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06.06 (1) 현충일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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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9 - 세계 최소 2백56메가D램 개발
일본 도시바와 미국 IBM, 독일 지멘스가 대량생산이 가능한 세계 최소의 256메가D램을 공동으로 개발했다고 1995년 6월 6일
발표했다. 256메가D램은 삼성전자도 개발에 성공했으나 양산체제용으로 공동개발에 성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3사가 개발한 256메가D램의 면적은 2백85.5㎟로 신문 1천 쪽 이상의 정보를 기억할 수 있으며, 미국의 공동전자기기기술위원회(IEDEC)가 1995년 여름 정한 표준규격에도 부합되는 것이다. D램은 퍼스널컴퓨터나 게임기에 쓰이는
반도체 기억장치로 현재는 4메가비트와 16메가비트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번 개발로 2백56메가D램 시대가 열렸다.
2) 1968 - 미국 상원의원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 사망
케네디 [Kennedy, Robert F(rancis), 1925.11.20~1968.6.6]
매사추세츠주(州) 브룩라인 출생. 1948년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1951년 버지니아대학에서 법학학위를 받았다.
그 후 법조계에 들어가 상원위원회의 변호사를 지냈다.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형인 J.F.케네디의 선거운동 사무장으로
활약하였고, 1961년 J.F.케네디 행정부에서 법무장관과 대통령 고문을 지냈다.
J.F.케네디가 암살된 후에도 L.B.존슨 행정부에서 법무장관으로 있었고, 1964년 뉴욕주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68년 3월 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후보가 되어 출마성명을 하고, 6월 5일 캘리포니아주(州) 예비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직후 요르단계(系)의 이민자에게 저격당하여 다음날 아침에 죽었다. 저서로 《내부의 적 The Enemy Within》(1960),
《정의의 추구 Pursuit of Justice》(1964)등이 있다.
3) 1961 -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Carl Gustav Jung) 사망
융 [Jung, Carl (Gustav), 1875.7.26~1961.6.6]
바젤 출생. 바젤대학의 학부를 졸업한 후 1900년 취리히대학 부속 부르크흴츨리 정신병원의 E.블로일러 교수 밑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하였다. 1904년경 정신분석의 유효성을 제일 먼저 인식하고 연상실험을 창시하여, S.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것을 입증하고, ‘콤플렉스’라 이름붙였다. 이어 1906년 정신분열병의 증상을 이해하는 데에 정신분석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런 업적들에 의해 그는 프로이트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수제자로 인정되었다.
1908년 4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개최된 최초의 국제정신분석학회 제창자가 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발행키로
결정한 기관지 《정신분석학 ·정신병리학 연구연보》의 편자(編者)로 뽑혔다. 그러나 그 후 그는 ‘리비도’라고 하는 개념을 성적(性的)이 아닌 일반적인 에너지라고 하였기 때문에 프로이트와 의견이 대립되어, 1914년에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고, 그 이후 자신의 심리학(분석심리학이라 일컬음)을 수립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의 심리학은 신비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는데다 난해하였기 때문에, 심리학 일반에 대해서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나 성격을 ‘내향형(內向型)’과 ‘외향형(外向型)’으로 나눈 것은 그의 큰 공적이다.
"실용의학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의 예술이며, 그 점은 실용분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예술이란 창조이며 창조란 일체의 이론들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초보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 이론들을 배울 수 있는 한 배우시오.
하지만 살아 있는 영혼이라는 기적 앞에서는 이론 같은 것은 잊어버리시오.
이론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창조적인 개성이 판단하게 하시오."
