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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87 - 프랑스의 시인, 외교관 생 종 페르스(Saint-John Perse) 출생 생 종 페르스 [Saint-John Perse, 1887.5.31~1975.9.20] 본명 Marie-René Alexis Saint-Léger Léger이다. 서인도제도의 과들루프에서 출생하였다. 보르도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1914년 외무성에 들어가 베이징과 워싱턴 등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뒤, 1930∼1940년에는 외무성 비서관장으로 국제문제 해결에 힘썼다. 1941년 독일군의 파리 점령을 계기로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의 국회도서관 고문으로 있으며 시작(詩作)에 몰두하다가 1957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시인으로서의 출발은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기 전인 1911년에 처녀시집 《찬가(讚歌)》를 발표한 것이고, 그 후 외교관으로서 각지를 여행한 경험을 토대로 《원정(遠征)》(1924), 미국 망명 중에 쓴 《망명》(1946) 《바람 Winds》(1946) 《연대기 Chronique》(1960) 《새의 세계 L’Ordre des oiseaux》(1962) 《단테를 위하여 Pour Dante》(1965) 등을 써냈다. 동시대의 모든 문학 조류를 떠난 그의 시는 P.클로델풍(風)의 파격적 운율로 웅대한 우주적 규모의 서사시를 풍부한 환상과 구상적(具象的) 이미지에 실어서 노래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아니었으나, 그의 시 속에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를 구하는 진지하고도 강렬한 숨결이 느껴진다. 196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2) 1817 - 독일의 시인 헤르베크(Herwegh, Georg) 출생 헤르베크 [Herwegh, Georg, 1817.5.31~1875.4.7] 독일에서 혁명정신을 호소하여 당대 젊은 시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당시의 혁명적 시인들과는 다른 서정적 감수성을 지닌 그의 시작품들은 하인리히 하이네의 작품들에 필적한다. 튀빙겐의 신학대학에서 쫓겨나 언론인으로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병역 의무를 치르는 동안 분별 없이 한 장교를 모욕하여 스위스로 피해야만 했다. 그곳에서 독일 젊은이의 기상을 표현한 정치시들을 모은 〈살아 있는 자의 시 Gedichte eines Lebendigen〉(1841, 1844)라는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시집을 출판해줄 출판업자를 발견했다. 비록 책은 압수되었지만 이 시집으로 그는 하루아침에 명성을 얻었고 그 책은 판을 거듭했다. 1842년 독일로 다시 돌아온 그는 그에게 동정심을 가진 대중들에 의해 열렬히 환영받았고,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그를 따뜻이 맞았다.
3) 1924 - 미국의 첫 흑인 여성 관방장관 해리스(Harris, Patricia Roberts) 출생 해리스 [Harris, Patricia Roberts, 1924.5.31~1985.3.23] 1) 2) 3)
1) 1910 - 남아프리카공화국, 영국으로부터 독립 19세기 중엽에 영국은 산업자본의 발달에 따라 광대한 시장을 필요로 하는 제국주의시대에 돌입했으며, 1867년 오렌지자유국의 킴벌리에서 다이아몬드 부광(富鑛)이 발견되자 그 지방의 할양을 요구하여 1871년 영국령으로 만들었다. 이어서 1886년 트란스발의 위트워터스랜드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케이프 식민지의 총리 C.J.로즈가 이를 차지하기 위해 제임슨 침입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실각하였다. 그후 1899년 보어전쟁이 일어났다가, 보어측의 패배로 1902년 화해조약을 체결한 후, 두 공화국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1910년에는 이들 4개 지역이 합병하여 영국연방의 일원으로 남아프리카연방이 형성되었다. 만들었다.
