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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의 사건 06.17 사막화방지의 날

오늘의 사건  06.17   사막화방지의 날

 

아이슬란드독립기념일 (1944년) 

 

2009 - 조세형 민주당 상임고문 ‘뇌경색’ 별세

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과 주(駐) 일본대사를 지낸 조세형 민주당 상임고문이 17일 오전 타계했다. 향년 78세.

조 고문 측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큰 충격을 받으셨다"면서 "장례기간 봉하마을에 다녀오고 영결식에 참석한 지

이틀 후인 1일 심각한 뇌경색 증세로 입원해 수술을 받았으나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조 고문은 수술 전까지 한 일간지에 자신의 정치 역정을 담은 회고록 연재를 준비 중이었다고 한 측근은 전했다.

전북 김제 출생으로 전주고와 서울대 문리대를 수료한 조 고문은 합동통신 기자를 거쳐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지냈고

중견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창립대표를 맡는 등 25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79년 10대 신민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13~15대 의원을 지냈으며 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과 일본 대사,

열린우리당 상임고문 등을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조성훈(하나대투증권 부장), 성주(기아차 미주법인)씨와 사위 문정환(SC제일은행 상무)씨 등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장지는 김제 선영이며 발인은 20일이다. ☎(02) 3410-69

김재현 기자 jahn@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9-06-17 오전 09:56:13

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360854.html

 

조세형 민주당 고문 별세…"盧 영결식 이틀후 쓰러져 수술"

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과 주 일본대사를 지낸 조세형 (78) 민주당 상임고문이 17일 오전 타계했다.
조 고문 측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큰 충격을 받으셨다”면서 “장례기간 봉하마을에 다녀오고 영결식에 참석한 지

이틀 후인 1일 심각한 뇌경색 증세로 입원해 수술을 받았으나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북 김제 출생으로 전주고와 서울대 문리대를 수료한 조 고문은 합동통신 기자를 거쳐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지냈고

중견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창립대표를 맡는 등 25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79년 10대 신민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13~15대 의원을 지냈으며 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과 일본 대사,

열린우리당 상임고문 등을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조성훈(하나대투증권 부장), 성주(기아차 미주법인)씨와 사위 문정환(SC제일은행 상무)씨 등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장지는 김제 선영이며 발인은 20일이다. ☎(02) 3410-6915

조선닷컴 2009.06.17 10:06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17/2009061700481.html

 

2008 - 인터넷 경제의 미래에 관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장관회의 개막

OECD장관회의 기념우표 발행

지식경제부 우정사업본부는 ‘인터넷 경제의 미래에 관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장관회의'를 기념한 우표(사진) 160만 장을 제작해 전국 우체국에서 판매한다고 16일 밝혔다.
이번 회의는 17, 18일 이틀간 코엑스에서 열리며 향후 10년간 추진할 OECD 국가의 인터넷 정책을 다루게 된다. OECD

장관회의는 1998년 캐나다 오타와에서 전자상거래를 주제로 개최된 이래 아시아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열리게 됐다.
우표 디자인은 인터넷을 상징하는 @와 디지털 문자 ‘0, 1’을 활용했다. 전 세계를 연결하는 인터넷망과 그 중심에 있는

인터넷 강국 한국을 표현했다. - 머니투데이
http://news.moneytoday.co.kr/view/mtview.php?no=2008061615073794565&type=2

 

2008년 6월, 37개국 장관과 글로벌 기업인, 국제기구, 국제 시민단체 등 1,500여 명의 주요 인사들이 서울에 모여 인터넷

경제의 미래를 논하게 된다.
오늘날, 인터넷은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 되었고 경제와 교육, 환경, 보건 등 사회 전반에서 중요한 인프라가 되고 있다.

특히, 경제 활동에 있어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터넷의 혜택과 함께 이에 수반되는 장애 요인과 그에 대한 해결책,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인터넷의 성장과 발전, 변화에 주목하여 국경과 다양한 이해관계를 넘어서 인터넷 경제활동과 관련된 정책과 실천방안이 논의되고 합의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번 인터넷 경제의 미래에 관한 OECD 장관회의는 관계자의 토론을 통해 세계 각국이 앞으로 10년간 추진할 인터넷 관련 정책의 밑그림을 제시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번 회의는 정보통신 분야에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주최하는 두 번째 장관급 회의로 지난 1998년 캐나다

오타와에서 전자상거래를 주제로 개최된 이래 10년 만에 열리는 것이며 아시아에서 최초로 개최되는 OECD 장관회의이다.
인터넷 경제의 미래에 관한 OECD 장관회의가 효과적이고 건설적인 논의를 통해 향후 전 세계 인터넷 경제 성장의

로드맵을 제시하길 기대하면서 ‘인터넷의 중심, 한국’을 표현한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 kstamp

 

2007 - 휴대전화 외판원 폴 포츠, 노래 경연대회 '브리튼스 갓 탤런트' 결승에서 우승

폴 포츠...감동적인 실화

폴 포츠라는 사내가 있다. 나이는 36살. 영국 웨일스의 한 도시에서 휴대전화 외판원 일을 하고 있다.
외모는 미남과 거리가 멀다. 소위 말하는 ‘비호감’ 형이다. 표정에서는 자신감 한곳 찾아보기 힘들다. 치열이 고르지 못한

탓인지 주섬주섬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왔고, 낡은 양복 차림새는 더 허름하게 보이고,

자세는 긴장한 듯 경직돼 있다.
폴 포츠가 지난 7일(현지시간) 노래 경연 대회인 영국 ITV1의 ‘브리튼스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 프로그램 예선 무대에 섰다. '브리튼스 갓 탤런트'는 노래 실력을 겨뤄 일반인을 일약 스타로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미국의 프로그램 ‘아메리칸 아이돌’과 비슷하다. 더욱이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독설과 혹평으로 참가자의 눈물을 쏙 빼는 것으로 유명한

'사이먼 코웰'이 심사위원 중 한 명이다.
이날 폴 포츠가 수수한 양복차림으로 무대 중앙에 서자 사이먼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희한한 사람이 다 나왔네’ 라는 식의 표정으로 포츠에게 곁눈질을 보냈다. 여성 심사위원인 아만다 홀덴이 폴 포츠에게 물었다. “무슨 노래를 준비해

오셨나요?” 폴 포츠는 “오페라를 부르려고요”라고 짧게 답했다.

사이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

폴 포츠가 준비한 곡은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 등장하는 아리아 ‘공주는 잠못 이루고’(Nessun dorma)였다.