- 카를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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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6 - 스웨덴의 테니스 선수 보리(Borg, Björn) 출생
보리 [Borg, Björn, 1956.6.6~ ]
1902~06년 윔블던 대회를 5연패한 로리 도허티 이후 처음으로 윔블던 대회 단식종목에서 5년 연속(1976~80)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프랑스 오픈 대회 단식 종목에서 4년 연속 우승을 포함해 통틀어 6차례 우승하는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1974~75, 1978~81). 아주 어렸을 때부터 테니스를 시작해 13세에 스웨덴에서 가장 뛰어난 주니어 선수가 되었다. 강력한 서브와 두 손을 모아 치는
백핸드로 유명한 보리는 14세 때 프로 경기에 출전했고, 17세 때 이탈리아 오픈 대회에서, 18세 때 프랑스 오픈 대회에서 우승했다. 1975년 스웨덴이 사상 처음으로 데이비스 컵을 타는 데 한몫을 했고, 데이비스컵 대회 단식 종목에서 16연승을 거두어 빌 틸던이
세운 12연승 기록을 깼다. 1981년 봄 윔블던 대회에서 미국의 존 매켄로에게 패할 때까지 단식경기에서 41연승, 선수권대회에서
5연승을 하였다.
2) 1978 - 미국과 파나마, 파나마 운하 통제권 이양에 관한 조약 체결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운하의 소유권이 미국에서 파나마로 넘어간 것은 1977년 파나마 실력자 오마르 토리호소
장군과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파나마는 혼란에 빠지고 폭동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1968년 국민수비대가 오마르 토리호스
대령의 지휘 아래 쿠데타를 성공시켰고, 이 쿠데타의 지도자가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1977년
파나마 운하 조약을 협상합니다. 이 조약에 의해 1999년이후부터 파나마가 파나마운하에 대한 운영권을 갖게 됩니다. ...
1978년 미국이 파나마에 당해지역에 대한 통제권과 2000년 이후 운하에 대한 통제권을 이양한다는
세부적 조치들을 내용으로 하는 2개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 by 미친병아리 2006/03/31 00:05-http://madchick.egloos.com/1273139
파나마운하 연혁
1881-00-00 - 프랑스의 레셉스, 대양간운하만국회사를 설립하고 수평식운하 건설 착수
1889-00-00 - 회사 파산으로 건설공사 중단
1894-00-00 - 신(新)파나마운하회사 설립
1901-00-00 - 미국, 영국으로 부터 운하 건설 운영권을 인정받음 (2차 헤이-폰스포트조약)
1903-01-00 - 미국-콜롬비아, 미국이 운하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것을 인정하는 조약 체결
1903-07-29 - 미국, 프랑스 회사로부터 운하굴착권과 기계 ·설비 일체를 4,000만 달러에 구입
1903-11-03 - 미국의 도움으로 파나마 독립.
1903-11-06 - 미국, 파나마 독립 승인
1903-11-18 - 미국-파나마, 파니마운하 조약(헤이-뷔노 바리야 조약) 체결
1904-05-04 - 미국, 프랑스로부터 신파나마운하회사의 운하 소유권을 인수
1906-00-00 - 파나마 운하 최종설계도 채택
1914-08-15 - 파나마 운하 완공
1977-09-07 - 신 파나마 운하조약 체결(워싱턴)
1978-06-06 - 파나마 운하 통제권 이양에 관한 조약 체결(파나마시티)
1979-10-01 - Return of Canal Zone to Panama, Oct.1, 1979
1999-12-31 - 파나마 운하 통제권 파나마정부에 완전 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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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3 - 중국 제6기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代) 개막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 / 약칭 전인대(全人代). 국가의사(國家意思)의 결정기관이며,
집행기관인 국무원(행정) ·법원(사법)이 전인대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점에서 3권분립제에서의 국회와는 차이가 있다.
성(省) ·자치구 ·직할시 ·군(軍)이 선출하는 대표로 구성되며, 각 소수민족도 대표를 가진다. 임기는 5년이며,
l년에 적어도 l회 개회한다.
전인대의 직권으로서는 헌법개정, 법률제정, 국가주석 ·부주석의 선출, 국무원 총리와 국무원 구성원의 임명,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선출, 최고인민법원장과 최고인민검찰원장의 선출, 국민경제와 사회발전 계획 및 국가예산 ·결산의 심사와 비준, 특별행정구의 설치와 그 제도에 관한 결정, 전쟁과 평화에 대한 결정 등으로 되어 있다.