2) 1832 - 프랑스의 수학자 갈루아(Galois, Évariste) 사망 갈루아 [Galois, Évariste, 1811.10.25~1832.5.31] 파리 교외 부르라렌에서 태어났다. 군(群)의 개념을 처음으로 고안하였고, ‘갈루아의 이론’으로도 유명하다. 파리의 고등이공과학교에 입학하려다 실패하였으나, 1829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830년 정치운동에 참가해서 퇴학당하였다. 또한 국왕을 탄핵하여 투옥되었는데, 가출옥 중에 경찰관이 도발한 것이라고도 하는 결투로 인해 21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방정식론에 관한 연구 결과도 프랑스 학사원에서 등한시되었으나, 그가 죽은 후, 결투 전날 밤에 친구인 A.슈발리에에게 보낸 유고(遺稿)에서 비로소 그 위대성이 알려졌다. 유고에는 타원적분(楕圓積分)과 대수함수(代數函數)의 적분에 관한 것, 방정식론에 관한 것이 요약되어 있다. 그 내용에는 군(群)의 개념 도입이나 갈루아 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갈루아의 사상에 포함된 군의 개념은 기하학이나 결정학(結晶學)에도 응용되었고, 물리학에도 풍부한 연구수단을 제공하였다.
3) 1773 - 독일의 소설가, 극작가 티크(Tieck, Ludwig) 출생 티크 [Tieck, (Johann) Ludwig, 1773.5.31~1853.4.28] 베를린 출생. 1792년부터 할레대학 ·에를랑겐대학 ·괴팅겐대학 등에서 배웠다. 친구 W.H.바켄로더의 감화로 낭만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99년 예나에서 F.노발리스, 슐레거 형제, C.브렌타노, F.W.셸링, 피히테 등 초기 낭만파 사람들과 사귀었고, 이른바 예나 낭만파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뒤 유럽 각국을 여행하였으며, 1819년 드레스덴 궁정극장의 연극주임이 되었고, 1841년 프리드리히 4세로부터 연극고문으로 초빙되어 베를린에 돌아와 평화로운 만년을 보냈다. 그는 슐레거 형제와 함께 초기 낭만파의 건설 ·추진 ·선전에 활약하였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하였으며, 합리주의에 근거한 야유와 유머를 인생의 암흑면에 대한 날카로운 감수성과 교묘히 결합시키는 재능이 풍부하였다. 장편소설에 《윌리엄 로벨씨의 이야기 Die Geschichte des Herrn William Lovell》(1793∼1796) 《프란츠 슈테른발트의 여행 Franz Sternbalds Wanderungen》(1798)이 있는데, 후자는 F.슐레겔이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 보다 뛰어난 신시대의 작품이라 격찬한 바 있다. 바켄로더와의 공저 《예술을 사랑하는 한 수도사의 심정 토로》(1797)도 전기 낭만파의 출발점으로서 유명하다. 널리 알려진 작품에 《금발의 에크베르트 Der blonde Eckbert》(1796) 《아름다운 마게로네의 이상한 사랑의 이야기》(1796) 《장화를 신은 고양이 Der Gestiefelte Kater》(1797) 등의 아름다운 이야기와 동화가 있다. 또 S.M.세르반테스의 작품 번역과, W.셰익스피어극의 번역 ·연구에도 큰 공적을 올렸다.
1) 1750 - 프로이센의 정치가 하르덴베르크(Hardenberg, Karl August von) 출생 하르덴베르크 [Hardenberg, Karl August von, 1750.5.31~1822.11.26] 니더작센주(州) 에센로데 출생. 1770∼1781년 니더작센의 관료, 1787∼1790년 후작(後爵) 브룬스네크 밑에서 일하였으며, 1790년 안스바흐-바이로이트 지방장관이 되었는데, 1791년 그곳이 프로이센에 병합됨에 따라 프로이센 정부의 관리로 있게 되었다. 프랑스혁명 때 라인전쟁에 참가, 1795년 바젤조약에 프로이센 대표로 조인, 1804∼1806년 외무장관으로 있었다. 슈타인의 개혁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1810년 슈타인의 뒤를 이어 재상(宰相)이 되었으며, 이후 슈타인이 시작한 길드 특권의 폐지, 세제개혁을 중심으로 한 재정개혁, 농노의 해방, 유대인에 대한 시민권의 공여, 국민교육의 충실과 학예의 진흥 등 자유주의적인 행정, 경제개혁을 정력적으로 추진하고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에 의한 군제개혁에도 전면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실패한 후, 1813년 국왕을 설득하여 프랑스에 선전을 포고하게 하여 해방전쟁을 지도하였고, 1814년 파리조약에 조인하였으며 후작에 서임(敍任)되었다. 1814∼1815년 빈회의에는 프로이센 대표로 출석하여 영토확장에 성공하였다.