포츠가 노래를 부르자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이먼은 자세를 고쳐앉았고 관객들의 눈은 휘둥그레해졌다. 외모와 말투와 달리 포츠의 목소리는 우렁차고 감성적이었다. 노래 몇 소절이 끝나자 관객들의 박수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몇몇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심사위원 홀덴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곡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폴 포츠가 안정적인 바이브레이션 창법으로 고음을 내뿜자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쳤다. 심사위원들은 폴 포츠의 가창력에, 그리고 기립박수를 보내는 관객들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폴 포츠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사이먼은 독설 대신 “당신은 우리가 찾아낸 보석”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홀덴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고 놀라워 했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폴은 14일 준결승전에 진출했다. 시각장애 오페라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의 곡으로

유명한 ‘타임 투 세이 굿바이’(Time To Say Goodbye)를 불러 결승전에 진출했다.

폴 포츠는 17일 결승에서 오페라 공연 정장을 입고 다시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렀다.

다시 한번 ‘천상의 목소리’를 뽐냈고 관객들은 일제히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폴 포츠는 이 대회에서 ‘오버 더 레인보우’를 불러 유명세를 치른 6살 소녀 코니 탤벗 등 4명의 결승 진출자를 제치고 우승자가 됐다. 음반기획자이기도 한 사이먼은 “당신은 다음 주 데뷔 앨범을 녹음하기 위해 스튜디어오에 있게 될 것”이라며 음반 제작을 제안했다. 10만 파운드(약 1억8000만원)의 상금과 함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참석하는

 ‘2007 로열 버라이어티 퍼포먼스’ 출연 기회도 얻었다. 폴 포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폴 포츠는 어릴 적부터 어눌한 말투와 외모 때문에 ‘왕따’를 당하면서 자랐다고 한다. 오페라를 향한 꿈을 포기할 수 없어

28살 때부터 자비를 들여 이탈리아의 오페라 학교를 오갔다. 직업 오페라 가수를 꿈꿨지만 충수 파열,

부신 종양 등의 병으로 수술대에 올랐고 2003년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쇄골까지 부서졌다. 큰 성량을 요구하는 오페라

곡을 부르기에는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오페라를 접고 휴대전화 외판원이 됐지만 포기할 수 없는 자신만의 꿈에

재도전했고 공식적인 경연대회에서 우승해 인정받았다.

현재 세계적인 사용자제작컨텐츠(UCC) 사이트인 ‘유튜브’에서 폴 포츠의 예선무대 동영상은 500만회를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준결승 및 결승 무대 동영상 조회수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너무나 감동적이다” “노력하는 자의 꿈은

이루어진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등의 해외네티즌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국내 유명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이 동영상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소름이 돋았다”는 반응부터

 “폴 포츠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등의 다양한 댓글이 달리고 있다.
동영상을 본 한 국내 네티즌은 “국내 가수의 노래인 ‘거위의 꿈’이 다시 듣고 싶어졌다”고도 했다. ‘거위의 꿈’은 가수

이적과 김동률이 만든 프로젝트 그룹 ‘카니발’의 곡으로 최근 가수 인순이가 다시 부르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래요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난 저 벽을 넘고서 저 하늘 드높이 날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수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 해요’라는 가사를 담고 있다. 김성수 2007/08/11

http://cafe.chosun.com/club.intro.news.read.screen?bbs_id=club_news&message_id=430775  /Google

 

2005 -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평양서 면담

2004 - 브라질, 1억 8000만년된 가장 오래된 물고기 종(種)발견

모리스 그린이 그리스 아테네그랑프리에서 9초79의 세계신기록을 기록하며 결승점 테이프를 끊고 있다. 

 

1999 - 모리스 그린, 남자 육상 100m에서 9초79로 세계신기록

미국 육상선수 모리스 그린이 1999년 6월 17일 벌어진 그리스 아테네그랑프리에서 9초79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도노번 베일리(캐나다)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서 세운 종전기록(9초84)을 0.05초 앞당긴 것이자 1991년 칼 루이스(미국)가

9초90 벽을 허문지 8년만에 이룬 역사적인 기록이었다. 모리스 그린은 1997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아테네세계선수권 100m에서

9초86의 기록으로 도노번 베일리를 누르고 우승, 세계무대에 이름을 올렸다.

8세때 육상을 시작한 그린은 20대 초반까지는 무명이었다. 고향의 캔자스시티 대학생이던 1995년 4월 텍사스 릴레이 대회서 9초88로 칼 루이스를 누르고, 이어 전미선수권에서는 2위를 차지해 관심을 끌었지만 스웨덴 예테보리 세계선수권에서는 예선탈락했다.

그린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예선에서 또 탈락하자 "변화가 필요하다"며 미국 `단거리 사관학교`인 UCLA의 존 스미스 감독 휘하로 들어갔다. 아토 볼든, 존 드러먼드 등 세계 정상급 선수와 연습한 그린은 1997년 전미선수권에 이어 세계선수권마저 제패,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탄생했다. -조선

 

1998 - 동티모르 수도 딜리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의사당건물을 점령

1997 - 국무회의, 러시아와의 `형사사법공조조약안` 의결

 

1996 - `패러다임 이론` 창시한 토마스 쿤 사망

1996 - 『과학혁명의 구조』의 저자이며 과학사회학자인 토머스 쿤 사망

 

1994 - 김일성, 카터 전미국대통령과 회담. 남북정상회담에 동의

1994 - 카터, 김일성 주석과 2차 회담(1994)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북한 방문 사흘째를 맞은 1994년 오늘!
카터는 대동강 유람선상에서 김일성 북한 주석과 두 번째 회담을 가졌다.
카터는 이 자리에서 '미국 정부가 유엔에서 진행중인 북한 제재논의를 중단할 뜻을 밝혀 왔다'고 말했다.
북한이 핵개발을 동결한다면 북한 측의 거의 모든 요구조건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의사를

밀사 자격으로서 김일성 주석에게 전한 것이다.
이에 대해 김일성 주석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김 주석은 또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 정상회담을 희망한다며 카터의 중재를 부탁하기도 했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김일성 북한 주석과의 단 2차례 회담을 통해 대결국면으로 치닫던 북한 핵문제가 대화국면으로 반전된다. 

94미국월드컵축구대회 개막식 광경.

 

1994 - 제15회 월드컵 미국서 개막

1994년 6월 17일 꿈의 구연 미국 월드컵축구대회가 아시아대표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 24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미국 시카고

솔저필드스타디움서 개막됐다. 전대회 우승팀인 독일과 볼리비아전을 시작으로 1994년 7월 18일까지 한달 동안 52경기를 소화한

이번 월드컵은 한국이 경기를 갖는 댈라스를 비롯, 시카고, 로스엔젤레스, 보스턴 등 9개도시에서 펼쳐졌다.