2) 1949 - 경찰, 반민특위 습격사건
1949년 6월 6일 오전 8시 30분쯤 윤기병 당시 중부경찰서장의 지휘로 중부서 및 서울시내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 80여명이
남대문로 2가에 있는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청사 앞에 도착, 삼엄한 포위작전에 들어갔다. 이들은 우선 출근길의
특위 조사관들을 연행, 무기를 압수한 뒤 청사에 난입했다. 경찰은 특위 조사관들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하면서
책상 위의 서류를 찢었다. 직원 주소록 경비전화 자동차 4대 등도 압수했다.
반민특위는 일제 치하에서 친일 부역자를 단죄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1948년 10월 23일 발족했다.
반민특위는 출범 초부터 친일세력의 심한 반발에 부딪쳤다. 해방직후 발족된 새 경찰의 50%이상이 일제 경찰 출신들이었고
이들이 반발세력의 중심이었다. 친일파 세력을 집권 기반으로 한 이승만도 반민특위가 눈에 가시였다. 이승만은 노덕술,
최연 등 심복인 경찰간부들이 특위에 체포되자 특위 해체를 추진했다.
이 사건은 그날로 뜨거운 정치문제가 됐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약화돼 결국 석달 후인
1949년 9월 22일 와해되고 말았다.
1982 - 이스라엘 레바논 침공, 아라파트 PLO의장 15000 지지자와 함께 망명
아라파트(Arafat, Yasir, 1929~2004)는 1949년 20살의 나이로 팔레스타인 학생연맹을 결성했고 1956년 이집트 군 장교복을 입고
수에즈 운하 전투에 참가했다.
아라파트는 1969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에 취임하면서 전 세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아라파트는 초기에
이스라엘과 서방 국가에 대한 테러를 지휘했다. 1972년 9월에는 PLO의 한 분파였던 '검은 9월단'이 독일 뮌헨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촌을 급습하는 사건을 벌이기도했다.
뛰어난 언변과 사태를 정확히 읽는 아라파트의 판단력은 진가를 발휘 1974년 아랍연맹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팔레스타인들을
대변하는 유일하고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했다.
아라파트는 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정처없는 유랑길에 떠났고 85년에는 튀니지에서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죽을 뻔했다. 아라파트는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 요원에 의해 여러차례 암살위기를 겪었으나 그 때마다 뛰어난 변장술로 위기를 모면해
'9개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2년 4월 리비아 사막에서 아라파트의 전용 비행기가 추락해 조종사까지 사망했으나 그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 수에즈운하 국유화 10주년
1967 - 이집트, 이스라엘과의 6일 전쟁으로 시나이 반도 점령, 수에즈 운하 봉쇄
제2차 중동전쟁 후 1964년경부터 아랍게릴라의 활동이 시작되어, 게릴라의 기지가 된 시리아에 대해 이스라엘은 1967년 4월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해 붕괴에 직면한 아랍의 결속강화를 이스라엘과의 대결에서 회복하려는 대통령 나세르는
대군을 시나이반도에 투입, 유엔긴급군의 철수를 요청하고 아카바만(灣)의 봉쇄를 선언하였다.
6월 5일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전투가 개시되었고, 전란은 시리아 ·요르단으로 확대,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서전의 기습공격으로 아랍측 공군력을 괴멸시킨 이스라엘군은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4일 만에 시나이반도를 점령하였으며,
요르단강 서안(西岸)지역, 시리아 국경의 골란고원을 공략하였다.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6일 즉시 정전을 결의하였고,
쌍방의 수락에 의해 6월 9일 정전이 실현되었다. 또한 안전보장이사회는 그해 11월 중동분쟁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결의 242호를 채택하였다.