3) 1557 - 러시아의 차르 표도르 1세(Fyodor I) 출생 표도르 1세 [Fyodor I, 1557.5.31~1598.1.17] 정식 이름은 Fyodor Ivanovich. 러시아 루리크 왕조의 마지막 차르(1584~98 재위). 이반 4세와 그의 첫째 아내 아나스타시야 로마노브나 자하리나 유레바의 아들로, 1584년 3월 19일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탓에 국정에 참여할 수 없었으며 외삼촌인 보리스 고두노프가 전권을 행사했다. 러시아 대도시를 총주교의 관할로 승격시키고(1598), 1583년 스웨덴에게 잃었던 핀란드 만 근처의 땅을 회복했으며(1595), 서시베리아와 카프카스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 등 표도르 재위기간의 치적은 고두노프의 업적이었다. 1598년 표도르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루리크 왕조는 대가 끊어졌고, 젬스키소보르(전국회의)는 고두노프를 왕으로 선출했다.
1930 - 미국의 영화배우,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Eastwood, Clint) 출생 이스트우드 [Eastwood, Clint, 1930.5.31~ ] 미국의 영화배우, 영화감독.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오클랜드 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벌목장 인부, 소방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였다. 군대에 다녀온 후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1954년부터 배우 생활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트럭 운전을 하면서 단역 배우로 영화에 출연해 연기 경력을 쌓았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 《앱솔루트 파워》(1997)를 감독하여 흥행에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1923 - 모나코 공국의 군주 레니에 3세(Rainier III) 출생 레니에 3세 [Rainier III, 1923.5.31~2005.4.6] 본명은 레니에 루이 앙리 막상스 베르트랑 드 가리말디(Rainier Louis Henri Maxence Bertrand de Grimaldi)이다. 폴리냐크 백작 피에르 공과 모나코 국왕 루이 2세의 무남독녀로 왕위 계승권을 가진 샤를로트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국·스위스 등지에서 공부하였고, 프랑스 몽펠리에대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1941년에는 프랑스군에 포병장교로 자원입대하여 알자스주 탈환 작전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어머니가 왕위 계승권을 포기함에 따라 1949년 5월 5일 루이 2세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1956년 미국의 인기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Kelly, Grace Patricia, 1929~1982)와 결혼하여 세계적으로 화제를 뿌렸다. 2005년 4월 6일 사망하기까지 57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새 헌법을 공포하고 국민의회와 시회를 재건하는 등 정치 개혁에 힘썼으며, 모나코의 경제를 관광·금융·도박 산업 중심으로 크게 발전시켰다. 1974년에는 국제서커스대회를 창설하였고, 1993년에는 국제연합(UN)의 183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등 모나코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들 알베르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1915 - 독일 비행선, 영국 런던을 공습 - 독일 제국 해군 소속의 쩨펠린 비행선 2대가 영국 본토에 폭격을 감행. - 5명 사망 (1차대전을 통해 런던에 총 56톤, 그외 다른 영국의 지방에 214톤의 폭탄이 투하됨) 1915년 5월 31일 --- 독일, 런던에 최초로 쩨펠린 공습 - 7명 사망, 35명 부상
1915년 5월 31일, 일부 런던시민들은 달이 환하게 비추는 음산한 밤하늘에, 타원형의 그림자가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목격했다. 바로 독일의 쩨펠린 비행선 LZ-37호 였다.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줄 몰랐고, 사실 런던시민들은 비행기나 비행선을 구경해본 적이 없는 사람도 대부분이었다. 곧 귀를 찢는 폭음이 런던시내 곳곳에서 터져 나오면서 불길이 타올랐다. 이날의 최초 공습의 성과는 미미 했으나 그 심리적인 효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1915년 9월에는 다른 쩨펠린 비행선이 다시 런던 상공에 나타났다. 쩨펠린 LZ-13호는 성공적인 런던 폭격을 감행하여 13명의 런던 시민이 사망하고 87명이 부상했다. 런던시민들은 공포에 빠져들었고, 곧 그것이 독일의 폭격 비행선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고, 영국 본토도 이제 전쟁권에 들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이후 점점 쩨펠린의 공습이 증가하게 되었고, 1916년 9월 2일에는 런던에 최대규모인 14척의 쩨펠린이 출현하여 폭격을 감행했으며 수백발의 폭탄이 투하되었다. 밤하늘을 울리는 폭탄의 굉음과 멀리서도 보이는 불빛은 런던 전체를 아비규환의 소용돌이로 몰아갔다. 새벽이 되어보니 런던시민 수백명이 사상하고, 여러 군수공장이 대파되는 피해가 있었다. ... http://airwar.hihome.com/airwar/ww1/ww1-18.htm
