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3)
1) 1903 - 소련의 작곡가 하차투리안(Khachaturian, Aram) 출생
하차투리안 [Khachaturian, Aram Ilich, 1903.6.6~1978.5.1]
그루지야 티플리스(트빌리시) 출생. 가난한 아르메니아인 제본공(製本工)의 아들로 태어나 고향에서 일하다가 1921년 모스크바로
이사, 그네신음악원에 들어가서 첼로와 작곡을 배우고 1954년 소련 국민예술가, 1963년 아르메니아 과학아카데미아 회원이 되었다. 소련 평화위원회 회원으로 사회운동에도 참여하는 한편, 모스크바음악원, 그네신음악원의 교사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지휘자로도 활약하였다. 대표작에 발레모음곡 《가이느》(3막 6장, 1942) 《스파르타쿠스》(4막 9장, 1954) 등이 있다.
2) 1850 - 독일의 물리학자 브라운(Braun, Ferdinand) 출생
브라운 [Braun, (Karl) Ferdinand, 1850.6.6~1918.4.20]
풀다 출생. 마르부르크대학교·베를린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876년 마르부르크대학교의 원외교수가 되었고, 그 후 슈트라스부르크대학교·카를스루에공업대학교·튀빙겐대학교 등을 거쳐 1918년 슈트라스부르크대학교 교수 겸 물리학연구소장이 되었다.
초기에는 현(弦)이나 막대의 진동에 관한 연구와 열역학(熱力學)의 문제(르 샤틀리에 브라운의 법칙 등)에 관한 연구를 하다가,
전자기학(電磁氣學)의 분야로 읊겨, 옴의 법칙의 편의(偏倚)와 열기전력(熱起電力)의 문제 등을 검토하였으며, 실험상의 필요에서
브라운의 전기계(電氣計)와 음극선(陰極線)오실로그래프(브라운관, 1897)를 제작하였다. 그 후 무선전신의 연구에 들어가 고주파에 의한 수중(水中)에서의 전파송달, 폐회로의 도입에 의한 정방향(定方向)에의 발신, 경사(傾斜) 빔 안테나에 의한
수신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무선전신 연구의 업적으로 1909년 이탈리아의 G.마르코니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에,
특허에 관한 소송사건 증인으로 도미하였다가 미국의 참전과 질병 등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객사하였다.
3) 1880 - 아일랜드의 정치가 코즈그레이브(Cosgrave, William T.) 출생
코즈그레이브 [Cosgrave, William T(homas), 1880.6.6~1965.11.16]
아일랜드 자유국 초대 대통령(1922~32)을 지냈다. 젊은시절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인 '신페인 운동'에 매료된 코즈그레이브는
1909년에 더블린 시의회 의원이 된 뒤, 신페인당 소속으로 재선되었다.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그는 아일랜드 의용군에 입대했지만, 1914년 의용군이 북부의 얼스터 사단과 남부 사단으로 분리되자 신페인당의 소수파와 함께 아일랜드의 온건파
지도자인 존 레드먼드의 징집정책에 반대했다.
1916년 코즈그레이브는 부활절 봉기에 가담했으며, 신페인당이 압승을 거둔 1918년 선거에서 아일랜드 의회의 초대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첫번째 공화당 정부에서 지방자치장관에 임명되었는데,
그의 임무는 영국과 싸우는 동안 더블린에 있는 영국정부에 협조를 거부하도록 지방자치단체를 선동하는 것이었다.
- 6.10 만세운동 70주년 기념 (1996.6.10. 발행)
1926 - 6.10만세운동 계획 탄로 (천도교 인사 다수 체포)
6.10만세운동 / 조선 황제의 국장일을 맞아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는 과거 3·1운동의 일을 거울삼아 매우 민감하게 경비에
대비하였다. 조선총독부 산하 전경찰과 일본군 5000여명이 경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날 오전 8시 30분경 황제의 상여가 종로
단성사 앞을 통과할 때 중앙고보생이 전단을 뿌리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에 모든 민중이 호응하여 관수교,
황금정 3정목(3가), 훈련원, 동대문 동묘(東廟), 청량리에 이르는 상여통과 예상 연도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은 그 후 전국으로 전파 확산되어, 순창, 군산(이상 전라북도), 정주(定州 평안북도), 홍성, 공주(이상 충청남도)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사회주의 계열의 권오설, 박내원, 민창식 등은 상하이에 있는 여운형(呂運亨)과 연락하여,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전단 10만 매를 인쇄하며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6·10 만세운동’으로 서울에서 이병립, 박하균 등 200여명이 체포되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 동모자 또는 관련자로 체포,
투옥되었다. 이 만세운동은 3·1 독립운동만큼 전국적이지는 못했으나,
여전히 우리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욕망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민족운동이었다.
