점을 민간교류차원에서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98년 10월 27일 2차로 소떼와 함께 방북하였습니다. ^.@)
1992 - 미소정상회담,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I) 합의
부시 미국 대통령과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1992년 6월 16일 가진 1차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현재 보유중인 장거리
전략핵무기를 2003년까지 3분의 1만 남기고 모두 폐기한다는데 합의했다. 이같은 핵감축은 미국과 구 소련이 15년여의 오랜 협상끝에 1991년 타결한 전략무기 감축협정(START) 합의수준에서 또 다시 절반 이상을 줄이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START에서 정한 양국의 전략핵탄두 보유 상한선은 미국 9천8백86개 소련 1만2백37개였는데 양국 정상은 이번 회담에서 보유 상한선을 미국 3천5백개, 러시아 3천개로 다시 대폭 하향 조정했다. 양국 정상은 또 가장 가공할
무기인 중형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과 다탄두 ICBM을 폐기키로 합의했으며 이와함께 테러 위험 국가의 핵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인류의 안전을 확보하는 범지구방어망 구축작업을 함께 연구해 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때 합의된 전략핵무기 감축은 두 단계로 나눠 이뤄졌는데 1단계에서 양측은 보유 핵무기를 ICBM 1천2백50기
중형미사일 6백50기 잠수함 발사 미사일 2천2백50기 등 3천8백∼4천2백50개 수준으로 줄이도록 했다. 2단계에서
양측은 보유상한선이 1천7백50개로 제한되는 잠수함 발사 미사일(SIBM)을 포함,
각각 3천∼3천5백개의 핵탄두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폐기하도록 했다.
1983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모국 폴란드 방문
교황의 자리에 오른 요한 바오로 2세는 여덟 차례의 고국 순방(1979, 1983, 1987, 1991, 1995, 1997, 1999, 2002년)을
통해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와 민주화 정착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폴란드 사람들에게 교황의 존재는 때로는
민족의 상처를 보듬는 인자한 아버지였고, 때로는 가차 없이 잘못을 꾸짖는 엄중한 스승이었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내가 폴란드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조국의 땅이 내게 선물한 신앙과 문화,
역사의 토대, 그리고 그 곳에서 경험했던 모든 기억들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특히 폴란드어는 내게 특별한
의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무언가를 써야 할 때는 폴란드어로 씁니다. 나는 온갖 시련과 박해를 받아온
폴란드 민족 가운데서 당신의 대리인을 선택하신 하느님의 섭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은총과 신비』(1996) 중에서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 국제지역정보 제9권 5호(통권 142호) 2005. 5. 1)
1977 - 독일 태생의 로켓과학자 브라운(Braun, Wernher von) 사망
브라운 [Braun, Wernher von, 1912.3.23~1977.6.16]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장거리 탄도미사일 'V-2'를 발명한 독일 출신 로켓 연구가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박사가 1977년 오늘 65살을 일기로 사망했다. 브라운 박사는 나치 독일의 몰락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1950년부터 미국 육군병기공장의 유도탄 연구의 기술부 부장으로서 장거리로켓을 연구했다.
1960년 이후에는 나사(NASA), 즉 미국항공우주국에 소속돼 아폴로 계획을 위시한 우주개발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63 - 소련 우주비행사 테레슈코바(Tereshkova, Valentina), 세계최초로 여성 우주비행에 성공
“여기는 갈매기. 기분 최고. ” 1963년 6월 16일,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가 된 발렌티나 테레슈코바(당시 26세)가
우주에서의 감동을 이렇게 전했다. 갈매기는 그녀의 호출 부호.
테레슈코바가 1인승 우주선 ‘보스토크 6호’에 몸을 싣고 하늘로 날아오른 것은 낮 12시30분이었다. 장시간의 우주여행이 남녀의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소련은 이를 위해 발레리 비코프스키 중령을 태운 ‘보스토크 5호’를 이틀 전에 발사, 그녀와 함께 비행하도록 했다.
모스크바 방송은 무중력 상태를 실연(實演)하는 그녀의 모습을 오후 3시30분부터 생중계하기도 했다.
보스토크 6호는 70시간50분 동안 지구를 48바퀴 선회한 뒤 19일 오전 11시20분쯤 지구에 착륙했고,
보스토크 5호는 81바퀴를 돌며 119시간6분 동안 우주에 머무는 신기록을 달성한 뒤 같은 날 오후 2시쯤 지구로
돌아왔다.흐루시초프는 “여성은 약하지 않다”며
소련에서 6번째, 세계에서 10번째의 우주비행사가 된 테레슈코바의 장도를 축하해주었다.
1954 -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블룸즈데이(Bloomsday) 행사 시작
블룸즈데이(Bloomsday)는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의 배경이 되는 날인
1904년6월 16일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소설 《율리시스》는 1904년 6월 16일 하루동안에 주인공 리오폴드 블룸과 그의 아내 마리언 블룸, 예술가를 꿈꾸는
청년 지식인 스티븐 데덜러스 라는 세명의 인물이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겪는 하루동안의 18가지 에피소드를
다루었는데 제임스 조이스의 팬들과 문학가들은 매년 6월 16일을 주인공 블룸의 이름을 따서 블룸즈데이로 명명하고
제임스 조이스와 율리시스를 기념하는 행사를 갖는다.