1886 - 이화학당(梨花學堂) 설립 1886년 5월 어느날, 가마를 탄 한 여성이 하인을 거느리고 벽안(碧眼)의 스크랜턴 부인을 찾았다. 스크랜턴은 미국 세계여성해외선교부(WFMS)가 조선에 파견한 선교사. 1885년 6월에 조선 땅을 처음 밟은 스크랜턴은 조선 여성을 교육하는 것이 시급함을 깨닫고, 서울 정동(貞洞)에 학교 부지 6100여평을 매입한 뒤 이듬해 2월부터 건물공사를 시작했다. 곧 학생모집에 나섰으나 교육을 받을 여성들은 여전히 집안 깊숙한 곳에서 나오질 않았다. 이런 때 상류계층의 여성이 제발로 찾아왔으니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고관의 소실로 결혼까지 한, 이름을 알 수 없어 김부인으로 불린 여성은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이 되고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1886년 5월31일, 김부인 한 명 만을 상대로 한 역사적인 첫 수업이 시작됐다. 근대적인 여성교육이 첫 발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부인은 불행히도 병이 들어 석 달만에 중도하차해야했다. 6월 말, 10살 난 꽃님이가 가난으로 딸을 부양할 수 없었던 엄마를 따라 이곳을 찾았고, 곧 4살 난 별단이도 이곳에 보내졌다. 한국인 최초의 양의사가 된 김정동(박에스더)이 문을 두드린 것도 이 무렵이었다. 11월, 학수고대하던 200평 규모의 한식 기와집 교사(校舍)가 완성된 데 이어 이듬해 2월, 또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고종황제가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교명(校名)을 하사한 것이다. 정동에 배밭이 많아 `이화(梨花)`로 지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화여대는 1935년에 화빈궁(정조의 후궁)의 묘가 있던 현재의 자리로 이전해 `신촌시대`를 열었다.
1857 - 로마 교황 비오 11세(Pius XI) 출생 비오 11세 [Pius XI, 1857.5.31~1939.2.10] 1870년의 이탈리아 왕국의 로마 병합 이후 교황청과 이탈리아 왕국은 대립을 계속해 오고 있었는데, 비오 11세는 1929년 2월 무솔리니 정권과의 사이에 라테란협정을 체결하여 오랜 세월의 분쟁을 해결, 이에 따라 바티칸시국(市國)의 확립을 보았다. 그는 가톨릭의 해외 포교에 힘쓰는 한편, 공산주의와 소련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1819 - 미국의 저널리스트, 시인 휘트먼(Whitman, Walt) 출생 휘트먼 [Whitman, Walt, 1819.5.31~1892.3.26] 휘트먼은 가장 미국적인 시인으로 평가받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수필가·시인이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다닌 뒤 인쇄소 사환, 식자공, 교사 등으로 일했다. 1855년 시집 <풀잎 Leaves of Grass>을 발표했는데, 인간의 육체와 감각을 무절제하게 찬양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저명한 평론가 랠프 월도 에머슨의 격려에 힘입어 1856년 <풀잎> 재판을 출간했다. 잡지의 편집인으로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며 1860년에는 <풀잎> 제3판을 냈고, 남북전쟁 이후에는 좀더 온건한 자세로 돌아가 <풀잎>(1867) 제4판을 출간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작품을 인정받기 시작했으나, 1872년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몸이 마비되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 그는 병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풀잎>의 보완을 위해서도 계속 힘썼다. 그는 급진주의자나 광인으로 매도당하기도 했지만, 인류의 미래를 예견한 과감한 선구자로 칭송받았다. 그는 시의 내용 및 형식에 있어서 새로운 혁신을 일으켜 미국 문학 및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일에 죽음이 있다면 그것은 삶을 추진하는 것이지
- 휘트먼의 시 <풀잎>에서
