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내 고향 전경
사람마다 고향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없고 선대 가 없을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보통 고향이하고 선대가 대를 이어 살아온 곳을 이르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든지 나에 대한 자취가 묻혀 있는 곳이 고향이다.
내 고향 창녕군 고암면 감리 미곡도 그런 마을이다. 선대는 경기도 파주에 거주하시었는데 임진왜란 때 전라도 나주게시다가 화왕산전투로에 참가하기 위하여 이곳에 오신 후 400여 년 대를 이어 살아온 화왕산기슭에 자리 잡은 산골 작은 마을이다. 나의 선대인 증조부 때부터 이곳을 떠나서 외국 생활 하신일이 있지만 그래도 한 번도 이곳을 버리거나 잊은 일이 없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살아오시었다. 어릴 때는 할아버지 손목에 이끌리어 시사에 참배하려 이곳을 드나들었고 지금은 한 가문의 장손으로서 나에게 부여된 장손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하여 이곳을 들여야 하는 책임이 주어져 있다.
남평(南平) 문씨(文氏) 의안공파(毅安公派) 후손들로 감리 미곡 초곡 등 일원에 300여 호가 살았다. 감정공( 監正公) 난의(蘭宜)을 파조로 삼고 있으며 남평 문씨 선대는 이러하다
시조(始祖)는 문다성(文多省)이니 호는 삼광(三光)이고, 시호는 무성(武成)이다. 본관(本貫)은 시조 문다성이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삼중대광(三重大匡)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오르고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남평(南平)으로 관적(貫籍)하였다. 하지만 후에 우상기상시(右常騎常侍)를 지낸 문익(文翼)을 중조(中祖) 1세로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12세 휘 익점(益漸)은 자가 일신(日新) 호가 삼우당(三憂堂)이고,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고려 공민왕 9년에 문과에 급제 김해부사록(金海府司祿)을 시작으로 직강 박사를 거쳐 좌정언(左正言)이르고 공민왕(恭愍王) 때에 중현대부(中顯大夫)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임명되었으며, 동지 경연사에 오르고, 시무팔조(時務八條)를 상소하였고, 고려가 망하자 두문불출하였는데 이태조(李太祖)가 친히 불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효행 또한 지극하여 왕의 특명(特命)으로 효자비(孝子碑)가 세워지고 성리학(性理學)에도 밝았다. 조선 태종(太宗) 때에 그의 학행을 기리고자 참지의금부사(參知義禁府使)로 강성군(江城君)에 봉(封)해지고 부조묘를 세웠다. 세종 22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남평의 장연서원(長淵書院)과 단성(丹城)의 도천서원(道川書院)에서 향사(享祀)하고 있다.
특히 서장관(書狀官)이되어 원(元)나라에 갔다가 정치 소용돌이 속에 말려서 원나라 교지국(交趾國)에서 귀향살이 하다가 귀국하면서 목화(木花)씨를 가져와 재배하고 옷을 지을 수 있도록 기계(機械)를 발명하여 우리나라 의류혁명을 일으켰다. 그의 손자 래(萊)는 중실의 장자로서 물래는 그의 이름 따 명명되었다.
13세(世) 휘 삼자(三子) 중실(中實)은 간의대부(諫議大夫), 참지문하시중(參知門下侍中)에 증직 되었으며 시호가 의안군(毅安君)이니 파조(派祖)이시다. 14세 문래 文萊(朝鮮字 : 子蓬號 : 理谷諡號 : 靖惠 ) 자봉(子蓬) · 호(號) : 이곡(理谷) · 시(諡) : 정혜(靖惠) · 官職 : 좌찬성(左贊成) 종1품 學者로서 경사에 통하고 천문ㆍ지리ㆍ음양ㆍ산수ㆍ척도등에 밝았다.
15세 문순(文珣) 병조참의(兵曹參議) 16세 홍위(弘胃) 증(贈) 이조참판 (吏曹 參判) 17세 문설(文卨) 성천 진병마절제도위 (成川鎭兵馬節制都尉) 18세 승서(承瑞) 자는 현조(顯照), 조선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부승지(副承旨)로 공충도수사(公忠道水使)를 지냈다. 1467년(세조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조석문(曺錫文)등과 함께 錄勳되었다. 19세 사영(士英) 자는 희현 (希賢) 호는 진명제(進明)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을 지냈다. 20세 지보(之保)는 수사(水使)로 재직하였으며 선대의 묘 파주 북사 석평 선영아래 있다. 21세 난의(蘭宜)는 임진외란이 일어난 1592년 전라도 나주에서 이곳으로 와서 의병장 곽재우 휘하에 소속되어 의령 정암진 나루전투에 참전한 이후 1597년 정유재란 때 화왕산 전투에서 승전하는데 군사로 참전하였다. 이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제수 된 바 있으며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오지였을터지만 물이 달고 살기좋은 이곳에 안주하시어 후손들이 감정공을 파조 로 삼고 있다.
감리 미곡마을(미실)은 참 경치가 아름다운 마을이며 앞 개천이 붕어낚시터로 유명한 감리저수지로 흘러드는 산골 마을이다. 감리는 무공해지역으로 근래 이농 현상으로 이 마을도 외면 받다가 근래 다시 미나리 재배로 각광받고 있다. 이곳에 토지가 기름지어 어떤 작물을 심어도 아니 되는 품종이 없다고 조모님은 항상 고향이야기를 하셨다.
감리 산골짝 맑은 물이 토평천을 타고 1억 5천만년 흘어 들어서 이루어지 늪이 저 유명한 우포늪이다. 내 고향 미곡도 최소 1억5 천 만년 전에 자연의 모습은 존재하였다는 증거이니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고향에 내려간다고 전화하니 선대 큰집 종부 아주머니가 어김없이 동구 앞 다리간간에 앉아서 기다리고 계시었다.
낚시 철이며 강태공의 붕어 낚시로 밤을 즐겁게 하고 봄이 되면 온갖 약초들로 약초 채집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며 등산객들에게 하루를 즐겁게 하는 적당한 등산로와 산허리를 감아서 청도 밀량 방면으로 단순에 갈수 있는 천왕재와 신라 때부터 사용된 유명한 감골재를 끼고 있다.
내가 임도 통행 열쇄를 인수 받아 선대 산소를 찾아간 청룡등 산마루에는 위치한 고조부 묘소 부근 여기저기에는 좀 처럼 구경하기 어려운 야생 고사리가 소나무 근처에 지천이었다. 자연을 지키고 보호하는 땅은 하늘의 축복도 따르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스럽게 고개 내민 고사리 사진을 차마 카메라에 담는 것도 죄송하여 촬영하지 아니하기로 마음먹었다. 위치가 확인 되면 인간들 손길에 남아 날 수 있으랴
이 시대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은 자연이 속에서 한세상 살다가 돌아가신 선대가 물려 준 고향이 각 사람마다의 가슴속에 아름답지 아니한 마을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우리는 각자의 고향과 산천을 잊지 아니 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가꾸어 가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내 고향 사랑이며 향토에 대한 애향심발로 일 테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고향을 언제라도 잊어버리지 말고 사랑하며 살아가려는 마음가짐 속에 우리 사회가 바라는 자연보호운동이 지속되어지고 살기 좋은 우리국토가 조성되지 아니 할까하는 생각이다.
그럴 때면 길거리에 잡초인 민들레도 좋아하며 춤추는 날이 될 테지요. 그러한 날이 오기를 저 감골 저수지와 산골마을은 오늘도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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