시카고 솔저필드스타디움서 개막전에 앞서 열린 개막식에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헬무트 콜 독일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24개 참가국들의 공연단이 자국의 전통무용을 선보였으며 한국은 로스엔젤레스 교민무용단이 고유의 부채춤을 선보여 갈채를 받았다.

한국은 스페인과 2-2 무승부, 볼리비아와 0-0 무승부, 독일에 3-2로 패해 2무1패로 16강 진출이 좌절됐다.

결승전은 브라질과 이탈리아가 연장까지 갔으나 0-0 무승부를 기록, 승부차기로 3-2 승을 한 브라질이 우승했다. - 조선

 

1994 - 사막화방지의 날 제정

1994 - 사막화방지협약 채택

사막화방지협약 채택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정한 날

사막화는 기후변화와 인간활동 등으로 인하여 건조·반건조 지역이나 건조한 저습()지역의 토양이 침식되거나

산림이 황폐화되는 등 사막 환경이 확대되어 가는 현상을 말한다. 이로 인한 피해가 늘어나자 국제사회는 1970년대 초반부터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서

아프리카들의 발제로 사막화 대책이 국제적으로 논의되었다.

이에 따라 1994년 6월 17일에 프랑스 파리(Paris)에서 기상이변과 산림황폐 등으로 심각한 한발이나 사막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

국가들의 사막화를 방지하여 지구환경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막화방지협약(Convention to Combat Desertification)을 채택하였다.

1994년 제49차 국제연합총회에서는 사막화방지협약 채택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6월 17일을 사막화방지의 날로 지정하였다.

우리나라도 중국 고비사막 및 타클라마칸사막에서 발생하는 황사, 북한의 산림황폐화 등으로 사막화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지역적 협력이 증진되고 우리나라 산림녹화 및 사방기술을 피해국에 지원하고 있다. 

전처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O.J 심슨. 

 

1994 - 미국의 미식축구선수 O. J. 심슨이 전 아내의 살해 혐의로 TV로 생중계되는

고속도로 도주전 끝에 체포되다. 1994 - 미국 미식축구선수 O.J.심슨, 전처 살해혐의로 체포

전처인 니콜 브라운 심슨과 그녀의 남자친구 로널드 골드맨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수배됐던 미국의 전설적인 미식축구스타

O.J.심슨이 경찰과 대치끝에 1994년 6월 17일 투항, 수감됐다. 심슨은 이날밤 경찰의 추격을 받자 1백여Km를 달아나다

로스엔젤레스 교외의 자택 건물밖에 차를 세우고 권총자살하겠다며 90분간 경찰과 대치하다 결국 투항했다.

O.J.심슨사건은 이후 미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속에 재판이 진행돼 체포후 474일 만인 1995년 10월 2일 배심원들의 전원일치 합의에

의해 무죄 평결을 받았다. 전체 12명중 흑인9명(남자1명, 여자8명)과 백인여성 2명, 멕시코계 히스패닉 1명으로 구성된 배심원 무죄평결 결과에 대해서도 미국 언론들은 한결같이 놀라움을 표시했다. 평결발표이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평결에 동의하는 반응은 33%, 동의할 수 없다는 반응은 56%로 나타났다.

 

1992 - 중요무형문화재2호 양주별산대놀이 예능보유자 고명달씨 별세  

로마자 표기법이 개정됨에 따라 서울 퇴계로 주변의 도로표지판에 써있는 `을지로` 표기도 `Euljiro`로 바뀌었다.

 

1992 - 남북한, 프랑스에서 기계화 위한 한글의 로마자표기법 통일안에 합의

http://www.hangeul.or.kr/cap_np/hgn/024.htm  /Google

1992 - 한글 로마자 표기법 단일안 합의 

한글의 로마자 표기에 관한 남북한 단일안이 마련됐다. 1992년 6월 16, 17일 이틀간 파리소재 프랑스표준협회(AFNOR) 회관에서

열린 제5차 기계화를 위한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에 관한 남북한 회의에서 양측은 쌍방제안을 절충시킨 단일 표기법안에 합의,

1987년 5월 모스크바 1차 회의이후 5년간에 걸친 단일화 협상을 매듭지었다.

정수웅 공업진흥청 차장과 홍린택 규격위원회 위원장이 각각 남북한 수석대표로 참석한 이번 5차 회의에서 양측은 자음의 경우

북한측 안을 ,모음은 한국측 안을 수용하는 절충안에 합의했으며 1992년 6월 17일 오후 국제표준화기구(ISO)에 단일안을 공식 제출했다. 남북한 단일 로마자 표기법이 합의됨에 따라 국내 지명, 인명표기 방식이 통일돼 국내외 표기상의 혼란이 해소되게 됐으며

한글 및 어문학 분야에서 남북 간 격차를 해소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남북한간의 단일안에 따르면 한글자음 `ㅂ` 은 영문 알파벳 `p` 로 결정돼 `부산`의 경우 `pusan`으로 확정됐으며 `ㄱ` 은 `k` 로, `이`는 `i` 로 각각 표기되게 됐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지명이나 인명의 경우에는 종전 표기를 인정하는 예외를 두기로 양측은 합의했다.

 

1989 - 헝가리 개혁파의 기수 나지 전총리 복권

1986 - 해경, 충남 서산 앞바다서 표류중인 중국선박(선원19명) 보호중이라고 발표  

1985년 6월 17일 남아공 최초 법적으로 결혼이 인정된 흑백인종 커플이 탄생했다.

 

1985 -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합법적 흑백인종 커플 탄생

남아프리카공화국이 1985년 4월 15일 인종차별정책으로 악명높은 흑백인종간의 결혼을 금하는 잡혼금지법과 연애,

섹스를 금하는 배덕법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1984년 7월 의회 특별조사위원회가 양법의 폐지권고를 정부가 받아들인 결과였다.
남아공 정부는 인종간의 교류금지를 주요 정책으로 추진해왔지만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에 대한 국내외의 비난이

점증하고 무기금수, 경제제재 등에 의해 국제사회에서 고립됐기 때문에 이같은 결정을 내리게 됐다.
이 융화책은 남아공으로서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지만, 흑인의 참정권 권력이양은 여전히 인정되지 않았다.