1962 - 프랑스의 화가 클라인(Klein, Yves) 사망
클라인 [Klein, Yves, 1928.4.28~1962.6.6]
니스 출생. 누보 레알리슴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1958년 ‘허공’전시회를 열어 화제를 모았고, ‘인터내셔널 클라인즈 블루’라 이름
지은 푸른 하늘, 깊은 바다의 색조를 즐겨 썼으며, 금박(金箔)·불·물·공기 등 그리스의 철학적 원소를 사용하였다.
또 페인트를 칠한 여자들의 나신(裸身)을 캔버스에 굴려 그림을 그렸고, 그 자신이 2층집에서 뛰어내리는 ‘허공의 극장’을 연출하는 등 ‘예술의 혁명’을 지향한 기행(奇行)으로 짧은 생애를 마쳤다. 1995년 1월 말까지 독일의 쾰른(루트비히 박물관)과
뒤셀도르프(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미술관)에서 열린 이브 클라인의 1차 순회전시는 그의 실험정신을 그대로 전한다. 작품활동은
불과 8년이나 그의 이념과 작업은 요셉 보이스를 비롯한 현대의 행위예술·팝아트·미니멀리즘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청색은 바다와 하늘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자연세계에서 가장 추상적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
- 이브 클라인
1956 - 제1회 현충일(顯忠日) 추도식
1956년 6월 6일 서울 동작동에 있는 당시 '국군묘지'에서 처음으로 '현충기념일' 행사가 엄수됐다. 유가족 천2백여 명을 포함해
추모객 2만여 명이 참석해 6.25전쟁 등으로 희생된 호국영령들의 넋을 위로했다. 국군 창설후 이때까지 국군묘지에 안장된
호국영령은 8만8천 위였다.
현충기념일은 두 달 전인 같은 해 4월 19일 대통령령으로 제정됐다. 이전까지는 국방부 주관 하에 3군 전몰장병 추모식과
무명용사 추도식 등이 열렸었다. 서울 동작동 국군묘지는 1965년 3월 관계법령 정립에 따라 이름이 '국립묘지'로 바뀌었다.
'현충기념일'은 1975년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이름이 '현충일'로 고쳐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6 - 미국의 고고학자, 정치가 빙엄(Bingham III, Hiram) 사망
빙엄 [Bingham III, Hiram, 1875.11.19~1956.6.6]
1911년 6월 24일 미국의 고고학자인 히람 빙엄(Bingham, Hiram, 1875∼1956) 이 인간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페루 안데스 산맥 지역에서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마추픽추(Machu Picchu)를 찾아냈다.
마추픽추는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에 있다. 면적은 13㎢이고 신전 하나, 3,000개가 넘는 계단, 테라스식 정원으로 이루어졌다. 빙엄은 1906년부터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예일대학교 역사학 교수를 지내면서 잉카에 대한 옛 기록을
단서로 마추픽추를 찾아나섰다. 1911년 6월 24일 그는 요새화한 도시 마추픽추에 도착해 잘 보존된 석조물의 유해를 발견했다.
이어 8월에는 또 다른 중요한 잉카 유적 비트코스도 발견했다. 빙엄은 안데스 문명에 관한 <잉카의 땅>
<마추픽추>·<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등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말년에는 정치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6 - 독일의 극작가, 소설가 하우프트만(Hauptmann, Gerhart) 사망
하우프트만 [Hauptmann, Gerhart, 1862.11.15~1946.6.6]
독일의 극작가. 소설가.
슐레지엔의 바트잘츠브룬 출생. C.하우프트만의 동생. 어릴 때 경건한 종교적 환경에서 자라나 한때 조각(彫刻)을
공부하다가 후에 예나대학·베를린대학에서 생물학철학을 공부하였다. A.홀츠, J.슐라프가 제창하는 ‘철저한 자연주의’의
영향하에 처녀희곡 《해뜨기 전 Vor Sonnenaufgang》(1889)을 발표하고, 일약 자연주의 문학의 기수가 되었다.
