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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흔적

백정의 딸을 정경부인 삼은 의리의 사나이 이장곤 [李長坤, 1474~?]

泰伯山  지기가 뻗고 있는 이장곤묘소   

풍수상 명당인자리인 정남향의 이장곤 묘소 


쌍분아래 발치에 있는 묘가 정경부인된 양씨묘이다.


문인석상과 무인석상 


백정의 딸을 정경부인 삼은 의리의 사나이 이장곤 [李長坤, 1474~?]


이장곤의 본관은 벽진(碧珍)이고, 자는 희강(希剛)·용가(龍哥)요, 호는 금헌(琴軒)·우만(寓灣)·학고(鶴皐)등 이며, 시호는 정도(貞度) 로. 한성참군(漢城參軍)을 지낸 승언(承彦)의 넷째 아들이다.

1474년(성종 5)에 출생하였으며 김굉필(金宏弼)의 문인.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02년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04년 홍문관 교리(校理)로 있으면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거제로 귀양 갔으나, 함흥으로 도주하여 양수척(楊水尺)의 무리에 섞여 살면서 목숨을 유지했다. 그 뒤 복직된 이래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박원종(朴元宗)의 추천으로 관직에 다시 임명되어 교리 ·장령(掌令)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학문과 무예를 겸비한 인물로 중종의 신임을 받았다.

1512년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이듬해에 이조참판이 되었다. 1514년 예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이후 대사헌 ·이조판서 ·좌찬성 등을 지냈다. 1519년 병조판서 재임시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주도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참여하였으나, 조광조(趙光祖) 등 사화에 연루된 사림들의 처형에는 반대하다가 삭직되었다. 1522년 복관되었으나, 여강(驪江) ·창녕(昌寧) 등지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는 《금헌집》이 있다



조선시대 중종때 우찬성겸병조판서를 역임한 이장곤의 교지는 금관지의 재질로 두텁게 배접된 붉은 색의 금박당지(金箔唐紙)로 만들었으며, 가로 118㎝, 세로 69㎝ 규격의 52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장곤교지(李長坤敎旨 )시도유형문화재 제309호(경남)


경상남도 창녕군 대곡면 평지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이장곤에게 시호를 내린 교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09호. 이 유품은 1856년(철종 7, 청나라 함풍 6)에 이장곤에게 ‘정도공(貞度公)’의 시호를 증하는 교지이다.


내용은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 겸 판의금부사원자보양관(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 兼 判義禁府事元子輔養官)을 지낸 이장곤에게 ‘정도공’이라는 시호를 증 한다고 하고, 그 옆으로 조금 작은 글씨로 ‘貞(정)’이라고 한 것은, 숨기지 않고 꺾이지 않음으로써, ‘度(도)’라고 한 것은 마음이 능히 의(義)를 지음으로써”라고 하여 정도공이라고 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함풍 6년의 6년 부분에 관인(官印)을 날인하였다.

교지 전체의 현존 상태는 양호하다.


 

금호재(琴湖齋)


금호재는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병조판서를 지낸 금헌 이장곤 선생의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다. 대합면 대동리 265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재실로서 경남 유형문화재 제26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문신이자 학자로 중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금헌(琴軒) 이장곤(李長坤)의 재실(齋室)이다.


이장곤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죽은 뒤 창녕의 영암서원에서 제사를 모셨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영암서원도 사라지게 된다. 원래 금호재는 용흥사의 부속건물이었던 것을 1966년 이곳으로 옮겨 지어 이장곤 선생의 제사 건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대청과 온돌방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방의 출입문은 기능적인 면과 장식적인 면 모두를 갖춰 아주 실용성이 돋보인다.


1966년에 현장소로 이전되었으며 용흥사가 1695년까지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적어도 17세기 후반의 건물로 사료되는 팔작지붕의 집으로  목재는 느티나무를 사용하였으며, 연화무늬의 공포와 망와에 '병오년 9월 11일'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현재 이헌덕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대동리 금헌묘석상(大同里 琴軒墓石像)


금호재에서 북동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태백산 기슭에는 그의 묘소와 함께 대동리 금헌묘석상이 있다. 이장곤의 묘지에 있는 유물과 유적으로 원형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사각형 석축분 1기와 문인석상 2기, 무인석상 2기, 망주석 2기, 이장곤 중형의 묘 1기, 이장곤 부부의 묘 1기, 신도비가 있다.

조선 중기인 1535년경에 조성된 금호재에 배향된 금헌 이장곤(李長坤)의 유적으로서 경남 유형문화재 제296호로 지정되었다.





 

유기장이의 딸을 정부인으로 삼은 내력


드라마 <대장금>의 배경이 되는 중종 때. 조정은 백정의 딸을 양반의 정실부인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로 한바탕 시끄러웠다. 결국 중종이 어려운 시절에 동고동락한 천민의 딸을 양반의 정식 아내로 인정하라는 명령을 내려 일단락된 이 사건은, 조선 전체가 들썩거렸던 백정의 딸 양씨 스캔들이다.


폭군 연산군은 예쁜 여자라면 유부녀건 처녀건 가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산군은 이장곤이라는 관리의 아내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여자로 만든다. 이에 격분한 이장곤은 홧김에 아내를 죽이고 함경로 도망친다. 도망자 신분의 이장곤은 백정 양씨의 집에 얹혀살게 되고, 정말 괜찮은 그 집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도망자 생활 몇 년 만에 중종의 즉위로 조정으로 돌아온 이장곤. 그동안 양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이장곤은 동고동락한 아내를 버릴 수 없어 조정에 선처를 부탁한다. 결국 이장곤 덕에 부인 양씨는 정경부인이 되고 친정은 모두 천민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정경부인 양씨의 이야기는 나중에 소설 <임꺽정>에도 등장하는데 임꺽정은 정경부인 양씨의 조카로 설정돼 있다.


 

여행후기 


이장곤이 함경도지방으로 귀향사리로 떠나 천민들이 사는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갈증이 나서 우물에서 물을 깃는 아낙네에게 물 한 모금을 청하였는데 과객의 형상을 보고 바가지에 수양버들잎을 한웅컴 훌 터서 넣어준 사람이 양씨 처녀로서 후에 이장곤이 복직되어 짐에 조정에 상소하여 정경부인이 된 사람입니다.


조선이라는 철저한 계급사회에 법과 제도가 엄격하였지만 왕과 제상들의 마음을 움직여 일족의 천민 신분을 면하게 하여주고, 자기에게 진심으로 헌신한 그 여인을  역사에 빛나는 정경부인 반열에 올여 둔 부인이지만 무덤만큼은 같은 반열에 쓰지 못한 것 같다. 


본부인 앞으로 들어 세운 양자의 후손들이 묘소를 관리해오며  서자인 양씨 후손들은 묘사시 축대 아래서 참배 하곤 했답니다. 친손들은 지금 의령지방에서 산다. 한 국가의 제도와 법령은 이렇게 엄하고 무서운 사회 구속력 있었기 때문에 어떤 흔들림 앞에도 원칙을 고수하며 때로는 내부갈등과 외세 침략과 모진 질고에도  조선은 500년간이라는 긴 세월의 역사를 지탱하여왔다.


오늘날 약속과 신의 우정 등을 중시하기 보다 자기 이익에 따라 편리한 데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에서 이장곤에 얽인 사연은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