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는 묵묵부답…그녀의 다음 카드는?
“공천 잘못 땐 좌시하지 않겠다” 배수진 친 박근혜
#장면 1
17대 총선을 20여 일 앞둔 2004년 3월 24일 오전. 전날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박근혜 대표가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중앙당사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당사엔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았다. 대신 당직자들과 함께 당 간판을 떼어냈다. 한나라당이 ‘호화 당사’를 버리고 ‘광야’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그는 당직자들과 간판을 들고 여의도 MBC 건너편의 천막 당사까지 20여 분을 걸어갔다. 그곳에 당 간판을 내걸고 조촐한 입주식을 치렀다.
그는 “국민 여러분께 지은 죄를 진심으로 참회한다. 새 출발하려는 저희의 마음만은 받아 달라”라고 호소했다. 천막 당사행은 차떼기와 탄핵역풍 속에 꺼져가고 있던 한나라당을 살리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장면 2
“저 박근혜, 경선 패배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
2007년 8월 20일 오후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 중앙 무대 단상에 앉아 있던 박 후보는 유정복 비서실장으로부터 경선 결과를 보고받았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안 된 거죠? 알았어요”라고 대꾸했다. 그리고 이후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연설’로 평가된 ‘승복 연설’에 나섰다. 그는 또박또박한 말투로 “경선 과정의 모든 일을 이제 잊어버리자. 하루아침에 잊을 수가 없다면, 몇 날 며칠이 걸려서라도 잊자”며 “저와 함께 당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고 여러분의 그 열정을 정권교체에 쏟아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 후보의 흰색 재킷 상의 오른쪽 주머니엔 후보 수락 연설문이, 왼쪽 주머니엔 경선 승복 연설문이 준비돼 있었다. 측근들은 눈물을 글썽였지만 그는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정치인 박근혜를 설명하는 데 이 두 장면만 한 것이 있을까.
오랜 공백을 깨고 1998년 정치무대에 ‘컴백’하자마자 그는 단박에 정치권의 스타로 부상했다. 대중 동원력에 있어 그를 능가할 정치인은 없었다. 그러나 정치권은 그를 그저 ‘부모님 후광으로 버티는 여성 정치인’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이후 박 전 대표는 위기 때일수록 더욱 빛나는 내공을 보여 줬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차떼기와 탄핵역풍으로 위기에 직면한 당을 맡아 121석을 건지며 강력한 야당의 위상을 지켜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유세 땐 ‘면도칼 테러’를 당해 수술까지 했지만 깨어난 뒤 제일 먼저 “대전은요?”라고 물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병원문을 나서자마자 그는 대전으로 달려갔고 당은 시장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경선. 그의 패배는 ‘아름다운 패배’로 기록됐다. 정치권은 일제히 “박정희의 딸이 아닌 정치인 박근혜로 새롭게 태어났다”고 치켜세웠다. 그의 통 큰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회창 전 총재가 경선 불참 뒤 탈당이란 ‘편법’으로 출마하자 “정도가 아니다”라고 일갈했고 “한나라당 후보는 이명박”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본격 선거운동이 시작된 뒤로는 전국을 돌며 지원유세에 나섰다. 이명박 후보를 수차례 거론하며 “기회를 달라”고 외쳤다. 대선 승리 후 박 전 대표는 당내 모든 세력으로부터 ‘일등 공신’임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대선이 끝난 뒤 박 전 대표는 어려운 길을 걷고 있다. 4월 총선이 다가오면서 일기 시작한 당내 공천 갈등 때문이다. 한 측근의 말을 빌리자면 “박 전 대표는 패자의 승복을 보여줬지만 이 당선인 측 일부가 ‘승자 독식’을 원하고 있고 당선인은 그를 국정의 동반자라고 말했지만 당선인 주변엔 그를 견제할 대상으로 보는 눈이 더 많은 상황”에 처했다.
이 당선인 측은 지난해 말부터 “2월 25일 정부 출범 이후 일괄 공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당선인도 직접 비슷한 뜻을 피력한 바 있다. 박 전 대표 측은 “반발할 틈도 없이 우리를 잘라내려는 밀실 공천 의도”라고 반발하는 상황이다. 이에 박 전 대표가 적극 나서고 있다. 처음엔 “공천을 늦추는 데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나”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지만 발언의 강도는 점점 세졌다. 지난 3일엔 이 당선인을 직접 겨냥, “무슨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급기야 10일엔 “공천 잘못 땐 좌시하지 않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대선 이후 처음 열린 계파 의원들과의 대규모 만찬 회동에서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지하겠다”는 최후통첩도 날렸다.