1901 -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Sukarno) 출생
수카르노 [Sukarno, 1901.6.6~1970.6.21]
동부 자바에서 출생했다. 고교시절부터 민족운동에 눈 떠, 1920년 반둥공과대학 입학 때는 ‘형제수카르노’로 유명하였다.
1928년 국민당을 결성하여 민중주의(民衆主義)를 주창하다가, 1929~1933년 투옥 후에 플로레스섬의 엔데, 수마트라섬의 펜쿠렌에서 유배생활을 보냈다. 1942년 일본군에 의하여 석방되어 일본군에 협력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네덜란드로부터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 1950년 인도네시아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55년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를 주최, 비동맹중립외교의 주역으로 각광을 받았는데, 내정면에서는 다당난립 때문에 단명내각의 연속이었다. 1957년 그는 내부혼란의 원인이 서구형 의회정치에 있다고 하여 대통령중심제를 채택, 촌락민주주의의 전통에 입각한 이른바 교도(敎導)민주주의를 제창하였다. 그 후 국내에서 절대권력을 장악하고, 네덜란드에 대항해서 서(西)이리안해방투쟁을 전개, 1963년 목적을 달성하고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65년 9월 30일에 발생한 쿠데타에서 공산당을 감쌌다고 하여, 1966년 3월 장군 수하르토가 지휘하는 반공 육군에 실권을 넘겨주고, 이듬해 종신 대통령의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정치활동이
금지된 가운데 보고르 교외의 바트트리스의 자택에 살다가 정계복귀도 못한 채 죽었다.
1875 - 독일의 소설가, 평론가 토마스 만(Mann, Thomas) 출생
만 [Mann, Thomas, 1875.6.6~1955.8.12]
만은 192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소설가·평론가이다. 초기에는 형 하인리히 만과 달리 국수주의적 성향을 취했으나
서서히 자유민주주의적 사고로 전환되어갔다. 이런 변화는 장편소설 <마의 산 Der Zauberberg>(1924)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세기말의 문화적 위기상황에서 그의 작품 세계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 진보와 보수, 동양과 서양, 정신과 육체,
인간과 자연 등 인간의 본질적이고 전형적인 문제를 다루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자 만은 망명길에 올라 미국에 정착했고, 전후 미국 사회에서 독일 문화와 독일인의 입장을 변호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부덴브로크가(家) Die Buddenbrooks>·<베네치아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요셉과 그의 형제들 Joseph und seine Bruder>·<바이마르의 로테 Lotte in Weimar>·<파우스투스 박사 Doktor Faustus>·<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Bekenntnisse des Hochataplers Felix Krull> 등이 있다. - 브리태니커
"문학은 죽음이다.
어떻게 그것을 증오하지 않고 그것의 노예가 될 수 있는지
나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토마스 만
1872 -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황후 알렉산드라(Aleksandra) 출생
알렉산드라 [Aleksandra, 1872.6.6~1918.7.16-17]
황제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선에서 러시아군을 지휘하는 동안 실정(失政)을 행해 1917년 3월의 제정 몰락을 촉진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자 헤센다름슈타트의 대공 루트비히 4세의 딸로 1894년 니콜라이와 결혼하여 그를 마음대로 움직였다. 궁중에서 인기를 얻지 못해 위안삼아 신비주의에 빠진 그녀는 거의 광적으로 동방정교를 믿었고 독재체제가 옳다고 생각해
1905년의 개혁으로 축소되었던 니콜라이의 절대권력을 되찾도록 돕는 것이 신성한 의무라고 여겼다. 4명의 딸과 1904년에 태어난
막내 알렉세이 황태자를 두었는데, 혈우병을 앓는 황태자를 살리기 위해 지극한 정성을 쏟다가 최면술을 쓰기도 하였다.