이에 흑인의 반대시위가 걷잡을 수 없게 확산됐고, 10월에는 요하네스버그에서 흑인폭동이 발생했다. -    조선(4월 15일)

 

1983 - 교황, 폴란드 방문중 계엄해제 자유노조 부활 요구

1982 - 갈티에리 아르헨티나 대통령 포클랜드전쟁 패전 책임을 지고 사임

 

1980 - 계엄사, 부정축재 국기문란 혐의로 329명 지명수배

1977 - 국무회의, 임시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안 가결  

워터게이트 사건을 폭로한 워싱턴 포스트의 그레이엄 회장(맨 왼쪽)이

 번스타인ㆍ우드워드 기자 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72 - 워터게이트 스캔들 발생(1972)
1972년 오늘 새벽!
미국 워싱턴D.C.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5명의 괴한이 침입했다.
이들은 한 달 전 설치해 놓았던 도청장치를 바로잡기 위해 이곳에 몰래 들어갔다.
순찰을 돌던 워터게이트 빌딩 경비원이 비상구 잠금장치가 벗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이른바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터진다.
현장에서 체포된 괴한 5명은 당시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동원된 비밀공작원들이었다.
이듬해 5월 17일 이 사건에 대한 미 상원의 청문회가 시작되고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가 진상을 파헤치면서 닉슨 대통령이

도청을 사전에 알고도 묵인한 것으로 밝혀진다.
이 스캔들로 닉슨 정권의 선거방해, 수뢰·탈세 사실까지 만천하에 드러나고 결국 닉슨 대통령은 1974년 8월 8일 하야한다.

 

1972 - 美 워터게이트 사건 政街 강타

1972년 6월17일 새벽2시,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 내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괴한 5명이 체포됐다.

단순 절도죄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이 사건이 미 정가를 강타한 사건으로까지 비화한 것은 한 사내가 워싱턴포스트지 편집국장 브래들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면서였다. 취재지시를 받았으나 막막하기만 했던 신참내기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에게 ‘딥 스로트(Deep Throat)’란 사람이 결정적인 제보를 해왔다. 백악관이 관련됐다는 것이다. 닉슨 대통령과 워싱턴포스트지의 쫒고 쫒기는 추격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건의 파장이 커져 FBI가 나서자 닉슨은 CIA를 통해 수사를 중단시키고 사건에 연루된 참모들도 해임시키며 자신의 무관함을 강변했다. 그러나 닉슨도 이 사건의 은폐공작을 알고 있고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모두 녹취된다는 증언 등이 속속 등장하면서 닉슨을 궁지로 몰아갔다. 빗발치는 여론에 밀려 제출한 녹음 테이프도 일부가 빠진데다가 결정적인 대목까지 지워져 오히려 의혹만 키웠다.
결국 하원이 대통령 탄핵을 가결하자 닉슨은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해야 했다. 1974년 8월8일이었다. 이때부터 역사는 닉슨을 ‘중국을 처음 방문한’이 아니라 ‘재임 중 물러난 대통령’으로 기록하고 있다. ‘딥 스로트’는 지금까지도 베일에 쌓여있다.

 

1972 - 워터게이트 사건: 5명의 괴한이 포토맥 강 변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선거본부에 침입하다.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는 1972년부터 1975년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지칭하는 말로서,

미국의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민주당을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권력 남용에서 시작된 정치스캔들이었다. 그 이름은 당시 민주당 선거운동 지휘 본부(Democratic National Committee Headquaters)가 있었던 워싱턴 D. C.의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유래한다. 처음 닉슨과 백악관 측은 [침입사건과 정권과는 관계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1974년 8월, "스모킹 건"(smoking gun; '확증'을 의미함)이라 불리는 테이프가 공개됨에 따라 그의 마지막 측근들도 그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미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지 4일 뒤인 1974년 8월 9일,

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이로서 그는 미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임기 중 사퇴한 대통령이 되었다.

 

사건 경과-도청사건 적발

1972년 6월 17일 워싱턴D. C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근무하던 경비원 프랑크 윌즈(Frank Wills)는 건물 최하부계단의

후미진 곳과 주차장 사이 문 위에 기묘한 테이프(tape)가 묶여있는것을 느꼈다. 힐즈는 처음엔 의 열쇠가 잠겨있지 않았기 때문에 청소부가 작업도중 테에프를 묶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금방 누군가에 의해 테이프가 묶여있는 걸 느끼고

침입자라고 생각해 워싱턴 시경에 통보했다.

경찰은 도착 후 같은 호텔에 있던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본부 사무소에 불법 침입한 5명의 남자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5명은 비질리오 곤잘레스(Virgilio González), 버나드 버커(Bernard Barker), 제임스 W. 맥커드(James W. McCord), 유지니오 마르티네스 주니어(Jr. Eugenio Martínez), 프랭크 스터지스(Frank Sturgis)이다. 이후 증거사진에서 그들은 3주전 같은 사무소에 침입했었고, 이번 침입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던 도청기를 재설치하기 위한 행동으로 판명되었다.

2번이나 같은 사무소에 침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또한 범인 측의 실수였지만, 더 치명적인 사실은 경찰이 체포했던 맥커드의 수첩 속에 에드워드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 Jr.)의 백악관 연락처 전화번호를 발견한 것이다.

 

헌트는 닉슨 대통령 재선위원회(Committee to Re-elect the President, CREEP 혹은 CRP)에서 예전에 활동한 경력이

있어, 침입범이 닉슨 대통령과 가까운 누군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닉슨 대통령의 로널드 루이스 지거(Ronald Louis Ziegler) 보도담당관은 "3류 도둑(third rate burglary)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하며 백악관과의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

심문과정에서 맥커드는 CIA의 옛직원으로 대통령 재선위원회 경비주임 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워싱턴 연방지방 검사국(알 J 실버드 주임검사후보)은 맥커드와 CIA간의 관계를 조사하기 시작하고 그가 대통령 재선위원회에서 자금을 받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 워싱턴포스트의 기자 밥 우드워드(Bob Woodward)는 동료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과 함께 독자적으로 조사를 시작해 사건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을 신문에 발표했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FBI 및 다른 정부조사관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이었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세간의 주목을 모으게 되어,

닉슨 대통령과 그 측근을 궁지에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우드워드에게 비밀정보를 제공했던 딥스로트(Deep Throat)]으로만 알려진 정체불명의 고위층인물은 이 사건과는 별도로 또 하나의 미스터리였다.

(당시 FBI부국장였던 마크펠트가 2005년 5월 31일에 사망 직전 자신이 딥스로트라고 고백했다)

 

닉슨측의 워터게이트 사건 은폐 시도

닉슨 대통령과 해리 로빈슨 핼드맨(Harry Robbins Haldeman) 대통령수석보좌관은 7월 23일 FBI의 범죄조사를 저지하기 위해 CIA를 동원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그 상황은 테이프에 녹음되었다(후에 특별검찰관에게 제출을 요구받았다).

논의 후 닉슨은 국가안보가 위험하다며 CIA에게 FBI의 조사를 방해할 것을 지시했다.

