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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흔적

세월의 흔적속 이 사진

 

 

 

세월의 흔적속 사진

 

이 한 장의 사진

 

이사진의 배경은 부산시 서구 괴정2동 대치고개라는 마을에서 서대신동과 구덕산을 배경한 사진이며 멀리보이는 학교가 당시 명문이던 부산여중 교사 전경이다. 이 빛바랜 사진은 까마듯하게 잊고 있었던 지나간 시절 인 1960년도 어린형제들과 생활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나에게는 의미가 담겨있는 소중한 사진입니다.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나의 학창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기에 족합니다. 지금은 고급아파트 밀집지역인데 단독주택으로 지금의 어느 시골 마을 같습니다.

 

 

기억이란 시간의 곰팡이가 피어가면 서서히 자기 위주로 부패하고 변질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진이 있으면 그 기억은 다시 사물이 존재해 있었던 그대로 재생되기 마련입니다. 혹시 재생된 기억이 새로운 모습으로 과거의 사실을 덮어버리고 왜곡하는 역기능적인 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진속의 진실은 결코 외곡 할 수 없으며 거짓말이 통하지 아니하고 화면구성과 내용을 읽어보면 당시의 상황에 쉽게 접근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진을 찍은 날이 추석 이후로 기억되며 부모님이 시골가시고 부재중 일 때는 당시 내가 소년 가장의 역할로 동생들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 됩니다. 큰 여동생이 없는 것을 보면 내가 카메라를 조작하여 여동생에게 촬영하도록 한 것 같습니다. 내 절친한 친구가 우리 집을 찾아와 우리형제들과 함께 촬영한 것을 보면 얼마나 다정한 사이인지 알 수 있고 친구는 어린 동생들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나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준 한살 위 인 이 친구(당시 경남고등학교 윤자효)가 항상 내 곁에 있었습니다. 이 친구를 처음 만난것은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서대신동2가 바로 집앞에 있었던 제일 장로교회 주일학교 이었습니다. 서로가 외로운 소년들이면서 생각하는 것이 같아 어느 다른 친구보다 쉽게 친할 수가 있었습니다. 친구는 생각하는 바가 깊었고 두뇌가 아주 명석하였으며 항상 긍정적이었고 나에게 희망을 심어주었으며 나를 이해하고 항상 이끌어 주었습니다.

 

​ 이 친구는 목사 아들인 친구 따라서 55년도 이적과 기적의 신비한 하늘의 역사를 일으키던 박태선 장로가 부산서대신동2가 전차길가 있었던 보세창고를 개량하여 부산전도관 개관 집회 (1956.5.7-12)을 하였는데 그 집회에 참석하여 이슬성신 은혜를 받았다고 하며 같이 장로교회에 나가지 말고 이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부산 전도관으로 나가자고 하여 그해 7.28(수)일에 정들었던 교회을 떠나 전도관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후 한국 기독교 총회에서는 박태선 장로가 이슬성신이 내린다고 주장함은 이단이라고 규정하여 교회로부터 핍박과 사회에 조작된 여론에 의하여 57년도 부터 전도관은 큰 시련속이 시작되었고 백 만 명에 달하는 은혜 받은 수많은 교인들이 다시 원 교회로 돌아가기 시작 한 일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요란스러워도 어린 나이에 교회 다니며 하나님을 믿는 일은 항상 즐거움이 되었고 가정생활이 비록 윤택하지 못했으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큰 축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믿음으로 맑고 밝게 살아가려고 신앙생활에 매진하였습니다. 교회가 멀리 영주동 산꼭대기로 이전하여도 개의치 아니하고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니면서 학생시절 신앙생활로 일관 하였습니다. 그 시절 나의 가정은 아버님이 신경통으로 오래토록 활동하지 못하여 경제적 어려움이 닥쳐서 학업을 이어 가기 어려워도 나는 가난한지 알지도 못했으며 부족 한 것이 있어도 원망하거나 불평해본일이 없었습니다.

 

내가 군대를 같다 온 후 친구는 부산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생사가 알 길 없게 되어 지었습니다. 의미 있는 말을 한 마디 남겼는데 지금 입증할 수가 없지요. 그렇게 인사도 없이 살아져버린 이 친구를 평생을 잊지 못하고 찾고 있습니다. 학창시절 다니던 학교는 비록 달랐지만 방과 후 같이 생활한 시간이 많았습니다. 주로 친구가 우리 집을 찾아 왔었고 때로는 우리 집에서 숙식을 같이 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친구의 어머님은 일찍 돌아가시고 당시 부친은 체신공무원이고 직급은 서기관으로 부산 우체국 국장직에 근무하시었다고 생각 돱니다. 지금 생각하면 막내로서 누나들과 뜻이 맞지 아니하여 참 외로운 소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방학 동안에는 보름 동안이나 우리 집에 머물다가 간일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우리집 가정생활을 회상해보면 정말 궁핍하고 가난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조부모님은 시골인 창녕에서 생활하고 계시었고 부모님과 우리형제들은 부산에서 살았습니다. 부모님들이 생업을 위해 나가시면 부모님이 집에 돌아오기 전에 내가 항상 저녁밥을 지어 동생들과 같이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밥 짓기에 앞서 미리 어머님이 보리쌀을 삶아 소쿠리에 담아 두었습니다. 그렇게 삶아둔 보리쌀을 다시 밥을 지을 때에 가장 아래에다 깔고 그 위에 쌀을 올려서 연탄불 위에 두면 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쌀이 귀한 시절이라 쌀을 아끼기 위해서입니다. 보리쌀을 깔면 쌀이 적게 들어가도 밥의 분량은 비슷해지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납작 보리쌀’이란 것이 나와서 미리 삶지 않고 쌀이랑 같이 안쳐도 되었는데, 보리쌀보다 더 맛이 적어서 동생들이 꺼려하여 미리 삶아둔 보리쌀로 계속 밥을 했답니다. 당시에 쌀은 정말 서민들에게 황금보다 더 소중한 생명 그 자체 이였습니다.