2월혁명(1917)으로 제정(帝政)의 붕괴를 맞았다. (니콜라이 2세는) 1917년 3월 15일 퇴위를 선언하고 유폐 ·감금되었다가 10월혁명 뒤 시베리아로 이송되는 도중, 우랄 지방에 있는 예카테린부르크(스베르들롭스크)에서 지방
소비에트 당국에 의해 1918년 7월 16/17일 가족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1868 - 영국의 해군장교, 남극 탐험가 스코트(Scott, Robert Falcon) 출생
스코트(스콧) [Scott, Robert Falcon, 1868.6.6~1912.3.29]
데번포트 출생. 1882년 해군에 입대하였으며, 1901∼1904년 디스커버리호(號)를 타고 남극탐험을 지휘하였다.
이때 킹 에드워드 7세 랜드를 발견하여 남한(南限) 도달기록인 남위 82도 17분을 기록하였다. 1910년 테라 노바호(號)에 의한 제2차 남극탐험에 나서서 1912년 1월 18일 남극점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남극점은 1911년 12월 14일 노르웨이의 아문센이 도달하였기
때문에 첫 정복의 웅도(雄圖)는 깨어졌다.
그와 4명의 동행자는 귀로에 악천후로 조난, 식량부족과 동상으로 전원 비명의 최후를 마쳤다. 그의 유해와 일기(마지막 일자는
3월 29일) 등은 1912년 11월 12일 발견되었다. 마지막까지 용기를 잃지 않고 영국신사다운 최후를 마친 것이 알려져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저서로는 《탐험항해기》(2권, 1905) 《스콧, 최후의 원정》(1913)이 있다. - naver
"여기 있는 이 각서와 우리의 시체가 이 사실을 말해줄 것이다.
뒤에 남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기 바란다."
- 스코트의 유서에서
1844 - 영국의 윌리엄즈, 런던서 기독교청년회(YMCA) 창설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기독교청년회)는 세계적인 기독교 평신도 운동단체로서 1844년 6월 영국 런던의
히치콕로저스 상점의 점원이던 조지 윌리엄스(George Williams)가 12명의 청년들과 함께 산업혁명 직후의 혼란한 사회 속에서
젊은이들의 정신적·영적 상태의 개선을 도모하고자 설립하였다.
그후 유럽 각국으로 급속히 전파되어 1855년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YMCA 연맹(The World Aliance of YMCAs)을 결성하였다.
제1·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전쟁포로를 위한 사업과 난민구호 사업을 펼쳤다. 1955년 YMCA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주체성
재확립을 위한 노력을 다짐하였고, 1973년 우간다 캄팔라 세계대회에서 캄팔라 원칙을 채택하여 YMCA의 새로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적 관심과 책임을 강조하였다.
회원들은 YMCA 운동의 정신인 독일 경건주의에 따라 정신적 각성, 만인사제론에 입각한 평신도성의 자각,
선교에 대한 정열과 기독교 정신으로의 일치를 기본 원칙으로 하여 봉사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1799 -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Pushkin, Aleksandr) 출생
푸시킨(푸슈킨) [Pushkin, Aleksandr Sergeyevich, 1799.6.6~1837.2.10]
모스크바 출생.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확립자이다. 명문 중류귀족의 장남으로, 1811∼1817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차르스코예셀로의 전문학교에 다녔다. 그 곳의 자유주의적 기풍, 나폴레옹 전쟁의 국민적 고양(國民的高揚), 미래의 데카브리스트들과의 교유 등은 그의 사상형성에 커다란 기반이 되었다. 전문학교 재학 때부터 진보적인 낭만주의 문학 그룹 ‘알자마스’에 참가하여, 1814년 시 《친구인 시인에게》를 처음으로 발표하였다.