사실 범죄 및 다수의 기타 정치적 부정공작은 조지 고든 배틀 리디(George Gordon Battle Liddy) 및 에드워드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를 중심으로 닉슨 대통령 재선위원회직원가 주도하였다. 그들은 이전 닉슨정권에서 선관공(plumber unit)이란 애칭인 특별조사팀에서 움직였다. 이들은 정보누설을 조사해 민주당원 및 반전운동활동가에게 각종 공작을 실행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베트남전의 실체를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를 유출한 다니엘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다니던 정신과의 루이스 J 필디그의 사무소 침입공작이었다. 이 공작에서 벤트와 리디는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후에 침입은 닉슨 대통령과 그 측근에 관계가 있음이 드러나,

엘스버그 기소는 정부의 부정행위때문에 기각되었다.

 

존 N 미셜(John Newton Mitchell)법무장관, 하르데만 수석보좌관, 찰스 콜슨(Charles Colson) 특별보좌관(Chief Counsel) 및 존 다니엘 에릭만(John Daniel Ehrlichman)내정담당보좌관, 닉슨 대통령 및 백악관 고위 참모들이 사건 계획 시점에서 어느 정도 관여했느냐가 논쟁의 주제였는데, 찰스 콜슨은 자서전《새로 나기》(영어: Born Again)에서 변호사출신의 닉슨파 고위관리들이 그들이 누리던 엄청난 특권옹호와 그들이 매우 존경하는 닉슨을 보호하기 위해 훌륭한 법률지식을 이용하여 은폐계획을 꾸몄다고 한다. 하지만 18일만인 1973년 4월 8일 이들의 음모는 들통난다.

미셜 대통령 재선위원회 책임자는 제프 스튜어트 마그다 선거운동본부장 및 프레더릭 C 랄 과 함께 헌트와 리디의 침입을 포함한 스파이 활동계획을 승인했으나, 이를 그들의 상부에서 지시했었는가는 명확하지 않다. 마그다는 예를 들어 다수의 다른 보고서를 제공했다.

닉슨이 미셜에게 로런스 R 오브라이엔 민주당 전국위원장의 활동정보수집 때문에

침입지휘를 명령했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상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

1973년 1월 8일 리디와 헌트를 포함한 침입범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졌으나, 맥커드와 리디 이외의 전원이 유죄를 인정했다. 재판에서는 피고전원에 대해 범죄 공동모의, 가택침입 및 도청에 대한 유죄 판결이 내려졌으나, 피고가 증원을 하지 않고 유죄를 인정했으니 보석금을 지불해도 되냐는 사실을 밝혀 왔다. 이에 대해 존 J 시리카 연방재판소판사([맥시멈 존이라 알려져 있다])는 크게 화를 내고, 피고에 대해 30년형을 언도하는 동시에 그룹이 사건조사에 협력적이란 판결을 재고할 것도

이야기했다. 이 판사의 발언에 응하여 맥커드가 스스로 대통령 재선위원회와의 관계가 위증을 인정했기 때문에 이 침입범에 대해 재판은 가택침입의 재판만 유죄선고로 끝나고, 다른 사건에 대한 조사로 발전하게 되었다. 샘 J 아빈 Jr. 상원의원은

상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를 설립해 백악관 직원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4월 30일 닉슨은 그의 가장 유력한 보좌관 하르디만 및 아릭만의 사직을 강요했다. 거기에 닉슨 자신에 대한 불리한 증인이 될 수 있는 백악관 법률고문 존 딘(John Wesley Dean III)을 경질하고, 새로운 법무장관으로 엘리엇 L 리처드슨(Elliot Lee Richardson)을 임명했다. 그에게는 특별검사을 지명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5월 18일 리처드슨은 아치볼트 콕스(Archibald Cox, Jr)를 특별검사로 지명했다.

TV에 방송된 심문은 전날 미국상원에서 시작했다.

 

상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의 공청회는 여름을 통해 방송되었고, 이것은 닉슨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이었다.

특별위원회는 거기에 7월 13일에 중대한 사실을 발견했다. 위원회에서 알렉산더 P 베터필드 대통령 부보좌관은 백악관이 대통령집무실의 모든 대화를 자동녹음하고 있다고 폭로하였다. 이것은 닉슨과 존 딘 법률고문의 면담을 녹음한 테이프가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콕스 특별검사와 상원조사위원회 양측 모두 테이프제출을 요구하는 소환장을 발부했다.

닉슨은 대통령 특권으로 이를 거부하고,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장관을 통해서 콕스 특별검사에게 소환장 취소를 명령했다. 콕스의 거부로 인해 1973년 10월 20일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발전했다.

닉슨은 콕스 특별검사 해임을 리처드슨 법무장관에게 요구했으나, 그는 이것을 거부하고 자진사임했다.

뒤이어 윌리엄 D 란케르즈하우스 법무차관도 명령을 거부하고 사임하였다.결국 로버트 H 보크 법무차관보가

임시 법무장관대리로 콕스 특별검사를 해임했다.

1973년 11월 17일 플로리다 주 올란드에서 닉슨은 400명의 기자 앞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변명했다. [I am not a crook]이란 유명한 말도 이 때 나왔다.

닉슨은 계속해서 테이프 공개를 거부하면서, 백악관이 편집한 기록(고령이기 때문에 귀가 부자유스런 정치적 친구 존 C 스테니스 상원 군사위원장이 내용을 보증했다)을 제출하기로 합의하여 공표했다. 그 속에는 다수의 비속어 삭제가

몇 군데 있었다. 이것으로 닉슨에 대한 보수적인 국민들의 지지가 크게 약해졌다.

 

테이프의 대부분은 존 딘 법률고문의 증언과 일치하였으나, 1개의 테이프가 18분 30초가 삭제된 부분이 발견되어 의혹이

일어났다. 백악관은 이것을 닉슨의 비서 로즈 메리 힌스의 책임이라고 했다.

그녀가 전화를 받는 시기에 녹음기의 페달을 눌러 우연히 테이프가 삭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보도에 의해 전화를 받으며 페달을 밟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졌다.그녀의 손발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길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백악관에 의한 자의적인 테이프 편집은 증거물훼손으로, 이는 범죄행위로 기소대상이 된다고 판명됐다.

테이프 제출 문제는 대법원에까지 가서 다투게 되었는데, 1974년 7월 24일 테이프에 대해 닉슨의 대통령특권을

무효화하는 동시에 특별검사 레온 쟈보로스키에게 테이프를 넘겨줄 것을 명령하는 판결이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닉슨은 7월 30일 문제의 테이프를 넘겨주게 되었다.