1954년에 첫 행사를 가진 블룸즈데이는 매년 더블린과 그 일대에서 행사를 가지는데 2004년에는 소설의 배경
100주년을 기념하여 수개월동안 성대한 행사를 벌였다. 매년 블룸즈데이를 전후로 해서 아일랜드 문학과 제임스 조이스를 조명하는 학술대회, 공연, 전시회등 다양한 행사가 개최된다. 이 행사는 더블린 시민과 아일랜드 국민은
물론 세계의 많은 영문학도와 문학 애호가들의 문학 축제이다.아일랜드에서는 이 날을 공휴일로 정해 기념한다.
1924 - 중국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개교(교장 장제스)
1924년 6월 16일 황푸[黃埔]군관학교가 개교했다.
정식 명칭이 ‘육군 군관학교(陸軍軍官學校)’ 즉 육군 사관학교인 이 군사학교는 광둥[廣東]성 황푸[黃埔]에 세워져
통상 ‘황푸군교’, ‘황푸군관학교’로 불리었다.
손문은 국공합작 후 혁명수행을 뒷받침할 자체적 무장역량을 건설하기 위해 코민테른과 공산당의 협조를 얻어
중국 최초의 현대적 군사교육기관인 황푸군관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손문은 개교식 연설에서 중국에서 혁명이 지지부진한 것은 진정한 혁명 무장세력이 없고 광대한 인민의 기반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당을 개조하고(국공합작을 지칭), 당의 군대를 양성,
공농(工農)정책을 추진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황푸군관학교의 설립취지는 첫째 혁명 무력과 민중의 결합, 둘째 혁명무력의 인민무력화라고 밝히고
이는 황포군관학교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푸군관학교 설립은 이해 1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결의되었으며 3월 입학시험 등을 통해 350명의
학생과 예비학생 120명을 선발했다. 개교식에는 국민당원과 공산당원을 포함한 교관 및 학생 500명이 참석했다.
초대 교장은 국민당의 장세스[蔣介石]였으며 정치부 주임은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였다.
황푸군관학교는 일본 군대제도를 참고하였으며 국민당의 완전한 통제 아래 혁명 이론교육을 중시하였다.
훈련기간은 10개월 이었으며 교장은 국민혁명군 군장(軍長)을 겸하였다.
1926년 중앙군사정치학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다음 해 공산당 세력을 배제하였다.
난징[南京], 청두[成都] 등을 거쳐 1949년 대만으로 옮겨왔다.
대만 독립을 지향하고 있는 천수이볜[陳水扁] 대만 총통이 2004년 개교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할
계획을 밝히자 일부 원로 졸업생들은 기념식 참석을 거부하고 별도로 기념행사를 갖겠다고 발표했다.
http://www.chinawatch.co.kr/chinawatch.php3?_Number=22686
1903 - 미국의 포드, 포드자동차회사 설립
포드 자동차 회사(Ford Motor Company)는 미국의 자동차를 제조, 판매하는 다국적 기업이며, 단순히 포드(Ford)라고도 한다NYSE:F. 포드는 1903년 6월 16일 미국 미시간 주 디어본(Dearborn)에서 헨리 포드(Henry Ford)가 설립했고
디어본에는 현재에도 포드 본사가 있다. 2004년 포츈 잡지의 매출액 기준에 의하면, 양대 자동차 회사인 다임러-크라이슬러 자동차와 토요타 자동차의 뒤를 이어 세계 3위의 자동차 회사이다.
그러나 수년 전만해도 포드는 제너럴 모터스에 이어 둘째로 큰 자동차 회사였다.
포드는 과거 거대 노동인력을 관리하는 방법과 자동차 제조공정의 방법을 개혁해 왔다. 제조공정의 연구 결과로
엘리 휘트니가 제안했던 교환가능한 부품을 사용한 최초의 일괄 작업 공정을 1913년 도입하기도 했다. 이 방식에 따라
자동차는 벨트를 따라 이동하게 되고 작업자는 단순한 반복 작업으로 부품을 장착하게 되어, 기업 입장에서는 저비용으로도 높은 품질 관리가 가능하게 되었다. 현대의 수많은 제조 기업들이 이 공정을 채택하여 대량생산의
시대가 열리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노사관계 역시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1914년 당시 일반적인 노동시간은
하루 9시간이었고 임금은 일당 2달러 34센트였다. 그러던 것을 8시간 노동시간에 5달러를 지급하면서
노동자의 복지향상에 기여하기도 했다.
설립 초기 포드 자동차의 성공은 1908년 10월 포드 모델 T를 발표하면서 부터였다. 이 자동차에는 825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이 매겨졌다. 포드 모델 T는 1914년 50만대 이상 팔리면서 미국 전체 자동차의 반 이상을
포드 자동차일 정도로 포드 자동차의 성공에 혁혁한 공을 세운 모델이다.
현재 포드 자동차 회사의 최고 경영자는 윌리엄 클레이 포드 2세이다.
1902 - 미국의 유전학자 매클린턱(McClintock, Barbara) 출생
1897 - 미국 매킨리 대통령과 하와이 공화국이 합병조약 체결
1894 - 근대올림픽 부활을 결정한 국제스포츠회의 개최(16~23일, 소르본느대학)
1890 - 미국의 희극배우 로럴(Hardy, Oliver) 출생
1878 - 프랑스의 정치가, 사회주의자 토마(Thomas, Albert) 출생
1874 - 캐나다의 정치가 미언(Meighen, Arthur) 출생
1829 - 미국 아파치족 인디언 추장 제로니모(Geronimo) 출생
1762 - 조선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출생
1592 - 임진왜란 옥포 해전, 합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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