졸업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외무성에 근무하였다. 혁명적 사상가 차다예프와의 교류, 데카브리스트의 한 그룹 ‘녹색 등잔’에의 참가 등으로, 그의 농노제 타도의 정치사상은 차차 확고한 것이 되었다. 시 《차다예프에게 K Chaadaevu》(1818) 《농촌 Derevnya》(1819) 등도 이러한 배경에서 쓰인 것들이다. 1820년 최초의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 Ruslan i Ljudmila》를 완성하였는데,
그것은 보수적인 의고전취미(擬古典趣味)에의 통타(痛打)가 되었다. 동년 《농촌》 등 자유를 사랑하는 내용의 시가 화근이 되어
남부 러시아로 유배되고, 키시뇨프 오데사에서 살았다. 이 시절에 데카브리스트 남부회의 구성원들과 사귀고,
그들의 사상에 공감을 가지게 됨과 동시에, 서사시 《카프카스의 포로 Kavkazskii plennik》(1822) 《바흐치사라이의 샘 Bakhchisaraiskii fontan》(1823)을 비롯하여, 낭만주의의 특질이 강한 많은 작품을 썼다.
1824년 국외 망명에 실패하고 가령(家領) 미하일로프스코에 마을에 유폐되어 여기서 서사시 《집시 Tzygany》를 완성, 사실적인
시형소설(詩形小說) 《예프게니 오네긴 Evgenii onegin》(1823∼1830)의 집필을 계속하였고, 비극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1825), 풍자적 서사시 《누손 백작》(1825)을 탈고하였다. 고독하고 불우한 유폐생활은 도리어 시인에게 높은 사상적 ·
예술적 성장을 가져다주어, 러시아의 역사적 운명과 민중의 생활 등에 대하여 깊은 통찰의 기회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1825년 12월 데카브리스트 괴멸 후, 그들과 친교가 있던 그는 이듬해 수도로 소환되었다. 친구를 잃었던 수도에서의 고독에도
좌절하지 않고, 1828년 역사시 《폴타바 Poltava》를 완성하였다.
1830년에는 보르지노 마을에서 소비극(小悲劇) 4편 《인색한 기사 Skupoi rytsari》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Motsart i Salieri》
《돌의 손님 Kamennyi gosti》 《질병 때의 주연(酒宴) Pir vovremya chumy》, 그리고 《벨킨 이야기 Povesti Belkina》 등을
탈고하였다. 그 해에 《예프게니 오네긴》도 완성하였으며, 이것은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의 리얼리즘의 달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당시 러시아 사회의 특질을 남김 없이 그렸다.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는 산문소설 《스페이드의 여왕 Pikovaya dama》(1834)
《대위의 딸 Kapitanskaya dochka》(1836) 등을 써,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초석을 쌓았다. 마지막 서사시 《청동(靑銅)의 기사 Mednyi vsadnik》(1833)에서는 전제적 국가권력과 개인과의 대립 모순을 조명(照明)하고,
제정 러시아의 역사적 숙명을 제시하였다.
1837년 1월 27일 그는 아내 나탈랴를 짝사랑하는 프랑스 망명귀족 단테스와의 결투로 부상하여 2일 후 38세의 나이에 죽었다.
이 결투는 명백히 그의 진보적 사상을 미워하는 궁정세력이 짜놓은 함정이었다고 한다. 푸슈킨의 작품은 모두 농노제하의
러시아 현실을 정확히 그려내는 것을 지향(志向)하였으며, 깊은 사상과 높은 교양으로 일관되어,
후의 러시아 문학의 모든 작가와 유파(流派)는 모두 ‘푸슈킨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naver
What though life conspire to cheat you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시킨
What though life conspire to cheat you,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Do not sorrow or complain.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Lie still on the day of pain,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And the day of joy will greet you.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
Hearts live in the coming day.
마음은 미래에 살고
There's an end to passing sorrow.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Suddenly all flies away,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And delight returns tomorrow.
지나간 것은 또 다시 그리움이 되나니.
1756 - 미국의 화가 트럼벌(Trumbull, John) 출생
트럼벌 [Trumbull, John, 1756.6.6~1843.11.10]
미국 독립전쟁중에 일어난 주요사건들을 화폭에 담아 당시의 인물과 사건을 독특한 기록으로 남겼다.