 

탄핵 조정

1974년 3월 1일 대통령의 옛 측근 7명(하르디만, 아리크만, 미셸, 찰스 콜슨, 고든 C 스토먼, 로버트 C 마디언 및 케네스 W 베킨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조사 방해를 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대배심은 거기에 비밀로 닉슨을 기소하지 않은 공모자(범죄의 공모는 한가지의 형사죄명이 된다)로써 지명하였다. 디안, 마그더 및 다른 인물은 이것으로 유죄를 인정하였다.

닉슨의 지위는 계속 불안정한 가운데, 하원은 대통령의 탄핵이 가능한 형식상 조사를 시작했다. 하원사법위원회는 1974년 7월 27일에 27표 대 11표로써 대통령에 대한 제 1차 탄핵(사법방해)을 권고하는 것으로 가결되어 거기에 그 후 7월 29일에는 제 2차 탄핵(권력의 남용)을 또 7월 30일에는 제 3차 탄핵(의회에 대한 모욕)까지도 가결되게 되었다.

침입이 있은 지 약 며칠 후 기록된 테이프는 1972년 6월 23일에 공개되었다. 그 속에는 닉슨과 하르디만은 국가안전보장에 대한 문제를 날조하는 것으로 조사를 저지할 계획을 세운다. 테이프는 [결정적 증거(Smoking gun)]라 불렸다.

 닉슨에 대한 상원의 지지는 하원과 마찬가지로 약했다.

 

대통령 사퇴

유죄판결을 받기에 충분한 표의 존재를 중요한 공화당 상원의원에 의해 전달받자, 닉슨은 스스로의 의사로

사퇴할 것을 결정했다. 1974년 8월 8일 밤 국민전체에 대한 TV연설에서 닉슨은 8월 9일 정오에 사퇴한다는 것을 발표했다(즉, 그때 닉슨은 탄핵을 받게 된 유일한 대통령으로 소개되었으나, 현실에서는 탄핵결의가 나오기 전에 사퇴했기

때문에 닉슨은 현실에서는 탄핵을 받지 않아 유죄판결을 받지 않았다).

닉슨의 사임 후 부대통령인 제럴드 R 포드(Gerald Rudolph "Jerry" Ford, Jr.)가 대통령으로 승격되어 9월 8일 "닉슨 대통령이 지시한 가능성이 있는 범죄에 대해선 무조건 대통령 특별사면을 재판 이전에 하겠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으로 인해 닉슨은 이후 모든 조사와 재판을 피할 수 있었으나, 사면을 받았다는 것은 죄를 인정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찰스 콜슨은 그 후 에르즈바크 사건에 관한 고발로 유죄가 인정되어 은폐에 대한 고발은 취하되었다. 스트론에 대한 고발은 취하되었다. 3월에 기소된 7명중에서 남은 5명은 1974년 10월에 공판이 진행되었다. 1975년1월 1일 파킨슨이외 모두는 유죄를 피했다. 1976년 상소재판소가 마디안때문에 새로운 재판을 명령했다. 또한 그들에 대한 고발은 모두 취하하였다.

하르드만, 아릭크만 및 미셸은 1977년에 변명을 끝냈다. 아릭크만은 1976년에 다른 2명은 1977년에 형무소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중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의 영향은 닉슨의 사퇴와 보좌관들 중 몇 명이 형무소에 수감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간접적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은 선거운동의 자금조달의 광범위한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법률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중요한 정부고관의 새로운 자산공개요구 법률과 그와 맞먹는 정보의 자유법가결의 주요인이 되었다.

이것은 법률상 요구받지 않으나 한편 최근의 소득세형식의 공개에 대해 다른 타입의 개인정보개시는 기대할 수 없었다.

닉슨은 1972년 선거에서 우세했으나, 대립후보 조지 마크가벤과 토론하는 것은 거절했다. 이후 토론을 회피하는 자는 주요 대통령 후보는 되지 못하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대통령은 회화의 대부분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 후 이런 기록을 하는 일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매스미디어가 정치가의 활동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유력한 하원세입위원장 윌버 밀즈가 닉슨 사퇴후 몇 개월 후 음주 운전 중 사고를 일으켰을 때 미디어는 예전이라면 이것과 비슷한 일에 대해선 언급하지도 않았으나, 사건은 보도되어 밀즈는 곧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더해서 리포터가 중요한 정치가의 개인 행위를 밝히는 것에도 예전에 비해 정력적으로 활동하게 되어, 민감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보고하게 되었다. 윈드워드 및 번스타인을 목표로 하는 리포터의 새로운 세대는 조사보도와 정치가와 연관된 활동에 관련된 공표도 하면서 증가한 금융정보에 대해서 새로운 스캔들을 찾아내 보도하게 된다.

딥 스로트의 정체가 FBI부국장이었기 때문에 정체가 밝혀진 2005년 이후에는 경찰이 매스미디어를 이용하여

대통령을 사퇴로 몰아넣은 쿠데타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위키백과

 

1971 - 미국-일본 오키나와 반환 협정 조인

1970 - 부산항과 일본혼슈 시모노세키항을 잇는 부관 카페리호 부산 입항

부산(釜山)과 시모노세키(下關)간을 운항하는 부관(釜關) 카페리호가 1970년 6월 17일 새벽 0시 30분 기시 노부스키

일본 전수상 등 귀빈과 승객 4백3명, 선원 44명 및 자동차 8대를 싣고 부산항 제2부두에 입항했다.

25년 만에 새로 등장하는 부관 카페리호는 3천8백톤급의 호화여객선이며 일본 아카다키 조선소에서 건조했으며 시속 21노트로

부산∼시모노세키간을 7시간에 달렸다. 선장 105m에 선폭은 17.5m, 여객정원은 6백2명으로 귀빈실 2명,

1등 50명, 특2등 1백여명, 2등은 4백50명이다. 이밖에 승용차 60대와 8톤짜리 콘테이너 70개를 적재할 수 있었다.

