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 1943)
KBS 1TV 설 특선 영화로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청순한 모습을 볼 수 있는 1943년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21일 밤 11시25분),을 목감기 몸살로 잠을 이루지 못하여 뒤처기다가 우연히 학창시절이후 다시 보았습니다.
1930년대의 스페인 내란 주제로 여인과의 사랑과 전쟁의 비극에 대한 지식인의 주체적 결단, 죽음을 초월한 용기와 사랑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는, 헤밍웨이의 작품 특성이 잘 나타나있는 헤밍웨이의 대작들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여기서 헤밍웨이의 작품 특성이라고 하면, 전쟁 서사시적인 것을 말합니다. 원작소설과 영화 내용의 줄거리는 동일합니다.
1937년 파시스트와 공화정부파로 갈라져 싸우던 스페인 내전에서 미국 청년 로버트 죠단(케리쿠퍼)은 정의와 자유를 위해 공화 정부파의 의용군에 투신하여 게릴라 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죠단에게 내려진 새로운 임무는 적군의 진격로에 해당하는 산중의 대철교를 3일 후에 폭파시키라는 것이다. 죠단은 안세르모라는 늙은 짚시를 안내로 삼고, 목적하는 산지로 찾아들어간다.
한편, 철교를 폭파시키기 위해서는 이 산악지방의 집시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 짚시의 두목은 술을 좋아하는 파블로로 그는 이일에 선뜻 협력하려들지 않는다. 그래서 죠단은 파블로의 아내 필라와 이 일을 협의하게 된다. 그녀는 자진하여 집시를 지휘해서 이 계획을 원조할 것을 제의한다. 파블로의 부하는 전원 필라의 명령에 따라 착착 계획을 진행하는데 이러는 중에 스페인의 소녀 마리아는 뜨겁게 죠단을 사랑하게 되는데.
드디어 3일째인 이른 아침, 죠단일행은 철교 폭파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말을 몰고 달리는 순간, 적군의 포화에 쓰러진다. 마리아는 쓰러진 그의 몸에 매달려 울며 떠나려하지 않지만 죠단은 그녀에게 떠날 것을 설득하고, 필라는 강제로 그녀를 끌고 떠난다. 마지막 남은 죠단은 최후의 기력을 다해 뒤쫓는 적군에게 총탄을 퍼붓는다.
원작을 그대로 다 옮겨 놓을 수 없는 것이 영화의 한계설정이기도 하다. 인위적인 구도 설정에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아시다시피, 조던은 다리를 폭파시키기 위한 작전으로, 험한 바위산 동굴에서 파블로와 만나죠. 그 원인이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줄거리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배신하고 도망갔던 비겁하게 자기만 살기위한자로 파블로 설정하고 있는 반면 전쟁에서 의미를 나름 데로 알고 있는 파블로는 다시 돌아와 재결합하면서 자기의 살아날 길을 알고 있는 자로, 조던과 마리아의 만남과 사랑은 조금 작위적인 느낌감이 들지만 남녀간의 사랑이란 국경이 없으며 얼마나 숭고하며 지고지순 한 것인지 전쟁이란 무대를 통하여 그려 본 것이다. 인생의 삶의 마당에서 단3일간의 사랑이지만 사랑은 시간의 길이에 있지 아니하며 이 세상을 지나 다음세상 까지 영원할수 있다는 것을 저자는 말하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의 의식구조가 변화하여도 변할 수 없는 진리이기에 이 명화를 보면 볼수록 연륜에 따라 다른 시각으로 독자들을 매료하고 우리들 속에서 명화로 남아서 심금을 울려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가혹한 전쟁의 참상에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랑의 열병으로 가슴 아파하며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어린 한 여인의모습을 보고 우리는 눈물을 훔치지 아니할수 있는 심장의 소유자가 될 수 없지 아니한가?
작가가 독자들에게 강조한 부분도 이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의 무대에서는 결코 일어나자 못할 일들이 전쟁이란 상황설정 하에서는 인간의 사랑도 비정상적인속에서 인간의 순수성은 전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간접적으로 어필한 사실을 독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작위적이고, 결합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없이 갈등이 난무하는 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보면서 전 그런 느낌을 사랑이나 배반 등을 이용해 잘 표현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의 상황설정 내용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아니하는 층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독자층에서는 누구나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이 있게 마련입니다.
원작소설의 제목은 던(Donne, John)이라는 영국 시인의 산문시 제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누구를 위하여 (조)종[弔鐘]은 울리나> 입니다.(조종 :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뜻으로 치는 종)
시를 한번 살펴보죠.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이다.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며, 모래톱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다.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領地)가 그리되어도 마찬가지이다.
(The island itself is not perfect as anyone. Every human being is a piece of the continent, is part of the ocean. Washed in the waters of ten thousand days go heuldeongyi European jimyeo that much smaller, the sandbar is, there's is no different.
Manor of thy friends and thyself and the same is true of so.)
"어떤 이의 죽음도 나 자신의 소모려니 그건 나도 또한 인류의 일부이기에, 그러니 묻지 말지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느냐고,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다."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Ja ankinde;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인간은 모두가 하나의 인류이자 형제이다. 누가 죽는다면 당신이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다. 누가 죽어서 조종이 울리면 누가 죽었지 궁금할 필요 없다. 바로 당신이 죽은 것이며 그 종은 당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울리는 것이다.
소설 원작에는 에스파냐 내전 속에서 미국인과 에스파냐 여인 사이에 꽃피는 사랑을 담담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로, 이러한 전쟁 소설에다가 인류애를 강조한 시 제목을 갖다 붙임으로써 전쟁의 참혹함과 덧없음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먼 나라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고 죽어가는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니 무명용사인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잊지 말라 이런 뜻으로 해석도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