코네티컷 주지사였던 아버지 조너선 트럼벌은 시인인 존 트럼벌의 사촌이었다. 어릴 때 왼쪽 눈을 다쳐 사실상 애꾸가 된 까닭에,
트럼벌의 작품들은 규모가 작은 것이 큰 것보다 더 뛰어났다. 하버드대학교를 다닌 뒤 교사로 근무했고, 독립전쟁중에는 조지프 스펜서 장군 밑에서 복무하다가 조지 워싱턴 장군의 부관이 되었다. 그후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을 수행하다가 대령으로 진급했다.
1780년 프랑스를 거쳐 런던으로 갔지만, 미국이 영국 정보원인 존 안드레 소령을 교수형에 처한 데 대한 보복으로 투옥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건축을 공부한 그는 풀려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784년 벤저민 웨스트와 함께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다시 런던으로 갔다.
1) 2)
1) 1523 -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1세 바사(Gustav I Vasa) 즉위
구스타브 1세 바사(Gustav I Vasa, 1496년 5월 12일 ~ 1560년 9월 29일, 재위 1523년 6월 6일 ~ 1560년 9월 29일) 또는 구스타브 1세 에릭손 바사(Gustav I Eriksson Vasa)는 스웨덴 바사 왕조의 시조이다.
우프살라(Uppsala) 대학에서 배우고, 1518년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2세와의 전쟁에 참가, 덴마크의 포로가 되었으나,
1519년 도피하여 달레카를리아(Dalecarlia)에 귀환했다. 1520년 11월 덴마크는 스웨덴 귀족들을 대규모로 학살하였다.
이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구스타브는 저항운둥에 앞장섰고, 힘든 투쟁 끝에 1523년 6월 6일, 구스타브는 구스타브 1세 에릭손 바사로 스웨덴 왕이 됨과 동시에 독립을 선언했고, 마침내 칼마르 동맹이 해체되었다.
그는 국교를 루터교로 정하고, 전체 교회 재산을 몰수(1527년)하여, 국가 재정을 늘렸다. 또한 그립스홀름 성 등을 짓고,
개혁을 잘 이끌어 훗날 스웨덴이 발트 해의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구스타브는 1560년 9월 29일 사망했고, 웁살라 대성당에 묻혔다.
2) 1723 - 일본 에도시대의 문인화가 이케노 다이가[池大雅] 출생
이케노 다이가 [池大雅, 1723.6.6~1776.5.30]
일본 에도 시대[江戶時代:1603~1867] 중엽의 문인화가. 본명은 마타지로[又次郞]. 호는 다이가를 비롯해 10개나 있다. 요사 부손[與謝蕪村]과 함께 문인화를 확립했는데, 이 양식의 그림은 지금까지도 일본에 살아남아 있다(원래 중국에서 비롯된 문인화는 처음에는 남종화라고 불렸으며 학문이나 문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서예와 중국 고전을 배웠고, 결국 에도 시대의 중요한 서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중국 명·청 시대의 새로운 화법, 특히 남종화를 배웠으며 야나기자와 기엔[柳澤淇園]의 영향을 받았다. 또 문인화의 대가인 기온 난카이[祇園南海]를 찾아가는 등 각지의 일류 인물과 교류하면서 인격을 도야했다. 그는 단순히 문인화법의 모범들을 충실하게 따르는 데 그치지 않고 활력과 생기로 가득 찬 자유롭고 풍부한 화풍을 개발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산수화와 초상화로 이루어졌으며, 대부분 후기 문인화보다 규모가 크다. 대규모 작품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우지[宇治]에 있는 절의 만푸쿠 사[萬福寺]의 맹장지와 벽에 그린 〈오백나한 五百羅漢〉·〈서호 西湖〉, 고야 산(高野山)의 헨조코인[遍照光院]이라는 절 맹장지에 그린 10점의 〈산수인물도 山水人物圖〉이다. 또한 요사 부손과 함께 〈십편십의첩 十便十宜帖〉이라는 시화집을 제작했는데, 중국 청대(淸代 : 1644~1911) 초기의 시인 이입옹(李笠翁)의 작품에 삽화를 그려넣은 이 시화집에서 이케노는 10가지 유익한 점에 대한 삽화를 그렸고, 요사 부손은 10가지 즐거움에 대한 삽화를 그렸다. 이케노는 아내 교쿠란[玉瀾]에게 그림을 가르쳐 유명한 화가로 이름을 떨치게 했다.
