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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흔적

의령이 배출한 애국지사 안희제

의령이 배출한 애국지사 안희제

독립운동가·민족기업가·교육자·언론인. 안희제 (安熙濟)

 

안희제(安熙濟, 1885. 8. 4∼1943. 8. 3) 선생은 1885년 8월 4일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부친 안발(安鏺)과 모친 창녕 성씨(成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강진(康津), 호는 백산(白山)이다. 7살 때부터 선생은 향리에서 집안의 형인 안익제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매우 영민하여 문리를 쉽게 터득하였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그리하여 19세이던 1903년 7월 선생은 정석신 등 의령·합천·삼가·진주·하동 등지의 선비들과 지리산과 섬진강 일대를 유람하며 32수의 한시를 지어 <<남유일록(南遊日錄)>>에 남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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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통하여 청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낸 뒤 러시아와 세력 각축을 벌이던 중,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켜 가고 있었다. 일제는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그 해 2월 23일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의 체결을 강제함으로써 우리 영토를 점유하여 갔고, 또 8월 22일에는 <한일협약(韓日協約)>을 강제하여 고문(顧問)정치를 실시함으로써 내정간섭을 본격화하여 갔다. 나아가 일제는 러일전쟁 승전 직후 제국주의 열강의 양해 아래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자주적 외교권과 통치권을 장악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조국이 이같이 망국의 위기에 처하자 선생은 신학문을 익힐 뜻을 집안 어른들에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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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망해 가는데 선비가 어디에 쓰일 것입니까.

고서(古書)를 읽고 실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무식자만 같지 못합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나라를 해치는 것이니, 내일 당장 경성으로 올라가 세상에 맞는 학문을 하여 국민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가위 공맹(孔孟)의 도라 할 수 있는데, 어찌 산림간(山林間)에 숨어서 부질없이 글귀만 읽고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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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회복운동

1891년(고종 28)부터 족형인 서강(西崗)에게 한학(漢學)을 수학했다. 사립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신학문을 배운 후 1905년 국권회복을 위한 지식의 필요성을 느껴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했으나 교주(校主) 배척운동에 관련되어 중퇴하고 양정의숙으로 전학하여 전통 한학의 토대 위에 서양의 선진 학문을 접목하여 24세 때 졸업했다.

이 때 선생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의 동량이 될 청소년의 교육이 급선무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을사늑약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한편에서는 즉각적 항일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장기적인 구상으로 각계각층에서 구국계몽운동을 펼쳐가던 당시 민족사회의 분위기와 그에 대한 선생의 자각이 크게 작용한 탓이었다.

1907년 민중 계몽과 애국사상 고취를 위해 지방순회강연을 했으며, 지방 유지들과 함께 동래 구포에 구명학교(龜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이어 의령 중동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세웠으며, 다음해에는 고향 설뫼에 창남학교(南學校)를 설립했다. 1909년 이시영(李始榮)과 교의를 맺고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는 한편, 신민회원인 윤세복(尹世復)·김동삼(金東三)·신백우(申伯雨)·고순흠(高順欽)·이원식(李元植)·서상일(徐相日) 등 120여 명을 규합,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펼쳤다. 한일합병 후인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모스크바·만주 등지를 돌면서 독립운동가들과 구국방책을 논의했으며, 최병찬(崔秉瓚)과 함께 〈독립순보 獨立旬報〉를 간행했다. 1914년 국내에서의 운동자금 조달과 연락을 위해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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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기업·교육활동

지금 우리의 사회는 모든 일을 창조할 때이다. 계림팔도를 통하여 기성(旣成)의 인재를 찾는 것은 하늘에서 혜성을 찾는 것과도 같다. 이것은 마치 수명의 장공(匠工)을 갖고 수만간(數萬間)의 거택(巨宅)을 영조하려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인재 양성의 필요는 어느 시대와 어느 사회인들 급하지 않으리오만, 오늘날과 같이 급하고 절실한 때는 또 없다. 지역은 비록 작으나 국민은 2천만이다. 박옥잠룡(璞玉潛龍)이 어찌 없을쏘냐. 역사는 반만년이다. 국민을 교육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어찌 급하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 1919년 11월 선생이 독립운동의 인재 양성을 위해 조직한 기미육영회의 취지문 중에서