그러나 이 당선인 측은 무대응 전략을 펴고 있다. 그래서일까. 11일 4강 특사단과 함께 이 당선인을 면담한 박 전 대표의 표정은 시종 냉랭했다. 박 전 대표 측은 “대표가 지분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공천심사위를 조속히 꾸려 단계적으로 심사하자는 데도 아무 대꾸가 없는데 어떻게 표정이 밝을 수 있겠나”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이 당선인 측과 당에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한 한 가지다. “투명하고 사심 없는 공천을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조속한 공천심사위 구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박 전 대표의 정치 원칙을 한 마디로 압축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대표가 된 이후 한나라당의 ‘공당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2002년 그를 탈당까지 하게 만들었던 소신이자 철학이었다. 그는 당시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으면 제왕적 지위를 누리는 제왕적 대통령만 탄생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2년 뒤인 2004년엔 그가 당권을 잡았지만 오히려 대표의 기득권을 버리는 데 관심을 쏟았다. 그가 대표를 맡은 뒤 치른 모든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압승을 거뒀지만 그 자신이 공천에 개입한 적은 없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공천은 시·도당이 전권을 가지는 상향식으로 이뤄졌다.
2005년엔 당헌·당규 개정을 위한 혁신위를 꾸리며 ‘비주류’인 홍준표·박형준 의원 등에게 맡겼다. 혁신위는 당권·대권 분리 원칙과 대통령 후보 선출 방식이 담긴 개정안을 제출했다. 박 전 대표에게 경선 패배를 안겨준 여론조사 반영 원칙도 이때 결정됐다. 주변 인사들은 “우리에게 불리하다”며 반대했지만 그는 전격 수용했다.
박 전 대표의 핵심 측근은 “당 대표를 하며 ‘줄세우기’를 조금이라도 했더라면, 혁신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경선에서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박 전 대표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그는 자신이 경선 패배를 각오하면서까지 세운 원칙들이 훼손될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정현 공보특보는 “공천 시기를 촉박하게 한 상태에서 일괄적으로 발표한다는 것이야말로 ‘사당화’의 전조 아니냐”며 “이는 대통령이 공천에 개입하지 못하게 한 당헌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전 대표의 강경 드라이브엔 경선 때 자신을 도왔던 ‘계파 의원’들을 다독이기 위한 의도도 담겨 있다. 그 자신이 계보 정치를 원하진 않았지만 이미 당내 한 계파의 ‘수장’이 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자신의 식솔들을 챙겨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그렇다면 박 전 대표는 앞으로 어떤 수단과 방법을 택할 수 있을까.
현재로선 그의 선택지가 많아 보이진 않는다. 당 원로들은 “이 당선인과 만나 담판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당이 산다”고 충고한다. 하지만 둘 사이의 신뢰가 굳지 못하다. 지난해 말 단독 회동을 한 뒤 오히려 더 나빠졌다. 박 전 대표는 “이 당선인과 공천 시기를 늦추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전했지만 당선인 측이 이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당내 일각에선 조심스레 ‘분당 가능성’이 언급된다. 박 전 대표측은 물론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탈당’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김재원 의원은 “이 당선인이나 강재섭 대표 측이 더 이상 박 전 대표를 벼랑으로 몰아선 안 된다”고만 말했다.
만일 박 전 대표가 당을 깨는 결단을 내린다면 이는 정치권 전체를 뒤흔드는 폭발력을 갖게 된다. 이명박 정권은 출범과 함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탈당에 대해 “박 전 대표가 택할 수 있는 최하의 방법”이란 지적도 있다.
한 측근은 “누가 어떻게 지켜온 당인데 나가나. 당에서 야당 역할을 한다면 이 당선인 측은 괴로운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측근은 “명분은 우리에게 있고 시간이 지나면 민심은 박 전 대표의 편이 될 것”이라며 “당선인 측이 끝까지 무시할 수 없는 시점이 올 것이다”고 내다봤다.
이와 관련, 당내에선 “앞으로 2주가 고비”라는 관측이 나온다. 박 전 대표는 16일부터 3박4일간 특사단장으로 중국을 방문한다.
그가 귀국했을 때까지도 공천심사위 구성이나 단계적 공천에 대한 응답이 없다면 그로서는 말 이상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과연 박 전 대표는 어떤 선택을 할까. 정치권은 숨죽여 그를 지켜보고 있다.