1606 - 프랑스의 극작가 코르네유(Corneille, Pierre) 출생
코르네유 [Corneille, Pierre, 1606.6.6~1684.10.1]
루앙 출생. 대대로 법률직에 종사하는 중류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9세 때 예수회가 경영하는 학교에 입학하여, 세네카의 비극이나 사상 등을 애독하였는데, 이러한 경험은 후일 의지비극(意志悲劇) 창조에 영향을 끼쳤다. 1624년 졸업 후, 법률을 배워 18세에
변호사가 되었으나 내성적인 성격에다 말까지 서툴러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을 본 아버지가 한가한 직책인 토지와 해무(海務) 관계의 재판관 자리를 부여하였다. 1650년까지 이 직에 근무하면서 많은 시간을 몽상에 잠기거나 때로는 시를 쓰는 한편,
루앙의 사교계에도 출입하여 카트린 드 유(나중의 뒤 퐁 부인)와의 사랑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공상적 희극 《멜리트 Melite》(1629 초연, 1633 출간)를 썼는데, 이것을 루앙에서 공연 중이던 몬드리 극단에
위탁하여 파리에서 상연하여 성공을 거두고, 그 후 극작에 전념하게 되었다. 희비극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다시 희극으로 돌아와
《미망인》(1633 초연, 1634 출간)으로 성공하고 《루아얄 광장》(1634 초연, 1637 출간)에 이르는 일련의 풍속희극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 후의 《거짓말쟁이》(1642 초연, 1644 출간)는 이 계통의 걸작으로, 몰리에르 이전에 문학적 희극을 확립한
공적은 매우 크다. 재상(宰相) 리슐리외의 총애를 받았으나 어용작가가 되는 것이 싫어 주로 루앙에서 살았다.
1630년 전후부터 고대비극의 형식을 지키는 정통비극이 대두되는 것을 간파하고는 당시 연구하고 있던 에스파냐극에서 취재하여 《르 시드 Le Cid》(1636 초연, 1637 출간)를 썼다. 사랑하는 남녀가 명예 때문에 서로 적이 되는 이야기인데, 웅변적인 미문으로
자유의지가 의무감을 선택함으로써 정념을 극복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극적 대립을 내면화시킨 새로운 수법으로 한
시대를 이루었으나 약간 불규칙한 구성과 원전이 있다는 것이 밝혀져 공격을 받고 르 시드 논쟁이 일어나자,
리셜리외 재상은 자신이 창설한 아카데미의 첵임자인 샤플랑에게 의견서를 발표케 하여 논쟁을 수습하였다.
그 결과 그는 그 후 침묵을 지키고 연극을 연구하다가, 애국심을 찬미한 비극 《오라스 Horace》(1640 초연, 1641 출간),
관용(寬容)의 비극 《시나 Cinna》(1640 초연, 1643 출간), 순교의 비극 《폴리왹트 Polyeucte》(1640 초연, 1643 출간)를 발표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규칙을 지킨 의지비극으로 불멸의 명성을 획득하였다. 1640년 법관의 딸인 마리 드 랑페리에르와 결혼, 루앙에
정주하면서 재상 마자랭의 지우를 얻어 파리 사교계에도 출입하였다. 수작(秀作) 《로도귄 Rodogune》(1644 초연, 1647 출간)
발표 후 1647년 아카데미 회원이 되어 극작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프롱드의 난 때는 왕당파에 속하였다.