1914년 9월 독립운동 자금의 조달과 일제 자본에 맞서는 민족기업의 발전을 위해 이유석(李有石)·추한식(秋翰植) 등과 더불어 부산 중앙동에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소규모 개인상회로 출발한 백산상회는 1919년 5월 자본금 100만 원과 총주수 2만 주, 주주수 182명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대구·서울·원산·펑톈[奉天] 등지에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대규모 회사로 성장했다. 회사의 확장에 따라 부산상업회의소 부회두와 부산상업학교 이사를 역임했으며, 부산 유지들과 더불어 부산진과 영도에 공립보통학교를 설치했다. 3·1운동을 전후하여 남형우(南亨祐) 등과 국내외 연락을 담당했으며, 의령에서 독립선언서 수만 장을 제작하여 영남 각지에 배포하고 의령지방의 독립운동을 지휘했다. 이해 11월에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회사 관계자 및 영남 유지들과 함께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전진한(錢鎭漢)·안호상(安浩相)·이극로(李克魯) 등 많은 장학생을 각국에 유학시켰다. 1920년 동아일보사 창립 때 최준(崔浚)·허걸(許傑)·이종화(李鍾和) ·윤현태(尹顯泰) 등 백산회사 관계자들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그해 4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동아일보사 부산지국장을 맡기도 했다. 1921년 친일단체 상애회(相愛會) 회장이자 친일파의 거두인 박춘금(朴春琴)의 도항증명서(渡航證明書) 강매 기도에 맞서 부산에서 '박춘금 성토대회'를 열고 항의·진정 투쟁을 벌여 도항증명제를 폐지하게 했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연통제(聯通制)를 구성하고, 그 교통사무국을 만주의 이륭양행(怡隆洋行)과 백산회사에 두게 했다. 그러나 백산무역주식회사는 계속된 독립운동자금 공급과 부채, 일제의 수색, 장부검열 및 회사간부의 감금·고문 등의 탄압은 견디지 못하고 1927년 해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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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언론·협동조합운동

1926년 민족자주정신과 경제적 실력을 배양하여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전진한 등과 더불어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고, 다음해 이시목(李時穆) 등과 함께 자력사(自力社)를 설립하여 〈자력 自力〉을 발간했다. 1929년 이우식(李祐植) 등과 함께 재정난에 빠진 〈중외일보〉를 인수, 주식회사로 전환하여 사장에 취임했다. 〈중외일보〉는 민족언론의 입장에서 일제에 항거했으나 이로 인해 여러 번 발행정지 및 휴간을 당했고 결국 1930년 10월에 자진 휴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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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건설 및 대종교활동

1931년 대종교에 입교했으며, 1933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투쟁의 근거지 마련과 재만주 조선 소작농들의 자력갱생을 위해 닝안 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을 세워 조선농민 3백 호를 유치하고 농장 내에 발해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34년 대종교 제3대 교주이자 총본사(總本司)의 도사(都司)인 윤세복을 동경성으로 맞이하여 총본사를 이곳으로 옮기게 했다. 이후 대종교 참교(參敎)·지교(知敎)·상교(尙敎)를 역임했고, 교적간행회장(敎籍刊行會長)으로서 〈삼일신고 三一神誥〉·〈신단실기 神檀實記〉·〈홍범규제 弘範規制〉·〈종례초략 倧禮抄略〉·〈한얼노래〉 등을 간행하여 종교를 통한 민족자주사상 고취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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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교변(壬午敎變) 때 체포되어 고문으로 순국

일제는 1938년 7월 중일전쟁과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연합군측과 힘겨운 전쟁을 벌이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 위협의 무게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1942년 4월 신병 치료를 위해 귀향했다. 대종교를 독립운동조직으로 간주한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이극로가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왜곡 번역하여 같은 해 11월 조선어학회 간부 검거와 동시에 대종교 간부 25명을 체포하는 임오교변(壬午敎變)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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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이때 선생 또한 신병 치료 차 귀향해 있던 중, 일경에게 피체되어 만주 복단강성 경무청으로 이송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8월3일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3시간 만에 59세의 나이로 목단강 영제의원에서 순국했다. 대종교에서는 이때 같이 순국한 권상익(權相益) 등의 10명을 순교십현(殉敎十賢)으로 추존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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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안희제)

발굴 한국현대사인물 1 : 김효순, 한겨레신문사, 1991

독립유공자 공훈록 : 국가보훈처 편·발행, 1986

일제의 경제침탈사(일제하의 한국연구총서 1) : 김문식 외, 현암사, 1982

한국기업가사 : 조기준, 박영사, 1973

백산·안희제 〈한국언론인물지〉 : 김의환, 1981

백산선생의 편모 〈나라사랑〉 19 : 신재홍, 외솔회, 1975

백산 안희제선생 해적이 〈나라사랑〉 19 : 김의환, 외솔회, 1975

민족기업가로서의 백산선생 〈나라사랑〉 19 : 조기준, 외솔회, 1975

독립투사 안희제 〈나라사랑〉 19 : 김형두, 외솔회, 1975

대종교와 백산선생 〈나라사랑〉 19 : 강천봉, 외솔회, 1975

 

 

부산 중구에 있는 백산 안희재 선생님의 기념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