1809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하이든(Haydn, Joseph) 사망 하이든 [Haydn, Joseph, 1732.3.31~1809.5.31] 로라우 출생.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100곡 이상의 교향곡, 70곡에 가까운 현악4중주곡 등으로 고전파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형식을 완성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만년에는 미사곡과 《천지창조(天地創造) Schöpfung》(1798), 《사계(四季) Die Jahreszeiten》(1801) 등 오라토리오풍의 교회음악의 명작을 남겼다. 오스트리아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수레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5세 때 친척인 초등학교 교장이자 교회음악가인 프랑크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740년 빈의 성스테파노대성당의 소년합창대에 들어간 그는 당시의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총애를 받았으나 1749년 변성기에 들어가자 합창대를 나와 그때부터 빈에서 자유롭기는 하였지만 불안정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 생활이 1759년까지 10년간이나 계속되고 그 동안의 자세한 경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는 한편, 어느 시기에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인 N.포르포라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하고 음악 애호가인 귀족 툰백작부인의 하프시코드 교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오스트리아의 귀족 퓌른베르크남작 집안의 실내음악가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한다. 또 스테파노대성당 등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가수로서 예배주악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밤에는 세레나데악단에 참여하여 빈거리로 나와 돈을 버는 일도 하였다. 이처럼 고생을 하면서 음악과 더불어 살아간 그는 10년 후인 1759년 마침내 보헤미아의 모르친백작 집안 궁정악장(宮廷樂長)에 취임하였다. 보헤미아에 부임한 하이든은 그곳에서 초기의 교향악과 관악합주인 디베르티멘토를 작곡하였다. 그러다가 백작의 집안 재정상태가 핍박하여 악단이 해산되는 바람에 다시 실업자가 되어 빈으로 돌아왔고, 1760년 11월 가발업자의 딸 마리아 안나 켈라와 결혼하였다. 1761년 5월 1일 하이든은 헝가리의 귀족 에스테르하지후작 집안의 부악장(副樂長)에 취임하였다. 당시의 악장은 G.베르나였으나 그가 사망한 1766년부터는 하이든이 명실상부한 그곳 악장으로 승진하였다. 에스테르하지후작의 집에서는 하이든이 1790년까지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충실한 악장으로 근무하였다. 그 동안에 많은 교향곡·현악4중주곡·오페라 등을 작곡하였는데 특히 교향곡과 현악4중주곡 등 실내악·클라비어소나타 등 기악곡에 있어서는 고전파의 규범이 되는 형식을 창조하고, 1781년에는 소나타형식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6곡으로 된 《러시아4중주곡》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모차르트에게도 영향을 준 작품이다. 그리고 1780년대에는 파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6곡의 《파리교향곡》을 비롯하여 《토스토교향곡》(2곡) 《도니교향곡》(3곡) 등 명작을 잇달아 작곡하였다. 1790년 9월 그가 오랜 세월을 모시던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후작이 사망하자 그는 명예악장이라는 칭호를 받음과 함께 그 직을 물러나 빈에서 살았다. 이 무렵 독일의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런던에서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성공을 거둔 J.D.잘로몬의 권유로 그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79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런던에서 오케스트라시즌에 출연하였는데 그는 《잘로몬교향곡》(제1기, 6곡)을 작곡하여 크게 성공하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명예음악박사의 칭호를 받았다. 그런 성과에 크게 자극을 받은 하이든은 1794년에서 이듬해에 걸쳐 다시 영국을 방문, 《잘로몬교향곡》(제2기, 6곡)을 작곡하였다. 만년의 하이든은 다시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악장으로 되돌아갔으며 뛰어난 미사곡 6곡을 작곡하고 또 두 개의 오라토리오의 대작 《천지창조》와 《사계》를 작곡하였다. 하이든은 젊은 모차르트와 친교가 있었는데 첫번째 영국 체류 중이던 1791년에 모차르트는 35세로 세상을 떠났다. 런던에서 독일로 돌아가던 1792년, 본에 들렀던 하이든은 거기서 처음으로 젊은 베토벤을 만났으며 그후 잠시 빈에서 그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베토벤이 왕성한 작곡활동을 하게 될 무렵에는 은퇴하여 여생을 즐겼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제2회 빈 공략의 포성을 들으면서 77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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