1649년 극작을 재개하여 《니코메드 Nicome de》(1651 초연 ·출간)에 성공하였으나 지나치게 이상한 상황을 추구하여 심리적 진실을 잃었고, 《페르타리트 Pertharite》(1652 초연)에서 실패한 후 고향으로 은퇴하여 종교서 《그리스도를 모방하여》를 번역하였다. 그 후 동생 T.코르네유가 극작에 성공하였고, 루앙에 내연(來演)한 몰리에르 극단의 여배우와의 연애, 재무경 푸케의 권유 등으로 《에디프 Oedipe》(1659 초연 ·출간)를 발표하여 연극계로 복귀하였고, 1660년 《극시론(劇詩論)》을 발표하는 한편, 자작집을 개정(改訂)하였으며 파리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만년의 작품은 우미(優美)와 진실을 추구하는 새로운 풍조에 맞지 않았고, 권력자인 콜베르에게도 대우를 받지 못하여, 이의 만회를 위해 몰리에르와 궁정무용극 《프시시 Psyche》(1671 초연)를 합작하였으나, 후배이자 강적인 라신과 동일한 주제로 경작(競作)을 벌인 《티트와 베레니스 Tite et Berenice》(1670 초연, 1671 출간)에서 크게 실패하였다. 《쉬레나 Surena》(1674 초연, 1675 출간)를 끝으로 극작에서 손을 떼고 파리에서 신앙생활에 열중하다 병사하였다.
1599 - 에스파냐의 화가 벨라스케스(Velazquez, Diego) 출생
벨라스케스 [Velazquez, Diego (Rodriguez de Silva), 1599.6.6~1660.8.6]
세비야에서 출생하였다. 처음 에레라에게 사사하고, 이어 마니에리스트 화가 파체코에게 사사하였다. 정신적으로도 이 문화도시와 스승 파체코의 영향을 받았으며 뒤에 그의 사위가 되었다. 초기의 작풍은 당시의 에스파냐 화가들과 다름없이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명암법으로 경건한 종교적 주제를 그렸으나 민중의 빈곤한 일상생활에도 관심이 많았다. 1622년 수도 마드리드로 나가,
이듬해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되어, 평생 왕의 예우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궁정의 요직까지 맡았다.
초기의 어두운 색조와 명암법에 의한 마지막 걸작은 《주정뱅이들─바커스의 대관(戴冠)》(1629)이고, 1628년의 첫 이탈리아 여행에서 받은 베네치아파의 영향으로, 중기(中期)는 밝고 선명한 색조와 경묘한 필치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왕족·신하 그리고 궁정의 어릿광대·난쟁이 등을 그린 다수의 초상화는, 그를 미술사상 초상화가의 대가로 만들었다.
이 불행한 사람들을 왕족들과 다름없는 담담한 필치로
묘사한 것은 인간 존재의 중요성과 본질적인 비극성까지 추구하였음을 보여준다.
초상화의 대표작으로는 《왕녀 마리아 안나》 《왕녀 마르가리타》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1650) 등이 있으며
또 큰 구도의 작품으로는 《브레다성의 항복》(1637)이 유명하다. 그 후 두 번째 이탈리아에 체류(1649∼1651)하는 동안 장기간 연찬을 거듭하여 기법상의 혁신이 완성되었다. 만년의 대작 《궁녀들(라스 메니나스)》과 《직녀(織女)들》(1657)은 평생의 화업(畵業)을 집약한 것들이다. 거기서는 전통적인 선에 의한 윤곽과 조소적(彫塑的)인 양감(量感)이라는 기법이, 투명한 색채의 터치로
분해되어, 공기의 두께에 의한 원근법의 표현으로 대치되었다.
전동(顫動)하는 빛의 파도에 씻기고, 완전히 대기를 파악하는 벨라스케스의 공간과 기법은 시대를 크게 앞질러 인상파의 출현을 예고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의 종교화 ·신화화는 모두 주제의 제약에 속박되지 않는 조형성 탐구라는 근대성을 지녔으며, 백색 ·흑색 ·회색의 해조(諧調)된 색채가 비속화나 이상화에 치우치지 않는 독자적인 리얼리스트로서,
그 시대의 에스파냐 화단에서는 개성이 출중한 화가로서 평가되었다.
1723 - 일본 에도시대의 문인화가 이케노 다이가[池大雅] 출생
1606 - 프랑스의 극작가 코르네유(Corneille, Pierre) 출생
1599 - 에스파냐의 화가 벨라스케스(Velazquez, Diego)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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