이가영 기자
중앙SUNDAY 구독신청
중국 특사로 파견되는 박근혜 전 대표가 11일 오후 이명박 당선인의 서울 통의동 집무실에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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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직자들과 간판을 들고 여의도 MBC 건너편의 천막 당사까지 20여 분을 걸어갔다. 그곳에 당 간판을 내걸고 조촐한 입주식을 치렀다.
그는 “국민 여러분께 지은 죄를 진심으로 참회한다. 새 출발하려는 저희의 마음만은 받아 달라”라고 호소했다. 천막 당사행은 차떼기와 탄핵역풍 속에 꺼져가고 있던 한나라당을 살리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장면 2
“저 박근혜, 경선 패배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
2007년 8월 20일 오후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 중앙 무대 단상에 앉아 있던 박 후보는 유정복 비서실장으로부터 경선 결과를 보고받았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안 된 거죠? 알았어요”라고 대꾸했다. 그리고 이후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연설’로 평가된 ‘승복 연설’에 나섰다. 그는 또박또박한 말투로 “경선 과정의 모든 일을 이제 잊어버리자. 하루아침에 잊을 수가 없다면, 몇 날 며칠이 걸려서라도 잊자”며 “저와 함께 당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고 여러분의 그 열정을 정권교체에 쏟아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 후보의 흰색 재킷 상의 오른쪽 주머니엔 후보 수락 연설문이, 왼쪽 주머니엔 경선 승복 연설문이 준비돼 있었다. 측근들은 눈물을 글썽였지만 그는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정치인 박근혜를 설명하는 데 이 두 장면만 한 것이 있을까.
오랜 공백을 깨고 1998년 정치무대에 ‘컴백’하자마자 그는 단박에 정치권의 스타로 부상했다. 대중 동원력에 있어 그를 능가할 정치인은 없었다. 그러나 정치권은 그를 그저 ‘부모님 후광으로 버티는 여성 정치인’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이후 박 전 대표는 위기 때일수록 더욱 빛나는 내공을 보여 줬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차떼기와 탄핵역풍으로 위기에 직면한 당을 맡아 121석을 건지며 강력한 야당의 위상을 지켜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유세 땐 ‘면도칼 테러’를 당해 수술까지 했지만 깨어난 뒤 제일 먼저 “대전은요?”라고 물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병원문을 나서자마자 그는 대전으로 달려갔고 당은 시장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경선. 그의 패배는 ‘아름다운 패배’로 기록됐다. 정치권은 일제히 “박정희의 딸이 아닌 정치인 박근혜로 새롭게 태어났다”고 치켜세웠다. 그의 통 큰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회창 전 총재가 경선 불참 뒤 탈당이란 ‘편법’으로 출마하자 “정도가 아니다”라고 일갈했고 “한나라당 후보는 이명박”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본격 선거운동이 시작된 뒤로는 전국을 돌며 지원유세에 나섰다. 이명박 후보를 수차례 거론하며 “기회를 달라”고 외쳤다. 대선 승리 후 박 전 대표는 당내 모든 세력으로부터 ‘일등 공신’임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대선이 끝난 뒤 박 전 대표는 어려운 길을 걷고 있다. 4월 총선이 다가오면서 일기 시작한 당내 공천 갈등 때문이다. 한 측근의 말을 빌리자면 “박 전 대표는 패자의 승복을 보여줬지만 이 당선인 측 일부가 ‘승자 독식’을 원하고 있고 당선인은 그를 국정의 동반자라고 말했지만 당선인 주변엔 그를 견제할 대상으로 보는 눈이 더 많은 상황”에 처했다.
이 당선인 측은 지난해 말부터 “2월 25일 정부 출범 이후 일괄 공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당선인도 직접 비슷한 뜻을 피력한 바 있다. 박 전 대표 측은 “반발할 틈도 없이 우리를 잘라내려는 밀실 공천 의도”라고 반발하는 상황이다. 이에 박 전 대표가 적극 나서고 있다. 처음엔 “공천을 늦추는 데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나”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지만 발언의 강도는 점점 세졌다. 지난 3일엔 이 당선인을 직접 겨냥, “무슨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급기야 10일엔 “공천 잘못 땐 좌시하지 않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대선 이후 처음 열린 계파 의원들과의 대규모 만찬 회동에서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지하겠다”는 최후통첩도 날렸다.