카페리운항이 두 나라의 우호다리로 환영을 받았지만 우리나라는 도로교통에 관한 국제조약에 가맹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국제면허가 통하지 않아 승용차의 통관이 문제가 됐다. 우리나라는 임시방편으로 `자동차 임시수입에 따른

통관요령`을 내놓아 부관 카페리에 의해 운송되는 외국인 또는 교포의 승용차는 임시통관시키거나 여권기간동안에 재수출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 배는 6월 25일 다시 한국측의 관계인사와 보도진 등 500여명을 태우고

시모노세키에 입항해 일본측의 환영을 받았다. -조선

 

1967 - 중국 수소폭탄 실험 성공 발표(1967)
1967년 오늘!
중국은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한다.
중국은 사흘 전인 6월 14일 중국 북서쪽 신장(新疆) 지구에서 3메가톤급의 수소폭탄실험을 실시했다.
중국은 이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미국, 소련, 프랑스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수소폭탄 보유국이 됐다.
중국이 1964년 10월 첫 번째 원폭실험을 시작한 이래 2년 8개월 만에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열강들은 중국의 군사대국화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YTN
 

1966 - 그레이엄 목사, 런던 환락가 선교(1966)
미국의 세계적인 부흥목사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1966년 오늘 스트립쇼 클럽과 술집들이 몰려 있는 런던의 환락가 소호거리를 방문한다.
주민들이 그레이엄 목사의 선교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소호지역의 모든 거리를 막아선다.
그레이엄 목사는 자동차 위로 올라가 설교를 시도하지만 스트립 걸이 올라가 목사의 자리를 빼앗는다.
그레이엄 목사를 환영하는 주민과 반대입장에 선 주민들 사이에 패싸움까지 벌어졌다.
결국 경찰이 출동하고 그레이엄 목사는 소호 지역 선교활동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그레이엄 목사는 한국에서도 1973년 5월과 1980년 8월 등 여러 차례 부흥집회를 열었고

1994년 1월에는 북한에서도 선교집회를 가졌다. -YTN

 

1960 - 곽상훈 국회의장.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권한을 대행

1953 - 동베를린, 반소 폭동(1953)

1953년 오늘!
5만여 명의 동독 국민들이 동베를린 시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소련 반대 시위를 벌인다.
시위대는 동독 정부가 더 이상 소련의 내정간섭과 조종에 굴복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동독인들은 낮은 임금과 식량부족으로 쌓인 불만까지 한꺼번에 폭발시키며 격렬하게 시위했다.
그러나 이 같은 반소, 반정부 시위는 동독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에 의해 진압된다.

 
1952 - 서울신문에 김용환의 만화 '코주부' 연재 시작

서울신문 코주부(1952.6.17-1952.10.6)

김용환이 해방 후 처음으로 한국적 캐릭터를 만들어 연재한 만화이다.
김용환은 일본에 유학하여 화가협회 회원으로 일했으며 해방 후 서울신문에서 시사만화를 그렸다.
1950년대 김성환과 함께 대표적 만화가로 꼽힌다. /신문박물관

http://www.presseum.or.kr/bbs/board.php?id=cartoon 

1930년대 일제하 식민지 현실을 비판한 `풍자소설`로 주목받았던 작가 채만식.

 

1950 - 소설가 채만식 사망

1930년대 ‘탁류’ ‘레디메이드 인생’ 등 일제하 식민지 현실을 비판한 ‘풍자소설’로 주목받았던 작가 채만식이

1950년 6월 17일 6ㆍ25직전 고향 근처에서 병고로 사망했다. 이날은 그가 세상에 나온 지 꼭 48년째 되던 날이었다.
전북 옥구에서 태어나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중퇴한 그는 귀국 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도 활약했다.
그는 1924년 춘원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세 길로’라는 작품으로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했으며, 식민지 하의 왜곡된

사회와 경제질서를 풍자하는 소설들을 주로 썼다. “시대의 허위에 대해 민감했고 또 진지했던”

그는 초기에 사회주의적 성향을 드러내 동반자 작가로 분류되기도 했지만, 끝내 카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레디메이드 인생’ ‘인텔리와 빈대떡’ 등 풍자적인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적인 기반을 굳혔다.
대표작으로는 ‘탁류’와 ‘태평천하’ 등이 있으며 ‘치숙’ ‘소망’ ‘패배자의 무덤’ 등 풍자성이 짙은 단편집도 계속 발표했다.

이러한 그의 열정은 창작활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사립학교 교원으로 또 기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2002년 8월 14일 민족문학작가회의 등 5개 단체에서 발표한 ‘일제시대 친일문인 42명’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포함되기도 했다. -조선

 

1950 - 덜레스 미국 국무성 고문 내한

1950 - 신장이식수술 세계최초로 성공

1950년 6월 17일 미국 시카고의 메어리 병원에서 49세의 신장병 여성이 신장이식수술을 받았다.

그때까지 피부와 뼈, 각막, 폐 등을 이식한 예는 있었지만 신장을 이식한 수술은 처음이었다. 신장을 제공한 사람은 환자와

똑같은 혈액형의 동년배 여성으로 수술하기 몇분 전 사망했고, 신장이식수술을 받은 사람은 1개월 후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했다.

 집도는 로욜라 스트레치 의대의 리처드 로라 박사가 담당했다.

 

1950 - 아랍연맹7개국중 5개국 아랍집단안보조약에 조인

1947 - 팬아메리칸 항공, 최초로 세계일주항로 개설

 

1944 - 일제 미곡강제공출제 실시

1944 - 아이슬란드, 덴마크로부터 독립  

이원대 선생

 

1943 - 독립운동가 이원대 선생 사망

조국 광복을 위해 중국 화북지역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한 이원대 선생이 1943년 6월 17일 일본군의 혹독한 고문 끝에 사망했다.

1911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선생은 일제의 압제와 수탈에 신음하던 동포들의 모습을 보면서 식민지 상황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민족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그의 나이 22세가 되던 해 조선의열단 국내공작원 안병철의 권유로 독립투쟁을 결심,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난징 조선의열단 간부학교에 입교한 후 6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은 선생은 난징ㆍ

상해 등지를 내왕하면서 지하운동을 전개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인으로 간첩활동을

자행하는 자들을 미행하거나 색출하여 체포, 숙청하는 데 공을 세웠다.

1943년 3월, 산시성 부곡에서 중대장으로 소속 부대원을 진두 지휘하던 중 일본군에게 생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일본군의 혹독한 고문 끝에 3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지난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8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에어하트

 


1928 - 에어하트, 여성 최초 대서양 횡단비행
1928년 6월 17일 미국의 아멜리아 에어하트가 여성 최초로 대서양 횡단비행에 성공했다. 이어서 미국 횡단비행과

상업비행 발전을 위한 운동에도 참여했다. 1935년에는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까지의 위험한 항로를 단독으로 비행하는 데

최초로 성공했다. 2년 후에는 조종사 프레드 누넌과 함께 쌍발기 '로키드 엘렉트라'로 세계일주 비행을 시작했는데,

국제 날짜변경선 근처 태평양 중심부에서 실종되었다. 남편인 출판업자 조지 P.

퍼트넘이 그녀의 전기 <솟구치는 날개 Soaring Wings>(1939)를 펴냈다. - 브리태니커


 

1925 - 제1회 전국중등학교야구연맹전 개최됨(~6.30)

1925 - 제네바 무기무역국제회의서, 독가스사용금지 조약 조인

 

1920 - 196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프랑스의 생물학자 자코브 출생

1920 - 프랑스의 생물학자 자코브 출생

1919 - 임시정부, 사료 조사 편찬부 설치  

만세보 인쇄물.