이어 가정비극 《쓸쓸한 사람들 Einsame Menschen》(1891)에서는 삼각관계로 고민하는 무력한 남편을 묘사하였고,
직공(織工)들의 반란을 다룬 군중극 《직조공들 Die Weber》(1892)로 극단에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걸작 희극 《비버 모피(毛皮) Der Biberpelz》(1893)를 비롯하여
《마부 헨셸 Fuhrmann Henschel》(1898) 등의 사실극이 발표되었다.
한편, 점차 상징적·낭만적 경향이 짙어져 몽환극(夢幻劇) 《한넬레의 승천(昇天) Hanneles Himmelfahrt》(1894),
서정미 넘치는 낭만적 상징극 《침종(沈鐘) Die versunkene Glocke》(1896), 《그리고 피파는 춤춘다 Und Pippa tanzt!》(1906) 등을 거쳐 후년의 인형극 《축전극(祝典劇)》(1913), 최후의 대작 《아트리덴 사부극(四部劇) Die Atriden-Tetralogie》(1941∼1949)에 이르는 작품계열이 있다. 그 밖에 단편소설로는 에로스의 승리를 구가한 걸작 《소아나의 이단자 Der Ketzer von Soana》(1918), 장편으로는 종교적 사상체험을 담은 《기독광(基督狂)》(1910) 등이 있다.
서정시인 《틸 오일렌슈피겔 Till Eulenspiegel》(1927)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민족의 도의적인 분기(奮起)를
일깨웠으며, 서정시집으로 《오색서(五色書) Das Bunte buch》(1888) 등을 남겼다.
하우프트만은 자연주의에서 출발하였으며, 그 완성자인 동시에 그 초극자(超克者)이기도 하다. 그는 독일문학에 공통된
관념적인 묘사를 피하고 하층민에서 영웅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인간과 생의 고뇌 그 자체를 사실적이면서도
구상적(具象的)으로 부각시킨 점에서 독일로서는 독자적인 작가였다. 191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기독광》과 《소아나의 이교도》는 박찬기 번역으로 을유문화사에서 간행되었다.
1944 -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작전(Normandy Invasion) 개시
1944년 6월 6일 군함 1,200척, 항공기 1만 대, 상륙주정 4,126척, 수송선 804척, 그리고 수백 대의 수륙양용전차로 편성된 대부대가
15만 6,000명의 연합군 병력과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자, 미국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은 육·해·공군 합동으로 프랑스 북부해안 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위해 사상최대의 진격함대를 조직하는 일을 맡았다. 영국의 프랑스 북부 공격은 처음에 정한 5월이 아닌 그 유명한 제2차 세계대전의 'D-데이' 6월 6일에 시작되었다.
연합군 공격부대가 유타·오마하·골드·주노·소드라고 암호명을 붙인 노르망디 해안의 5곳에 상륙했다. 캉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던
영국군은 독일 기갑사단의 저항에 맞부딪히기도 했다. 결국 1개월 이상의 격전을 벌인 뒤에 영국군은 7월 9일 캉을 점령했고,
미국군은 6월 26일 중요한 항구인 셰르부르 항을 점령했다. 상륙이 시작된 뒤부터 히틀러는 장군들의 행동을 엄격히 통제해 독일은 전세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일부 지역에 묶여 있던 연합군은 프랑스를 가로질러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1934 - 벨기에 국왕 알베르 2세(Albert II) 출생
알베르 2세 [Albert II, 1934.6.6~]
벨기에의 국왕. 1934년 6월, 벨기에의 4대 왕인 레오폴드 3세(Leopold Ⅲ)와 왕비 아스트리드(Astrid)의
둘째아들로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년만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소년시절에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학교에 다니고 1950년 벨기에로 돌아왔다. 1959년 6월 이탈리아의 귀족 도나 파올라 루포 디 칼라브리아(Donna Paola Ruffo Di Calabria)와 결혼했으며, 1960년에 아들 필리페(Phillppe), 1962년에 딸 아스트리드(Astrid),
1963년에 아들 라우렌(Laurent)을 낳았다.