그러나 이 당선인 측은 무대응 전략을 펴고 있다. 그래서일까. 11일 4강 특사단과 함께 이 당선인을 면담한 박 전 대표의 표정은 시종 냉랭했다. 박 전 대표 측은 “대표가 지분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공천심사위를 조속히 꾸려 단계적으로 심사하자는 데도 아무 대꾸가 없는데 어떻게 표정이 밝을 수 있겠나”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이 당선인 측과 당에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한 한 가지다. “투명하고 사심 없는 공천을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조속한 공천심사위 구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박 전 대표의 정치 원칙을 한 마디로 압축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대표가 된 이후 한나라당의 ‘공당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2002년 그를 탈당까지 하게 만들었던 소신이자 철학이었다. 그는 당시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으면 제왕적 지위를 누리는 제왕적 대통령만 탄생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2년 뒤인 2004년엔 그가 당권을 잡았지만 오히려 대표의 기득권을 버리는 데 관심을 쏟았다. 그가 대표를 맡은 뒤 치른 모든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압승을 거뒀지만 그 자신이 공천에 개입한 적은 없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공천은 시·도당이 전권을 가지는 상향식으로 이뤄졌다.
2005년엔 당헌·당규 개정을 위한 혁신위를 꾸리며 ‘비주류’인 홍준표·박형준 의원 등에게 맡겼다. 혁신위는 당권·대권 분리 원칙과 대통령 후보 선출 방식이 담긴 개정안을 제출했다. 박 전 대표에게 경선 패배를 안겨준 여론조사 반영 원칙도 이때 결정됐다. 주변 인사들은 “우리에게 불리하다”며 반대했지만 그는 전격 수용했다.
박 전 대표의 핵심 측근은 “당 대표를 하며 ‘줄세우기’를 조금이라도 했더라면, 혁신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경선에서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박 전 대표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그는 자신이 경선 패배를 각오하면서까지 세운 원칙들이 훼손될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정현 공보특보는 “공천 시기를 촉박하게 한 상태에서 일괄적으로 발표한다는 것이야말로 ‘사당화’의 전조 아니냐”며 “이는 대통령이 공천에 개입하지 못하게 한 당헌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전 대표의 강경 드라이브엔 경선 때 자신을 도왔던 ‘계파 의원’들을 다독이기 위한 의도도 담겨 있다. 그 자신이 계보 정치를 원하진 않았지만 이미 당내 한 계파의 ‘수장’이 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자신의 식솔들을 챙겨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그렇다면 박 전 대표는 앞으로 어떤 수단과 방법을 택할 수 있을까.
현재로선 그의 선택지가 많아 보이진 않는다. 당 원로들은 “이 당선인과 만나 담판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당이 산다”고 충고한다. 하지만 둘 사이의 신뢰가 굳지 못하다. 지난해 말 단독 회동을 한 뒤 오히려 더 나빠졌다. 박 전 대표는 “이 당선인과 공천 시기를 늦추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전했지만 당선인 측이 이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당내 일각에선 조심스레 ‘분당 가능성’이 언급된다. 박 전 대표측은 물론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탈당’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김재원 의원은 “이 당선인이나 강재섭 대표 측이 더 이상 박 전 대표를 벼랑으로 몰아선 안 된다”고만 말했다.
만일 박 전 대표가 당을 깨는 결단을 내린다면 이는 정치권 전체를 뒤흔드는 폭발력을 갖게 된다. 이명박 정권은 출범과 함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탈당에 대해 “박 전 대표가 택할 수 있는 최하의 방법”이란 지적도 있다.
한 측근은 “누가 어떻게 지켜온 당인데 나가나. 당에서 야당 역할을 한다면 이 당선인 측은 괴로운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측근은 “명분은 우리에게 있고 시간이 지나면 민심은 박 전 대표의 편이 될 것”이라며 “당선인 측이 끝까지 무시할 수 없는 시점이 올 것이다”고 내다봤다.
이와 관련, 당내에선 “앞으로 2주가 고비”라는 관측이 나온다. 박 전 대표는 16일부터 3박4일간 특사단장으로 중국을 방문한다.
그가 귀국했을 때까지도 공천심사위 구성이나 단계적 공천에 대한 응답이 없다면 그로서는 말 이상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과연 박 전 대표는 어떤 선택을 할까. 정치권은 숨죽여 그를 지켜보고 있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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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8.01.13 02:46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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