 

1906 - 천도교, 일간지 '만세보' 창간

1906 - 일간신문 萬歲報 창간

1906년 6월 17일 일간지 만세보(萬歲報)가 창간됐다. 손병희가 재정을 지원하고 오세창이 사장, 이인직이 주필을 맡았다. 훗날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 된 오세창과 철저한 친일파 이인직의 만남은 물과 기름의 동거였지만 그래도 신문은 제대로 만들었다.

일진회를 강경한 논조로 공격했고, 편집으로는 한자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 한자 옆에 한글로 음을 달았다. 특히 신문소설을 처음

연재한 것은 만세보의 자랑 가운데 하나. 근대소설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와 ‘귀의 성’을 연재한 것이다.

고종도 만세보를 애독해 1000원을 하사할 만큼 인기를 끌었으나 경영난은 어쩔 수 없었다.

약 1년 만인 1907년 6월 29일, 293호로 막을 내렸으나 만세보를 인수한 이인직이 ‘대한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7월 18일부터 간행하면서 철저한 친일지가 됐다. -조선

 

1906 - 일간신문 <만세보> 창간
1906년 6월 17일 일간신문 <만세보>가 창간되었다. 대한제국 말기 천도교에서 펴낸 신문으로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의 발의로

이인직이 신문발행 허가를 받았다. 사장은 오세창, 총무 겸 주필은 이인직, 편집 겸 발행인은 신광희·권동진·장효근 등이었다.

 블랭킷 배판 4면 체재에 7단제를 실시했고, 한자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한글 토를 달았다. 여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다. 이인직의 <혈의 누>·<귀의 성>을 연재해 국문학사상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남겼다.

경영난으로 이듬해 이완용 내각의 친일기관지인 <대한신문>으로 개제되었다. 

채만식

 

1902 - 소설가 채만식(蔡萬植) 출생

채만식 [蔡萬植, 1902.6.17~1950.6.17]

채만식은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불우한 삶을 풍자한 작품들로 높이 평가되는 소설가이다. 전라북도 옥구 출생으로,

중앙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중퇴했다. 1923년 귀국 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기자로 일하다가,

1935년부터는 개성에서 형의 금광업을 도우며 창작에 매진했다. 1924년 단편 <세 길로>로 <조선문단>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등단 초기에는 프로 문학에 대한 동반자작가로서의 작품들을 썼으나, 1934년부터는 자전적 소설인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보듯 풍자성이 강한 사회소설들을 발표함으로써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보여주었다. <치숙>(1937)·

<태평천하>(1937)·<탁류>(1937~38) 등은 1930년대의 타락한 한국 사회를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인테리가 아니었으면 차라리 노동자가 되었을 것인데 인테리인지라 그 속에는 들어갔다가도 도로

달아나오는 것이 99프로다. 그 나머지는 모두 어깨가 축 처진 무직 인테리요 무기력한 문화

예비군 속에서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주인 없는 개들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다. "

 

- 채만식, <레디메이드 인생> 중에서


 

1902 - 독일.프랑스.러시아 3국 공사, 러시아공관에 모여 철도, 광산 등의 이권탈취 모의

1901 - 청나라, 미국 의정서 조인

1895 - 일본, 타이완에 총독부 설치 

 

1882 - 스트라빈스키 출생

1867 - 고종4년, 육전조례 간행

1862 - 1858년 인도의 초대 부왕 영국의 정치가 존 캐닝 사망

 

1818 - 프랑스 작곡가 구노 출생

1808 - 노르웨이의 민족시인 베르겔란(트)(Wergeland, Henrik Arnold) 출생

베르겔란(트) [Wergeland, Henrik Arnold, 1808.6.17~1845.7.12]

노르웨이 독립의 상징이기도 한 그는 인도주의 활동, 혁명 이론, 자유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가 이끄는 "애국자"라는 조직과 요한 벨하벤이 지휘하는 친(親)덴마크 "인텔리겐치아" 사이의 충돌은 향후

1세기 동안 지속된 이념적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다양하고 방대한 작품 가운데 그의 시는 세월의 흐름에도 변함없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대표작으로

〈창조, 인간성, 그리고 메시아 Skabelsen, mennesket og messias〉(1830)·〈시, 첫 묶음 Digte første ring〉(1829)·

〈스페인 사람 Spaniolen〉(1833)·〈노동자 계급을 위하여 For arbeidsklassen〉·〈유대인 Jøden〉(1842) 등이 있다.

설화시 〈얀 반 후위숨의 꽃장식 Jan van Huysums blomsterstykke〉(1840)과

〈영국인 안내인 Den Engelske lods〉(1844)은 흔히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베르겔란트는 새롭게 탄생한 노르웨이와 그 국민, 그리고 1814년 제정된 헌법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그로 인해 분별력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따라서 강력한 반대세력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시에 담겨 있는 엄청난 낙관주의는 그의 경우에는 은신생활의 소산은 아니었다.

헌법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항목을 철폐하기 위해 투쟁한 일은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본보기였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의 결실을 보지 못한 채 일찍 죽었다.

 

1789 - 제3신분을 중심으로 프랑스 국민의회 결성

1703 - 감리교회 창시자 존 웨슬리 출생

 

1703 - 영국의 종교개혁자, 신학자 웨슬리(Wesley, John) 출생  

웨슬리 [Wesley, John, 1703.6.17~1791.3.2]  

 

1696 - 폴란드의 왕 얀 3세 소비에스키(Jan III Sobieski) 사망  

얀 3세 소비에스키 [Jan III Sobieski, 1629.8.17~1696.6.17]

폴란드의 왕(재위 1674∼1696).

본명 얀 소비에스키(Jan Sobieski). 1648년 군대에 들어갔으며, 1665년에 사령관이 되었고, 1673년 오스만투르크군에게

승리하여 명성을 떨치고, 1674년 왕위에 올랐다. 1675년 르보프 전투에서 다시 오스만투르크군을 무찔렀고,

이듬해 슬라브나 조약에서 전왕이 포기한 서부 우크라이나의 태반을 회복하였다.
1683년 9월 빈을 오스만투르크군의 포위에서 구출하여 그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이후 신성로마황제·교황·베네치아와 결성한 대()오스만투르크 동맹의 일익을 담당하여, 재삼 기도한 몰다비아

원정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국정개혁에 따른 왕권 강화의 계획도 귀족의 뿌리깊은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의 활동은 몰락해가던 폴란드의 마지막 빛이었다.

 

1592 - 임진왜란 적진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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