 

 

이 한 장의 사진이 남겨지게 된 경위는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에 전남 나주 출신으로 참 다정 다감한 노총각 전도사가 교회 단을 맡고 있었습니다. 명절을 즐겁게 보내라고 독일제품 라이카 카메라를 빌리어 주시어 촬영한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카메라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시절 카메라 한 대를 소유한다는 것은 큰 자랑이며 재산목록 1호였다. 전도사님이 큰 배려로 빌리어 주셨을 것이다.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잊어버린 상태이지만 이사진만 보면 항상 감사한 마음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사진 찍기를 좋아 했으며 지금 명절을 기념하기위하여 사진 촬영 한다고 하면 아마도 웃음꺼리가 될 것입니다. 당시 생활수준 이란 것이 겨우 먹고 사는 정도 인데 카메라로 취미 생활 한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며 가난 때문에 그 시절에 청소년으로서 즐길 수 있었던 취미 생활은 생각을 제대로 해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이유가 되어 우연한 기회에 예배시간에 맡아지던 그 하늘의 향기를 난초향기에 다시 맡게 되어 틈만 나면 투자하여 일생토록 배양해가도 끝이 보이지 아니하는 난초에 빠져서 40년 넘게 씨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근래에는 베란다의 저 숱한 난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제 걱정스러워지기도 합니다. 인간이 좋아한다는 취미생활이란 것이 이런 것이기에 허무해지며, 네이버 불로그를 통하여 사소한 내 생각의 조각들을 언제까지 이렇게 엮어갈 수 있을지도 생각해봅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소통의 공간으로 사이버 이웃들과 오래토록 대화를 나누고 싶은 바램이지만 이것도 나의 지나친 욕심 같은 생각이 자주 들게 합니다.

 

 

이제 나이 들어서 인생을 살아온 까마득한 먼 길을 되돌아보니 사람이 산다고 아등바등 하지만 각자에게는 자기의 길이 다 정해져 있는 것 같아집니다.. 한 장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한 콩깍지에서 나온 콩들인 우리형제도 사주팔자인지 불우하지는 아니하지만 형제모두가 다 잘 될 수는 없습니다. 가정환경 탓으로 중간에 공부를 하지 못한 여동생과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공부한 동생과는 육신의 삶에 있어서 차이가 너무나 크게 보입니다. 어려움을 헤치고 공부한 막내 여동생은 자영업으로 성공하여 부산 감전동 모 철강회사 대표이사이고, 품에 안겨 있는 남동생은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어지는 인천 국제공항 본부장으로 현직에 근무하고 있으며 나 또한 중앙부처에서 33년 무탈하게 공직생활을 마치고 연금혜택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람의 한평생 삶이라는 것이 부모가 만들어준 한 콩깍지에서 나온 형제들도 다른 모습으로 각자 제 갈 길을 가며 살아가고 있는데 하물며 억만 가지 인연의 굴레에 의하여 서로가 잠시 만났다가 해어지게 살아가게 되어 있는 세상에 하늘에 구름처럼 일어났다가 살아지는 일시적인 인연의 인간사회에서 삶의 모습을 두고 옳고 그름을 시시비비 가리려 한들 시원한 답이 있을 수 없으며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의 업보에 따라 각자가 살아가야 하는 길 위에 놓여저 있는 것이고, 나는 작은 소망이 있다면 그 길 위로 걸어가면서 내가 남기고 가는 삶이 새로운 업이 아니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깨달음은 무엇일까?  깨달음은 의문점을 찾는 것이다. 의문점은 사람마다 다르게 접근하여 오는것 같다. 삶에 대한 의문점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고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도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다. 그 의문점을 진정으로 찾으려고 한다면 간절한 마음과 시련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간절한 마음은 의문점이 해결이 되더라도 그것을 유지되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진정한 깨달음인 것이다. 일시적으로 깨닫는 것은 누구나 가질 수가 있는 것이고  진정으로 그것을 적용시킬 수 있는  한계는 수학에서 말하는 최대공약수에 비견 할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변화이다. 변화를  신앙생활에 적용을 시킨다면 이 깨달은 새로운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