1962년 벨기에 무역센터의 명예회장직을 맡았고, 31년 동안 이 직책을 수행하면서 전세계를 상대로 100여 건의 경제적
성과를 달성했으며 수출 분야에서 많은 회사들을 도왔다. 1984년에는 그의 이러한 노력을 기리는 의미에서
무역전문가를 배출하기 위한 '알베르 기금'이 결성되었다.
또한 1954년부터 저축 및 연금 업무를 위한 제너널뱅크 이사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1958년부터는 벨기에 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했다. 그 밖에도 도시계획, 건축, 환경 등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환경분야에서는 다양한 국제회의를 주재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으며, 1969년에는 문화유산 및 농업유산의 보호에 관한 유럽각료회의의 회장에 취임했다.
1993년 8월 9일 형인 보두앵 1세가 자녀 없이 사망함에 따라 제6대 왕위에 올랐다. 취임 이래 실업문제와 소외계층의 해소 및 교육과 사회적 안정에 중점을 둔 정책을 펼치고 있다.
또한 국군통수권자로서 국내 및 국제적 군사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군대의 발전과 개선에 힘쓰고 있다.
1933 - 최초의 드라이브인 영화(Drive-in Theater) 미국 뉴저지 윌슨가에서 상연
드라이브인 시어터의 탄생은 좀더 영화를 편하게 보기 위해서 고심하던 한 남자의 발상으로 시작되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가를 찾는 법이라고, 리처드 홀링시드란 남자는 자동차와 영화를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영화가 상영 중인 극장에 들어가기 위해 매번 차에서 내려야 한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차에서 내리지 않고 영화를 볼 수 있을지 방법을 고심하다 결국 야외극장이라는 획기적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역사적인 드라이브인 시어터의 첫 실험은 소박했다. 그는 자신의 차 후드 위에 영사기를 올려놓고,
나무로 짠 스크린과 그 뒤에 감춘 라디오를 가지고 테스트를 가졌다.
그 뒤 점점 발전이 되면서 관객을 배려한 시도를 가진다. 야외극장의 치명적 단점은 날씨 변화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비로 스프링클러로 실험을 하면서 우천시에도 사용할 수 있는 사운드 장치를 고안하려고 애를 썼고,
자동차들이 서로에게 방해를 받지 않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한 남자의 열정은 결국 1933년 5월 그 결실을 맺는다. 특허신청이 통과되면서 그 다음달 미국 최초의 드라이브인 시어터가 뉴저지주에 들어섰다.
드라이브인 영화의 탄생
1933.06.06 - 최초의 드라이브인 영화 미국 뉴저지 윌슨가에서 상연
1933.05.16 - 미국의 리처드 홀링시드, 드라이브인 영화(Drive-in Theater) 특허 획득
1932.08.06 - 미국의 리처드 홀링시드, 드라이브인 영화(Drive-in Theater) 최초로 실험
1926 - 6.10만세운동 계획 탄로(천도교인사 다수 체포)
1903 - 소련의 작곡가 하차투리안(Khachaturian, Aram I.) 출생
1901 -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Sukarno) 출생
1891 - 캐나다의 초대 총리 맥도널드(John Macdonald) 사망
1884 - 영국 런던서 기독교청년회(YMCA) 창설
1880 - 아일랜드의 정치가 코즈그레이브(Cosgrave, William T.) 출생
1875 - 독일의 소설가, 평론가 만(Mann, Thomas) 출생
1872 -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황후 알렉산드라(Aleksandra) 출생
1868 - 영국의 해군장교, 남극 탐험가 스코트(Scott, Robert Falcon) 출생
1850 - 독일의 물리학자 브라운(Braun, Ferdinand) 출생
1799 - 러시아의 시인 푸슈킨(Pushkin, Aleksandr) 출생
1756 - 미국의 화가 트럼벌(Trumbull, John) 출생
1723 - 일본 에도시대의 문인화가 이케노 다이가[池大雅] 출생
1606 - 프랑스의 극작가 코르네유(Corneille, Pierre) 출생
1599 - 에스파냐의 화가 벨라스케스(Velazquez, Diego)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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